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9. 23.
서리북 15호 읽기. 대전과 광주에 대한 서평을 흥미롭게 읽었다. 왜 대전은 노잼도시로 이미지화되었는지, 왜 광주는 고층 아파트 밀집지역이 되었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글들. 인기를 얻게 된 밈들이 도시의 정체성을 납작하게 만든다는 일침에 공감하면서도 어느 순간 나는 소제동이 핫플이구나 하면서 머릿속에 여행 갈 만한 곳으로 저장하고 있었다. 도시 계획과 실행의 역사에서 건설업의 부상과 부패 구조의 견고화의 산물로 만들어진 고층 아파트 단지와 자동차 이동 중심의 도시 광주를 읽으며, 복합 쇼핑몰들의 대거 유치의 과정에서 비슷한 전철을 밟게 될 광주의 모습을 상상하며 씁쓸해지기도 했다. 결국 이 글들이 겨냥하고 있는 것은 지방 소멸로 질주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난장이다. 어떻게든 서울에 뿌리를 내려보고자 발버둥치는 나를 포함해서.
심채경_「당신의 블로그를 파헤쳐 납작한 대전을 만나다」
재미가 없다는 뜻의 키워드 '노잼'이 게임, 사람, 영화가 아니라 대전과 직결되기 시작한 것은 2019년부터다. 아이러니하게도 2019년은 대전시가 출범 70주년과 광역시 승격 30주년을 기념해 대전 방문의 해로 지정한 해다. 대전을 홍보하고 방문을 독려하자 '이렇게 노잼인데 놀러 오라는 것이냐'는 일종의 조롱이 되돌아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가벼운 조롱이 혐오나 무관심이 아닌 놀림거리이자 유머 코드로 승화되며 밈으로 확산됐다는 것이다. (17쪽)
성심당을 향해 돌진하는 사람들은 대전의 구석구석을 탐험하지 않고, 오래된 도시가 품고 있는 역사를 탐색하지도 않는다. 새로운 장소에서 자신만의 재미를 찾거나 다르게 보이는 공간의 사연을 묻지 않는다. 그래서 대전은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다. 공간이 지닌 기억과 감정, 그 속의 물질과 사람들의 특성, 그 모두를 복합적으로 느끼는 총체적인 경험을 장소성('sense of place‘ 또는 ’placeness‘)이라 할 때,(52쪽) 성심당과 코레일이 약간의 돈을 버는 동안 대전은 장소성을 잃었다. (18쪽)
대전역 인근에 있는 소제동은 대전의 대표적인 구도심으로, 일제강점기에 철도 노동자를 위한 관사촌으로 번성했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을 만큼 오래된 풍경이 펼쳐지는 곳이다. 수십 년간 아무도 돌보지 않은 듯 무너진 벽 사이로 잡초와 넝쿨식물이 무성한데, 또 어떤 건물은 내부를 근사하게 리모델링하되 담장과 문패는 그대로 두어 레트로 감성의 카페, 식당으로 변신했다. 100여 년의 시간이 한데 공존하는 듯한 이 동네에는 별명이 있다. 제2의 익선동. 오래된 한옥 마을이었다가 힙한 카페 거리로 변모한 서울의 익선동과 분위기가 비슷해서다. 경부선과 호남선이 분기하는 철도 요충지인 대전, 적산 가옥이 들어찼다가 전쟁 폭격으로 일부만 남았던 역사, 빈집이 절반 가까이 되도록 황폐해져 갔던 수십 년의 이야기가 '익선동'이라는 세 글자로 납작해진다. 소제동뿐인가? 봉명동은 대전의 홍대, 둔산동은 대전의 강남으로 불린다. 그러면 핫한 지역이라는 뜻이다. (20쪽)
지방도시의 매력은 서울을 기준으로 평가된다. 그래서 지방도시는 빠르고 확실한, 실패 없는 성공을 위해 지역 고유의 특성 대신 서울과의 유사성에 천착하기도 한다. 서울의 경리단길 같은 성공 사례는 신속히 복사, 붙여넣기 되어 전국 각지에 '○리단길'이 조성된다. (21쪽)
박경섭_「전라도와 함께 지역 문제를 이해하고 극복하기」
1980년대 도시 계획의 수립과 1990년대 실행 과정에서 구도심 인구 과밀과 주택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시 외곽 곳곳에 택지 지구가 개발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고층 아파트가 대규모로 건축되었고, 호남 기반 건설사들은 급격히 성장해서 전국구 건설사가 되었다. 성장한 지역 건설사들 대부분은 지역 시민사회 단체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지역 언론사의 사주가 되었다. 2021년 6월 학동 참사가 자본, 언론, 권력의 결탁, 즉 부패 구조에서 기인한다는 책의 내용은 뼈아프다. 그리고 2022년 1월, 학동 참사의 아픔이 가시기도 전에 발생한 화정동 아이파크 붕괴 사고는 아파트의 도시 광주의 민낯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32쪽)
광주는 2000년을 전후해 아파트와 자동차의 도시로 급속하게 변모했다. 글쓴이가 밝혔듯이 광주는 계획도시인 세종시를 제외하면 주택에서 아파트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은 도시다. 광주가 아파트의 도시로 변화하면서 달라진 것은 건설업의 성장과 부패 구조의 강화만이 아니다. 주거지인 아파트 단지와 일터로의 이동을 위해 승용차 중심으로 도로 교통이 구성되었으며, 생필품의 조달은 전통 시장보다 대형 마트가 담당하게 되었다. 아파트, 승용차, 대형 마트의 삼각 동맹이 광주의 새로운 생활양식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32~33쪽)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1960년대까지 광주의 가장 큰 공장이자 가장 많은 노동자들이 일했던 전남방직과 일신방직이 자리 했던 방직 공장 부지에는 화력발전소와 고가수조 등 다수의 근대 산업 유산이 존재하고 있다. 광주의 시민사회 단체는 광주의 역사가 담겨 있는 산업 유산의 공적 가치에 근거해 시민 문화 시설과 산업 박물관이 건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신속한 행정 속에 대형 쇼핑몰 건립에 대한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의 우려의 목소리는 묻혔고, 광주의 도시사와 산업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방직 공장의 공공성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지금도 심각한 교통 체증을 유발하는 유스퀘어(광주종합버스터미널)와 더현대 광주가 들어 설 방직 공장 부지는 불과 1킬로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데, 이로 인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교통 문제 역시 숙제로 남겨졌다. 글쓴이는 민주당의 지지 기반을 흔드는 복합 쇼핑몰 이슈를 지역 지배 체제의 균열로 파악했지만 광주시의 발빠른 유치 작전을 보면 이러한 체제가 흔들릴 것 같지는 않다. (35쪽)
『기도를 위하여』를 읽는 중. 김말봉이라는 이름은 처음 들었는데, 작가소개에서 흥미를 느껴 도서관에 신청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망명녀」는 내가 대학생 시절 언뜻 보았던 신경향파나 카프 문학보다 훨씬 재미있게 읽었다. 아무래도 삼각관계의 구조가 함께 얽혀있어서일까. 작가정신의 ‘소설, 잇다’ 시리즈의 기획은 감탄스럽고, 뒤에 나올 박솔뫼의 작품은 어떻게 김말봉의 작품과 연결되어 있을지 궁금해진다.
다시 서리북 읽기. 밀양의 송전탑 문제에서 시작해 도시를 위해 희생당하는 농촌의 이야기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도시의 편리한 생활을 위해 농촌의 희생을 모두가(국가를 포함해서) 강요하고, 농촌-시골의 정치적 목소리는 적은 인구와 고령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하고, 일관된 기준 없는 보상으로 반대하는 이들을 매도하는 폭력성. 그렇다면 송전탑과 기타 시설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 어떤 과정을 밟는 것이 모두의 목소리를 존중하는 일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질문만 남았다.
하승수_「곳곳이 밀양,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 이유는?」
도시로 전기를 보내기 위한 발전소와 송전선이 농촌·어촌·산촌 곳곳에 들어서고 있다. 태양광과 풍력 발전도 농촌·어촌·산촌으로 밀려들고 있다. 발전원은 바뀌어도, 도시와 공장으로 전기를 보내기 위해 시골 사람들은 희생을 감수하라는 것은 똑같다. 도시로 보내는 것은 전기만이 아니다. 도시에서 벌어지는 각종 공사에 필요한 토석을 채취하는 곳도 농촌이다. 그로 인해 주민들은 수십 년 간 소음, 진동, 분진에 시달려 왔다. 공장과 도시에서 배출되는 산업 폐기물 처리 시설이 밀려드는 곳도 농촌이다. 전기는 도시로 보내주고, 쓰레기는 농촌이 받아들이라는 식이다.
그리고 '시골'에 사는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존중받지 못해 왔다.(47쪽) 인구가 적고 고령화되었다는 이유로 무시당해 왔다. 주민들이 난개발과 환경 오염 시설에 반대하면 '님비(Not In My BackYard, NIMBY)'로 몰아붙인다. (55~56쪽)
그러나 전국 곳곳에 있는 밀양 할매들은 어렵고 외롭다. 동해 안의 신울진 원전 단지에서 출발하는 50만 볼트 초고압 송전선 때문에 강원도와 경북 일대에서도 밀양 같은 상황들이 발생하고 있다. 한전은 주민들을 분열시키고 갈등을 조장하는 매뉴얼을 들고 이 지역을 휘젓고 있다. 그들은 "우리가 밀양에서 다 해본 일들이다. 밀양을 봐라. 거긴 그렇게 심하게 반대했는데 결국 우리가 송전탑 세웠다. 우리가 못할 것 같냐. 싸워봤자 어르신만 힘들 뿐이다”(135쪽)라고 얘기한다. (61쪽)
싸우는 이주여성들에 대한 글도 인상적. 결국 필요한 건 선민의식이 아닌 구조의 변화. 신자유주의가 국내 노동자를 이주노동자의 처지와 같게 만들고 있다는 지적을 인상깊게 보았다.
채효정_「타인의 목소리가 나의 목소리가 될 때」
처음 책 제목을 봤을 때 나는 기록 노동자 희정이 성소수자들의 노동을 추적한 르포인 『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 (오월의 봄, 2019)를 떠올렸다. 바로 옆에서 일하는 퀴어를 보지 못하는 건 당사자들이 커밍아웃을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변에서 그들을 '당연히 없는(또는 퀴어가 아닌)' 존재로 치부하기 때문이다. 조금 다른 맥락이기는 하지만 나는 우리 옆에서 일하는 이주여성이 잘 보이지 않는 이유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직장 동료, 학교의 교사나 학부모, 옆집 사람 등 시민들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마주치는 '평범하고 정상적인' 관계로 만나지지 않기 때문이다. 수많은 이주노동자들이 도시를 지탱하고 있지만 대부분 한정된 특수 직종에 종사하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로 일하고 있다. 지방 소도시나 농촌 지역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래도 서울이나 수도권에 비해서는 훨씬 더 잘 보인다. 아마도 그것은 삶에 더 깊숙이 들어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농촌 지역에서는 이주 배경 학생이 없으면 학교가 유지되기 힘든 지역도 상당하다. 이처럼 이주에 대한 감각은 지역에 따라서 달라진다. (66쪽)
인력 외주화의 논리는 지금도 여전하다. 개인에게 돌봄의 짐을 지우고 국가와 사회가 돌봄을 돌보지 않은 탓에, 이제 돌볼 사람도 없고 돌봄 비용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되니 '비싼 도우미 비용'을 탓하며 '(값싼) 외국인 가사도우미 수입'을 해법이라고 내놓는 것도 그때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사람들이 오도 가도 못하고 발이 묶여 돌봄 대란을 치러야 했던 팬데믹을 겪고도 반성이 없다. 이주의 시대가 한 세대를 지나고, 한국은 농촌도, 산업도, 돌봄도, 이주노동자와 이주여성들이 없이는 지탱할 수 없는 곳이 되었지만 한국 사회는 그들을 그만큼 고마운 존재로 대접하지 않는다. 문제가 생겼으니 다문화 가족 정책도 생겼을 테지만 무엇보다 한국 노동자들에게 시킬 수 없는 일을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는 시켜도 되는 것인지, 한국 여자들이 기피하는 삶을 외국 여자들에게는 강요해도 되는지, 근본적 질문은 제대로 물어지지 않았다. '국민'은 평등해야 하지만 '비국민'은 차별해도 되는 것인가. (68쪽)
자본의 이동과 노동의 이동이 엄연히 다름에도, 마치 자본과 노동자들이 똑같이 이동의 기회를 가진 것처럼, 노동자를 선택할 수 있는 기업의 권리와 회사를 선택할 수 있는 노동자의 권리가 동등한 것처럼, 직업과 직장의 다양성과 선택의 자유를 부추기던 신자유주의의 속삭임에 많은 이들이 속아 넘어갔다. (69쪽)
이주여성이라는 호명에는 '이주여성'으로 범주화되는 특정한 이주의 경로가 내재해 있다.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이주, 자발적이기보다 비자발적인 이주, 빈국에서 부국으로, 남반구에서 북반구로의 이주 경로가 '이주'라는 말에 담겨 있다. 이 경로는 곧 차별과 불평등의 경로이기도 하다. 유럽의 이주노동자는 동유럽과 북아프리카에서 오고, 미국의 이주노동자는 남아메리카에서 오며, 한국의 이주노동자는 주로 중국과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온다. 외국인이라도 미국이나 유럽에서 왔으면 대우가 달라지고, 이주노동자라도 몸집이 크고 외모가 유럽인에 가까운 러시아나 중앙아시아 출신은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한국인들의 보편 의식으로 깊이 새겨져 있는 식민주의와 인종주의의 민낯을 마주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의 식민지로, 해방 후에는 미국에 종속된 나라로, 인종주의적 차별과 폭력을 끔찍하게 경험한 곳임에도, 왜 우리는 그 차별의 기억을 차별하는 자의 우월감으로 극복하고 있는 것일까. 가해자의 위치에서 차별당한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는 책의 전반부는 부끄러움과 슬픔으로 점철된다. (69~70쪽)
신자유주의화가 불러온 노동계급의 파편화, 고립화, 내부 난민화는 국내 노동자의 상황을 이주노동자와 점점 유사하게 만들었다. 임노동 체제의 바깥으로 내밀어진 비정규직 불안정 노동은 오랫동안 무가치화되고 비가시화되었던 여성 노동의 형태와 점점 유사해졌다. 이런 양상을 두고 북반구 산업 선진 국가 내부의 노동 형태가 남반구 노동과 유사해지고 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국내 노동자들도 이주노동자화되고 있다는 의미다.
이렇게 젠더와 국경을 가로질러 증대되는 이주와 노동의 취약성은 그 취약성을 공유하는 이들의 공통성이 되기도 한다. 파편화되고 고립된 삶에 맞서 커뮤니티를 만들어 내고, 서로의 취약성에 공감하고 필요한 요구의 공통성을 확인하며 연대하며 싸워 나갔던 이주여성들의 이야기가 지금 파편화되고 고립되어 있는 수많은 노동자 민중들에게 필요한 영감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으면 좋겠다. "나중엔 이주노동자들도 돕는 공간이 되고 싶어요. 처음엔 우리 힘든 것만 보였는데" (143쪽)라고 부티탄화 옥천군결혼이주여성협의회 회장은 말했다. 그 말은 자신이 겪은 차별에 저항하는 싸움을 자신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과 동시에 그 싸움이 자신의 것만이 아님을 깨달아 가는 사람의 말이었다. (75쪽)
24. 9. 24.
『기도를 위하여』 읽기. 단편 「고행」을 읽었다. 흔한 치정 이야기지만 등에와 오줌의 서스펜스가 주는 코미디.
알라딘에서 주문한 책을 받으며 문지 스펙트럼 에코백을 이미 주문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 또 골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산 책을 깜빡하고 또 산 적은 없는데 굿즈를 또 사다니.
서리북 읽기. 김홍중의 글을 오랜만에 보았다. 유머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코엔 형제의 영화와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를 통해서 풀어낸 점이 인상적. 이전에 읽으면서 김홍중의 '이마고 문디' 코너가 난해하다는 느낌이 종종 있었는데 이번에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유머가 지닌 힘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었던 계기.
바로 이 지점에서 코엔 형제는 자신들의 철학을 전면화한다. 즉, 문제는 우리를 영원히 떠나지 않으며, 어느 누구도 문제의 외부로 나갈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새로 다가오는 문제는 불길하고 무시무시해 보이지만, (이미 지나간 모든 문제들이 그러했듯) 언젠가 슬그머니 소멸할 것이라는 사실을. <시리어스 맨>의 이념은 이것이다. 문제가 인간의 불가피한 존재 조건임을 깨닫고 나면, 좋은 삶을 사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랍비들이 충고하듯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지 마. 인생은 문제들의 영겁 회귀야. 끝없이 밀려오는 문제들을 그냥 살아 내라고. 이 내재적 세계의, 생성의 영원함을 믿으라고." (111쪽)
발터 벤야민에 의하면, "억압받는 자들의 전통은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비상사태'가 상례임을 가르쳐 준다." 패배자들과 약자들에게 파국은 예외가 아니라 일상이다. 파국 이후의 번영에 대한 믿음은 승자들의 안이한 시간 감각이다. 약자의 입장에서 보면, 파국 이후에는 또 다른 파국이 올 뿐이다. 그들이 반복되는 역사와 인생의 고난을 통해 배운 교훈은 이것이다.
그들은 문제 속에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헐벗을' 뿐이다. 더 강해지거나 위대해지는 것이 아니라, 약해지고 부서지고 다치고 고장 난다. 약자들에게 문제는 기회가 아니라 순수한 위험이다. 생존의 위험, 파멸의 위험, 치유 불가능한 상처의 위험. 이런 위험들 속에 던져진 채 그들은 '구원 가능성'을 찾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구원 가능성은 밝은 미래에의 낙관이 아니라 그런 낙관이 불가능할 때 솟아나는 부조리한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 환각처럼 지금 눈앞을 휙 지나가는 순간적인 느낌. 웃음이라고 해야 할까? 깨달음이라고 해야 할까? 마음속에서 뭔가가 저절로 내려놓아질 때, 꽉 차 있던 존재에 텅 빈 자리가 만들어질 때, 그때 비로소 내려 오는 빛이나 숨결 같은 것. 작고 미약한 힘. (112쪽)
하여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는 낙관주의자가 아니라 파국주의자의 언어다. 파국주의자는 안다. 긍정적인 자들이 그리는 장밋빛 미래는 허구라는 것을. 언제나 행복한 종합으로 귀결되는 변증법은 가진 자들의 오만한 논리라는 사실을. 패자들, 약자들, 떠도는 자들은 안다. 삶은 그저 파국이며, 그 밖으로 가는 기적적 출구는 없음을. 이런 순수한 내재성을 긍정하는 자들만이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말할 수 있다. 슬픔과 웃음이라는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이 교차하는 불가사의한 공간. 유머는 그 공간에서 솟아 나온다. (112~113쪽)
1905년의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에서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두 명의 '유머리스트' 사형수 이야기를 제시한다. 첫 번째 실례는 월요일에 교수대로 끌려가는 도둑이 "야, 이번 주는 시작이 좋군"이라 말하는 경우다. 이어 프로이트는 "처형장으로 가는 도중 감기 들지 않도록 목에 두를 머플러를 달라고 요청하는" 사형수를 거론한다. 유머란 이런 것이다. 유머를 말하는 자는 "현실적인 이유들 때문에 마음 상하고 고통받기를 거부하며 외부 세계로부터의 외상(外傷)이 자신에게는 문제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일종의 '정신승리적' 주체다. 유머를 통해 주체는 "자아의 불가침성”을 만방에 천명한다. (113~114쪽)
1923년의 논문 「유머」에서 프로이트는 유머리스트의 주체성에 대해 좀 더 상세한 분석을 시도한다. 그에 의하면, 유머리스트의 자아는 두 상이한 심급으로 쪼개져 있다. 한편에는 문제적 상황에 처해 있는 (곧 사형을 당하게 되어 있는) 자아가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는 이 자아를 굽어보면서 마치 자신에게는 결코 죽음이 도래하지 않을 듯이 말하는 또 다른 자아가 있다. 프로이트는 이 두 번째 자아가 사실은 '초자아(超自我)‘라고 본다. 어린아이의 눈에 비친 위대한 부모의 이미지를 모델로 형성된 초자아는 자아가 마주하고 있는 리얼리티의 위중함 따위는 손쉽게 부정한다(성인의 눈에 아이들의 문제가 대수롭지 않게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프로이트는 말한다. 유머란 초자아가 자아에 대해 취하는 이 고압적 태도에서 나오며, 유머 속에서 초자아는 언제나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던진다. "보아라, 이것이 그렇게 위험해 보이는 세계다. 그러나 애들 장난이지. 기껏해야 농담거리밖에는 안되는 애들 장난이지!" (114쪽)
비극의 주체는 (오이디푸스로부터 예수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처형하는 권력 앞에 침묵하며 법의 심판을 수용한다. 하지만 처형을 통해 역설적으로 비극의 주인공은 불멸의 개체성을 획득한다. 이런 점에서 비극은 숭고를 동반한다. 하지만, 유머의 주체는 침묵도, 불멸도, 부활도, 숭고도 알지 못한다. 사형수는 법에 의해 곧 목숨을 잃을 존재다. 그런데, 그는 지금 감기를 걱정하고, 날씨를 생각하고, 계단을 이야기한다. 목에 머플러를 둘러 달라 말한다. 육신에 대한 이런 본능적이고, 즉물적이며, 유물론적인 관심은 임박한 죽음 앞에서도 결코 약화되지 않는다. 그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살(肉)의 욕망과 감각을 잃지 않는다. (115쪽)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유아적이고 생리적인 집착이 법의 권위를 흔드는 효력을 발휘한다. 처형장 유머에 웃음을 터뜨리는 자는 이렇게 묻게 된다. 저처럼 처절하게 자신의 생명을 사랑하고, 생명을 유지하고자 하는 사람의 목을 자르는 '법'은 과연 정의로운 것인가? 유머가 "심판 없이 행해진 정의"이며 "심판 없는 처형 행위"라는 벤야민의 통찰이 뜻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유머에 "괴물적인 것"이 있다면, 이 괴물성은 생명의 종식 불가능성, 기괴한 불멸성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것 같다. 유머 안에는 죽여도 죽지 않는 것, 죽일 수 없는 것, 죽음을 알지 못하는 것, 우리 인격 속에서 부단히 움직이는 괴물적 생명성, 그러나 언제나 상처와 박탈과 소멸의 위협에 시달리는 생명성의 절박한 목소리가 메아리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죽지 않는다, 나는 살고 싶다, 나는 불멸이다, 이렇게 외치는 목소리가. (115~116쪽)
유머는 죄인들을 심판한다고 주장하는 법의 맹목성, 추상성, 형식성, 자의성을 폭로한다. 법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묻게 한다. 법의 정당성에 균열을 낸다. 경찰, 검사, 판사의 권력은 유머 속에서 도리어 심판의 대상이 된다. (116쪽)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분열 분석이 명철하게 드러낸 것처럼, 프로이트는 욕망을 오이디푸스 삼각형(아빠-엄마-아들) 속에 가두어 버리고, 그 가공할 힘을 순치하고자 했다. 유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절차가 수행된 듯이 보인다. 즉, 프로이트는 유머를 사회적 권위(초자아)에 귀속함으로써, 유머에 잠재해 있는 불온성과 비판성을 은폐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프로이트의 유머 이론도 수정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유머의 참된 발화자는 초자아가 아니라 '이드(ld)'인 것이다. 죽음도 부정(否定)도 시간도 알지 못하는 무의식, 욕망의 흐름으로 기계 작동하는 '이드'가 바로 유머리스트의 숨은 실체다. 따라서, 유머리스트는 '신=법=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안에 존재하는 '고아=무신론자=탈주자'다. 다스릴 수 없는 민중의 근원적 저항성이다. 비인간적·반사회적 생명력, 진압할 수 없는 욕망 기계다. (116~117쪽)
바로 이런 점에서, 유머는 구조적으로 슬픔과 분리할 수 없다. 유머는 웃긴 만큼이나 슬픈 것이다. 모든 것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자가 주는 웃음이 유머기 때문이다. 상실의 깊이가 유머의 통렬성과 비례한다. 풍자나 농담이나 위트와 달리 유머에는 비탄의 날카로운 편린이 박혀 있다. 영화사에서 이런 유머리스트의 주체성을 가장 탁월하게 형상화한 존재는 찰리 채플린이 연기한 '떠돌이 찰리'다. 그의 유머는 언어를 넘어서 몸짓 전체로, 존재 전체로 확장되어 있다. 가는 곳마다 곤경에 빠지지만 좌절하는 일 없이, 찰리는 부단히 움직여 나간다. 어떤 권력, 폭력이나 악의, 간계도 손상을 입힐 수 없다는 듯, 어떤 고난이나 문제도 생명을 해칠 수 없다는 듯, 찰리는 유머리스트 특유의 불굴의 무사태평함을 유지하며 미국 자본주의의 정글부터 파시스트 소굴까지, 서커스 무대에서 컨베이어 벨트까지, 서부 탄광으로부터 권투 경기장까지 천연덕스럽게 횡단한다. (117쪽)
카우리스마키의 스타일은 '미니멀리즘'으로 대표된다. 초기작부터 그는 "금욕주의, 간결성, 생략주의(ellipticism), 무표현적 연기"를 추구해 왔다. 대사는 최소화되어 있고, 인물들의 표정도 가면을 쓴 듯 내향적이고 검약적이다. 한 인터뷰에서 카우리스마키는 자신이 오즈 야스지로를 매우 좋아하며, 일본 영화 특유의 장식 없는 정직성을 높게 평가한다고 토로한다. 이것은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예술적 원리가 "축소"와 "단순성"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119쪽)
이들이 보여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무리 죽여도 죽지 않는 것, 죽일 수 없는 것, 파괴할 수 없는 것, 손상시키거나 굴복시킬 수 없는 것. 비인간적이고 맹목적인 생명의 충동. 인간-너머의, 목숨-너머의 생명성이다. 언데드(undead). 20세기 정신분석학은 인간 정신에 내재하는 이 괴물적 힘을 '죽음 충동'이라는 용어로 개념화했다. 우리가 흔히 잘못 이해하는 바와 달리, 정신분석학이 말하는 죽음 충동은 자살에의 의향, 죽고 싶다는 생각, 소멸을 향한 자연적 경향, 혹은 엔트로피 같은 것이 아니다. 죽음 충동은 죽음과 무관하다. 반대로 그것은 생명의 끈질기고 강렬한, 유기체가 결코 체험할 수도 없고, 인지할 수도 없는 '비-유기체적 생명성'을 지시하는 용어다. 주체를 무의식적으로 강박하여 불쾌하고 고통스러운 행위마저도 끝없이 반복하게 만드는 마성적 힘. 바로 그런 의미에서 죽음 충동은 "생명이 항상 그 자신을 초과(exceed)하는 방식"이자 "살아 있으라는 순수한 압력"이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124쪽)
코엔 형제의 영화적 이념이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로 집약될 수 있다면, 카우리스마키 시네마의 이념은 "인생은 영원히, 언제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야"라고 말할 수 있다. 항상 다시 시작하는 것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진정하고 유일한 리듬이다. 실업에 빠지면 다시 직장을 구하고, 헤어지면 다시 만나고, 빼앗기면 다시 획득하면 된다. 다치면 회복하고, 또 다치면 또 회복한다. 하지만, 도저히 다시 시작할 수 없을 정도로, 도저히 다시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도저히 다시 시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이 파괴되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랍비 마샥이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가사를 빌려와 래리의 아들에게 물었듯이, "진실이 거짓으로 밝혀지고, 모든 희망이 사라져 버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는 놀라운 해답을 제공한다. (125쪽)
당신이 완전히 무너졌을 때, 그래서 다시 시작할 어떤 힘조차 없을 때, 바로 그때 타인들이 나타난다는 것. 누군가 나타난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다. 실제로, 그의 영화에서 누군가 다쳤을 때, 누군가 버려졌을 때, 누군가 곤경에 처했을 때, 누군가 아플 때, 어김없이 사람들이 나타난다. 누군가 비열하게 폭행을 당할 때, 사람들이 꾸역꾸역 나타나 폭력에 맞선다. 붕대를 감아준다. 밥을 준다. 노래를 부른다. 손을 내민다. 악인들이 약자들을 파괴시킨다는 점에서 이 세상은 일종의 지옥이다. 하지만 불멸하는 생명의 힘이 약자들로 하여금 계속 삶을 다시 시작하게 한다는 점에서 이 세상은 '유머러스한' 지옥이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서, 그 유머러스한 지옥에는 언제나 선인(善人)들 이 있다. 착한 사람들이, 그들이 도움을 주기 위해 뻗는 손들이 있다. 선(善)은 악(惡)의 발생을 막지는 못하지만, 악이 극단으로 흘러 가는 것을 어느 지점에서 끊어 낸다. 중지시킨다. 그렇다고 지옥이 천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 왜 악이 존재하느냐라고 수많은 철학자들이(가령 C.W.L. 라이프니츠) 물었다. 하지만, 카우리스마키 영화는 그 질문을 뒤집는다. 세상은 늘 지옥인데, 왜 지금까지도 악은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는가? 왜 선은 이토록 완강하게 잔존하는가? 왜 착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나타나는가? 선은 왜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는가? (125~126쪽, 강조는 인용자)
사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는 최근에 <사랑은 낙엽을 타고>만 보았는데, 잔잔하면서 평범한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를 심상하게 다루는구나 정도의 느낌만 받았고 깊은 인상을 남기진 못했었다. 이번 글을 통해 다시 찾아볼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24. 9. 25.
다와다 요코의 『글자를 옮기는 사람』 읽기. 단어들의 파편에서 길을 잃고 정처없는 번역가의 발길에서 또 길을 잃는다. 오래전 배수아의 『뱀과 물』을 읽었을 때의 느낌(이 책도 다 읽지는 않았다. 몇 가지 이미지만 강렬하게 남았을 뿐).
단어들이 이어지지 않은 채 원고지에 흩어졌다. 모두 이어서 문장이 되도록 해야 하는데 생각만 들고 거기에 필요한 체력은 최소한도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체력보단 폐활량이 모자랐다. 하나의 문장을 천천히 숨을 쉬며 읽고 거기서 꾹 하고 한 번 숨을 멈춘 다음 머릿속에서 뜻을 풀이하고 어순을 정리할 것, 그리고 조심스럽게 숨을 내쉬면서 풀이한 문장을 쓰는 것이 요령이라고 번역가 에이 씨는 말했다. 하지만 나는 단어 하나를 읽는 데도 숨이 차서, 힘들어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 다음 단어에는 거의 도달하지도 못한다. 그래도 적어도 나는 단어 하나하나의 낯선 감촉에 충실한 편이고 지금은 그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단어 하나 하나를 조심스럽게 건너편 강변에 던지는 느낌이 있었 다. 그래서인지 전체가 이리저리 흩어지는 것 같기도 하지만 전체를 다 생각할 여유는 없다. 전체는 아무럼 어떠냐는 생각까지 들었다. 번역이란 것이 '건너편 강변에 건네는 것'이라면 '전체'쯤은 잊어버리고 이렇게 작업을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어쩌면 번역은 전혀 다른 것일지도 몰랐다. 이를테면 변신 같은. 단어가 변신하고 이야기가 변신해서 새로운 모습으로 바뀐다. 그리고 마치 처음부터 그런 모습인 양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늘어선다. 이렇게 하지 못하는 나는 분명히 서투른 번역가다. 나는 말보다 내가 먼저 변신할까 봐 몹시 무서울 때가 있다. (22~23쪽)
24. 9. 28.
『글자를 옮기는 사람』 완독. 단조로우면서 고요하고 요상했던 일상이 갑자기 초현실적인 추격극으로 바뀌었을 때 느껴진 이야기의 낙차. 번역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작가의 창의적인 대답처럼 느껴진 소설이었다. 요약하면 ‘번역은 변신이다’? 낯설게 하기의 변신 버전 같은 답변으로도 느껴진다. 작가의 『여행하는 말들』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 책. (그리고 곧 구매했다)
즉 번역은 원본이 다른 언어로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원본이 변신하는 움직임이다. 그러므로 번역문은 원본과 전혀 다른 새롭게 태어난 글이고 그 이질성만으로 충분히 원본과 다른 가치가 있다. 또한 번역은 글만 변신하는 움직임이 아니라 글을 쓰고 있는 사람도 변신하는 움직 임이라는 말이 읽는 사람을 사로잡는다. 익숙치 않은 외국어를 나의 익숙한 언어로 옮기려면 단어 하나를 두고도 수없이 대조하고 연상해야 하는데, 대조와 연상은 글을 쓰는 사람의 정신적이고 물리적인 행위다.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거나 손가락으로 사전이나 참고 서적을 뒤적거려 보는. 따라서 변신은 이 행위를 하는 동안 번역가가 어떤 곳에 도달했을 때의 상태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92~93쪽)
주인공이 「성 게오르크 전설」을 번역한다는 점 그리고 주인공이 머무르는 카나리아 섬이 15세기에 스페인이 식민지로 점령하고 기독교 개종을 강요했던 나라라는 점은 모두 유럽의 기독교 문명을 상대화하고 이 소설을 문명 이면의 이야기로 자리매김하게 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섬을 머나먼 자연의 풍경으로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을 경계한다. 문명이 휩쓸고 지나간 장소를 무해한 자연으로 대하는 태도 역시 그 장소에서 벌어지는 삶들을 지우는 일이다. "무심코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을 뿐인데 관광객의 시선으로 바다를 보는 것 같아서 창피했다."(11쪽), "아름다운 청년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는 건 자유 침해지만 내가 그런 관광객이나 할 법한 말을 하려고 섬에 온 것도 아니고 설사 내가 아이스크림을 판다 해도 관광객이 그런 말을 했다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것 같았다."(54쪽) 햇볕이 내리쬐고 바다가 너울거리고 사람들이 농업과 무역에 의존해서 사는 아름답고도 각박한 섬을 어떤 이름으로 부르고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하는가는 주인공의 고민일 뿐만 아니라 읽는 사람에게도 던져지는 고민이다. (95쪽)
비록 단어가 뚝뚝 쉼표로 끊기고 뜻이 불분명한 번역이지만 바꿔 말하면 우리에게 상상의 여지를 많이 남긴다. 이렇게 언어의 마찰 속에서 상상의 실마리를 찾는 것이 바로 다와다 요코가 추구하는 번역이다. 위의 인용에서 번역을 변신에 비유했듯이 번역은 한 단어를 비슷한 뜻의 다른 단어로 교체하는 것이 아닌, 다른 뜻, 다른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맥락, 다른 형태의 글자, 다른 소리와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다른 느낌으로 변신하는 것이다. 어쩌면 원문 단어에 대응하는 비슷한 뜻의 번역문 단어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다와다 요코는 이렇게 번역이 맞아떨어지지 않아 틈새가 벌어지는 곳에서 새로운 발견을 하려고 한다. 옮긴이가 이전에 옮겼던 문학 에세이에서도 그러한 자기의 작품 세계를 밝힌 바 있다. "서로 다른 문화 사이의 다리를 건너는 것보다 빈틈을 발견하는 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빈틈에서 하는 새로운 발견이란 이를테면 출발어와 도착어의 최초 모습을 찾아내는 발견이다. "[일본어의] '나날[月日]'을 [독일어의] '해와 달[Sonne und Mondl]로 풀이하듯, 오역으로 느낄 정도로 직역을 하는 것은 우리를 말의 원점으로 되돌린다. 또 오랫동안 비유로만 쓰여서 원점에서 멀어진 노쇠한 말을 다시 살려 낸다.” (96~97쪽)
하지만 주인공이 달려가는 마지막 모습에서 불안이나 위기보다는 탈출의 기쁨과 안도감이 느껴진다. 번역을 방해하는 사람들에게서 탈출한 기쁨이고 번역을 다 끝낸 뒤의 안도감이다. 그리고 바다로 들어갈지 말지 망설이는 모습에서 옮긴이는 주인공이 여전히 번역 작업 속에 머무르고 있음을 느꼈다. "번역은 내내 결단을 내려야 하는 작업"(45쪽)이기 때문이다. 후반부 소동은 주인공이 자고 난 뒤에 일어난 것으로 보아 주인공의 꿈으로 읽을 수도 있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주인공이 번역하는 과정에서 품은 환상 속 변신으로 읽을 수도 있다. 꿈이라면 주인공은 꿈속에서도 망설이고 있는 것이고, 『글자를 옮기는 사람』은 그렇게 "결단을 내려야 하는 작업"인 번역을 상징하며 끝나는 소설이다. (10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