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집·뒷집·옆집 호박넝쿨 드리운 일가 마을 총각들 “서울 가서 책방 열자”
30여년전 의기투합 마을 큰형님 따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문화서점’ 간판 아래 20여군데 둥지 폐지 속 양서 살려낸단 자부심 밑천도
시대의 조류에 깎여갔다 텅빈 고향 마을처럼 ‘헌책방촌’도 그렇게…
동구 밖 느티나무. 그늘은 넓어 아낙들이 귀엣말을 하고, 촌로들은 동네일을 공론한다. 가지 끝에 연이 걸리고 때로 아무개네 황소가 매어 있다. 하여, 뻥 뚫린 둥치 속에는 구비구비 마을이야기가 서려 있지 않겠는가.
“연신내에는 ‘문화당’이라는 좋은 헌책방이 있다. 주인 말이 문경의 친구 여럿이 서울에 와서 모두 헌책방을 하게 되었는데 책방 이름은 똑같이 문화당으로 하기로 약속했다나….”(남재희 ‘헌책방 순례’ 신동아 2000년 6월호) 매니아 사이에 가끔 입길에 오르는 화제 중 하나다. 전에는 훨씬 더 많았다는 얘기도 전설처럼 떠돈다.
서울 관악구 봉천동 장승백이 ‘문화서점’(주인 강경원·66), 은평구 갈현 2동 속칭 먹자골목의 ‘문화당서점’(주인 박상우·56), 서대문구 남가좌동 197-13 문화서점(주인 양원석·54), 성북구 정릉1동 16-158 ‘문화서점’(주인 강성두·48). 동구밖 느티나무 같은 책방들이다.
강경원씨, 박상우씨, 강성두씨가 경북 예천군 보문면 간방 3리 출신이고, 양원석씨는 경기도 가평 출신이다. 이쯤이면 한동네 출신이라는 소문이 그럴 법하다.
“맞아요. 70, 80년대 예천에서 올라온 사람들이에요. 당시 시골에서는 먹고 살기 힘들어 대도시로 많이 나왔잖아요. 많이 배우지 않아도 밑천 많이 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게 헌책방이었지요.”(박상우씨)
예천사람 헌책방의 원조는 박지우(67)씨와 강경원(66)씨. 같은 동네인데다 초등학교 동창 사이.
“62년 대구에서 헌책방을 하고 있었는데 갓 군에서 제대한 지우씨가 서울서 크게 해보자고 편지를 보내 왔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서점을 정리하고, 그 친구는 소 두 마리 판 돈을 합쳐 63년께 종로구 계동에 ‘계원서점’을 냈어요. 청계천에서 헌책을 용달차 한차 분량 사서 시작해 4년 동안 했어요.” 강경원씨의 회고다.
최초의 문화(당)서점은 72년 영등포 시장 뒤에서 지우씨가 시작한 문화당서점. 4년전인 68년 1·21 사태 직후 강씨의 군입대 문제가 불거지면서 강씨와의 동업을 청산한 그가 따로 책방을 차린 것. 폐휴지를 한꺼번에 사서 책을 골라내는 방식이었다.
“대구에서 경북서점을 하는 박씨 형제한테서 ‘좋은 책이 폐지로 나간다’는 말을 듣고 아이디어를 얻었지요. 폐지를 함께 사면 분류하는 것이 힘들기는 해도 책을 사기 쉽고 원가가 덜 들었어요. 다른 책방에 비해 경쟁력이 있었던 거죠.”(박지우씨) 헌책은 있는대로 날개 돋친 듯 팔렸다. 파지값도 괜찮아 1㎏에 40~50원, 지금 돈으로 4000~5000원이었다.
서너집 한집골 상경 책방 개업
지우씨가 ‘상경하여 잘 먹고산다’는 소문이 나면서 고향사람들의 발길이 잦았다. 그는 술과 밥을 먹여주고 더러는 가게에서 함께 기거하면서 일을 가르쳐 주었다. “형님(박선우·65, 작고)이 연신내에서 헌책방을 했는데, 군대 제대하고 올라와 상의하니 돈 많이 들지 않는다면서 권하더라고요. 먹고 사는데 지장 없다면서 말이죠.”(박상우씨)
그렇게 해서 한창 때는 서울 이곳저곳에서 헌책방 하는 간방3리 사람들이 20명을 웃돌았다. <표 참조> 그곳의 총 가구수가 70~80호였으므로 서너 집에 한명꼴로 서울에 헌책방을 연 셈이다. 특히 최대 19가구가 살았다는 탑동(탑돌)의 경우 책방을 연 사람이 16명. 한집에 한명꼴이다. 또 이들 가운데 같은 성씨는 대부분 친인척이고 성이 다르면 앞·뒷집이어서 담 너머로 호형호제 하던 사이다. 마을이 다른 경우도 대부분 보성국민학교(현재 폐교됐음) 선후배 관계다. 헌책방을 연 사람 가운데 같은 성은 대부분 4촌에 8촌으로 얽혀 있다. 형제, 남매도 제법 많다.
형제가 동시에 책방을 한 경우는 박상우-원우, 김시환-교환, 김기옥-기선씨, 박상하-종희. 박상하씨의 경우 형 종길씨가 대구에서 헌책방을 해 세 형제가 같은 일을 했다. 시환씨 집안은 두 여동생(계순, 영순씨)도 한때 헌책방을 내어 한두 해 운영한 바 있다.
이렇게 많은 헌책방을 낸 간방 3리는 야산으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빈촌.
“간방 3리는 가난할 수밖에 없었어요. 올똥볼똥한 야산에다 들도 좁지요. 농토라고는 다락논에 대부분 밭이었어요. 세 동네 가운데 탑동이 가장 가난했어요. 옛부터 밥 못해 먹는 집이 많아 ‘연기 안나는 동네’라고 했을 정도니까요. 우리집은 땅이 없고 문중 위토를 조금 붙였을 뿐입니다.”
강경원씨 형제는 본래 9남매인데 어려서 모두 죽고 딸 둘에 아들 하나가 살아남아 그는 5대 독자다. “그래서 탑동사람들이 객짓물을 제일 먹저 먹었지요. 부평 신한제분, 신진자동차 등 공장으로 많이들 갔어요. 살기 위해 대처로 나가기는 우리 세대가 처음이었어요.”
상경 3세대인 강성두씨 사정도 비슷하다. “땅이 많지 않았어요. 올라올 당시 논 2000평, 밭 3000평으로 마을에서는 중간정도였어요. 시골에서는 비전이 없었어요. 아무리 땅을 파봐도 아이들 상급학교 진학은 커녕 겨우 먹고 살 정도였으니까요. 영주에서 외삼촌 땅콩공장을 도와주고 있었는데 먼지 많이 나고 못하겠더라고요. 한날은 서울 아현동에서 헌책방을 하는 친구(김창기·48)가 내려왔는데 양복을 쫙 빼고 왔더군요. 서울 가면 돈을 갈퀴로 긁는 줄 알았어요.”
이들이 서울에 올라와 자리잡은 곳은 대체로 변두리. 영등포구, 구로구, 관악구, 성북구, 강서구, 은평구, 마포구 등. 최근까지 헌책방들이 많이 분포했던 곳이다. 점포 임대료가 상대적으로 낮고 헌책을 즐겨 볼 중산층 이하의 사람들이 집중적으로 살고 있기도 하다.
갈현동 문화당 박상우씨의 경우 75년 15평 규모의 책방을 65만원(현재값 6500만원)에 인수하였다. 보증금 12만원에 월세 1만2000원이었다. “당시 불광천이 복개되기 전이어서 악취가 심했어요. 게다가 깡패소굴이어서 싸움 없는 날이 없을 정도였지요. 주변에 일문서점, 정은서점, 중앙서점, 동아서점 등 우리 말고 네 군데가 있었어요.” 84년까지 다섯 식구가 책방에 딸린 방에서 살았다. 81년에 아현동 고가가 끝나는 곳에서 책방을 시작한 김창기씨는 딸린 방에서 비키니옷장을 하나 두고 기거했는데, 고향에서 사람이라도 오면 책방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재웠다. 북악터널이 가까운 길음동에서 83년에 시작한 강성두씨는 월세 6만원이다. 강경원씨도 74년에 50만원을 들고 다시 상경하여 봉천극장과 시장 가운데쯤에 서점을 열었다가 상도동으로 옮겼다. 그는 집세 싼 곳을 찾아 상도동에서만 네번째 옮겼다.
이들은 점포를 차려 서로 넘기고 넘겨받고를 거듭해 내력을 묻는 질문에 한결같이 복잡하다고 토를 달았다. 갈현동 박상우씨는 재종형 선우씨한테, 장승백이 강경원씨는 박지우씨한테, 정릉 강성두씨는 김기선씨한테, 김교환씨는 동생인 시환씨한테, 세환씨는 봉천동 서점을 강경원씨한테서 넘겨받았다. 같은 동네사람들인 탓에 서로 신뢰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한결같이 문화(당)서점 이름을 쓴 것도 특이한 현상. “선배들이 그렇게 간판을 달아 별뜻없이 그대로 따랐어요.”(강성두씨) 한때 ‘문화’란 말이 고급스럽고 고상한 이미지를 주었던 것은 사실. 파지에서 책을 골라내는 일이 노가다에 속하는 일이어도 쓰레기에서 책을 살려내어 ‘책 읽는 사회’를 만드는 데 한몫을 한다는 자부심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스스로 ‘힘내자 아자’ 하는 추임새를 넣을 필요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상호 공유하며 ‘상도’ 지켜
상호를 공유한 이들은 그만큼 동지의식이 강했다.
△다른 사람의 영역은 침범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개업할 경우 도와준다
△같은 책이 많이 나오면 나눠서 판다 등의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다.(박상우씨 증언)
고향은 다르지만 문화서점 대열에 합류한 사람들도 있다. 남가좌동 양원석씨, 김진한, 윤진석씨 등이 그 예. 양씨는 72~3년 신촌로터리에서 중간상을 하다가, 박지우씨가 근처에 헌책방을 차려 김일환씨한테 맡기면서 영역다툼이 있었다. 화해 술을 한잔 하다가 친해져 지우씨의 도움을 받으면서 인연을 맺었다.
이들 문화서점은 95년 아이엠에프를 전후해 대거 전업하게 된다. 경기 자체가 어려워졌거니와 산아제한 세대가 학령기에 들고, 대학입시제도가 바뀐 동시에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헌책방을 찾는 사람이 급감하기 시작해 헌책방들이 대거 문을 닫은 시점과 일치한다. 몇몇은 한약방과 조명기구, 당구장 관련 사업으로 옮겨가고 나머지는 뿔뿔이 흩어졌다. 일단 서울물을 먹은 터, 70~80년대 시골에서 갓 올라와서보다는 시각이 다양해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한마을 청년들이 집단 상경하며 같은 이름으로 헌책방을 연 것은 일대 사회사적인 사건. 영국의 헌책방마을 헤이온와이가 책에 미친 한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장소를 옮겨 시간 속에 존재했던 ‘한국판 헤이온 와이’는 도시화와 이농현상이 만들어낸 우리시대의 특별한 표정일 테다.
현재 헌책방을 계속하는 네 사람 가운데 갈현동 박상우씨는 대체로 만족해하는 편. 삼남매(딸2, 아들1)를 두어 모두 대학을 보냈다. 아들은 ‘마누라 고생시킨다’면서 헌책방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가게가 작다면서 방문을 사양했던 장승백이 강경원씨는 두 아들을 두어 맏이는 회사원이고 둘째는 취업 준비중이다. 정릉 강상두씨는 고향에 그냥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를 한다. 서울에서처럼 고되게 일하면 이보다야 못 하겠느냐는 것. 남가좌동 양원석씨는 두 아들을 모두 대학까지 가르친 요즘 가게를 따로 내어 다른 일을 겸할 생각이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 한겨레신문 05. 10.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