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의 1부 제3장 「다른 사람들이 하는 책 얘기를 귀동냥한 경우」에는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책은 그 자체의 물성으로 한정되지 않으며, 사람들이 책에 대해 주고받는 일련의 교환들로 구성되기 때문에 책에 대한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 우리는 읽기 행위에 참여한다는 것이 이 장의 요지다. 바야르는 『장미의 이름』의 결말(윌리엄과 호르헤의 추론과 오류의 과정)을 통해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화제로 삼는 책들은 실재(實在)하는 책이 아니라 특정 상황이 만들어낸 대체물(책의 표현에 따르면 "가공의 오브제")일 뿐이며, 우리가 책에 대한 수많은 담론과 견해(이조차 우리의 기억에서 재구성되어 버린다)에 둘러싸인 사이에 진짜 책은 저 멀리 모습을 감추어버린다는 주장을 펼친다. 정독과 완독을 둘러싼 신화를 깨뜨리려는 과격한 주장이라고 해야 할까.
한데, 이 장을 읽으면서 내가 내내 거슬렸던 것은 저자의 주장이 아니라 인물의 이름이었다. 바야르는 『장미의 이름』의 주인공 이름을 "바스커빌 기욤"이라고 소개하고, 이후에 자신의 논지를 펼치는 과정에서 그를 끊임없이 "바스커빌"이라고 지칭한다. 작품을 읽은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장미의 이름』에서 주인공들은 모두 '(출신지)의 (이름)'의 방식으로 호명된다. 그러니까 '바스커빌'은 인물의 이름이 아니라 '기욤'(국역본으로 본다면 '윌리엄')의 출신지를 말하는 것이다. 아마 이것은 역자의 실수가 아니라 저자의 (의도적일 수도 있는) 오기라고 생각되는데, 바야르 스스로 『장미의 이름』을 SB(Skimmed Book, 대충 뒤적거려 본 책)와 HB(Heard Book,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알게 된 책)로 분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몇 달 전 책을 읽을 때에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발견한 오류를 간단하게 언급하는 글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었으나 금세 잊어버렸고, 한동안 이 책을 펼쳐보지 않았었다. 그러다 문득 다시 이 책을 떠올리게 된 것은, 1부의 1장에서 3장까지 저자가 펼치는 주장(책 한 권 한 권에 매몰되지 말고 집단 도서관의 시각으로 바라보라, 전체성과 책들 간의 유기적 연결을 보라는 것이 요지다)에서 사례들을 종합해 원칙으로 추상화하는 과학적 방법론이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뇌는 하나의 기계이자 컴퓨터이다. 그 점에 관한 한 고전신경학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우리의 존재와 삶을 구성하는 정신과정은 단순히 추상적 혹은 기계적인 과정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이기도 하다. 대상을 분류하고 범주화할 뿐만 아니라 판단하고 느낀다. 따라서 판단과 느낌을 배제한다면, 우리는 P선생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컴퓨터 같은 존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느낌과 판단이라는 개인적인 것을 인지과학에서 배제한다면, 그 역시 P선생과 똑같은 결함을 가지게 될 것이다. 즉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을 파악하는 능력을 상당 부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 따라서 P선생의 사례는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에게 던져진 하나의 경고이자 우화일 수도 있다. 판단이나 구체적인 것, 개별적인 것을 등한시하고 완전히 추상적이고 계량적으로만 변해가는 과학이 장차 어떻게 될지에 대한 경고 말이다.
- 올리버 색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45~46쪽)
개별의 사례를 원칙으로 추상화하는 과학적 사고가 있었기에 인류가 이토록 발전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올리버 색스가 24편의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과학적 방법론의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았을 때 우리는 인간이라는 개별적인 주체를 볼 수 없게 되고, 나아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지각하지도 못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P선생의 사례(「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가장 앞부분에 배치한 것은 색스의 주장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기 때문이다. 추상적인 형태는 인지하지만 현실의 구체적인 면을 지각하지 못하는 P선생을 통해 색스는 자신이 생각하는 신경과학의 문제점을 꼬집는 것이다. 추상성의 눈으로만 현실을 재단하는 움직임은 때로 폭력적이어서, 이를 갖추지 못했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을 '교정'하려고 하기도 한다(「쌍둥이 형제」). 추상성이라는 축으로 기울어진 과학에 색스가 제안하는 것은 "내러톨로지(서사학)"의 회복, "구체성의 과학"이다. 그가 보기엔 "현실을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것으로, 개인적이며 의미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이 '구체성'"이기 때문이다. 과학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문학, 특히 소설의 근간을 이루는 '이야기(서사)'의 회복을 말했다는 것이 색스에게 "과학계의 셰익스피어"라는 찬사가 붙게 된 이유였으리라.
그러나 구체성을 등한시하는 추상성이 세계를 바로 보지 못하듯, 추상성 없는 구체성은 세계를 톺아보지 못하고 차이점에 매몰되도록 할 것이다. 바야르의 책으로 돌아오면, 구체성만 가지고 세계를 마주한 인간은 "대속(代贖)의 사상"을 찾아 황실 도서관을 찾았다가 350만 권의 책을 마주했던 스툼 장군(바야르가 이 인물의 이름은 제대로 쓴 걸까?)과 비슷한 처지이다. 달리 말하면 "'개'라는 속(屬)적 상징이 형태와 크기가 상이한 서로 다른 개체들을 포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으며, 또한 3시 14분에 측면에서 보았던 개가 3시 15분에 정면에서 보았던 개와 동일한 이름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푸네스와 비슷한 상태일 것이다(「기억의 천재 푸네스」). 바야르는 어떤 책도 읽지 않는 황실 도서관 사서의 "총체적 시각"에서 진정한 독자와 교양인이 책에 대해 가져야 할 태도를 역설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갈 수 없음을 알기에 선뜻 그의 손을 들어주기 어렵다. 텍스트이든 사람이든, 그들 사이의 관계에서 추상화(또는 일반화)할 수 있는 원리의 힘도 강하지만, 각각의 대상이 품고 있는 개별적인 서사의 감정적 자장 역시 강하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결국 양쪽 사이의 균형을 잘 찾아야한다는 식상한 결론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둘 사이의 중간점은 계산해서 딱 떨어지는 그런 지점이 될 수 없음도 이미 안다. 가벼움과 무거움, 이성과 감성, 운명과 우연과 같은 개념들이 끊임없이 길항하며 공존하듯, 추상성과 구체성 역시 그러하다...
추신)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의 이야기의 회복 부분에서 내가 연상했던 것은 '문학은 보다 나은 현실을 위한 대안이 될 수 있는가?'였고, 여기에서 떠올린 작품이 조이스 캐롤 오츠의 『그들』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작품의 중반부에서 모린이 '오츠 선생님'의 강의, "문학은 삶에 형태를 부여한다."는 말을 듣고 보낸 두 통의 편지였다. 소설 속 삶을 동경하고 지향했던 모린의 일생을 보고 있으면, '오츠 선생님'의 말에 한 번쯤은 의문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이 연상은 오늘 끄적인 주제와는 동떨어져 있어 이렇게 메모로만 남겨두었다. 언젠가 다시 머릿속에서 엮어지길 기다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