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신내 지하철 역과 기자촌 중간쯤 연신초등학교 옆에 자리잡은 ‘작은우리’(02-383-6263). 이름처럼 아기자기한 동네책방이다. 엄마손 아이들, 재잘재잘 중고생, 퇴근길 한 정거장 앞뒤에서 내린 직장인들이 손님이다.


ㄷ자처럼 생긴 통로. 첫획 벽에는 시, 소설류가 꽂혔고 넘친 책들이 바닥에 쌓였다. <서재 결혼시키기>나 <돈 쥬앙> 같은 책이 도드라진다. 금방 들어온 듯한 창비영인본 세트는 끈도 안 풀었다. 주인 이홍복(49)씨가 앉은 뒤쪽은 사전 연감류 참고서류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날 정도로 좁은 끝획 통로에 이르면 갑자기 시간이 정지돼 흑백시대가 된 듯하다. 쌓인 책들의 무게만큼이나 시간이 첩첩이다. 오래 머물면 책이 무너지거나 시간의 무게에 스스로 무너지거나다. 신학서적, 일어소설, <세종장헌대왕실록> 낙질, <고전복음사휘집림> 1~8(정문서국) 등이 눈에 띈다.


백미는 천장. 빛바랜 ‘국민학교’ 공책, <황야의 무법자>, <동백아가씨>, <로보트 태권V> 등 옛 엘피판이 붙어있다. 뿐인가. <톨스토이 동화-사람은 무엇으로 사냐>, <소공녀 소공자>, <장다리꽃 필 때>, <5월의 노래> 등 50년대 동화책들이 둥둥 떠있다. 일종의 비품이다. ‘팔라’고 말한다면 ‘나는 여기 처음 왔소’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주인 이씨는 가게를 그만둘 때 단골한테 하나씩 선물할 거라고 한다. 그 때를 기다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근처 기자촌은 작가, 예술인들이 많이 살고, 불광동은 오래된 집이 비교적 많아 그런대로 ‘물건’이 나왔다. 예쁘게 장정한 권환의 <윤리>는 인자 자국이 까끌거릴 정도로 상태가 좋았다. 설정식의 <종> 역시 앞으로 다시 만날 기회가 없을 터이다. 얼마 전 국악, 한적 영인본 등이 한꺼번에 들어온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최근 뉴타운 개발이 되면서 옛물건 장사들이 목을 지키기도 했다.


주인 이씨는 목감기라면서 <건강도인술>(정신세계사)을 보고 있었다. 더위에 과로 탓일 거다. 폐지상 순례는 물론 ‘헌책 삽니다’ 전단지를 붙이고, 아파트·빌라촌을 돌며 경비들에게 명함과 음료수를 건네는 것도 일이다. 전화가 오면 가게를 아내에게 맡기고 오토바이로 휑 다녀온다. 부부는 부지런하기로 호가 났다. 찬바람이 불면 가게 앞에서는 어김없이 붕어빵을 굽고 어묵국물을 끓인다. 줄어든 헌책방 수입에 쏠쏠한 부업이다. 그렇게 키운 아들이 대학 4학년이다. 부부는 일년 한차례 전국일주 꿈이 있어 즐겁다.


지난 겨울에는 책을 한 트럭 버렸다. 책을 어떻게 파느냐보다 어떻게 버리고 정리하느냐가 중요하다고 했다. 책은 또 잃어버린 금반지 같아서 무더기에 휩싸이면 도저히 찾을 수 없다고 했다. 더불어 눈이 쌩쌩할 때 책을 많이 읽어두란다. 늙어 느른한 시간에 묻히면 스스로를 찾을 수 없다는 것. 그렇게 말하는 이씨는 정작 책읽기보다 남들에게 읽힐 책 구하러 다니느라 얼굴이 그을었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한겨레신문 05.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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