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신내 지하철 역과 기자촌 중간쯤 연신초등학교 옆에 자리잡은 ‘작은우리’(02-383-6263). 이름처럼 아기자기한 동네책방이다. 엄마손 아이들, 재잘재잘 중고생, 퇴근길 한 정거장 앞뒤에서 내린 직장인들이 손님이다.


ㄷ자처럼 생긴 통로. 첫획 벽에는 시, 소설류가 꽂혔고 넘친 책들이 바닥에 쌓였다. <서재 결혼시키기>나 <돈 쥬앙> 같은 책이 도드라진다. 금방 들어온 듯한 창비영인본 세트는 끈도 안 풀었다. 주인 이홍복(49)씨가 앉은 뒤쪽은 사전 연감류 참고서류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날 정도로 좁은 끝획 통로에 이르면 갑자기 시간이 정지돼 흑백시대가 된 듯하다. 쌓인 책들의 무게만큼이나 시간이 첩첩이다. 오래 머물면 책이 무너지거나 시간의 무게에 스스로 무너지거나다. 신학서적, 일어소설, <세종장헌대왕실록> 낙질, <고전복음사휘집림> 1~8(정문서국) 등이 눈에 띈다.


백미는 천장. 빛바랜 ‘국민학교’ 공책, <황야의 무법자>, <동백아가씨>, <로보트 태권V> 등 옛 엘피판이 붙어있다. 뿐인가. <톨스토이 동화-사람은 무엇으로 사냐>, <소공녀 소공자>, <장다리꽃 필 때>, <5월의 노래> 등 50년대 동화책들이 둥둥 떠있다. 일종의 비품이다. ‘팔라’고 말한다면 ‘나는 여기 처음 왔소’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주인 이씨는 가게를 그만둘 때 단골한테 하나씩 선물할 거라고 한다. 그 때를 기다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근처 기자촌은 작가, 예술인들이 많이 살고, 불광동은 오래된 집이 비교적 많아 그런대로 ‘물건’이 나왔다. 예쁘게 장정한 권환의 <윤리>는 인자 자국이 까끌거릴 정도로 상태가 좋았다. 설정식의 <종> 역시 앞으로 다시 만날 기회가 없을 터이다. 얼마 전 국악, 한적 영인본 등이 한꺼번에 들어온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최근 뉴타운 개발이 되면서 옛물건 장사들이 목을 지키기도 했다.


주인 이씨는 목감기라면서 <건강도인술>(정신세계사)을 보고 있었다. 더위에 과로 탓일 거다. 폐지상 순례는 물론 ‘헌책 삽니다’ 전단지를 붙이고, 아파트·빌라촌을 돌며 경비들에게 명함과 음료수를 건네는 것도 일이다. 전화가 오면 가게를 아내에게 맡기고 오토바이로 휑 다녀온다. 부부는 부지런하기로 호가 났다. 찬바람이 불면 가게 앞에서는 어김없이 붕어빵을 굽고 어묵국물을 끓인다. 줄어든 헌책방 수입에 쏠쏠한 부업이다. 그렇게 키운 아들이 대학 4학년이다. 부부는 일년 한차례 전국일주 꿈이 있어 즐겁다.


지난 겨울에는 책을 한 트럭 버렸다. 책을 어떻게 파느냐보다 어떻게 버리고 정리하느냐가 중요하다고 했다. 책은 또 잃어버린 금반지 같아서 무더기에 휩싸이면 도저히 찾을 수 없다고 했다. 더불어 눈이 쌩쌩할 때 책을 많이 읽어두란다. 늙어 느른한 시간에 묻히면 스스로를 찾을 수 없다는 것. 그렇게 말하는 이씨는 정작 책읽기보다 남들에게 읽힐 책 구하러 다니느라 얼굴이 그을었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한겨레신문 05.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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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기론 지하철 4호선 숙대입구역에서 가깝고, 어림잡기는 용산 미군기지에 궁둥이를 대고 있다. 우리서점(011-346-1589) 입구 계단은 건물의 나이만큼이나 닳았다.


느른한 오후 혼자서 커피를 타던 주인 남순종(65)씨는 동무를 만나 반가운 듯 한잔을 더 탔다.
18평 2만여권의 책이 가득한데 여느 책방하고는 조금 다르다. 반듯한 책꽂이에 분야별로 깔끔하게 정리돼 있어 잔손이 많이 간 흔적이 역력하다. 인문사회 특히 문학쪽 책이 많고 최근에 나온 책들도 꽤 많다.


“원래 출판사에 딸린 서고였는데 7개월 전에 책방으로 바꿨습니다.”
조금 다른 표정이 바로 그런 탓이다. 글벗사. 어린이책과 문학 관련 책 1천여종을 냈다. <건국대통령 이승만>(이종구 지음)이 최근작이다. 출판사 명패가 달린 작은 방 컴퓨터는 먼지를 썼고 아들이 업데이트한다는 사이트(gulbutsa.co.kr)는 한산하다. 구제금융 사태가 터지면서 시난고난 출판사는 시들고, 급기야 5~6명 직원을 모두 정리하고 집을 팔아 전세로 옮기며 빚잔치를 했다. 출판사 이름을 유지한채 일감이 들어오면 아르바이트를 써서 책을 낼 따름이다.


책이 좋아서 책동네와 40년 인연. 출판사가 잘 나갈 때는 하루에 책 5권을 낸 적도 있고, 종로 6가 대학천시장에서 신간도매를 하기도 했다.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헌책방을, 오산고교 앞에서 새책방도 해 보았다.


“출판사가 안될 때는 책방을 겸했지요.”
책을 낼 때 참고자료로 쓰려고 모아둔 것과 책동네의 지인들이 가져온 책들이 지금 매장에 나앉은 상품들이다. 출판사로는 돈을 만지기 어려웠는데, 요즘은 하루매상 7만~8만원을 올린다. 큰 돈은 아니지만 그래도 문인 친구하고 점심은 먹을 수 있다고 말했다.


놀아도 이곳에서 놀고 일을 해도 이곳에서 일을 한다는 남씨는 차라리 서점이 속 편하단다. 매장 분량만큼 쌓였다는 집안의 책도 이 참에 끌어내와 쏠쏠한 책방으로 만들 계획이다. 특별히 보여주는, 유리문 달린 책장에 귀중본들이 꽂혔다. 값만 맞으면 판다는 샘플들이다. <문학개론>(김기림, 문우인서관, 1946), <시집 호롱>(서창수, 청구출판사, 1951), <푸른 별>(김용호, 남광출판사, 1952), <조선문자 급 어학사>(김윤경, 조선기념도서출판관, 1938) 등 꾸리꾸리하다.


경기에 따라 떠올랐다 잠겼다를 거듭해온 책방. 남씨는 다시 책을 활발히 낼 꿈을 꾼다. 문예 계간지 <문예와 비평>를 11년째 거르지않고 내 온 것도 그런 연유다. 하지만 그것이 단지 꿈으로 그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 구제금융의 그늘은 그만큼 깊고, 출판동네의 세월은 빨라 늙은 그가 끼어들 곁을 주지 않는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 한겨레신문 05.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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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활딱 열려 있고, 선풍기가 홰홰 돌아도 덥다. 청구 헌책백화점(02-2252-3554) 주인 황영섭(62)씨는 ‘어깨 난닝구’ 차림이다. 비라도 한줄금 하려는지 찌는 듯한 무더위. 물 갈아줄 때가 지난 어항 속 물고기처럼 주인은 헉헉거렸다. 주인 또래의 노파가 언제부터였는지 징징대며 넋두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주인은 웅웅 대꾸하며 나른한 오후시간을 죽였다.


책들도 분위기를 타는가. 징징 웅웅, 바닥의 것들은 넘어지고 자빠져 있고 책꽂이의 것들은 들쑥날쑥 삐뚤빼뚤 도대체 ‘정신이 다’. 늘 그러한데 오늘 따라 유난스런 것은 아마도 더위 탓일 거다. 주인을 닮아서 체면이고 격식이고 없다. 어린이책, 참고서, 소설 그 정도 대충 영역을 정해 놓고 툭툭 던져진 듯한 게 여축없이 회색톤이다. 그러나 머무는 동안 찾아온 손님이 책을 물으면 있다, 없다, 황씨의 답은 확실하다. 값은 그까이꺼 대~충 얼마다. 행여 돈이 모자라도 그까이꺼 대~충 까준다. 세 내기가 귀찮아 건물을 사버린 주인은 손님 눈치도, 책 눈치도 안본다. 그까이꺼 대충 팔리면 그만이고 안 팔리면 버린다.

혹자는 이곳에는 쓸 만한 책이 없다고 한다. 책방이 아니라 고물상 같다는 혹평도 있다. 얼핏 보면 그럴만도 하다. 하지만 겉볼안. 주인은 부지런히 책을 거두어들이고 홈페이지를 열어 책을 올린다. 굳이 표를 내지 않거니와 매장 뒤편 창고에 한가득 갈무리해놓은 것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주인을 채근해 둘러본 적이 있는 그곳에는 썩 값나가는 것은 없지만 책주인을 찾기 어렵잖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눈길 멎는대로 손에 잡히는대로 노후대비 저축하는 심정으로 쟁여둔 것이리라. 더 늙어 힘이 없어졌을 때 그 책들이 든든한 ‘빽’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눈치다.


그렇다고 매장이 아주 맹탕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여유를 두고 느긋하게 훑어보면 까탈스런 눈에도 의외의 책이 ‘여기요’한다. <화당집>(1720)을 한정 영인한 <화당 신선생 문집>(1979).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신민일(1576~1650)의 글모음이다. 임병양란을 살아 어수선한 시대의 편린이 싯구에 남았다. 원본 일실을 우려한 문중에서 비매품으로 만들었지 싶다. 서울정도 600년기념 설화집 <옛날옛적 서울에>(최래옥 편, 서울학연구소 1994), <벽> 1, 2(허영만, 팀매니아, 1995), <고어사전>(남광우 편, 교학사, 1997) 등등. 툭툭 던져둔 것들 중에 섞인 것들이다. 값은 ‘무척’ 눅다. 책은 주인을 만나야 한다는 게 황씨의 지론이다. 해서 ‘필요한 만큼’만 받는다.


넋두리하던 노파가 나가고 40대 주부가 초등학교 교과서를 찾았다. 불러주는대로 책을 뽑아주고 값을 셈한 주인은 다른 교과목 책 2권을 얹어주며 대구 가져가라고 했다. 필요할 때가 있을 거라면서.
지하철 청구역에서 내리면 조금 가깝고 약수역에서 내리면 조금 멀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한겨레신문 05.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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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혜자 2010-07-14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청구 헌책방 내외와 사진 찍다 곳곳에 보석책들이 넘 많다.2시간 걸려 싸장닙 얼굴뵈니 가슴이 따스해 온다.
자녀들은 서울대 출신 부러움이다 .새벽같이 일어나 온발로 뛰시는 그 부지런함을 그성실함을 존경한다.
늘 그자리에 늘 그곳에서 정겨운 난닝구 사랑하며 건강건강 하시길 빌어본다.
청구헌책방 팬
 

 

삼선서림(02-747-3444)은 삼선시장에 있다. 삼선 사거리, 지하철 4호선 삼선교(한성대입구)역에서 가깝다.
토속적이고 옛스런 이름에 연륜은 4년 반이다.
김상호(48)씨 혼자서 운영하기 때문에 자주 문을 잠근다. 책 구입, 배달은 물론 화장실에 갈 때도 어쩔 수 없다. 미리 전화하고 가는 편이 좋다. 오후 2시께 약속과 한 시간 어긋나니 역시 문이 잠겼다. 손전화(016-9292-3698)는 그의 늦은 점심 자리로 날아갔다.
단 4평. 한발짝 들어가면 더 못간다. 왼쪽으로 비비적거리면 두 발자국 더 뗄 수는 있다. 작은 두 책꽂이 사이에 틈이 있기 때문. 오른쪽은 쌓인 책이 다섯 겹이다.


손님이 둘이면 한 사람은 밖에서 기다려야 한다. 성미가 급하면 앞사람 궁둥이에 코를 대고 책을 훑어볼 수는 있다. 그야말로 책이 주인이고 책방주인 김상호씨는 손님처럼 밖에서 서성인다. “워낙 공간이 좁아서… 한 열평은 돼야 하는데….”
“삐리릭.” 주인의 전화기가 울리면 손님이 먼저 전화기를 꺼내든다. 주-객의 거리는 전화가 엉킬 만큼 짧다.


주인은 섭섭하겠지만 책방이 아나라 창고다. 주인이 머물던 자취는 책 틈의 전화기가 가끔 비명을 지르는 것으로 짐작할 따름이다.
20여년 헌책방을 순례한 눈썰미. 무작위로 모은 2만여권의 책을 한차례 흩어보내고 다시 1만여권을 모았다. 그중에서 조금 헐어 책방을 시작했다. 주로 인문계통의 책이다. 논문집, 비매품 등 다른 데서 보기 힘든 것들이 자주 눈에 띈다는 한 손님의 귀띔이다. 아침부터 세수만 겨우 하고 그러모은 책들은 단골들이 얼추 빼가고 나머지는 고여 패총처럼 쌓인다. 주인도 3~4일 지나면 안쪽에 무슨 책이 있는지 모른다. 안다 해도 도대체 빼줄 수 없다. 이곳은 뜨네기가 책을 보면서 고르는 곳이 아니다.


“빨리빨리 순환돼야 하는데… 그게… 손이 많이 가고… 책은 묻히고….” 주인은 팔기보다 책 구하는 데 열심이다. 책무지의 표면적이 자꾸 줄어 단골과 비단골의 느낌은 자꾸 벌어진다. 좁은 공간의 비애. 문제는 공간과 책욕심의 부조화다.


시장을 거쳐 찬거리 비닐봉지를 들고온 주부. 책을 골라 역시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 들었다. 아이들과 자신을 위한 몸과 맘 먹거리다. 길 건너 출판사 사장이 슬리퍼 바람으로 책 구경이다. 은퇴한 백발의 교수가 “새로 들어온 책 있나?” 하고 물었다. 방금 전 아무 것도 눈에 띄지 않았던 곳에서 물고기를 개울밖으로 건져내듯 책을 툭툭 골라냈다. <태초 그 이전>, <로마문화 왕국, 신라> 등등. 눈 먼 사람과 눈 뜬 사람의 차이.


“모으려는 사람, 읽으려는 사람, 구별돼요.” 분야에 상관없이 눈에 확 띄는 책을 골라가는 사람은 영낙없이 모으는 사람이다. 그는 읽는 사람한테 파는 게 더 좋다고 말했다. 증정본 책을 판다기에 엿본 신문쟁이의 서고. 쟁여두느니 싸게 팔아 필요한 사람에게 가도록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복원되는 청계천의 상류. 내년 5월께 복개판 위에 세워진 시장이 뜯기면서 책방도 옮겨야 한다. 그건 그때 가서 걱정할 생각이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 한겨레신문 05.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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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집·뒷집·옆집 호박넝쿨 드리운 일가 마을 총각들 “서울 가서 책방 열자”
30여년전 의기투합 마을 큰형님 따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문화서점’ 간판 아래 20여군데 둥지 폐지 속 양서 살려낸단 자부심 밑천도
시대의 조류에 깎여갔다 텅빈 고향 마을처럼 ‘헌책방촌’도 그렇게…

 


동구 밖 느티나무. 그늘은 넓어 아낙들이 귀엣말을 하고, 촌로들은 동네일을 공론한다. 가지 끝에 연이 걸리고 때로 아무개네 황소가 매어 있다. 하여, 뻥 뚫린 둥치 속에는 구비구비 마을이야기가 서려 있지 않겠는가.


“연신내에는 ‘문화당’이라는 좋은 헌책방이 있다. 주인 말이 문경의 친구 여럿이 서울에 와서 모두 헌책방을 하게 되었는데 책방 이름은 똑같이 문화당으로 하기로 약속했다나….”(남재희 ‘헌책방 순례’ 신동아 2000년 6월호) 매니아 사이에 가끔 입길에 오르는 화제 중 하나다. 전에는 훨씬 더 많았다는 얘기도 전설처럼 떠돈다.


서울 관악구 봉천동 장승백이 ‘문화서점’(주인 강경원·66), 은평구 갈현 2동 속칭 먹자골목의 ‘문화당서점’(주인 박상우·56), 서대문구 남가좌동 197-13 문화서점(주인 양원석·54), 성북구 정릉1동 16-158 ‘문화서점’(주인 강성두·48). 동구밖 느티나무 같은 책방들이다.


강경원씨, 박상우씨, 강성두씨가 경북 예천군 보문면 간방 3리 출신이고, 양원석씨는 경기도 가평 출신이다. 이쯤이면 한동네 출신이라는 소문이 그럴 법하다.
“맞아요. 70, 80년대 예천에서 올라온 사람들이에요. 당시 시골에서는 먹고 살기 힘들어 대도시로 많이 나왔잖아요. 많이 배우지 않아도 밑천 많이 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게 헌책방이었지요.”(박상우씨)
예천사람 헌책방의 원조는 박지우(67)씨와 강경원(66)씨. 같은 동네인데다 초등학교 동창 사이.


“62년 대구에서 헌책방을 하고 있었는데 갓 군에서 제대한 지우씨가 서울서 크게 해보자고 편지를 보내 왔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서점을 정리하고, 그 친구는 소 두 마리 판 돈을 합쳐 63년께 종로구 계동에 ‘계원서점’을 냈어요. 청계천에서 헌책을 용달차 한차 분량 사서 시작해 4년 동안 했어요.” 강경원씨의 회고다.


최초의 문화(당)서점은 72년 영등포 시장 뒤에서 지우씨가 시작한 문화당서점. 4년전인 68년 1·21 사태 직후 강씨의 군입대 문제가 불거지면서 강씨와의 동업을 청산한 그가 따로 책방을 차린 것. 폐휴지를 한꺼번에 사서 책을 골라내는 방식이었다.
“대구에서 경북서점을 하는 박씨 형제한테서 ‘좋은 책이 폐지로 나간다’는 말을 듣고 아이디어를 얻었지요. 폐지를 함께 사면 분류하는 것이 힘들기는 해도 책을 사기 쉽고 원가가 덜 들었어요. 다른 책방에 비해 경쟁력이 있었던 거죠.”(박지우씨) 헌책은 있는대로 날개 돋친 듯 팔렸다. 파지값도 괜찮아 1㎏에 40~50원, 지금 돈으로 4000~5000원이었다.

서너집 한집골 상경 책방 개업

지우씨가 ‘상경하여 잘 먹고산다’는 소문이 나면서 고향사람들의 발길이 잦았다. 그는 술과 밥을 먹여주고 더러는 가게에서 함께 기거하면서 일을 가르쳐 주었다. “형님(박선우·65, 작고)이 연신내에서 헌책방을 했는데, 군대 제대하고 올라와 상의하니 돈 많이 들지 않는다면서 권하더라고요. 먹고 사는데 지장 없다면서 말이죠.”(박상우씨)


그렇게 해서 한창 때는 서울 이곳저곳에서 헌책방 하는 간방3리 사람들이 20명을 웃돌았다. <표 참조> 그곳의 총 가구수가 70~80호였으므로 서너 집에 한명꼴로 서울에 헌책방을 연 셈이다. 특히 최대 19가구가 살았다는 탑동(탑돌)의 경우 책방을 연 사람이 16명. 한집에 한명꼴이다. 또 이들 가운데 같은 성씨는 대부분 친인척이고 성이 다르면 앞·뒷집이어서 담 너머로 호형호제 하던 사이다. 마을이 다른 경우도 대부분 보성국민학교(현재 폐교됐음) 선후배 관계다. 헌책방을 연 사람 가운데 같은 성은 대부분 4촌에 8촌으로 얽혀 있다. 형제, 남매도 제법 많다.
형제가 동시에 책방을 한 경우는 박상우-원우, 김시환-교환, 김기옥-기선씨, 박상하-종희. 박상하씨의 경우 형 종길씨가 대구에서 헌책방을 해 세 형제가 같은 일을 했다. 시환씨 집안은 두 여동생(계순, 영순씨)도 한때 헌책방을 내어 한두 해 운영한 바 있다.


 

이렇게 많은 헌책방을 낸 간방 3리는 야산으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빈촌.
“간방 3리는 가난할 수밖에 없었어요. 올똥볼똥한 야산에다 들도 좁지요. 농토라고는 다락논에 대부분 밭이었어요. 세 동네 가운데 탑동이 가장 가난했어요. 옛부터 밥 못해 먹는 집이 많아 ‘연기 안나는 동네’라고 했을 정도니까요. 우리집은 땅이 없고 문중 위토를 조금 붙였을 뿐입니다.”

강경원씨 형제는 본래 9남매인데 어려서 모두 죽고 딸 둘에 아들 하나가 살아남아 그는 5대 독자다. “그래서 탑동사람들이 객짓물을 제일 먹저 먹었지요. 부평 신한제분, 신진자동차 등 공장으로 많이들 갔어요. 살기 위해 대처로 나가기는 우리 세대가 처음이었어요.”


상경 3세대인 강성두씨 사정도 비슷하다. “땅이 많지 않았어요. 올라올 당시 논 2000평, 밭 3000평으로 마을에서는 중간정도였어요. 시골에서는 비전이 없었어요. 아무리 땅을 파봐도 아이들 상급학교 진학은 커녕 겨우 먹고 살 정도였으니까요. 영주에서 외삼촌 땅콩공장을 도와주고 있었는데 먼지 많이 나고 못하겠더라고요. 한날은 서울 아현동에서 헌책방을 하는 친구(김창기·48)가 내려왔는데 양복을 쫙 빼고 왔더군요. 서울 가면 돈을 갈퀴로 긁는 줄 알았어요.”
이들이 서울에 올라와 자리잡은 곳은 대체로 변두리. 영등포구, 구로구, 관악구, 성북구, 강서구, 은평구, 마포구 등. 최근까지 헌책방들이 많이 분포했던 곳이다. 점포 임대료가 상대적으로 낮고 헌책을 즐겨 볼 중산층 이하의 사람들이 집중적으로 살고 있기도 하다.


갈현동 문화당 박상우씨의 경우 75년 15평 규모의 책방을 65만원(현재값 6500만원)에 인수하였다. 보증금 12만원에 월세 1만2000원이었다. “당시 불광천이 복개되기 전이어서 악취가 심했어요. 게다가 깡패소굴이어서 싸움 없는 날이 없을 정도였지요. 주변에 일문서점, 정은서점, 중앙서점, 동아서점 등 우리 말고 네 군데가 있었어요.” 84년까지 다섯 식구가 책방에 딸린 방에서 살았다. 81년에 아현동 고가가 끝나는 곳에서 책방을 시작한 김창기씨는 딸린 방에서 비키니옷장을 하나 두고 기거했는데, 고향에서 사람이라도 오면 책방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재웠다. 북악터널이 가까운 길음동에서 83년에 시작한 강성두씨는 월세 6만원이다. 강경원씨도 74년에 50만원을 들고 다시 상경하여 봉천극장과 시장 가운데쯤에 서점을 열었다가 상도동으로 옮겼다. 그는 집세 싼 곳을 찾아 상도동에서만 네번째 옮겼다.


이들은 점포를 차려 서로 넘기고 넘겨받고를 거듭해 내력을 묻는 질문에 한결같이 복잡하다고 토를 달았다. 갈현동 박상우씨는 재종형 선우씨한테, 장승백이 강경원씨는 박지우씨한테, 정릉 강성두씨는 김기선씨한테, 김교환씨는 동생인 시환씨한테, 세환씨는 봉천동 서점을 강경원씨한테서 넘겨받았다. 같은 동네사람들인 탓에 서로 신뢰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한결같이 문화(당)서점 이름을 쓴 것도 특이한 현상. “선배들이 그렇게 간판을 달아 별뜻없이 그대로 따랐어요.”(강성두씨) 한때 ‘문화’란 말이 고급스럽고 고상한 이미지를 주었던 것은 사실. 파지에서 책을 골라내는 일이 노가다에 속하는 일이어도 쓰레기에서 책을 살려내어 ‘책 읽는 사회’를 만드는 데 한몫을 한다는 자부심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스스로 ‘힘내자 아자’ 하는 추임새를 넣을 필요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상호 공유하며 ‘상도’ 지켜

상호를 공유한 이들은 그만큼 동지의식이 강했다.

△다른 사람의 영역은 침범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개업할 경우 도와준다

△같은 책이 많이 나오면 나눠서 판다 등의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다.(박상우씨 증언)

고향은 다르지만 문화서점 대열에 합류한 사람들도 있다. 남가좌동 양원석씨, 김진한, 윤진석씨 등이 그 예. 양씨는 72~3년 신촌로터리에서 중간상을 하다가, 박지우씨가 근처에 헌책방을 차려 김일환씨한테 맡기면서 영역다툼이 있었다. 화해 술을 한잔 하다가 친해져 지우씨의 도움을 받으면서 인연을 맺었다.


이들 문화서점은 95년 아이엠에프를 전후해 대거 전업하게 된다. 경기 자체가 어려워졌거니와 산아제한 세대가 학령기에 들고, 대학입시제도가 바뀐 동시에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헌책방을 찾는 사람이 급감하기 시작해 헌책방들이 대거 문을 닫은 시점과 일치한다. 몇몇은 한약방과 조명기구, 당구장 관련 사업으로 옮겨가고 나머지는 뿔뿔이 흩어졌다. 일단 서울물을 먹은 터, 70~80년대 시골에서 갓 올라와서보다는 시각이 다양해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한마을 청년들이 집단 상경하며 같은 이름으로 헌책방을 연 것은 일대 사회사적인 사건. 영국의 헌책방마을 헤이온와이가 책에 미친 한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장소를 옮겨 시간 속에 존재했던 ‘한국판 헤이온 와이’는 도시화와 이농현상이 만들어낸 우리시대의 특별한 표정일 테다.


현재 헌책방을 계속하는 네 사람 가운데 갈현동 박상우씨는 대체로 만족해하는 편. 삼남매(딸2, 아들1)를 두어 모두 대학을 보냈다. 아들은 ‘마누라 고생시킨다’면서 헌책방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가게가 작다면서 방문을 사양했던 장승백이 강경원씨는 두 아들을 두어 맏이는 회사원이고 둘째는 취업 준비중이다. 정릉 강상두씨는 고향에 그냥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를 한다. 서울에서처럼 고되게 일하면 이보다야 못 하겠느냐는 것. 남가좌동 양원석씨는 두 아들을 모두 대학까지 가르친 요즘 가게를 따로 내어 다른 일을 겸할 생각이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 한겨레신문 05.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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