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것에 익숙해지면 무서움은 사라질 줄 알았다. 익숙해질수록 더 진저리쳐지는 무서움도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 `스노볼` (12쪽)

꺼진 텔레비전 앞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있었다. 나의 미래처럼 캄캄했다. 나는 미래를 예측해본 것이 없었다. 미래를 다짐해볼 때는 많았다. 언젠가 먼 곳까지 가볼 것이다, 먼 곳에서 더 먼 곳을 향해 가며 살 것이다. 이불 속에서 얌전하게 죽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종류의 다짐이었다. 다짐으로 점철된 미래를 펼쳐놓았다. 미래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예언이 내게는 다짐 뿐이었다.
- `병신` (21쪽)

먹어보지 않은 크래커를 먹게 되는 것. 소주를 마시고 혀의 마비를 느껴보는 것. 네온사인이 색을 바꾸는 패턴을 이해하는 것. 네온사인이 꺼지고 도로에 차오르는 새벽 물안개의 냄새를 맡아보는 것. 내가 집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그런 것들 때문이었다. 알지 못했던 다른 세상이 이 세상 안에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것. 하찮고 안 하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자꾸 다른 곳으로 가고 싶어했다.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어했다.
- `빈대` (29쪽)

나는 나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내 이름은 나보다 우리집 개한테 더 잘 어울렸다. 단 한 번도 불려보지 못한 진짜 내 이름이 어딘가에서 나의 부름을 기다릴 것 같았다. 십자 낱말 퍼즐의 빈칸을 보는 것처럼 이름의 힌트를 찾아보았다. 이 이름 저 이름을 내 이름이라 생각해보았지만 어떤 것도 어울리지 않았다. 낭이든 당이든, 강이와 다를 것이 없었다. 내게 어울리는 이름이 있다면 `재떨이`뿐이었다. 나는 무엇도 아니었다. 되고 싶은 무언가를 분명하게 정해놓은 적도 없었다. 병신 같지 않은 누구나가 되고 싶을 뿐이었다. 무인 모텔의 누구나 같은, 그런 누구나가 되고 싶을 뿐이었다.
- `아저씨들` (43쪽)

"좋으니까. 오빠도 나 좋아해."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아름은 나를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어린것아, 사랑하면 원래 싸우는 거란다."
- `아저씨들` (54쪽)

이제 나의 꿈은 종이접기 박사가 아니었다. 나는 단어를 떠올렸다. 병신. 하지만 최소한 병신은 되고 싶지 않다는 꿈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 `아르바이트` (73쪽)

무릎을 꿇으면 희망이 있을 거라고 믿는 태도, 희망을 향해 다가가려는 태도가 나를 희망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 것 같았다. 병신이 되지 않으려다 상병신이 되었다. 나는 최악의 병신을 상상했다. 그것을 바라기 시작했다. 최악의 상황이 유일한 출구였다. 무차별하게 흙을 긁어쥐던 순간처럼, 아무 곳에도 손을 뻗을 수 없는 순간에야만 그러잡을 것이 생기리라는 희망이었다. (...) 나는 샤프심이 아니었다. 사뿐하고 안전하게 추락할 수 없었다. 딱딱한 아스팔트에 떨어져 깨져버리는 묵직한 수박처럼 완전히 깨어질 때에만 시원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에야 찾아올 강렬한 수치심을 떠올리면 짜릿했다. 수치심의 끝에서만 나는 식칼을 꺼낼 것이다. 식칼을 꺼내기 위해 더 큰 수치심이 필요했다. 회복이 불가능한 병신이 되어야 했다.
- `좆밥` (124-125쪽)

강이가 들어 있는 어항에 다른 물고기를 넣는 상상을 했다. 강이는 운명처럼 싸우고야 말 것이다. 강이가 죽거나, 다른 물고가기 죽거나, 둘 중 하나는 없어져야 할 것이다. 강이에게 거울을 보여주지 않는 상상도 했다. 자신을 볼 수 없다는 것 때문에 강이는 곪아갈 것이다. 곪아가고 곪아가다가 어느 날 물위로 떠오를 것이다. 강이가 원하는 것이 그것일지도 몰랐다. 어항 속에서 혼자 살도록, 평생 거울과 함께 살도록,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정해진 것은 아니다. 투어로 태어난 강이는 원래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야 했던 걸까.
- `투어` (150쪽)

엄마는 내가 읍내동으로 돌아오게 해달라고 빌어왔을 것이다. 나는 읍내동으로 돌아가지 않게 해달라고 빌어왔다. 소영과 싸우던 날에, 나는 소영을 이기게 해다라고 중얼거렸다. 소영 또한 나를 이기고야 말 거라고 중얼거렸을 것이다. 한쪽의 기도가 강해질수록 다른 한쪽의 기도는 짓밟혔다. 기도도 기도끼리 싸움을 했다. 어떤 기도가 욕망대로 이길수록 어떤 기도는 무참히 지게 되어 있었다. 이것을 기도라고 할 수 있을까.
- `센서등` (163쪽)

나는 다시 먼 미래를 생각했다.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흙을 퍼먹는 생활이 이어질 것이다. 우리는 땅속에 사는 지렁이 가족 같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끔찍함에 익숙했다. 엄마와 내가 번갈아가며 꾸어오던 악몽도, 시시때때로 떠오르는 기억도, 주기적으로 끓여먹는 된장찌개처럼 생활의 일부가 될 것이다. 나는 웃었다. 엄마도 웃었다. 병신 같은 사람들 곁에 병신으로 남을 것이다.
- `스노볼` (173쪽)

나는 최선을 다했다. 소영도 그랬다. 아람도 그랬다. 엄마도 마찬가지다. 떠나거나 버려지거나 망가뜨리거나 망가지거나. 더 나아지기 위해서 우리는 기꺼이 더 나빠졌다. 이게 우리의 최선이었다. 나는 이제 읍내동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읍내동을 벗어나고 싶었던 나의 소원도 이상한 방식으로 도래해 있었다. 언제 그칠 지는 알 수 없지만, 쉽게 녹아 사라지진 않을 눈이 내리고 있었다. 이상하고, 무섭고,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모를 정도로 좋은, 함박눈이었다.
- `스노볼` (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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