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공식적인 첫 눈이 소복하게 쌓인 감이파리들 위에 내렸다. 건드리지 않으면 녹지 않을 딱 그만큼. 커다란 대나무 빗자루를 들고(누군가 사다 놨는데 제법 쏠쏠하다) 쓱싹쓱싹 마당을 쓸면서 진짜 겨울이 왔음을 실감했다.


그리고 혀에 돋은 바늘. 그렇게 주의에 주의를 기울였건만 이놈의 입병은 낫을 만하면 돋아나고 낫을 만하면 생겨서 신경을 곤두세우게 한다. 지나칠 정도로 펑펑 놀고 있고만, 어째서, 어째서.


난로에서는 물이 내도록 끓는다. 가스 불에 올린 물은 끓을 새라 아까울 새라 신경을 곤두세우지만, 난로 위의 주전자는 뜨거운 김을 퐁퐁 품어 내거나 말거나. 이 난로는 회심작이다. 주변의 우려와는 달리 외풍 센 집안 공기를 한풀 꺾어 놓고 이런저런 용도로 잘 써먹고 있다. 시골에서 공수해온 고구마를 반으로 갈라 올려놓고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어 구워 먹기에 딱. 냉동실에서 묵은 떡들을 찾아내 굽는 재미도 괜찮다. 맛은 그저 그렇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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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12-02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눈이 왔군요. 난로의 온기를 상상해봅니다. 따뜻하네요. 고구마도 굽고 떡도 굽고.... 혓바늘이 돋아 불편하시겠어요. 내일도 편안한 시간 보내세요^^

겨울 2006-12-03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진짜 겨울이 왔어요.^^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면 마음이 막 두근거려요. 이상하죠? 혜경님, 건강하시고, 따뜻한 날들 되시기를.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5
다나베 세이코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원작이 있는 영화를 보는 재미는 남다르다. 대개는 원작이 너무 좋아서 영화를 찾아보지만 영화를 본 뒤에야 원작의 존재를 발견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후자의 경우는 전자보다 원작에 대한 호기심이 반감한다. 궁금하긴 해도 영화가 좋은 걸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 책,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도 같은 예다. 멋진 영화에 매혹되었지만 그 원작이 짧은 단편이라는 사실에 안보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왜 그랬을까. 영화에 대해 품었던 환상이 깨질까봐서? 서점에 가서도 몇 번이나 들었다 놨다 하면서, 사실은 표지 디자인이 맘에 들었으면서도 구입은 못했다. 그런데 우연찮게 ‘막다른 골목에 사는 남자’를 끼워주는 행사에서 망설임 없이 덥석 손을 뻗었다. ‘막다른 골목에 사는 남자’가 읽고 싶었던 게 첫째 이유. 덤이니까 밑져야 본전이라는 계산속이 두 번째.


‘남자들은 머핀을 싫어해’라는 맨 마지막에 있는 단편부터 읽었다. 이상하게 단편들은 처음엔 좋다가 나중에는 흥미도 떨어지고 대충 읽어지니까 아예 처음부터 끝부분부터 읽는 게 좋다. 독특했다. 별장에서 일중독자 남자를 기다리는 미미. 이런저런 불평을 하면서도 그 상황을 즐기는 여자. 마흔두 살 남자의 긴급 구조대원 타입의 섬세한 섹스어필에 홀딱 빠져든 그녀는 서른한 살이다. 짐은 아무것도 없었다. 화장품과 옷 몇 벌, 시부사와 다츠히코의 책만 들고, 아, 그리고 아주 큼지막한 물건, 시몬을 옆에 끼고 나는 멋진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별장을 나섰다. 비 내리는 뿌연 바다에 배들이 오가고 있었다. (270쪽) 결국 미미는 기다리던 남자 렌을 버리고 남자의 조카 시몬과 함께 별장을 떠난다는 얘기다. 보기에 그럴듯하지만 좋아하지는 않는 머핀을 만들었던 이유는 자기만족감 때문이었다는 깨달음과 함께.


우유부단한 남자와의 담담한 이별을 그린 ‘사로잡혀서’의 여주인공 리에 이야기는 더 쇼킹하다. 8년의 결혼 생활에 아이가 없는 미노루와 리에 부부. 어느 날, 거래처에서 만난 여자가 임신을 했다는 폭탄을 떨군 미노루는 그 와중에도 배가 고프다고 칭얼댄다. 결혼하지 못하면 죽어버리겠다는 맹한 여자와 가정이란 올가미에 생포되어 사로잡혀 가면서도 미련스럽게 뒤를 돌아보는 남자를 리에는 건조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얼마동안은 방광염이 도져도 부를 사람이 없다는 게 서글플지 모르지만, 리에는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졌음을 실감했다........자유로워진 몸에는 어떤 집착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240쪽)


완전무결한 행복은 죽음 그 자체라고 생각하는, 조제도 그런 여자다.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할머니마저 돌아가시자 혼자가 된 조제는 우연히 들를 츠네오를 필사적으로 불러 세워 꿈꾸던 것을 이룬다. 동물원에 호랑이를 만나러가고, 바다를 보고, 수족관이 있는 여관에 머무는 것들이다. 조제에게 츠네오는 일생에 단 한번 오는 기회였다. 어쩌면 바짝 마른 종이인형처럼 살았을 조제지만 츠네오를 통해 세상 밖으로의 모험을 시작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우리는 죽은 거야, 죽은 존재가 된 거야. 나머지는 그냥 덤으로 살면 된다.


각 이야기마다 나오는 여주인공은 다르지만 닮았다. 생에 초연하고 달관한 듯, 집착, 불안, 질투, 소유, 이기심들로부터 자유롭다. 그들의 삶은 강하면서도 유연하다. 결국에는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수의 여자들이 꿈꾸고 원하는 것, 그녀들의 내면과 심리를 이렇게 들여다보는 것, 새롭다. 이 소설, 이 작가, 다나베 세이코를 이렇게 뒤늦게 알게 돼서 미안하지만 더 늦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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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이름과 소재에 혹해서 구입했지만 읽는 내내 ‘왜 내가 이걸 읽고 있을까’라는 의문이 계속 들었다. 일단은 소설이라서 싫건 좋건 끝을 보았지만, 감동을 쥐어짜는 이야기의 미덕만은 박수를 쳐야겠다. 낯선 상황이지만 천만분의 일의 확률로 일어날 수도 있다는 가정 하에 멋지다는 감탄사를 뿌리면서 몰입에 몰입의 노력을 기울이다가도 결국은 허구일 수밖에 없잖은가, 하고 맥이 탁 풀려버리지만, 거기까지 끌어당기는 중력만은 역시 무시할 수가 없다. 또 그것이 그들 소설의 결정적인 미덕일 것이다.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듯 태어난 하루에 대한 아버지, 어머니, 형의 사랑은 가히 절대적이다. 강간범의 자식을 낳을 것인가, 말 것인가의 기로에서 아버지는 신에게 묻는다. 신의 대답은. 너 혼자 생각해. 하루는 그렇게 태어났다. 그게 그들의 선택이었다. 어떤 의문도 회의도 불신도 망설임도 없이, 한 치의 티끌 같은 거리낌도 없이 하루라는 생명을 존재를 사랑하고 존중하기로.   


이 소설은 읽는 이가 깊은 생각과 고뇌를 할 틈을 주지 않는다. 그냥 무조건 이런 결정을 내렸으니 받아들여. 한다. 교훈과 감동을 주기 위해 작정한 우화에 가깝다. 재미와는 다른 웃긴 이야기다. 그렇다고 웃음을 유발하지는 않는다. 우습지만 너무 진지하다. 강간범이 죽어 마땅한 인간이란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의 비정상에 가까운 윤리의식을 들여다보면 어이가 없다. 그럼에도 그가 하루의 친부라는 사실은 신조차도 어찌할 수가 없다. 출생의 가혹한 비밀을 끌어안고 결벽증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는 하루의 극단적인 선택에는 ‘유전자’라는 천형을 짊어진 자의 고통이 배어있다. 슬픈 중력 삐에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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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냉장고에 들어있는 두 병의 포도잼은 지난여름에 동생이 만들어 준 거다. 처음 몇 번 식빵을 구워 맛나게 먹은 이후로 잊혀졌다. 얼마 전, 시골에서 손수 농사지은 생강을 한 포대 받았다. 일부는 손가락이 아리도록 까고 물기를 없앤 후 얇게 썰어 냉동실로 직행했고, 일부는 꿀에 재놓고, 또 일부는 설탕과 생강을 일대 일로 다려서 생강차를 만들었다. 인터넷을 뒤져 생강으로 할 수 있는, 먹을 수 있는 방법을 열심히 찾아 낸 결과다. 그렇게 만든 생강차, 애지중지 하면서 먹는 걸 본 동생 왈, ‘남이 준 거면 그렇게 맛나지 않지’ 한다. 아, 그랬던 것이다. 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만든 결과물이라서 기특한 것이다. 동생은 제가 만든 포도잼이 홀대 당하는 것이 조금은 서운했음이다. 그러고 보니 포도잼 맛있다는 말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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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6-11-21 1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에서 잼을 만들었으면 되게 맛날텐데....^^
렌지에 살짝 데워 따뜻하게 먹어도 맛있다고 하더라구요..
그나저나 생강 한 포대라.....! ^^;;;;;

겨울 2006-11-21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렌지에 데워서요?
생강하면 기겁을 하고 뱉어냈던 기억뿐인데, 이번에 생강이랑 씨름하면서 아주 정다운 사이가 됐습니다. 그 냄새도 자꾸 맡으니 달콤해지더라는.

blowup 2006-11-22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겨울날의 생강 냄새는 매콤하면서도 달콤해요.
하루 종일 생강차를 끓이고 있으면 집안 공기가 전통찻집 같겠구나, 생각했어요.

겨울 2006-11-23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나무님.^^
그냥 생강이 아니라 겨울날의 생강이라서 달콤했던 거군요. 전 겨울이란 단어도 좋고 계절도 좋은데 더불어 생강도 좋아하는 목록에 추가해야 할 것 같아요.
 

 

늘 가져다주는 것만 날름날름 받아먹다가 내 생애 처음 동치미라는 걸 담가봤다. 첫 실험 작은 한 달 전이었고 엄청 어설프고 맛도 싱겁고 이상하기만 했다. 그리고 두 번째, 경험이 생겼다고 양념들을 딱 두 배씩 넣었고, 특별히 배도 넣어 주고, 지난번엔 없던 삭힌 고추도 조금 넣었더니, 거의 환상적인 맛이 나왔다. 동네방네 자랑하면서 어깨에 힘을 주고,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다고 엄마에게도 나눠주고. 드디어 세 번째 시도. 넣는다고 다 넣었는데 아무리 해도 두 번째와 같은 맛이 나오질 않는 것이다. 동생한테도 나눠 주겠다고 큰소리 펑펑 쳐 놨는데.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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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6-11-20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전 동치미하면 떠오르는 것이 먹는다는 의미보다는 언 손에서 얼음을 빼내기 위해 손을 담그고 있던 누이들의 모습입니다.

겨울 2006-11-21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려선 동치미가 싫었죠. 담그는 것도 꺼내오는 것도 늘 칼바람 쌩쌩 부는 그런 느낌이라서. 잉크냄새님의 누이도 그랬을 것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