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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환갑을 넘기기 힘들어 지게 되는 걸까? 아니면 70세까지도 여전히 노동을 하고 있어야 할까. 불확실성은 너무 크고 두려움은 점점 커져만 간다. ........실업에 대한 두려움, 오존층 구멍에 대한 두려움, 기후재난에 대한 두려움, 주택임대료 인상에 대한 두려움, 테러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 등등. 우리가 우려하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가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미래상으로만 극복할 수 있다. (165-166)


소비하는 인간은 이전의 어느 세대도 누리지 못한 과잉 상태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언제나 결핍을 느끼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을 즐길 수가 없고,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중요한 것은 노동! 중요한 것은 통장의 잔고가 늘어나는 것! 중요한 것은 시장이 제공하는 신형 전자고철덩이, 유행이라는 이름의 의상 조각, 제대로 달려 볼 수도 없는 더 빠른 자동차! 더 많은 도취와 더 빠른 소비!  (173)


오늘날 사적인 영역에서 주로 여성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일에 대해 사회는 어떠한 보상도 주지 않고 이익을 본다. 아이를 돌보는 일이나 노인이나 환자를 보살피는 일, 그리고 가사노동의 가치는 국민경제지수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경제학의 고려는 임금노동에만 고착되어 있다. 사장이 자신의 비서와 결혼을 하면 국민 총생산은 감소한다. 왜냐하면 비서는, 말하자면 더 이상 노동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장이 자동차 사고를 일으키면, 국민 총생산은 올라간다. 왜냐하면 수리 공장에서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렇게 계산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경제적이라는 것이다.


독자 여러분이 이 책을 옆에다 놓고 잠자리에 들거나 산보를 가면, 국민 총생산에는 좋은 일이 아니다. 그 대신 심리 치료약을 먹거나 비행기 여행을 통해 환경에 부담을 주면, 여러분은 국민 총생산 증가에 기여하게 된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살기 위해서 일하는가, 일하기 위해서 사는가? 우리는 미래의 노동이 어떠해야 하는가와 관련하여 우리의 사고를 전환할 필요가 있다. (176)


고민하고 또 고민할 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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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네 집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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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으며 <가지 않은 길>이란 프로스트의 시를 떠올렸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과 그리움, 환상을 한 번이라도 품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마는, 작가는 선택에서 제외된 길을 되짚어 올라가 봄으로써 미완의 첫사랑을 완성시킨다. 그런 일이 실제로 가능할 것이냐는 의문은 중요하지 않았다. 노련하고도 노련한 작가의 솜씨는 재미라고는 도통 없을 법한 이야기를 맛있게도 써내려 가니까.


‘나목’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오만과 몽상’ 등의 초창기 적 소설들을 20대에는 나오는 족족 사서 보았다. 왜였을까. 강렬한 인상을 남길 만한 작품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소설이라면 무조건 읽던 시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읽은 게 산문집 ‘왜 나는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였다. 읽노라면 공감을 하지만 지루해서 몇 번을 쉬었다 가는, 내 세대와는 거리가 먼 얘기들이라고 단정을 해서, 언젠가부터 책꽂이에서 그녀의 소설을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는 변명 아닌 변명을 굳이 하는 이유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고 청산유수와도 같은 이야기가 막힘없이 흘러가는 이 소설은 새로울 것 없는 과거를 거슬러 올라간다. 어떤 세대에게는 분명 감동과 살가움을 던져 주었을 풍경과 기억들이 여전히 낯설고도 멀다. 그래서 이야기를 읽지만 감정들이 춤을 추지는 않는다. 오히려 소설 자체보다도 오래전에 기억하던 작가의 새로운 책을 만났다는 기쁨, 날 때부터 소설가로 살아가도록 태어난 사람이라는 부러움과 동경, 주름 깊은 작가의 평화로운 얼굴에서 휴식을 얻어간다.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그 남자의 어머니였다. 그 남자가 입던 런닝구와 빤쓰를 주워 입고 행복해하는 노파를 보며 화가 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그것은 가슴이 저미는 감동보다는 외면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질기 디 질긴 정의 굴레였다. 그 남자의 철없는 패악과 냉대를 감수하고 또 감수하는 늙은 노모를 보면서, 아들내미의 밥상에 맛난 밥과 반찬을 올리는 것을 낙으로 여기는 시어머니를 보면서, 양색시 노릇으로 동생들을 먹여 살린 춘희를 보면서, 희생이란 얼마나 일방적인 것인가를 새삼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 페이지의 다음 글이 참 좋았다. '우리의 결별은 그것으로 족했다.' 첫사랑의 남자를 향한 그 단호함이 소설 읽기를 끝낸 내 마음과 닮아서였나. 


........ 우리엄마 너무 말랐더라. 그 남자가 말끝을 흐렸다. 울고 있었다. 점점 더 심하게 흐느끼면서 볼을 타고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나도 애끓는 마음을 참을 수 없어 그 남자를 안았다. 그 남자는 무너지듯 안겨왔다. 우리의 포옹은 내가 꿈꾸던 포옹하고도 욕망하던 포옹하고도 달랐다. 우리의 포옹은 물처럼 담담하고 완벽했다. 우리의 결별은 그것으로 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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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02 2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겨울 2005-05-02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감사! 고쳤어요. ^^

프랜치스 2005-05-04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땡스투를...^^

겨울 2005-05-04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랜치스님, 반갑습니다. ^^
 

 

드디어, 머리카락을 잘랐다. 계절 탓인지, 기분 탓인지 딱히 길다고 말할 수 없는 머리가 무겁고 거추장스럽고 신경에 거슬려 인상을 푹푹 쓰다가, 드디어, 실행에 옮겼다.


나는 미용실이란 일상적이고 사적인 공간이 부담스럽다. 대부분의 미용사들은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하고 반드시 그래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배려를 가장한 내키지 않은 질문들을 던지는데, 하루 일과를 끝내고 들린 그곳에서의 수다가 내게 즐거울 리가 없다. 종일 이런저런 말들로 오염된 생각과 머리를 쉬기 위해 눈을 감고 침묵을 유지하기가 좀처럼 요원하다.


길었던 머리를 짧게 자른 후, 대여섯 군데의 미용실을 이용했다. 그 중, 가장 솜씨가 일품이었던 남자미용사가 가게 이전을 한 후로, 좀처럼 마음에 드는 곳을 찾지 못하고 방황을 했다. 빠르고 조용한 곳이라는 조건에 맞춰 대충 자르다보니, 미용실에 가는 것이 더 고역으로 느껴져 하루 이틀 미루다보면 ‘머리를 자르는’ 일이 해치울 숙제로 남아서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된다. 만나는 사람마다, 내 머리 자를 때 됐지? 라고 묻는 건 예사고, 겨우 시간을 내서 들렀다가 기다리는 손님이 있을라치면 대기시간을 참지 못해 뛰쳐나오고, 그러다가 결국엔 또 다른 미용실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바람이 제법 차다는 생각을 하며 평소에 늘 다니던 길이 아닌 엉뚱한 골목으로 들어간 오늘, 크지도 세련되지도 않은 작은 미용실을 발견했다. 남자손님의 머리를 자르고 있는 나이 지긋한 중년의 미용사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여기다, 싶어서 불쑥 들어갔다. 그리고 평소와 달리 가방에서 책을 꺼내 읽으며 느긋하게 기다렸다.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손님과 미용사의 대화에서 상당히 오랜 단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말끔하게 생긴 청년의 인상도 좋고, 짧은 머리에 까무잡잡한 얼굴의 미용사도 맘에 들고, 책도 술술 읽혀서 기다리는 30여분의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몰랐다.


길게 자를까, 짧게 자를까를 결정하지 못하고 의자에 앉았는데, 짧은 머리가 잘 어울린다는 그녀의 한마디에 시원하게 잘라달라고 주문했다. 대책 없이 시원하게라니, 그럼에도 그녀는 망설임 없이 삭삭 가위질을 하고, 퍼머를 하지 않고도 볼륨을 넣는 법을 강의까지 곁드려 시야를 가로막고 목덜미를 누르던 이물질을 순식간에 제거해 주었다. 보통 눈을 꼭 감고 머리가 다 잘릴 때까지 기다리던 내가, 눈을 크게 뜨고 그녀의 손놀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굉장히 날렵하고 빠른 솜씨였다. 커트를 잘 치신다고 한마디 하였더니, 익히 듣는 소리라며 크게 웃으셨다. 단골들이 시간을 정해서 오는 일이 많고, 퍼머 손님보다도 남자손님이 절대적으로 많단다. 허름한 간판에 낡은 인테리어의 오래된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는 솜씨만큼 빠르게 살아오신 얘기를 풀어 놓는 그녀의 걸쭉한 입담에, 나는 오랜만에 활짝 웃을 수가 있었다. 어쩌면 다음번에는 나도 그녀처럼 시원하게 귀를 드러내는 커트를 칠 런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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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5-04-25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용실을 가야겠다고 생각한 지 몇 달이 된 저는.. 아직도 그냥 머리를 기르고 있습니다..ㅎㅎ 아~ 머리 자르고 싶다..^^

겨울 2005-04-25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맘에 쏙 드는 커트가 나와서 행복해 하고 있습니다. ^^

비로그인 2005-04-26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용실이든 이발소든.. 제발 사적인 질문들 좀 안했으면 좋겠어요. 어려서는 부모님 이름, 20살이 넘은 이후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묻는 그것들. 약간은 부담스럽지요...(--!!)

겨울 2005-04-26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구태의연한 질문들에 대꾸를 한다는 건 상당히 피곤하고 부담스러워요. 다행히 어제의 그녀는 머리 손질법 등을 친절히 설명해 주셨어요. 나중에는 잠깐 아들내미 자랑도 하시고. ^^

잉크냄새 2005-04-28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미용실 가면 " 짧게 , 빨리 " 가 주문사항입니다.
째깍 째깍 가위질 아래 있는 시간은 좀 곤혹스럽거든요.

겨울 2005-04-28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님과 미용사와의 관계는 원하지 않더라도 긴밀할 수밖에 없는 관계인데, 어지간히 눈치있는 미용사를 만나 기분좋은 휴식을 얻기란 하늘의 별따기 같아요. 짧게, 빨리 라구요, 저와 비슷하십니다.
 
해변의 카프카 (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춘미 옮김 / 문학사상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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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7년 만에 썼다는 장편소설을, 나 또한 7년 만에 그의 소설을 읽었다. 이상하게도 그의 단편집은 사거나 혹은 얻어 볼일도 생기지 않아 ‘상실의 시대’와 ‘태엽 감는 새’ 이후, 세 번째의 책인 셈이다. 파란색과 초록색의 표지와 손안에 들어오는 크지 않은 사이즈도 그렇고 서점에 갈 때마다 들었다 놨다 했던 별로 매혹적이지 못한 첫 인상을 불식시키듯, 소설은 뜨겁고도 깊다. 그래서일까? 다무라 카프카라는 15세의 소년의 이미지가 무척이나 생생히 그려진다. 자칭, 카프카라고 부르는 소년의 모험처럼 여겨지는 가출에는 현실에서의 탈출과 함께 미지의 세계라는 환상을 불러일으키는데, 그것은 그 나이의 소년 소녀라면 누구나 한번은 꿈꾸었던 것이기에 공감하게 된다. 또, 누구보다 혹독한 사춘기를 보냈던 사람이라면 더욱 카프카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다. 소설이 흘러가는 방향과는 관계없이 멋대로 소년을 응원하고 멀리 더 멀리 떠나길 기원하는 것이다.


이야기는 신비롭다. 세상과 동떨어진 별세계 같은 고무라 도서관에서 만나는 오시마상과 사에키상도 역시 마찬가지다. 여자로 태어났지만 성정체성은 남자인 도서관 사서, 오시마상은 머물 곳과 방향을 잃은 카프카의 손을 잡아 한없는 친절을 베푼다. 그는 혈우병이라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다. 어딘가 조금씩 어긋난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끼리의 만남을 통해 카프카는 한발 한발 신비로운 존재에게로 다가서는데, 그 정점에 불혹의 나이를 넘긴 도서관 관장, 사에키상이 있다. [해변의 카프카]라는 그림 속 소년을 사랑했던 15세의 소녀 사에키상과 카프카라는 이름을 가지고 찾아온 역시 15세인 소년의 만남이 우연일리는 없다. 그들의 관계맺음이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은, 이것은 어디까지나 소설이라는 단정도 있지만, 소설 속 공간이라는 환상에 깊이 빠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더구나 사에키상은 어릴 적 헤어진 카프카의 어머니일지도 모른다. 어머니 그리고 누이와 동침하는 아들이라는 아버지의 저주를 피해 달아났지만, 본능적으로 혹은 운명적으로 이끌리고 만 두 사람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살해당한다. 카프카는 어쩌면 그를 죽인 것이 자신이 아닐까 생각한다. 


카프카의 반대편에는 나카타상이라는 기기묘묘한 노인이 있다. 그는 어떤 사건으로 인해 모든 기억을 상실하고 퇴행한 이질적인 존재다. 읽기도 쓰기도 못한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고양이와 대화하는 것과 길 잃은 고양이를 주인에게 찾아주는 일이다. 그가 고양이 유괴범 ‘조니 워커’를 살해하는 과정은 너무도 필연적이라 잔혹이나 비극의 냄새 같은 건 전혀 나지 않는다. 하늘에서 개구리와 거머리가 떨어지는 사건조차도 나카타상에게는 전혀 뜻밖의 일이 아니다. 그는 고양이의 말을 알아듣는 특별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후, 나카타상이 마치 계시라도 받은 것처럼, 길을 떠나고 입구의 돌을 찾아 제자리도 돌려놓는 과정은 순례의 길처럼 경건하다. 그는 조니 워커라는 이름의 카프카의 아버지를 살해했다. 그것은 카프카에게 씌워진 저주다. 그가 열고자 하는 문은 카프카의 굴레를 벗기는 도구와도 같다. 저 세계와 이 세계를 연결하는 그 문으로 여행을 끝내려는 사람들이 떠나간다. 카프카도 그 통로에 서서 15세의 소녀인 사에키상과 이별한다. 그리고 묵묵히 돌아 나온다.


이후의 카프카가 어떻게 살아갈 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지극히 평범한 16세가 되고, 17세가 될 지도 모른다. 그는 15세의 자신이 떠났던 여행과 만남과 사랑을 까마득히 잊고, 그저 그렇고 그런 샐러리맨이 되어 지친 몸을 누이고 깊은 잠에 빠질 것이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15세의 소년이 15세의 소녀를 만나는 달콤한 꿈을 꾸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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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그네 오늘의 일본문학 2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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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환자건 정신과 전문의 이라부 앞에만 서면 우악스런 손아귀와 뇌쇄적인 외모의 간호사의 포로가 되어 무장해제 당한다. 그리고 다짜고짜 그 병의 특효약이라며 엄청나게 아픈 주사가 한 방. 얼이 빠져 있다가 뒤늦게 항의를 하지만, 이런 치료도 있는 거지, 뭘. 하고 시치미를 뚝 뗀다. 죽을상을 하고 병원 문을 들어섰던 환자들이 조만간 환한 웃음으로 나가는 것은 물론이다. ‘이라부 종합병원’에는 하마처럼 생긴 괴짜 의사가 있다.   


살면서 부닥치는 절박한 순간들이 있다. 요행히 피해 갈 수도 있지만 정면충돌로 만신창이가 되기도 한다. 눈에 띄는 육체의 상처는 보이는 병원 어디로든 달려가 치료받지만 마음의 병은 교묘하게 감추기에 바쁜 게 현대인이다. 가족, 친구, 연인에게도 차마 말할 수 없는 신경증, 강박증, 피해망상, 절망감을 주사 한 방으로 끝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사는 어딘가에 이라부 이치로 같은 정신과 의사가 있다면 지금이라도 한달음에 달려가련만, 아쉽게도 이것은 픽션이다.


이라부의 치료법은 비타민 주사 한 방과 허를 찌르는 몇 마디의 질문과 대답이 전부다. 그리고 그 속에는 묘한 해법이 숨어있다. 아니, 환자의 관점과 입장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고 체험하고 내키는 대로 무지막지하게 돌진하는 게 이라부의 치료법인 셈이다. 문제발견, 돌진, 충돌. 사람은 누구나 거기서 거기인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 선단공포증에 시달리는 야쿠자 세이지는 적대적 관계인 야쿠자 요시야스가 단도를 품지 않으면 마음의 안정을 잃는 의존증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그간의 불안증을 훌훌 털어낸다. 인간은 누구나 고슴도치라는 것을, 털을 곤두세우고 있지만 스스로를 방어하는 나약한 몸부림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공중그네에서 추락하는 공중그네의 달인 고헤이와 3루수로서 1루에의 송구에 실패하는 신이치의 병은 결국 나 아닌 타인을 얼마나 신뢰하느냐의 문제였다. 알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라서 허탈하게 웃지만 그 과정은 미로 찾기처럼 험난(?)하였으니 배꼽을 쥐고 깔깔 웃으며 그들의 여정을 바라보지만 가슴 한쪽이 짜한 것도 사실이다. 대머리 장인의 가발을 벗기지 못해 강박증에 시달리는 다쓰로의 비극도 마찬가지다. 가발은 권위와 체면이라는 허울이고 그것을 벗기는 상상을 함으로써 다쓰로는 시류에 편승한 스스로의 비겁을 단죄한다. 벌거벗은 임금님을 향해 아무도 손가락질을 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와하하 웃는 천진한 어린아이와도 같이 이라부의 손에 의해 장인의 가발이 벗겨지는 찰나, 다쓰로는 웃고 싶기도 하고 울고 싶기도 한 묘한 감정에 빠진다.


그렇다. 소설은 그렇게 웃음 한편으로 울고 싶은 기분이 들게 한다. 세상은 위로하고 위로받으며 어울려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뻔한 진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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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4-20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중그네를 타고 싶어요..;;;

겨울 2005-04-20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상만 해도 멀미납니다.

잉크냄새 2005-04-28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특한 소설일것 같네요.
아, 이 병원 약도를 알게되면 저에게도 보여주시길...^^

겨울 2005-04-28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약도 저도 궁금해요. ^^ 이 소설을 사면 요시다 슈이치의 '퍼레이드'를 공짜로 주는데, 역시나 묘한 코믹 잔혹극 같은 소설입니다. 이런 류의 가볍고 얇은 일본 소설들이 꽤나 많이 번역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