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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의 삶 - 제4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작
임솔아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다 읽고 나서, 작가가 되려면 '병신'이라는 나락으로까지 떨어져 봐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건 아마 이 소녀들의 처절한 삶이 경험이 없는 나에게까지 생생하게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첫 장편에서 이 정도의 성취를 이루었다는 것이, 질투를 불렀다는 것도 부인할 수는 없다. 생생하게 보여주는 소녀들의 삶은,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비극적이다.
나도 집을 좋아했다. 우리집 강이가 자기 집을 좋아해 개집 안에 장난감 인형들을 모아놓듯이 나도 그랬다. 우리집 강이가 밖으로 나가고 싶어 창문에 코를 대고 있듯이 나도 밖으로 나가고 싶을 뿐이었다. 왜 집을 나갔느냐는 질문을 사람들에게 받을 때마다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아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그러면 집이 싫으냐는 질문이 이어졌다. 그렇다고도 그렇지 않다고도 대답할 수 없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밥이 먹고 싶어질 때가 있는 것처럼, 멀리 나가다보면 원하지 않던 곳에 다다르더라도 더 멀리 나아가야 하는, 그런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먼 곳에서 더 먼 곳으로 갈수록,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이 더 비참한 느낌이라는 걸, 따뜻한 이불이 포근하고 좋아서 무서워지는 순간이 있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 '병신' (14쪽)
무식하게 이야기를 단순화하면, 이 소설은 소녀들의 가출 이야기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소녀들이 집을 나가는 이유가 명확하게 나타나 있지는 않다. 그런 순간이 엄습했고,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이었을 따름이다. 소영은 아니었지만. 소영에게는, 가출이 부모에 대한 일종의 시위이거나 일탈과 같은 것이었으리라. 크게 보면 '병신'이 되기 싫어서라는 이유이겠지만.
아람이 소영을 왕따시키려 하는 것도, 강이가 소영과 아람을 화해시키려 한 것도, 소영이 폭력을 행사하면서까지 자신의 위치를 지키려 한 것도 결국 '병신'이 되지 않기 위한 행동이었으리라. 하지만 '병신'이 되지 않기 위해 몸부림쳤던 강이는, 그 몸부림으로 인해 결국 병신 중의 병신, 상병신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또래 집단이라는 작은 사회는, 상병신에서 벗어나려는 상병신의 행동을 받아주지 않았다. 서로를 구별짓지 않았던 그들의 집단은, 세 소녀의 가출 이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실세에게 붙으며 구별짓기를 자행했다. 가출이 그들을 성장하게 했고, 황정은의 '누가'의 단어를 빌리자면, 그들의 성장이 그들의 계급적 조건을 무참하게 구별지어 버렸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자신의 '최선의 삶'을 위한 선택을 했던 집단 속 소녀들은, '최선의 삶'을 살고팠던 강이를 병신으로 만들었다.
강이는 상병신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을 취한다. 심사를 맡았던 정한아 소설가의 말처럼, 나 역시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예상했던 결말은 아니었지만, 상투적인 결말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빗나간 것에 대한 충격일 뿐 결국에는 상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의지는 아니었지만, 자신을 병신으로 만든 폭력으로부터 떠났다. 그러나 그것이 한 개인을 폭력으로 몰아넣었던 사회의 밖으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을까. 난 여기서 <야만적인 앨리스씨>를 썼던 황정은의 질문과 대면했다. 날 때부터 폭력으로 점철된 사회 속에서 살아왔던 개인은, 그 사회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하지만 눈은, 쉽게 녹아 사라지진 않을 함박눈으로 내린다.
각 장의 길이가 그리 길지 않은 탓에 소설의 호흡은 짧다. 그것이 소설을 술술 읽히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짧은 호흡을 만끽하며 넘기는 책장 안에 담긴 질문은 그리 가볍지 않다. 이 소설은 학교 폭력을 말하려고 쓴 소설은 아니다, 라는 생각을 한다. 병신이 되지 않으려는 몸부림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