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에 그려보았던 전장의 풍경과 실제로 그 전투가 있었음을 확인하기 위해 직접 눈으로 목격한 전장 풍경의 차이가 너무나 컸으므로, 예전에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모종의 현기증, 어떤 광적인 감정이 그를 엄습했다. 아마도 바로 그런 이유로, 전장에 서 있는 기념비가 극단적으로 조그맣게 보였을 것이라고 그는 썼다. 초라하고 흐릿한 기념비는 마렝고 전투를 상상할 때마다 그를 장악했던 요동치는 광폭함과도, 마치 멸망으로 침몰하고 있는 한 인간처럼 홀로 서 있는 이 끝없는 시체 들판의 광막함과도 어울리지 않았다.
- `벨, 또는 사랑에 대한 기묘한 사실`(20-21p)

병이 지속되는 동안 대화재의 불길에 휩싸인 모스크바 광경, 그리고 열병에 걸리기 직전에 계획해두었던 슈네코프 산 등반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라 정신이 혼란스러워졌다. 산 정상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여러 차례 반복해서 나타났으며, 세상과의 연결고리를 모두 잃어버린 채 사방에는 오직 거센 바람과 수평으로 휘몰아치는 사나운 눈송이들, 그리고 집들의 지붕을 뚫고 활활 솟아오르는 화염의 혓바닥이 눈앞에 보이는 것이었다.
- `벨, 또는 사랑에 대한 기묘한 사실`(25p)

그때 마담 게라르디는, 사랑은 다른 종류의 많은 문명의 혜택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본성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더욱더 간절하게 갈망할 수밖에 없는 키마이라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우리가 오직 타인의 육신에서 본성을 찾으려 하면 할수록 결국 그것과 멀어지게 될 뿐인데, 왜냐하면 사랑은 스스로 만들어낸 통화에 의해서만 부채 상환이 가능한 열정, 즉 다행스럽게도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은 허상의 거래이기 때문이다. 마치 벨이 모데나에서 구입한 깃펜깎이처럼 말이다.
- `벨, 또는 사랑에 대한 기묘한 사실`(26p)

아마도 그러느라 너무 지친 탓인지, 나는 내가 아는 누군가가 방금 곁을 스쳐지나간다는 느낌에 수시로 빠져들었다. 그런데 이런─다른 명칭을 붙일 수 없는─환각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예외 없이 내가 수년 동안 한 번도 떠올린 적이 없는 사람들, 말하자면 이미 죽은 사람들뿐이었다. 또는 죽었을 것이 확실한 사람들, 이를테면 마틸트 젤로스와 외팔이 마을 서기 퓌르구트를 나는 보았다. (……) 그런 돌연한 환각을 몇 번 겪고 나자 내 마음속에는 울렁거림과 현기증으로 묘사할 수 있는 희미한 우려가 싹트기 시작했다. 확실하게 붙잡고자 하는 장면들의 테두리는 점점 희미해졌고, 머릿속에 피어나는 모종의 생각들은 내가 채 인식하기도 전에 와해되었다.
- `외국에서`(37-38p)

우리가 함께한 그날 오전 시간은 충분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날 우리는 하늘을 나는 법을 배웠으리라. 적어도 나는, 품위 있게 추락하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최고의 순간은 결코 다다르지 못하는 법. 말하자면 그라이펜슈타인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이제 옛날 같지 않았다는 의미다.
- `외국에서`(43-44p)

카사노바는 인간 이성의 한계를 생각한다. 인간이 실제로 미쳐버리는 일이 흔하지는 않지만, 그럴 만한 계기는 삶의 도처에 널려 있다는 생각이 든다. 원래의 자기 자신에 아주 약간의 균열이 일어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카사노바는 인간의 명확한 판단력을 저 홀로는 깨지지 않는 유리에 비유한다. 단지 외부의 충격에 의해서만 깨지지만, 일단 깨질 때는 또 얼마나 쉽게 깨지고 마는지. 단 한 순간만이라도 잘못 움직이면 끝이다.
- `외국에서`(57-58p)

베로나에서 이곳을 거쳐간 카프카 박사도 나와 마찬가지로 이 역에서 내려 이 화장실을 사용했을까, 지금 나처럼 바로 이 거울을 들여다본 것은 아닐까. 그랬다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거울 근처에 있는 그라피티 중 하나가 나에게 그 사실을 암시해주었다. 사냥꾼이라는 글자가 서툰 솜씨로 쓰여 있었다. 손을 말리면서 나는 글자 앞에 슈바르츠발트의라고 덧붙여놓았다.
- `외국에서`(86p)

루치아나가 페르네트를 가지고 왔다. 이번에도 그녀는 잠시 동안 곁에 서서 내가 펼쳐들고 있는 신문을 들여다보았다. 하녀, 하고 그녀가 입속말로 중얼거렸고, 그녀의 손이 내 어깨를 건드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 내 머릿속을 스친 것은, 사실상 모르는 관계라고도 할 수 있는 그런 낯선 여인이 시도한 신체 접촉은 살면서 참 드물었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 우연히 일어난 피부 접촉은 늘 그랬듯이 무게도 중력도 없는 어떤 것, 실제라기보다는 허상과도 같은, 그래서 한없이 투명한 사물처럼 나를 관통해가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 이날 오후 리모네에서도 당시 맨체스터에서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주변 사물의 형체가 초점이 맞지 않는 안경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볼 때처럼 일제히 흔들리며 의식 속에서 와해되어 사라졌다.
- `외국에서`(95-96p)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는 사실은, 그때 순간적으로 갑자기 내가 어디에 있는지 전혀 알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난 수일간 여기저기 헤매고 다니다 마침내 이곳에 도달하게 된 나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필사적인 시도에도, 지금 내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세상에 있는 것인지 그 너머 다른 세계를 서성이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는 상태로 빠져들었다. 이렇게 기억을 상실한 상태는 대성당 꼭대기층 갤러리로 올라갈 때까지 지속되었고, 빈번하게 나를 엄습했던 현기증에 다시금 휩싸였는데, 내게는 완전히 낯설고 이상하게 보일 뿐인, 허공을 가득 뒤덮은 연무에 가려 흐릿하게 보이는 이 도시의 파노라마를 시야에 담는 순간에도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 `외국에서`(112-113p)

퇴근 후 나는 산문 속으로 구원을 찾아 떠나는 겁니다, 하고 살바토레가 말을 이었다. 사람들이 섬으로 휴가를 떠나듯이 말이죠. 온종일 소음이 홍수를 이루는 편집국 한가운데에 앉아 있다가, 저녁이 되면 내내 나만의 섬에 있게 되는 셈이죠. 그리고 책의 첫번째 문장을 읽기 시작하면 노를 저어 물 가운데로 점점 더 멀리 나아가는 느낌이 들곤 한답니다. 오직 저녁시간의 이런 독서가 있었기에 나는 이날까지 제정신을 유지하고 살아올 수가 있었던 거지요.
- `외국에서`(124p)

마담 게라르디는 그곳에서 한 광부에게, 이미 죽어버리기는 했지만 도리어 그 덕분에 수천 조각의 크리스털로 뒤덮인 나뭇가지 하나를 선물로 받았다. 그들이 숙소로 되돌아왔을 때, 가지 위에 내리쪼인 햇빛이 결정체의 표면에서 수천 갈래의 영롱한 파편으로 쪼개졌다고, 그것은 무도회장 조명의 환한 빛이 신사들의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도는 숙녀들의 다이아몬드 장신구 위로 부서질 때만 나올 수 있는 그런 찬란함이라고 벨은 썼다.
죽은 나뭇가지를 기적의 예술품으로 만드는 그 오랜 결정화 과정은, 우리 영혼의 암염광산에서 성장해가는 사랑의 알레고리처럼 느껴졌다고 벨은 묘사했다.
- ‘벨, 또는 사랑에 대한 기묘한 사실’ (28p)

K 박사는 육체를 배제한 사랑의 이론을 단편적으로 풀어놓는다. 그런 사랑에는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는 것 간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적어도 우리가 눈을 뜨고 있는 한 행복의 근원은 자연이지 이미 오래전에 자연으로부터 유리된 우리의 육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어리석은 연인들은, 사랑에 빠지면 대부분 다 어리석어지기 마련인데, 아예 눈을 감아버리거나, 결과적으로는 마찬가지지만, 욕망으로 흐려진 눈을 찢어져라 크게 떠버리기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성욕으로 그 어떤 때보다 더 대책 없는 상태로 빠져들게 된다. 이제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자라나는 상상은 걷잡을 수가 없다. 끊임없는 변화와 반복을 요구하는 강박이 인간을 굴복시킨다. 이미 그가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듯이 일단 그런 강박에 사로잡히면 모든 것이, 인간이 영원히 붙들어놓고 싶어하는 사랑하는 사람의 형상조차도, 허공에 산산이 흩어지고 만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게도, 그가 인식하기에 광증과 실제로 맞닿아 있는 것이 분명한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상상으로 만들어낸 검은색 나폴레옹식 사령관 모자를 그 자신의 자의식 위에 씌워주는 일이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 그에게 가장 필요 없는 사물이 바로 그런 사령관 모자다. 왜냐하면 이 호수 위에서 그들은 그야말로 육체가 거의 없는 상태에 가깝기 때문이며, 그들 개인의 무의미성을 통찰할 수 있을 정도로 자연에 걸맞은 혜안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 ‘K 박사의 리바 온천 여행’ (150-150p)

그는 특히,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일이 내 안에서 저절로 설명되고, 그럼에도 그 일들이 더욱 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더욱 수수께끼처럼 변해간다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나는 이어서 말했다. 과거에서 끌어올린 그림들을 더 많이 모으면 모을수록 그것들이 과연 내가 기억한 대로 흘러갔던 것인지가 더욱 모호해질 뿐이라고, 왜냐하면 과거에 속한 그 무엇도 평범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또한 설사 그렇지 않다 해도 최소한 경악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 ‘귀향’ (19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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