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를 닮은 친구'에게로 시작하는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 무척 오래된 일이라 기억은 가물거리는데 사진 속의 빛바랜 얼굴은 여전히 해맑게 웃고 있다. 소녀보다는 소년같은 이미지의 그 친구와 나는 물놀이 간 개울에서 흠뻑 젖은 채로 손을 잡고 있다.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아직도 나를 기억할까.

일하고, 학교 다니고, 기숙사에 거주하는 숨막히는 생활에서 유일한 돌파구는 친구들과의 수다와 책읽기가 전부였던 시절. 어딘가 촌티가 팍팍 나는 나와는 달리 세련된 말씨와 외모로 시선을 사로잡던 그애는 말을 더듬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원하는 한 단어가 나오기까지 숨막히는 시간을 기다리는 그것은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가족이 흩어지면서 충격을 받아서 후천적으로 나타난 장애라고 했다. 교정학원에 계속 다니며 치료받으면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다고 했다는데 형편이 나빠서 치료를 중단한 상태, 더구나 집을 떠나 기숙사에 머무는 상황은 최악으로  그 장애는 천형처럼 그앨 따라다녔다.

시작은 무엇이었는지 이젠 기억나지 않는다. 만나면 시선을 돌리고 입을 다문 채 고집스럽게 다른 방향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결벽스럽게도 싫은 것과는 절대 타협하지 않는다는 요상한 원칙으로 어떤 화해나 타협의 시도도 없이 나는 그앨 몰라라했다. 학교에서는 물론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불가피하게 업무적으로 협조를 해야하는 경우에도 나는 자존심을 지키느라 전전긍긍했다. 우리의 다툼이 알려지면서 부서장에게 불려가 호되게 야단을 맞았지만 나는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둘 중에 한 사람이 시간이동을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것은 낮과 밤이 바뀌는 이치처럼 이질적인 이동으로 정서적 충격이 상당한 형벌이었다.

며칠 후 다시 불려간 자리에서 부서장으로부터 독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동은 그 친구가 하기로 했다는 소식과 함께였다. 그리고 어느날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너를 많이 좋아했어, 잘 지내고 싶었는데, 미안해. 내가 욕심이 지나쳤어. 너를 보면 가을날 학교길에 피어있는 키 큰 코스모스가 생각나. 해가 지는 저녁에 함께 걷는 꿈을 꿔. 잘 지내라.....' 장문의 편지를 읽는 내내 울었다.  그애로 인해 내가 가해자가 되고 부서장의 눈 밖에 난 것이 억울하고 분했다.  

무슨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받게 되어 난생 처음 서울엘 가게 되었을 때 그 친구는 자신의 스커트와 셔츠, 운동화 일색을 챙겨와서 예쁘게 하고 가라고 했다. 내 손을 잡아 시내 여기저기로 구경을 시켜주고 처음 맛보는 음식을 사준 것도 그녀였다. 마치 세상의 이치를 다 아는 듯 어른스럽고 의젓해서 그녀가 하는 말을 귀담아 듣고 신기해 하던 나였다. 그런데, 그녀의 무엇이 호의조차도 망각하고 매몰차게 돌아서게 했는지 도무지 기억을 짜내려해도 모르겠다. 왜 그토록 싫어했을까. 

지금 생각하니 그것은 서투르고 어설픈 연애의 일종의 아니었나 싶다. 일방적인 호의와 그것의 의도를 모르는 무지가 오해를 낳고 불쾌감을 낳고 이별을 거치는 과정. 그녀도 나도 여자였지만 충분히 그런 감정이 싹틀 여지가 많은 환경이었다. 강산이 변하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녀는 내게 있어 회한이다. 지금은, 아마도 어디선가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살지 않을까 혼자 상상을 하곤 한다. 길을 가다가 문득문득 내가 저지른 악행중에 가장 독한 것을 떠올리면 그녀의 쓸쓸했던 눈매가 생각나니, 죄를 짓긴 지었나보다. 원컨데, 다시 만날 일이 생기면 먼저 손을 덥썩 잡고서 '미안해, 용서해줘'라고 말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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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4-04-23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가슴에 잔잔한 감동을 전해주는 글이군요. 근데 제 생각에는...다시 만나도 잘 못지내지 않을까 싶은데요??? 저도 그랬거든요..

겨울 2004-04-23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도요. 뚜렷한 이유없이 싫었던 건 사고방식이나 성격의 갭이 컸기 때문일테고 만에 하나 다시 만나도 역시 그런 이유로 피했을 듯도 싶어요.

잉크냄새 2004-04-24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까지 회한으로 남아있다면 만날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만나서 '미안해, 용서해줘'라고 말해도 좋을것 같네요.
잘 지내지 못할지라도 가슴속에 남은 회한은 사라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겨울 2004-04-25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때때로, 상처가 물처럼 흐르는 것이었으면 하고 상상할 때가 있습니다. 지나친 자만과 치기로 화해하지 못하고 불가피하게 끊어진 인연인 경우 더 그러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