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6.
서리북 17호 읽기.
25.5.7.
『사랑과 결함』 읽기 시작. 「우리 철봉 하자」를 읽었고, 한동안 젊은 작가의 작품을 읽어보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두 여성의 우정을 다루는 방식이 신선하다고 생각했다. 마음 먹은 대로 풀리지 않는 삶(직장에서도 연애에서도)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진솔함, 사랑으로 인해 화자가 받은 상처를 세상을 향해 드러내는 방식의 새로움, 그리고 간혹 드러나는 유머들. 젊은 여성이 사회에서 받는 부당한 대우와 시선은 소설의 주제가 아니라 배경으로 항시 놓여 있다(자기 일을 하면서 상사에게 자기가 ‘페미 같냐’고 물어보(아야 하)는 화자, 두 여성이 보는 앞에서 시선을 한껏 의식하며 묘기를 부리는 철봉 아저씨 등).
사장은 내가 그런 부분에서 예리하다며 좋아했다. 요즘은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시대라서 이런 것들은 기민하게 캐치해 사전에 전부 편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부분들을 초 단위로 표시해둔 뒤 맥락 전부를 문서에 기록하고 특히 문제 될 여지가 있는 대사를 빨간색으로 표시해 두었다.
—허대리님. 이거 나 페미 같아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
—이 부분은요?
—팀장님께 물어봐야 할 듯.
그즈음 내가 상사와 나눈 카톡 대화는 거의 이랬다. 특정 강사들은 성차별적 언사가 유독 두드러졌다. 특히 정신분석이 가볍게 다뤄지는 강의에서 그런 태도가 많이 나타났다. 나는 일을 하면서 문득 내가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는데, 분명 문제인 것 같지만 문제라고 말하는 게 더 문제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13)
내가 일으킨 문제에 대해 먼저 귀띔을 해준 이는 허대리였다. 강사 하나가 컴플레인을 제기했다나봐. 담당자가 너무 예민하다고. 페미 같다나 뭐라나. 나는 억울했다. 허대리님. 페미 같은 게 도대체 뭔데요? 이번에도 허대리는 고개를 저었지만, 조그맣게 속삭였다. 몰라요. 근데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어쩌면 손쓸 수 없는 상황을 일부러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문제가 될 걸 아예 모르진 않았으니까. 그러나 왜? 내가 왜 나에게 손쓸 수 없는 상황을? 그건 늘 손쓸 수 있는 선까지만 일을 저질러버리는 나의 졸렬함에 대한 일종의 반항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회사에서 잘렸다. 이번에 검수를 맡은 경영학 강좌 중 생산운영관리 및 조직관리 파트 삼분의 일 가량을 삭제해야 한다고 강사에게 메일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나는 문제되는 발언에 일일이 메모를 작성해서 상세한 피드백을 전달했다. 성별에 따라 의사 결정 과정이 명확하게 달라지기는 어렵습니다. 성별의 차이가 육십오 세 이후부터 사라진다는 것은 비논리적입니다. 문제를 과도하게 심사숙고하는 성향은 상황과 개인적 맥락에 따라 다른 것일 수 있습니다. (17-18)
다른 사람들은 그래도 삶이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 내 삶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몇몇 남자와 원나잇을 했고 늘 그랬듯 전혀 만족스럽지 않았는데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견딜 수 없는 마음이 제일 견딜 수 없었다. 나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을 또다른 못 견딜 마음으로 돌려 막고 있었다. 나는 살기 위해 내 삶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25)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맹지가 덧붙였다. 너는 너를 돌봐야 해. 좀처럼 항변할 수 없었다.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나를 돌보려면 나를 돌아보아야 하는데, 나는 나를 돌아보는 데 미숙했다. 일은 졸렬하게 하지만, 누군가를 좋아할 때는 손쓸 수 없을 만큼 좋아했다. 사랑에 있어서는 늘 나를 함부로 대하고 선을 넘어버렸다. (33)
25.5.8.
『사랑과 결함』 읽기. 「아주 사소한 시절」과 「우리는 계절마다」를 읽음. 「우리는 계절마다」를 예전에 『소설 보다 겨울 2023』에서 읽은 적이 있었는데 어떤 단편의 후속작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에 읽을 때는 「보편 교양」과 「혼모노」가 강한 인상을 남겨서 이 작품은 기억에 남지 않았었는데 이번에 「아주 사소한 시절」과 같이 읽으니 희조의 모습이 강렬하고도 아프게 다가왔다. 미정과의 관계, 그리고 그것에 영향을 받는 듯하면서도 무관한 것처럼 흘러가는(혹은 망가져 가는) 희조의 삶. 온갖 괴롭힘과 답답한 가정이 빚어내는 삶을 담담하게 서술하는 문체 때문인지, 눈앞에서 목격한 죽음에 대해 거짓을 섞어가며 떠들고 ‘은총’이라는 단어까지 발화하는 희조의 모습 때문인지 두 작품을 읽는 내내 섬뜩한 느낌이 자주 들었다. 언뜻 보았을 때는 다음 작품까지 3부작으로 마무리가 되는 것 같은데, 마지막 ’은총’이 세 번째 작품에서 실현이 될 것인지, 희조는 시궁창 같은 삶에서 희망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주 사소한 시절」
나는 망연히 언니가 한입 먹은 아이스크림과 숟가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언니의 침이 묻은 숟가락을 연못에 담가 닦았다. 한참을 닦았다. 나는 더러운 침이 묻은 그 숟가락을 신성한 물로 닦으면서 내 안 깊은 곳이 무너져내리는 것을 느꼈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간 살면서 줄곧 느껴온 감정의 실체를 깨달은 순간이었다. 이전에는 단지 그 감정의 실체를 몰랐을 뿐이었다. 나는 누가 들을까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씨발. 그러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38-39)
나는 살면서 누구도 나를 기꺼워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니까, 가족에게 얻어터지며 사는 사람은 평생 예쁨 받을 수 없는 사람으로 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엄마의 잘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엄마도 나름 힘들었을 테니까. 그렇다면, 엄마는 무엇을 위해 나를 낳은 것일까. 결론은 이거였다. 엄마는 아이를 원했지만, 나를 원하진 않았다. 나는 엄마를 사랑하고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끔찍하게 여긴다. 엄마는 나를 낳음으로써 가난해졌다. 원래 엄마는 기업에서 일하던 사람이었다. 나를 낳느라 직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아빠는 입사와 퇴사를 반복한다고 했다. 나는 끈덕진 사람이지만, 그이는 아니야. 그런데 회사를 그만둔 건 나야. 왜일까? 그이는 사회의 일원이 되지 못하면 낙오자가 된다고 생각하거든. 엄마는 '낙오자'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리고 깔깔 웃었다. 쥐뿔도 모르는 거지. 우리는 결혼한 순간부터 낙오되고 있었던 거야. (56-57)
결국, 내가 만든 죽음과 은총에 관한 이미지는 허구에 불과했고 그랬기 때문에 더 성스럽게도 느껴졌던 것이다. 그리고 곰곰 생각해보면 나는 '낙오'와 '낙하'라는 두 단어의 의미가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엄마에게 '낙오자'라는 단어를 들은 이후로 '낙하'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64-65)
죽음에 대한 내 태도와 그로 인해 일어난 일들로 인해 아이들은 나를 애써 없는 사람 취급했다. 애들은 나와 가까운 친구들이 어떤 식으로든 모종의 불행을 겪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영성이도, 미정이 아빠도 그랬으니까. 나는 사람들과 오랜 시간 동떨어지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가 아이스크림을 연못에 버리고 느꼈던 그 감정은 혐오보다는 공포에 가까운 것이었다. 내가 가진 모든 게 아주 작은 것으로 말미암아 망가지고 무너질 거라는 공포. 애들은 나를 미워하는 게 아니다. 두려워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가진 것들,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은 어리기에 무르디 무른 무언가를 내가 망가뜨리고 무너뜨릴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어른들 따위는 어느 시점부터 자신이 지니고 있던 무언가를 너무도 쉽게 잊은 채로, 마치 그저 주어진 것인 양 생을 살아간다. 다 망가져가는 것과 다름없는 생을. 나는 그것이 세계가 나를 '외부인'으로 만드는 교묘한 방식이라는 걸 깨우쳤다. (71-72)
「우리는 계절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언제나 그런 행동에 쉽게 화가 났다. 서로의 사이에 부려놓아진 것이 몹시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모른 척하는 사람들 특유의 행동. 그러니까 우리는 최대한 여러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 수도, 끊을 수도, 이어갈 수도 있는데 꼭 자신에게 주어진 방식은 하나뿐인 것처럼 구는 사람들에게 화가 났다. 왜냐하면, 그 상황에서 가장 배제되고 소외되는 존재는 나 자신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에. (85)
나는 인생이 적당한 시점에 최악의 결말로 끝나버릴 거라는 염세적인 기분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최악의 결말은 존재하지 않고, 늘 최악의 순간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이제 와서 생각건대, 그 감각은 세계가 이루 말할 수 없는 불가해한 상황으로 구성되고, 나는 속절없이 휘말릴 뿐이라는 것을 그 시절에 이미 알아차렸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었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걸레가 되고 그 짓거리 하는 년이 되고 씨발년이 된다. 그건 내 의도도 누구의 의도도 아니다. 세계가 그렇게 나를 그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86)
누군가 내게 가족이라는 존재를 언제 처음 실감했냐고 물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바로 그 순간에 대해서 말할 것이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나는 동생이 생긴다는 것의 의미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가족이 하나 더 생긴다는 건 식구가 는다는 거고, 식구가 는다는 건 더 깊고 깊은 가난의 늪에 빠지게 된다는 거다. 나의 부모는 무슨 생각으로 내가 기뻐하기를 기대했던 걸까? (92)
초등학교 시절의 나는 마트에 있는 햄스터를 훔쳐서 아파트 화단에 풀어주는 것을 해방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것이 결코 해방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내던져짐 그 자체였다. (95)
나는 그 말을 하고야 말았다. 우리가 짧은 키스를 나눈 이후로, 미정의 아빠가 돌아가신 이후로, 내가 그것을 미정의 '은총'이라고 생각하게 된 이후로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음침한 청소년이 되고야 말았다. 세상은 죽음에 대한 열망을 지닌 청소년을 그런 식으로 판단했으니까. 하지만 도대체 그렇지 않은 아이들이 존재하기나 한단 말인가? (104-105)
우리가 공유했던 내밀한 무언가가 전부 거짓일 수는 없었다. 나는 단 한 번도 은총이라는 단어가 거룩한 무언가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아는 은총은…… 우리가 지닌 열띤 욕망. 그것이었다. 미정과 나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무언가를 너도 생각하지 않니. 나는 미정이 그럴 거라고 확신했다. (105)
미정 엄마가 더 큰 소리로 우리에게 말했다. 나는 걸레가, 아니다. 나와 윤다혜는 조그만 목소리로 미정 엄마의 말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나는…… 걸레가…… 아니다……“
"우리는 시궁창에 살고 있다."
"우리는…… 시궁창에…… 살고 있다."
"시궁창에는 더러운 쥐들뿐이다.”
"시궁창에는…… 더러운…… 쥐들뿐이다."
나와 윤다혜는 그 말들을 천천히 따라 했다.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내가 훌쩍거리자 윤다혜도 훌쩍거렸다. 미정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셋은 그렇게 이상한 주문을 외며 기묘한 슬픔에 사로잡혔다. 미정 엄마가 침대를 빙 둘러 와서 나와 윤다혜를 뒤에서 안아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는 더럽고 지저분한 곳에 살아. 그렇지만 결코 그들과 같아질 필요는 없단다. 나는 남편이 죽고 나서 활력을 되찾았어. 그건 내 탓이 아니지 않니? (108)
25.5.9.
『사랑과 결함』 읽기. 「그 얼굴을 마주하고」와 표제작 「사랑과 결함」을 읽음. 희조는 왜 미정에게 그렇게까지 집착했을까. 어린 시절 부모님도 주지 못했던 친밀함을 처음으로 주었던 친구였기 때문일까.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도 미정은 희조를 밀어내고 희조는 미정과의 관계를 현수 언니와의 관계로 대체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아주 사소한 시절」부터 「그 얼굴을 마주하고」까지 희조의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더 깊어지고 얼마나 자기파괴적인 삶으로 나아가는지를 보여주는 거라면, 이 3부작을 반-성장소설이라고 보아도 될까. 문득 내가 보지 못하는 10대들의 삶이란 이것이 일반화된 삶인가(희조만큼은 아니어도 미정이나 혁주, 태규 같은)라는 생각이 들자,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도 얼른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PC방 컴퓨터로 싸이월드에 접속한 뒤 주위를 둘러보고 조심스럽게 담배를 꺼내 피웠다. 키보드에 재가 떨어지는 게 신경 쓰였지만, 신경 쓰이지 않는 척했다. 그것이 중요했다. 내가 내보이는 모든 모양새에 무심함이 묻어나야 한다. 그게 어른들의 세계에 잠입하는 방식이다. (113)
그때 미정 엄마에게서는 절대로 누군가에게 함부로 휘둘리지 않으려는 결기가 느껴졌고, 나는 미정 엄마의 삶을 닮고 싶어했다. 그러니까, 내가 누군가를 이용하더라도 그것이 그 누군가에게 절대로 해를 끼치지 않는 삶. 어떤 사건에 휘말리더라도 그 속에서 꼿꼿이 허리를 편 채 눈을 부릅뜨는 삶. 그때 나는 미정 엄마가 그런 삶을 살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삶이라는 게 정말 누군가에게 해가 되지 않는 방식으로 이뤄질 수 있는 건가? 기어코 해가 되고 마는 것이 삶 아닌가. (118)
내가 겪어왔던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엄마도 당신이 겪은 일련의 사건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게 문제라고 생각했다. 빤히 보이는데 보이지 않는 척하는 것. 서로가 떠안은 일들에 지쳐 상대의 상처에는 그저 눈을 감아버리는 태도. 우리가 그런데도 서로를 친밀한 사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는 것인가? (125)
나는 나를 싫어하는 애들보다 나처럼 되기 싫어하는 애들을 증오했지만, 결국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전부 나처럼 되기 싫어하는 사람뿐이었다. (126)
여태껏 나는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되고 우리가 이 모양이 꼴이 된 게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어린 시절부터 나는 늘 이런 식이었구나. 이게 나였구나. 나는 사는 동안 내 이야기의 완벽한 '외부인' 흉내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흉내. 그것은 흉내뿐이었다. 사실, 나는 이 이야기에서 완벽한 '내부인'이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내 서사에 완벽하게 가담한 인물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온전한 슬픔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133)
이혁주를 만나고 되돌아오는 길에 내 삶의 전반을 곰곰 돌이켜보며 재구성해봤다. 미정은 나에게 어떤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내게 접근했고 나는 미끼를 문 것이었다. 지독한 괴롭힘에 시달렸지만, 나는 미정을 끝까지 의심하지 않았다. 미정이 나를 그렇게 생각한다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미정의 존재가 내게 은총과도 같았기 때문이었다. 왜? 그냥 그렇고 그런 애들 중 하나일 수도 있었는데. 나는 또 내가 의아해졌다. 하지만 최근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나는 사람을 한번 믿으면 걷잡을 수 없이 좋아하게 된다는 것. 현수 언니를 좋아하게 되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134)
문득 할머니가 죽기 전날, 내가 할머니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희미해진 할머니의 몸냄새를 맡으려 애쓰며 속삭였던 그 말, 할머니, 나는 존나 못 사는 방식으로 잘 살 거예요.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지껄였던 그 말이 내 가슴팍에 박혔다. 아주 사소한 시절 우리는 계절마다 서로를 혐오하고 끔찍한 생활을 반복했지만 결국, 그때의 나도 나일 뿐이었다. 나는 작게 코를 골며 잠든 현수 언니를 보며 우리가 무슨 사이인지 생각해보다가, 비밀 친구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오늘만큼은 참으로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살고 죽는 것. 그게 내가 가진 유일한 열망이다. (145-146)
「사랑과 결함」은 화자와 화자의 고모에 대한 이야기. 고모란 어떤 존재일까. 화자의 친구이자 보호자였고, 화자의 어머니의 적이었던 부계 여성 친척? 로봇 청소기를 통해서 전해 듣는 화자가 몰랐던 고모의 모습, 그리고 화자가 기억하는 고모의 모습이 엄마의 모습과 겹쳐진다. 고모의 눈총을 받으며 시집살이를 했던 엄마, 시간이 흘러 홀로 남겨졌다 여기며 살았던 고모. 그 둘 밑에서 자란 화자의 모습에서 보이는 건 두 사람을 보고 배웠던 사랑과 결함, 혹은 사랑이자 결함이라고 해야 할까? 남들이 보기엔 결함(주로 여기선 정신병으로 표상되는)인 것도 어떻게든 사랑의 형태로 화자의 마음에 새겨졌다는 것. 끊임없이 벽을 들이받는 로봇 청소기의 모습에서 고모와 화자가 모두 떠오르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잠을 오래 자다보면 고즈넉하게 늙는 기분이 들었다. 남몰래 시간이 흘러가는 그 느낌이 치열하지 않아서 좋았다. (149)
그 어린 나이에도 순정 앞에서 절대로 엄마의 편을 들면 안 된다는 걸 알았다. 그 시절의 나에게 사랑이란 그런 식으로 모종의 불안을 동반하며 아슬아슬한 선을 넘나드는 무엇이었다. (163)
나는 수가 언제나 착한 척을 한다고 생각했다. 엄밀히 말하면 척은 아니었지만 달리 정확하게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수는 늘 자신의 마음이 진심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나는 그게 진심이 아니란 것을 알았고 그걸 제발 수가 깨닫길 바랐다. 하지만 수는 내가 자신의 의도를 왜곡하고 곡해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나는 그야말로 자기 자신을 왜곡하고 곡해하며 삶을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정립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즘 들어서는 수야말로 최선의 태도를 고민하며 사는 사람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쨌든 그 태도란 건 내가 평생 시달릴 고통과 우울, 그리움과도 맞닿아 있는 문제였다. (180-181)
유전이라고 말한다면 내가 겪어온 모든 고통이 엄마의 유전자적 결함으로 치환되고 고모의 인생을 끊임없이 괴롭혔던 조울증은 할머니의 유전자적 결함으로 치환되는 거겠지.
하지만 내가 아는 것은 고모나 엄마가 그저 나에게 끔찍한 사랑을 흠뻑 물려주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아직도 그 사랑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리고 그 사랑과 결함이 나를 어떻게 구성했는지도. 나는 실제로 고등학교 때 정신병이 유전되었을까봐 몹시 두려워했으며 내가 이상한 상태가 아니라는 걸 확인하기 위해 친구들의 상태에 대해 끊임없이 물었다. 그러면서도 정신과는 절대 가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고모의 영향으로 향정신성 약물에 대한 크나큰 불신을 안고 있었으니까. (183)
잠들려는 그 순간, 저 멀리서부터 쿵, 쿵, 쿵 벽을 찧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비로소 이 순간이 잠이 드는 바로 그 순간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희미한 정신으로 눈을 떴을 때 순정의 로봇 청소기가 빈 벽에 제 몸을 부술 듯이 처박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이지 전원을 켜고 끄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어쩔줄 몰라하다가 달려가서 끝내 전원을 끄지도 못하고 청소기를 끌어안았다. 작은 바퀴들이 헛돌고 헛돌았다.
고모는 자주 물건을 부수기도 했고 아버지를 때리기도 했다. 그런 것들을 나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암이 재발하고 나서 고모는 빠르게 힘을 잃어갔다. 비쩍 말랐고 입냄새가 심하게 났다. 병원에 입원한 후로는 오롯이 누워만 있었다. 모든 힘을 소진한 사람처럼. 임종을 앞두고 고모는 숨 쉬는 것조차 힘에 부치는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아버지도 나도 아닌 엄마를 아주 오랫동안,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간신히 신음처럼 말을 뱉었다. 민애야. 그런 다음 눈을 감았다. 우리 중 아무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다만 나는 그 순간 우리 가족이 가진 축축하고 퀴퀴한 기억들이 전부 엉켜버렸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저도요. (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