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 시절의 나는 꽤나 식탐이 강한 아이였다. 넉넉하지 못한 살림이라 간식이란 듣도 보도 못하고 하루 두 끼를 먹으면 잘먹었다 하던 시절이라 먹거리에 대한 욕심이 강하다한들 양껏 먹은 기억도 물론 없지만.
동네 구멍가게 앞을 지나는 일이 고역이지만 그렇다고 부모님을 졸라 먹을 것을 사달라 떼를 쓰던 철부지도 아닌지라 그져 꾹꾹 참고 또 참기만 했던 것 같다. 또래의 아이들이 10원, 20원 짜리 군것질을 하는 걸 부러움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만 보는 자존심 강한 여자애라니, 지금 생각해도 가엾다.
도시락이 없는 점심시간의 곤혹스러움을 피해 교사 주변을 배회해 본 사람이 아니면 굶주림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것이다. 하긴 요즘 시대에 굶주림이 어쩌구 하는 것이 어불성설인가.
결핍에는 반동으로 그것을 채우려는 무의식적인 욕구가 따르는데, 하나만 있어도 충분하건만 후일을 위해 꼭 두 개 이상을 챙기려는 의지가 그것이다. 저장이나 저축이 나쁜 건 아니지만 굳이 지금이 아니어도 되는 욕심을 부리는 스스로가 구차하다 느끼는 게 문제다.
그 시절, 우연찮게 읽게 된 이 책,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가 없었다면 난 여전히 유년의 결핍을 상처처럼 끌어안고 있지 않을까. 긴긴 노동수용소의 하루를 이반 데니소비치라는 비루하고 약한 인간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려낸 소설은 적당한 유머와 소소한 에피소드로 짜여져 무척 재밌게 읽힌다. 일생보다 긴 딱 하루, 한 끼의 형편없는 식사를 사수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비굴의 극치를 달리는 모습은 눈물겹다. 건더기도 없는 묽은 죽 한 그릇을 향한 이반 데니소비치의 기대와 실망과 체념을, 당연한 죄수의 몫으로 읽고 지나칠 수도 있다.
그러나 어쩐일인지 내겐, 그것이 번쩍이는 충격이었다. 최소한의 배고픔을 채우는 것 이외에는 먹거리에 대한 일체의 욕심을 버리자는 다짐 아닌 다짐을 한 계기다. 수도승이 아닌 다음에야 완벽히 식탐을 버릴 수는 없으나 살아오는 내내 그것은 잣대가 되어주었다. 먹을 거리를 다스리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각종 다이어트 열풍이 몰아치는 이즈음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어찌해서 입맛은 건조하기 짝이없고 미식의 미자와 요리의 요자도 모르는 여자가 되었지만 이 식성은 죽을 날까지 변하지는 않을 것 같다.
한 끼의 기름진 식사를 마주하고 굶어 죽어가는 아이를 노리는 독수리가 있는 흑백사진을 떠올리는 것은 지나친 결벽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마지막 가는 길에 굶어죽기를 선택한 스콧 니어링을 따라 그렇게 죽기를 바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선택. 한 권의 책의 의미는 이렇게 삶과 죽음을 아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