인간이라는 건 결국 패턴이야. 남자가 설명했다. 앞에는 새장을, 뒤에는 새를 그린 부채를 상상해봐. 부채를 빠르게 돌리면 새장 속에 갇힌 새가 생겨. 신경회로 위에 의식이 떠오르는 과정도 그와 비슷해. 전기신호들이 회로 속을 빠르게 다니다가, 어느 순간에 갑자기 불쑥, 유령처럼. 밤거리의 네온사인들이 제각각 깜빡이다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동시에 켜지고는, 그다음부터 함께 점멸하는 광경을 상상해봐.
- `패턴/시작/표절` (8쪽)

운동장은 그 학교에서 가장 표정이 풍부하고 가장 인간적인 존재였다. 살아있는 학생들보다 더. 학생들은 학교에 있을 때에는 인간이라기보다는 개미나 벌을 더 닮았다. 교사들은 지친 로봇 같았다. 운동장은 재래시장의 늙은 상인처럼 무덤덤한 얼굴로 대낮을 견디다 하교시간 즈음해서 제 혈색을 되찾았다. 운동장의 성별은 아마 남성인 것 같았다. 수업을 마친 남자아이들이 축구를 할 때 즐거워했으니까. 운동장은 신화적인 존재이기도 했다. 해 질 무렵부터 슬슬 마력을 뿜어내기 시작해 밤이 되면 귀기를 몸에 둘렀다. 그러다 아침이 되면 다시 사소하고 조잡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 `작두/홍콩/교지` (30쪽)

우주 알이 몸에 들어오면 이런 점이 참 안 좋아. 왜냐하면 어떤 만남이 어떻게 끝이 날지 뻔히 보이거든. 그런데 어떤 관계의 의미가 그 끝에 달려 있는 거라면, 안 좋게 끝날 관계는 아예 시작도 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 그 끝에 이르기까지 아무리 과정이 아름답고 행복하더라도?
- `일벌/인형/책장` (87쪽)

과거와 미래를 보지 못하고 현재만 보는 사람이 더 유리할 때도 있어. 여자가 말했다. 과거를 잊을 수 있으니까. 과거를 잊을 수 있기 때문에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어. 그러니까, 내가 널 지켜줄게. 과거로부터, 너를, 지켜줄게.
- `의혹/케샤/필명` (127-128쪽)

내게 인과율은 이런 식으로 작동해. 나는 미술관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지만, 미술관의 구조는 변하지 않는다는 거야. 그건 내가 바꿀 수 없어. 이 미술관에서 <모나리자>를 보려면 이탈리아 그림들을 함께 봐야 해. 이탈리아 그림이 있는 곳으로 가려면 프랑스와 스페인 회화 컬렉션을 거쳐야 하고.
너는 <모나리자> 같은 존재였어. 이 미술관에서 꼭 보아야 하는 그림. 우주 알이 내 몸에 들어왔을 때, 나는 네가 있는 곳으로 갔어. 나는 복권과 경마로 부자가 될 수도 있었어. 하지만 그런다면 네 곁에 머물 수 없었지. 그런 인생은 <모나리자>에서 매표소나 카페테리아만큼 멀리 떨어져 있었거든.
고마워. 너랑 지내는 동안 정말 행복했어. 우주 알을 받아들인 보람이 있었어.
- `복권/유서/너는 누구였어?` (143쪽)

전망대도 운동장과 비슷했다. 바깥 하늘이 붉어지자 조금씩 마력을 얻었다. 여자의 시간이 제 속도를 조금 잃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인간들의 현재와 미래는 기묘하고 쓸쓸했다. 인간이라기보다는 개미와 벌을 더 닮았다. 여자는 제대로 된 순서에 대해 생각했다. 도시는 점점 빛으로 된 암호가 되어갔다.
자동차들이 눈에 불을 켰다. 그것들은 형체를 잃은 뒤 붉고 노란 빛의 점선이 되었다. 그 점선은 뭉쳐서 다발이 되어가면서도 다른 다발과 엉키거나 꼬이지 않았다. 방향을 바꾸지도 않았다. 빛의 선에는 시작도 끝도 없었고 잠시 뒤에는 방향도 없어졌다. 오직 패턴만이 있었다.
- `나무/호텔/소원` (1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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