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숙만필
황인숙 지음 / 마음산책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굳이 시인이 아니더라도, 굳이 에세이스트가 아니더라도 이런 글 한 권 정도는 써보고 싶다는 바램. 황인숙의 산문을 읽은 후 든  생각이다. 어떤 코멘트가 적당할까. 재밌다? 유쾌하다? 기분이 좋다? 말은 달라도 의미는 거기서 거기가 아닌가. 기품이 있다는 누군가의 말에 기품이 무언가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다가, 내면의 견결한 자기긍정이라면 그런 거지 하다가 이 사람이 쓴 시의 한 구절을 되짚어본다.


가을 밤


마루를 걸으면

삐걱이는 뼛속에서

철썩거리는 어둠.

방파제를 쌓듯

담요를 두른다.


덜컹,

무슨 소릴까?

문은 잠겨 있는데.

덜컹,

무슨 소릴까?

문은 굳게 잠겨 있는데.

덜컹, 덜컹,

아아 무슨 소릴까?

암만 보아도 문은 잠겨 있는데.


스산한 바람이 부는 딱 오늘 같은 밤에, 홀로 책상에 앉아 쓴 시인가보다 뜬금없이 생각한다. 그녀는 옥탑 방에 산다고 한다. 개미가 들끓는 오래된 집의 옥탑에 살림을 차린 독신의 여자가 꿈꾸는 세계를 들여다보며 나는 행복해 한다.


오랫동안 시인을 동경했다. 시인의 마음, 시인의 방, 시인의 뜰, 시인의 사색은 뭔가 특별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정작 시인을 좋아하고 존경하게 되는 계기는 그 시인의 특별하지 않음에서이다. 동네 어디서든 만나는 푸근한 이웃 같은 매무시와 인사말, 낯가림을 훔쳐보고 놀라는 한편에서 안도한다. 정작 글을 쓴 시인의 의도는 그게 아닌데 내 멋대로 해석하고 결론내리고 자족하는 건지도. 그러나 누가 뭐란 들 어떠랴. 내가 산책의  내가 읽은 그 글은 온전히 내 것인데.  


시를 쓰던 친구가 생각난다. 지금도 시를 쓰는지는 모르겠다. 시상을 떠올리고 종이에 옮겨 적는 친구의 표정은 언제나 한가롭고 정감이 가득했다. 그런 친구를 보며 든 생각은, 시인은 태어나는가 보다, 참 행복한 아이구나였다. 그 무한한 상상의 세계를 보는 재능을 시샘하고 탐낸들 훔쳐올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는 동경만 하기로 했다.


삶은, 시에서 멀어졌다가도 갑자기 가까워지기를 반복한다. 시 따위가 뭐냐고 팽개치는가 하면 묵은 시집을 꺼내 읽으며 몽상에 잠긴다. 오래된 시 구절에서 번뜩이는 이치를 깨닫고 새삼 경이감에 빠지는 무지몽매한 인간의  일상이면 어떤가. 이날 이적까지 살아온 만큼 또 살아야 할 날이 까마득하고 여전히 산다는 건 억압이고 구속이며 곤궁함의 지속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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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insusun 2004-12-18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인 조은의 <벼랑에서 살다>,정말 마음에 와닿았거든요.

<인숙만필>도 읽어보고 싶네요.

조은 시인도, 황인숙 시인, 두 시인들의 시집을 읽어본 적은 한번도 없는데 산문집을 읽게 되네요.

겨울 2004-12-18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반가워요. 저도 이제 막 <벼랑에서 살다> 읽었답니다. 맘에 쏙 드는 산문들입니다.

 

 

퇴근길에 샛노랗게 익은 모과 두 알을 주웠다. 이게 어인 횡재냐면, 모과나무집 주인이 모과를 따다가 떨어뜨린 모양인데 불행히도 함몰된 갈색 상처를 입어 버려진 것. 가방에 고이 담아 와, 현관 입구의 신발장 위에 나란히 눕혀놓으니, 그 진한 향이 달디 달다. 할머니가 계실 적에는, 동네에서 적잖은 모과를 얻어다 냉장고며 방이며 가을 멋을 냈는데. 올 해는 이렇게 모과 향을 맡는다. 어지간히도 양분이 모자랐는지 크기가 내 주먹보다도 작으나, 그 향기만은 누구한테 질세라 짙고도 깊을 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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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4-11-13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파트 안 모과나무에 모과가 주렁주렁 달렸는데, 하나 따고 싶지만 차마 따지 못하고 쳐다보고만 있습니다..ㅡ.ㅜ 언젠가 경비 아저씨 안보시면 하나 슬쩍 따올까봐요.. 갑자기 모과향이 넘 그립군요..

겨울 2004-11-13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밤에 나가서 몰래 따오세요^^

잉크냄새 2004-11-14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모과향 맡은지 꽤 오래된것 같네요. 그 진한 향기가 그립습니다.

stella.K 2004-11-19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과차 먹어 본지가 언젠지 모르겠네요. 그 향기 그립네요.^^

겨울 2004-11-20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사는 동네엔 유난히 모과나무가 많아요. 노점에서 파는 푸릇한 게 아닌 샛노란 모과가 참 탐스럽답니다.^^
 

 

아침, 가로수 길을 따라 걷노라면 콧노래가 절로 난다. 노란 은행잎이 이불처럼 깔린 길에 빗자루가 지나간 흔적이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쁘던지. 매일 아침마다 청소를 하시던 분끼리 암묵적인 약속이라도 있었던 걸까. 소복소복 쌓인 은행잎을 보는 일이 이렇게 행복하다는 거, 모른다면 바보지. 동네 어귀뿐만이 아니다. 낡은 주공아파트를 둘러싼 넙적한 플라타너스나무도 오색의 이파리를 마구마구 흩뿌리는데 비에 젖어 촉촉한 그것이 제멋대로 굴러다니는 모양이 그지없이 좋다. 계절의 색과 냄새와 형태를 만끽하며 일터로 가는 이런 날들은 비록 종교는 없지만 신의 축복 같다.


오늘은 추위가 제법 매서웠다. 준비성은 철저해서 두툼한 스웨터를 꺼내 입고 마스크를 쓰고 집을 나서니 차가움이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였지만, 얇은 옷을 입고 파랗게 질린 여학생들을 보니 잔소리가 마구 쏟아지려 했다. 아이들을 보고 옷 좀 따뜻하게 입으라는 말을 무심코 하다보면 꼭 엄마가 된 것 같아서 무안할 때가 있다. 확실히 십대들은 무엇에서건 겁이 없다. 아주 기본적인 예의, 고운 말씨, 웃어른에 대한 공경 따위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듣기에도 생경한 욕설을 거침없이 뱉는 걸 보면 어이가 없어 실소가 나올 지경이다. 그러나 절대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안 된다. 나무라는 방법도 쿨하게, 직설화법으로 한 방에 쏴야한다. 자라고, 배우고, 느끼고, 모방하고 결론내리는 속도도 엄청나게 빠른 요즘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거기에 내 자리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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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4-11-13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는 제가 있는 곳도 은행잎을 치우지 않아서 꽤 기분이 좋았답니다. 예전에는 미리 작대기로 털어서까지 치워버리곤 했는데...

겨울 2004-11-13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치우지말자는 약속을 한 것 같죠? 언뜻 어수선한 느낌도 나지만 이리저리 날리는 잎새들의 정취가 한가롭고, 찬바람이 던지는 스산함을 덮어주네요. 그리고 저희집 마당에도 감나무잎이 아우성을 칩니다. 마당 안의 것은 상관이 없는데 대문 밖으로 날리는 것들은 앞집이나 옆집에 민폐라서 밤마다 비질을 합니다^^
 

 

일본식 전통 술을 빚는 양조장집 딸내미 나츠코의 파란만장한 분투기를 그린 이 만화에서 내 혼을 빼앗아 간 건 술에 관한 집념이나 애정이 아닌 농사꾼들의 농사짓는 이야기다. 전통 술의 원료인 쌀에서부터 최고의 술이 만들어진다는 신념아래 나츠코가 배워가는 농사짓는 법과 농부의 마음, 결국에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과정은 바로 이 시대의 내가 풀지 못하고 있는 숙제인 것이다. 먼 미래의 후손에게 물려줄 유산인 비옥한 땅을 과도한 농약살포로 산성화시켜 황폐케 하는 현재의 농사법의 부조리함을 성토하는 만화속의 인물을 통해서 가슴 먹먹한 비애에 빠져들었다. 물론 일부에서 유기농을 실현하고 있으나 아직도 멀었다. 농업에 미래는 없다는 패배주의적 사고가 팽배했을 뿐이다. 2차 쌀 시장 개방을 앞두고 연일 시끄러운 가운데서도 누구도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사용하고 있는 농약을 폐기처분하고 땅을 살리자고, 그 땅에 우리의 미래가 걸려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적은 양이라도 인간에게 이로운 건강한 쌀을 생산하면 높은 가격에 수매하겠다는 약속을 제시하지 못한다. 이런 생각에 젖는 나는 어쩔 수 없는 농사꾼의 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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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4-11-11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을 빚기 위해 쌀부터 재배하는 나츠코의 집념과 노력이 대단했던 작품이죠.. 나츠코의 할머니가 주인공인 명가의 술 2부도 있습니다. 보셨나요?

저는 저 책을 본 후로 전통주만 찾아서 먹기도 했습니다..^^;;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맛을 음미해가며요..ㅎㅎ

변화란건 갑작스럽게 일어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유기농을 찾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거기에 따라 점점 농약 사용이 줄어들고.. 깨달음이 너무 늦지 않기만을 바랄뿐입니다..


겨울 2004-11-12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2부는 읽지 못했지만, 꼭 읽어볼 생각입니다. 유기농에 대해서는 이렇게 생각만하고 화만 낼 뿐 무엇하나 능동적으로 개선할 의지가 없는 나부터 문제가 큽니다. 돌아가 살 곳은 거기라고 생각은 하지만 농사를 짓겠다는 각오는 없으니까요.
 

 

알라딘이 개편으로 오락가락 하는 동안 나는 죽도록 앓았다. 날 잡아 농사일을 돕는답시고 일요일 하루 새벽부터 저녁까지 막노동을 한 결과다. 뭐, 처음부터 몸살이 날 각오는 단단히 하였지만 정작 앓아누우니 딱 죽을 것 같았다. 여름, 가을에 걸쳐 그 힘든 노동을 하시는 부모님 앞에서 주름을 잡을 수도 없고 설마 죽기야 하겠냐고 큰소리 탕탕 쳤는데, 역시나 몸은 정직하다. 팔과 다리에 알이 밴 것은 물론이고 목과 가슴까지 욱신거린다. 하도 호되게 앓아서 살아있다는 게 이렇게 좋은 줄 모를 정도다.


성큼 다가온 겨울의 느낌에 몸은 움츠러들지만 마음은 꽝꽝 언 호수처럼 고요한 것이, 이럴 때 떠오르는 것은 한적한 산사다. 들리는 건 바람소리, 들짐승과 벌레소리가 전부인 깊고 깊은 산 속의 작은 절. 원하지 않아도 사람에 치이고 치이는 생활이 견디기 어려운 순간에 떠나는 일종의 몽상이지만 심신을 다스리는 데 큰 힘이 된다. 지금은 몸이 아팠던 탓으로 맘이 약해져 있어 상상하는 것만으로 만족감이 차오른다. 여행을 동경하나 쉬이 떠나지 못하는 내가 즐기는 이를테면 영혼의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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