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더기 - 바깥의 소설 22
샤를르 쥘리에 지음, 이기언 옮김 / 현대문학 / 2003년 1월
평점 :
품절


한 손에 딱 맞게 들어오는 작은 책이다.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감싸고 있는 남자의 웅크린 모습과 그것을 바라보는 아마도 어머니인 듯한 여인의 지친 표정이 인상적인 표지 그림만으로도 이 책을 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결코 가볍게 즐겁게 읽히지 않을 거라고, 서른여덟 살에 정신병원에서 굶어죽은 여자를 만나려면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들었다.

고통스런 타인의 삶을 엿보기를 즐긴다면 그런 악취미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관심과 끌림을 배제하지 못하는 것은 책읽기의 미덕 때문. 작가의 가족사를 다루었지만 '누더기'라는 제목에 갇힌 이것은 어쨌거나 소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잘 쓰여진 그래서 그 감동과 여운이 배가 되는 멋진 소설이다. 관습과 가난에 속박당해 자유로이 하늘을 날아보지도 못하고 날개를 꺾인 가엾은 여인의 비참함이 어떻게 핏덩이였던 아들의 영혼에 각인되었는지 찾으려는 의도가 없다면 거짓말이다. 그래서일까,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서도 어머니를 향한 아들의 그리움이 슬픔이 묻어나는 것은? 이것은 아주 천천히 낭독하듯이, 누군가에게 속삭이듯이 그렇게 읽혀야 한다. 얇지만 최대한 느리게, 무겁게, 그렇게.

생각컨데 가난이라는 단어가 이제는 낯설다. 남들보다 조금 덜 가졌다는 표현은 쉽게 써도 가난해서 배우지못했다는 말은 오래된 소설이나 유행가 가사에서나 존재한다. 이런 시골 마을, 눈을 뜨고 다시 감을 때까지 끊임없이 일하고 동생을 돌보고 학교에 가서 배우거나 책을 읽는 것은 더구나 사치가 되는 시절에 공감할 세대는 어쩌면 내가 마지막이 아닐까. 그게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출구가 없는 현실에 갇혀있다고 생각을 멈추고 꿈을 꾸지 않을 순 없다. 마지막까지, 결국 너널너덜한 누더기기 되도록, 몸과 마음이 찢어지고 찢어져 그 형체를 알아보지 못하게 될 때까지 참고 자신을 포기하지 못한 댓가로, 그녀는 정신병동에 끌려가 창살 속에 갇히고 만다. 

 당신을 부활시키고자 합니다. 당신을 재창조하고자 합니다. 당신에게 말하고자 합니다. 당신을 감싸주던 빛, 하지만 어느 날, 당신과 내겐 불행하게도, 산산이 부서져버린 그 빛을 생각하며, 당신이 살았던 그 세월과 그 겨울들을 따라가며, 당신에게 말하고자 합니다. 어머니! 당신을 무덤에 밀어넣은 이 아이를 용서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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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나는 꽤나 식탐이 강한 아이였다. 넉넉하지 못한 살림이라 간식이란 듣도 보도 못하고 하루 두 끼를 먹으면 잘먹었다 하던 시절이라 먹거리에 대한 욕심이 강하다한들 양껏 먹은 기억도 물론 없지만.

동네 구멍가게 앞을 지나는 일이 고역이지만 그렇다고 부모님을 졸라 먹을 것을 사달라 떼를 쓰던 철부지도 아닌지라 그져 꾹꾹 참고 또 참기만 했던 것 같다. 또래의 아이들이 10원, 20원 짜리 군것질을 하는 걸 부러움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만 보는 자존심 강한 여자애라니, 지금 생각해도 가엾다.

도시락이 없는 점심시간의 곤혹스러움을 피해 교사 주변을 배회해 본 사람이 아니면 굶주림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것이다. 하긴 요즘 시대에 굶주림이 어쩌구 하는 것이 어불성설인가.

결핍에는 반동으로 그것을 채우려는 무의식적인 욕구가 따르는데, 하나만 있어도 충분하건만 후일을 위해 꼭 두 개 이상을 챙기려는 의지가 그것이다. 저장이나 저축이 나쁜 건 아니지만 굳이 지금이 아니어도 되는 욕심을 부리는 스스로가 구차하다 느끼는 게 문제다.

그 시절, 우연찮게 읽게 된 이 책,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가 없었다면 난 여전히 유년의 결핍을 상처처럼 끌어안고 있지 않을까.  긴긴 노동수용소의 하루를 이반 데니소비치라는 비루하고 약한 인간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려낸 소설은 적당한 유머와 소소한 에피소드로 짜여져 무척 재밌게 읽힌다. 일생보다 긴 딱 하루, 한 끼의 형편없는 식사를 사수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비굴의 극치를 달리는 모습은 눈물겹다. 건더기도 없는 묽은 죽 한 그릇을 향한 이반 데니소비치의 기대와 실망과 체념을, 당연한 죄수의 몫으로 읽고 지나칠 수도 있다.

그러나 어쩐일인지 내겐, 그것이 번쩍이는 충격이었다.  최소한의 배고픔을 채우는 것 이외에는 먹거리에 대한 일체의 욕심을 버리자는 다짐 아닌 다짐을 한 계기다.  수도승이 아닌 다음에야 완벽히 식탐을 버릴 수는 없으나 살아오는 내내 그것은 잣대가 되어주었다.  먹을 거리를 다스리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각종 다이어트 열풍이 몰아치는 이즈음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어찌해서 입맛은 건조하기 짝이없고 미식의 미자와 요리의 요자도 모르는 여자가 되었지만 이 식성은 죽을 날까지 변하지는 않을 것 같다.

한 끼의 기름진 식사를 마주하고 굶어 죽어가는 아이를 노리는 독수리가 있는 흑백사진을 떠올리는 것은 지나친 결벽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마지막 가는 길에 굶어죽기를 선택한 스콧 니어링을 따라 그렇게 죽기를 바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선택.  한 권의 책의 의미는 이렇게 삶과 죽음을 아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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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4-04-26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스콧 니어링이 죽음에 이르러 먹을것을 끊고 자신을 구성하던 유기체들의 떠나감을 자유로이 해준 그의 마지막 삶의 부분을 몇번이나 반복해서 읽었습니다. 죽음을 또 다른 삶의 연장선으로 바라본 그의 관조적 삶의 태도가 무척이나 존경스러웠죠.

프레이야 2004-04-26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참 인상깊게 읽었어요. 그리고 한 끼 식사앞에서 진지한 눈빛을 쏘고 있는 독수리와 새까맣게 타들어가듯 마른 몸으로 웅크리고 있는 여아의 사진, 아주 충격적이었죠. 목숨이란 건 그렇게 질기고 염증 나는 것인가봐요. 익숙해져서 뭐가뭔지도 모르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겨울 2004-04-26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가 지난 뒤에 내가 쓴 글을 읽으면 이게 뭐냐 싶으리만큼 엉망인 경우가 많다. 뒤죽박죽 일관성도 없고 창피할 만큼 감상적이다. 소시적 국어시간, 네 글은 절대 잘 쓴 글 아닌데... 하시면서 애들 앞에서 낭독을 즐겨하신 선생님의 의도는, 그럼에도 흥미진진하더라?

stella.K 2004-04-27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쓰셨는데요. 이 책이 유명한 줄은 알고 있으면서도 한번도 읽을 생각을 못했네요.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다가 잊혀지곤 하는 책. 님의 리뷰 읽고 꼭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드네요. 님의 닉네임으로 된 책두요.^^

겨울 2004-04-27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라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른 책이 포의 '우울과 몽상'이라죠. 일단은 두껍고 무거워서 야구 방망이 대용으로(?) 좋고, 아무리 읽어도 끝이 보이지 않아서 좋고, 그 제목이 무엇보다 좋아서 제일 맘에 든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
 

노브라를 예찬 혹은 지지한다라는 기사를 우연히 읽고 인상깊어 다시 보려고 찾았으나 어디서 읽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 포기했다. 기사의 내용은 대략, <윤도현의러브레터>에 출연한 전도연의 노브라가 한동안 이슈가 되어 뜨거웠던 적이 있는데, 가슴의 절반을 드러내는 블라우스를 입은 그녀의 당당함은 오히려 칭찬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유독 우리나라는 속옷을 입었나 입지 않았나의 문제로 유명 배우, 가수들이 구설수에 오르는 일이 허다하다. 선정적인 스트립쇼를 한 것도 아니고 적절한 장소나 설정상의 노출도 도마에 오르기는 매한가지다. 노출이 전무후무한 것도 아니고 여성성과 개성을 표출하는 하나의 수단이면 또 어떻다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배우에게 몸은 상품이다. 시의 적절한 노출은 팬서비스의 일종으로 봐도 무관하지 않을까.

전도연이 출연한 당시의 사진을 찾아보니 눈부실만큼 순수하고 예쁜 전도연을 확인했을 따름이다. 기사는 <해피엔드>라는 영화를 찍었을 당시, 누구도 그 시나리오에 선뜻 하겠다고 나서지 않을 때 내가 하겠노라 나선 전도연의 결단과 용기에 큰 박수를 보냈다. 솔직히 글래머의 쭉쭉빵빵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몸매를 그토록 과감하게 드러내리라고는 누구도 예상못했다. 전도연의 벗은 몸이 이슈가 되긴 했지만 결국 연기와 연출이 괜찮았다로 흥행몰이를 한 것은 영화 속에 녹아든 평범한 주부의 모습이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다수의 사람들이 그녀의 쳐진 가슴 어쩌구 하면서 입방아를 찧은 것도 사실이다.

물론 기사의 주제는 전도연의 몸이 아니라 브래지어에 구속된 여자의 몸을 해방시키자는 것이다. 헐리우드의 여배우들이 볼품없는 가슴일지라도 거침없이 드러내고, 노브라의 자연스런 상태를 여과없이 보여줄 때 얼마나 아름답고 솔직하던가. 우리나라도 트렌드의 선두에 있는 스타들이 노브라를 주저말고 실천하기를 바란다. 제대로 된 속옷을 미착용시 몸매에 치명적인 오류가 생긴다는 등의 속옷회사들이 퍼트린 낭설에 맹목적으로 속지 말기를 바란다.

진정한 여성운동은 속옷으로부터의  해방에서 시작되어야한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속옷이 여자들에게 구속이자 억업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사람의 성격과 얼굴마냥 가슴의 모양도 각각이고 이제 시대는 개성적인 가슴으로 당당해지는 여자들을 필요로 하지 않을까. 가슴 드러내기를 주저않는 배우, 가수들에게 앞으로도 기죽거나 굴하지 말고 더 자주 속옷을 벗어 던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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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4-04-24 0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입니다. 하지만 실행하기가 어려운 현실이죠. 전 집에 오면 벗어버립니다. 작은 편인데도 하고 있으면 그렇게 가슴이 답답할 수가 없어요. 전도연의 그 모습은 저도 보았어요 귀여운 얼굴에 예쁘게 보였어요. 스캔들에서 나온 전도연의 가슴이 진짜였다면 참 예쁘던데요.^^

마태우스 2004-04-24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러길 바랍니다"라고 코멘트를 달고 싶은데, 그러면 제가 좀 이상한 놈이 되어버릴까봐... 안합니다.
 

 

현재 5권까지 나와있는 만화다. 1권이 막 나왔을 당시에는 어딘가 산만하고 주인공의 성격도 확실하지 않아 읽다가 말았는데 무진장 재밌다는 누군가의 권유로 근래에 다 읽어치웠다. 역시나 흥미로웠다. 경찰들의 정거장 일명 '라쇼몬'에 루미라는 여경찰이 등장하면서 만화는 시작되는데, 이후 그녀는 라쇼몬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서 없어서는 안 될 능력있고 용기있는 가슴 따뜻한 인물로 그려진다. 역시 경찰이었던 남편이 죽은 뒤, 남편이 이루지 못한 꿈을 위해 경찰직에 투신한 그녀에게는 요헤이라는 유치원생 아들이 있다.

이 만화의 장르는 휴먼드라마다. 다양한 색깔의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들의 가슴에는 저마다의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도사리고 있으며, 도움을 구하는 타인을 향해 손을 내밀기를 서슴치 않는다. 세상의 잣대로 볼 때는 성격파탄자에 정신이상자이고 구제불능의 삐딱한 사고체계를 가졌지만 자신들이 가진 약점과 상처를 통해 타인의 아픔과 처지를 더 깊이 이해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경찰 초년생 루미는 괴짜들의 집단 '라쇼몬'에서 사람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우고 진정한 정의가 어떻게 실현되어야 하는지를 자각한다.

가슴 찡한 감동을 거듭 받고 눈물까지 흘리고 코를 훌쩍이며 마지막 장을 덮고 나자 분발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마구 솟구쳤다. 역시 만화가 있어 세상은 살만하다. 무엇보다 여주인공 루미의 지혜와 강인함, 용기, 불굴의 의지가 감탄스러웠다. 오랜만에 만나는 근사한 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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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를 닮은 친구'에게로 시작하는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 무척 오래된 일이라 기억은 가물거리는데 사진 속의 빛바랜 얼굴은 여전히 해맑게 웃고 있다. 소녀보다는 소년같은 이미지의 그 친구와 나는 물놀이 간 개울에서 흠뻑 젖은 채로 손을 잡고 있다.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아직도 나를 기억할까.

일하고, 학교 다니고, 기숙사에 거주하는 숨막히는 생활에서 유일한 돌파구는 친구들과의 수다와 책읽기가 전부였던 시절. 어딘가 촌티가 팍팍 나는 나와는 달리 세련된 말씨와 외모로 시선을 사로잡던 그애는 말을 더듬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원하는 한 단어가 나오기까지 숨막히는 시간을 기다리는 그것은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가족이 흩어지면서 충격을 받아서 후천적으로 나타난 장애라고 했다. 교정학원에 계속 다니며 치료받으면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다고 했다는데 형편이 나빠서 치료를 중단한 상태, 더구나 집을 떠나 기숙사에 머무는 상황은 최악으로  그 장애는 천형처럼 그앨 따라다녔다.

시작은 무엇이었는지 이젠 기억나지 않는다. 만나면 시선을 돌리고 입을 다문 채 고집스럽게 다른 방향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결벽스럽게도 싫은 것과는 절대 타협하지 않는다는 요상한 원칙으로 어떤 화해나 타협의 시도도 없이 나는 그앨 몰라라했다. 학교에서는 물론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불가피하게 업무적으로 협조를 해야하는 경우에도 나는 자존심을 지키느라 전전긍긍했다. 우리의 다툼이 알려지면서 부서장에게 불려가 호되게 야단을 맞았지만 나는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둘 중에 한 사람이 시간이동을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것은 낮과 밤이 바뀌는 이치처럼 이질적인 이동으로 정서적 충격이 상당한 형벌이었다.

며칠 후 다시 불려간 자리에서 부서장으로부터 독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동은 그 친구가 하기로 했다는 소식과 함께였다. 그리고 어느날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너를 많이 좋아했어, 잘 지내고 싶었는데, 미안해. 내가 욕심이 지나쳤어. 너를 보면 가을날 학교길에 피어있는 키 큰 코스모스가 생각나. 해가 지는 저녁에 함께 걷는 꿈을 꿔. 잘 지내라.....' 장문의 편지를 읽는 내내 울었다.  그애로 인해 내가 가해자가 되고 부서장의 눈 밖에 난 것이 억울하고 분했다.  

무슨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받게 되어 난생 처음 서울엘 가게 되었을 때 그 친구는 자신의 스커트와 셔츠, 운동화 일색을 챙겨와서 예쁘게 하고 가라고 했다. 내 손을 잡아 시내 여기저기로 구경을 시켜주고 처음 맛보는 음식을 사준 것도 그녀였다. 마치 세상의 이치를 다 아는 듯 어른스럽고 의젓해서 그녀가 하는 말을 귀담아 듣고 신기해 하던 나였다. 그런데, 그녀의 무엇이 호의조차도 망각하고 매몰차게 돌아서게 했는지 도무지 기억을 짜내려해도 모르겠다. 왜 그토록 싫어했을까. 

지금 생각하니 그것은 서투르고 어설픈 연애의 일종의 아니었나 싶다. 일방적인 호의와 그것의 의도를 모르는 무지가 오해를 낳고 불쾌감을 낳고 이별을 거치는 과정. 그녀도 나도 여자였지만 충분히 그런 감정이 싹틀 여지가 많은 환경이었다. 강산이 변하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녀는 내게 있어 회한이다. 지금은, 아마도 어디선가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살지 않을까 혼자 상상을 하곤 한다. 길을 가다가 문득문득 내가 저지른 악행중에 가장 독한 것을 떠올리면 그녀의 쓸쓸했던 눈매가 생각나니, 죄를 짓긴 지었나보다. 원컨데, 다시 만날 일이 생기면 먼저 손을 덥썩 잡고서 '미안해, 용서해줘'라고 말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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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4-04-23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가슴에 잔잔한 감동을 전해주는 글이군요. 근데 제 생각에는...다시 만나도 잘 못지내지 않을까 싶은데요??? 저도 그랬거든요..

겨울 2004-04-23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도요. 뚜렷한 이유없이 싫었던 건 사고방식이나 성격의 갭이 컸기 때문일테고 만에 하나 다시 만나도 역시 그런 이유로 피했을 듯도 싶어요.

잉크냄새 2004-04-24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까지 회한으로 남아있다면 만날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만나서 '미안해, 용서해줘'라고 말해도 좋을것 같네요.
잘 지내지 못할지라도 가슴속에 남은 회한은 사라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겨울 2004-04-25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때때로, 상처가 물처럼 흐르는 것이었으면 하고 상상할 때가 있습니다. 지나친 자만과 치기로 화해하지 못하고 불가피하게 끊어진 인연인 경우 더 그러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