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해도 괜찮아 - 진흙탕을 놀이터로 만드는 박혜란의 특급 결혼이야기
박혜란 지음, 윤정주 그림 / 나무를심는사람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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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내가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먼저 아이의 자존심을 세워 주고 집은 나중에 세우리라"
 - 다이애나 루먼스 <만일 내가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가수 이적의 어머니로 알려진, 여성학자 박혜란 님의 신간이 나왔다. 전작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을 인상깊게 읽었던 차라, 신간 출판 소식에 일찌감치 책을 주문했다. 날 읽어주세요, 라는 먼저 구입한 책들의 간절한 눈빛을 뒤로 한 채. 책을 펼쳤다. 제목만으론 어쩐지 직업적 성공을 위해 결혼과 출산을 과감히 미루거나 포기한 젊은 2,30대 여성들을 향한 어머니 세대의 잔소리일 것만 같다. 무려 결혼 45년차의 내공으로 '결혼'과 '비혼'에 대해 다룬다지 않나.

예상은 빗나갔다. 잔소리는 커녕 본격 수다가 펼쳐진다. 저자의 연애스토리부터 올드미스 소리 듣고 싶지 않아 일찌감치(그래봐야 25세, 지금이라면 결혼 얘기 하기도 전에 부모가 먼저 말릴 나이다.) 결혼한 이야기, 결혼 후 콩깍지가 벗겨져 남편에게 실망하고 지지고 볶고 싸운 이야기부터 '재미없는 게 재미'라는, 답답하고 멋없는 남편 흉보기까지. 

다소 '아줌마'스러운 수다에 동참할 수 있는 여성층도 전 세대를 아우른다. 결혼을 인생 과업 중 하나로 여기며 신랑감 찾기에 촉을 세우는 여성들, 자기 전문분야에서 멋지게 일하며 착실히 노후 준비를 해나가는 비혼녀들, 아이들 뒷바라지에 여념없는 젊은 엄마들, 며느리와 친해지고 싶지만 친해질 방법을 모르겠는 시어머니 세대까지! 연령을 떠나 '여자'라면 한 번쯤은 고민해보고, 친구들과 한번쯤은 카페에서 나눠봤을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하지만 그저 소모적인 수다 모임과는 조금 다르다. 여성으로의 삶을 먼저 살아낸 선배의 따뜻한 조언이 곳곳에 드러난다. 때로는 본인 세대와는 환경적으로 다른, 오히려 더 힘들 수도 있는 시대를 사는 후배 여성들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도 느껴진다.

제가 드릴 말은 단 하나, 지금의 그 낙관주의를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는 겁니다. 아무리 힘든 일이 닥쳐도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잃지 마십시오. 하지만 동시에 너무 행복하려고 애쓰지 말라고 당부하고 싶습니다. 
특히 남들 눈에 완벽한 행복을 구가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애쓰지 말아야 합니다. 경제적으로 여유롭고 언제나 서로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것만이 행복한 결혼이라고 못 박지 말아야 합니다.  (중략)
결혼이 두 분을 행복하게 해주지 않습니다. 두 분이 행복한 결혼을 만들어 가십시오. (196쪽)


결혼, 쉽지 않지만 그래도 해볼만 하다며. 그러나 반전은 항상 후반부에 드러나는 법, 다시 태어나면 저자는 결혼 안 하고 살아보고 싶단다. 이쯤이면 결혼 해도 괜찮다는 건지, 결혼 안 해도 괜찮다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어쨌든 선택은 본인에게 달려 있으니, 편견을 버리고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행복한 여성이 될 준비부터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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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다른 아이들 1
앤드류 솔로몬 지음, 고기탁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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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심리학적 권리장전의 초석>이라는 극찬을 받은 이 책은, 저자인 앤드루 솔로몬의 표현에 따르면 "특별한 능력을 가진 아이를 키우는" 부모, 300여 가정을 십여 년에 걸쳐 인터뷰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인터뷰 기록만 4만여 페이지에 달한다고. 저자가 탐구한 10가지 범주는 정신적(자폐, 정신분열, 천재성), 육체적(청각장애, 왜소증, 다운증후군) 질병 뿐 아니라 아이의 충격적인 출산(강간)이나 충격적인 행동(범죄)까지도 다룰 정도로 연구 스펙트럼이 방대하다. 

10년에 걸친 연구의 결과를 소개한 책이다 보니 분량도 상당했다. 총 두 권으로 이뤄져 있는데 1권은 7개의 장을 통해 청각 장애, 소인증, 다운증후군, 자폐증, 정신분열증, 그외의 장애(주로 중도 중복 장애)를 갖고 있는 아이들과 그 부모가 직면하는 문제들을 다뤘다. 두 번째 책에는 신동, 강간, 범죄, 트랜스젠더 등을 소개한다. 단숨에 읽어낼 만한 분량도 아니었고, 다루고 있는 내용의 무게도 상당해 1권을 완독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됐다. 


이 책을 읽는데 중요한 키워드는 "정체성"이다. 저자는 수직적 정체성과 수평적 정체성을 예로 든다. 수직적 정체성은 부모세대가 자녀세대에게 물려주는 유전적 특징으로, 민족성(피부색, 자아상, 언어 등)과 종교까지 넓은 범위를 지칭한다. 그러나 가끔 부모와 이질적인 선천/후천적 특징을 갖고 태어나 동류 집단에서 정체성을 찾아야 하는 아이들도 있는데, 이러한 특징을 수평적 정체성이라 한다. 수평적 정체성의 대표적인 예로 저자는 '게이'를 들었다. 대부분 게이 아동은 이성애자 부모 밑에서 태어나지만(당연히) 성적 취향은 수직적으로 물려받은 것이 아니다. 가족이 아닌 다른 문화를 관찰하고 그 문화에 동참함으로서 게이로서 정체성을 습득하며 자존감을 되찾는다는 것이다. (서론에서 저자가 본인의 경험을 진솔하게 털어놓았고, 이는 책을 관통하는 핵심주장을 보다 잘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또 하나의 핵심 키워드는 부모의 역할이 무엇인지, "양육"에 대한 행위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모든 부모는 두 가지 행위 사이에서 갈등하는데, 첫째는 자녀를 '변화시키는 행위'로 옳은 것(예의)을 가르치며, 도덕적 가치관을 심어주는 등 아이가 사회에서 올바르게 자라날 수 있도록 훈육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자녀를 '지지하는 행위'다. 부모는 있는 그대로의 아이를 사랑하고, 스스로 자긍심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드려 노력한다. 이 두 가지 행위는 자녀양육의 매순간 맞닥뜨리는 문제겠지만, 특별한 요구를 지닌 아이들을 양육하는 부모는 더욱 극단적인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자녀의 어떤 면을 변화시키고 어떤 면을 축복할 것인지, 차이를 존중하는 사회적 모델에 의지할 것인지 아니면 자녀의 앞날을 위해 차이의 제거를 약속하는 의학적 모델에 의지할 것인지.  

청각 장애아들 중에는 독순술에 능하고 남들이 이해 가능한 수준으로 발화를 할 수 있는 아이들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런 능력이 부족하고 따라서 역사나 수학, 철학을 배우는 대신 청력학자나 언어 병리학자와 마주 앉아 연이어 몇 년을 허비한다. (중략) 
소리를 뇌에 전달해 주는 인공 와우 이식수술이 혁신적인 기술이었다. 청각 장애아의 부모들은 이 기술을 가혹한 장애에 대한 기적의 치료법이라면서 환영했고 청각 장애인 단체는 활기 넘치는 청각 장애인 커뮤니티에 대한 종족 학살이라고 맹비난했다.  (중략) 
인공 와우 이식수술이 어릴 때, 이상적으로는 유아기에 이루어질 경우 가장 효과적이며 따라서 장애를 가진 당사자가 충분한 정보를 접하거나 의사 표시를 할 수 없는 시점에 대체로 그 부모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와 관련된 논의를 지켜보면서 만약 게이를 이성애자로 만들 수 있는 비슷한 초기 치료법이 있었다면 나의 부모도 망설임 없이 치료를 선택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22-23쪽)


평소에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던 이슈에 대한 질문으로 머릿 속이 혼란스러웠다. 청각 장애 아동에게 인공와우 이식수술을 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 유전자 변이로 생겨나는 장애(다운증후군)를 가졌거나 아이를 키울 능력이 부족한(자폐증) 자녀에게 불임수술을 해도 되는 건지, 스스로 움직일 수도 의사표현을 할 수도 없고 인지능력도 떨어지는 중도 중복 장애 아이가 더 자라지 못하게 호르몬제를 주사하고 자궁적출수술을 한, 애슐리 치료법을 무조건 비난 할 수 있는지. (애슐리의 경우는 심지어 부모가 아이를 너무 사랑하기에, 기계로 들어올리고 내리는 것보다 부모의 직접적인 스킨십으로 이동하는 걸 아이가 기뻐하기 때문에, 아이가 사춘기 이후 겪을 생리에 대한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결정한 일이었다.) 그리고 만약 나라면, 임신 중에 아이가 장애를 갖고 태어날 것임을 미리 알고서 출산을 선택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아마 리뷰 작성을 마치고도 한참은 이에 대한 생각이 쉽게 정리 되진 않을 것 같다.


한편으로, 미국의 장애에 대한 사회인식과 제도가 우리 나라보다 훨씬 진보적, 선진적이어서 놀라웠다. 청각장애인 커뮤니티는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조직되어 있고, 청각 장애를 '청능의 부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청각 장애의 존재'로 보는 인식, 농문화를 하나의 삶과 언어로 보는 사회 분위기가 부럽기까지 했다. 왜소증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커뮤니티를 통해 소인의 권리 옹호 활동을 하고, 같은 수평적 정체성 내에서 결혼하기도 하며 오히려 자녀에게 정서적 안정성을 심어주는 모습도 보였다. 또한 장애를 가진 자녀를 돌보는 부모에게 무조건적 헌신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에서 위탁가정, 도우미, 복지시설 제공으로, 양육에 지친 부모에게 그들의 '삶'을 돌려주는 모습에 감탄했다. 컨트롤이 불가한 아이를 시설에 보냈다고 손가락질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도 휴식시간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걸 존중하는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한 다수의 부모는 아이에 대한 사랑과 절망을 동시에 경험한다고 한다. 아이에겐 장애가 괴로움일 수 있겠지만 부모인 자신에게는 한층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고백도 있었다. 중도 중복 장애를 가진 첫째 아이와 건강한 두 동생을 키우는 한 부모는 "한 아이가 가진 의존성 덕분에 나머지 두 아이의 자립성에 관해 많은 것을 배웠"다고 했다. 
배우자와 이혼하고도, 묵묵히 왜소증을 갖고 있는 딸 키키를 돌봐온 엄마 크리시가 유방암 진단을 받고 나서 한 인터뷰가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키키와 오래 지내다 보니 암을 이겨 내는 일은 오히려 쉬웠어요. <암은 내가 처리하고 극복해야 할 또 다른 문제에 불과해. 계속 움직이자>라는 식이었죠.  (중략) 
키키는 화학요법을 시작하기 전에 크리시가 머리를 삭발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이 직접 해주겠다고 나섰다. 그리고 크리스의 삭발이 끝나자 자신도 삭발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크리시가 만류했지만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키키가 말했다. "엄마는 내 수술 뒷바라지를 하느라 고생이 많았어요. 그 일 때문에 엄마가 암에 걸린 게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나는 남들과 다르다고 느끼면서 오랫동안 지내 왔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아요. 그래서 나도 엄마처럼 머리를 깎아서 엄마 혼자만 다르지 않도록 해주고 싶었어요.(306쪽)


남들과 달라, 특별한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를 데리고 집 밖에 나오지도 못하고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는 부모들이 이 책을 읽고 용기를 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거리를 활보하는 장애 아동을 보며 무의식적으로 눈살을 찌뿌리는 한국인들이 이 책을 읽고 시선에 변화가 생기길. 관련 연구와 권리옹호단체가 많아져 장애를 하나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성숙한 인식 변화가 이루어지길. 부모와 다른 아이들도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정부의 정책적 노력이 뒷받침되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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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정원 - 안티 - 스트레스 컬러링북 조해너 배스포드 컬러링북
조해너 배스포드 지음 / 클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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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정원>을 시작으로 안티 스트레스 컬러링북이 유행한다기에, 호기심에 서점을 찾았다.

파버카스텔 색연필을 구하기가 어려울 정도! 책방 여러 곳을 순회한 끝에 36색 색연필이 내 품에 왔다♡



컬러링에 몰입해 모든 근심을 잊어보리라! 마음 먹었다. 

12색도 24색도 아닌 무려 36색 색연필도 준비되어 있으니, 색깔이 부족하진 않겠지.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내가 원하는 색깔로, 원하는 곳에 색칠하며 나만의 비밀의 정원을 완성해 나간다. 

그런데.. 창의력의 한계일까, 미적 감각이 부족해서일까, 36색 색연필의 컬러가 턱없이 부족하게 느껴진다.

비싸더라도 48색을 샀어야 했나, 뒤늦은 아쉬움이. 

난 이제, 잎은 초록색이어야 하고 꽃은 붉은색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굳어진 어른이 되어 버렸나.



색연필 가짓수를 늘릴 수 없으니, 수성사인펜을 활용해 보기로 한다.

스테들러 화인라이너로 꽃과 잎의 테두리를 진하게 칠해주니 한결 다채로워진다.



어느 정도 성취감은 있다. 백지에 불과하던 밑그림이 내 손을 거쳐 색색의 식물들로 살아나는 느낌.

그런데 장시간 고개를 푹 숙이고 색칠에 몰두하다 보니 어깨와 목이 결린다. 

무슨 색을 칠해야 할지 고민도 되고, 안티 스트레스 하려다 도리어 스트레스 받을 수도 있다.


평소 대화가 부족했던 가족, 친구, 아이들과 둘러 앉아 도란도란 얘기하면서 함께 색칠하면 힐링 효과가 클 것 같다.

난 여동생이 떠올랐다. 어릴 적 머리를 맞대고 오순도순 색칠공부하던 추억이 떠오른다.  

이번 명절엔 고향집에 가지고 내려가야지. 온가족이 둘러앉아 정원을 완성시켜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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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씨앗 - 제인 구달의 꽃과 나무, 지구 식물 이야기
제인 구달 외 지음, 홍승효 외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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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첼 카슨, 제인 구달 박사, 최재천 교수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대중의 언어로 이야기 할 줄 아는 생물학자라는 것. 과학자가 되기엔 너무 인문계생이었던 내가 롤모델을 찾기 위해 애쓰던 생물학과 재학 시절 존경하던 인물들이다. 구달 박사의 저작을 읽은 건, 대학교 2학년 때 읽었던 <희망의 이유> 이후 처음이다.
책은 4부로 이루어진다. 1부는 자연에 대한 구달 박사의 사랑을 고백하는 챕터라면, 2부는 수렵과 채집, 원예에 대한 역사를 소개하며 자연이 인간에게 베푸는 선물에 대해 이야기한다. 반대로, 3부에서는 인간들이 식물을 오용하고 왜곡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마지막 4부에서는 지속가능한 환경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소개하고, 다시 한번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책을 읽으면 자연을 향한 저자의 순수한 사랑을 느끼게 된다. 아주 당연한 이야기도 그가 이야기하면 생경하게 다가오니 신기한 일이다. 저자의 관점으로 식물들을 바라보며 그의 감탄에 나도 모르게 동화된다.
"우리가 내쉬는 숨은 식물이 이산화탄소를 포획할 때 그들에게 영양분을 주며, 식물이 내쉬는 숨은 우리가 (또 그들이) 호흡할 수 있게 한다. 얼마나 놀라운지, 참으로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이산화탄소 1컵에 물 몇 수저, 햇빛 한 줄기를 섞기. 이것은 조류(algae)와 비슷한 형태의 다른 식물의 삶을 지탱하는 음식의 궁극적이며 유일한 조리법이다." (본문 43쪽)

때로는 산들산들 바람이 불어오는 울창한 숲 속에 누워있는듯, 독자를 자연 현장에 초대하기도 한다.
"작고 유속이 빠른 개울가에 앉아서 냇물이 호수로 흘러가는 도중에 굴러 떨어지며 내는 콸콸 소리를 듣는 것을 몹시 좋아한다. 아니면 등을 대고 누워 바람이 머리 위 높이 달린 가지와 잎사귀들을 휘저을 때, 가지 사이로 하늘의 작은 알갱이들이 별처럼 반짝이는 우거진 나뭇가지들 꼭대기를 올려다 보는 것을 몹시 좋아한다. 나는 숲의 음성을 매우 잘 알게 되었다. 바쁘게 계속 자기 일을 하는 작은 생명체들의 가벼운 바스락거림, 곤충이 비행할 때 윙윙거리며 씽 도는 소리, 매미의 날카로운 음성, 새들의 노래, 멀리서 들리는 수컷 비비의 울음소리. 모퉁이를 돌며 미끄러지는 타이어의 끼익 소리와 엔진 회전소리, 술에 취해 지르는 비명이 도시 사람들에게 친숙한 만큼이나 숲 사람들에게 친숙한 모든 다른 소리들. 그곳에는 비가 내릴 때 자리에 앉아 나무 잎사귀 위로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초록색, 갈색의 식물들과 부드러운 회색의 공기로 이루어진 흐릿하고 불가사의한 세계에 둘러싸였다고 느낄 수 있는 순간이 존재한다." (본문 92쪽)

특별히 인상깊게 읽었던 부분은 '식물사냥꾼들'과 '씨앗'에 대한 장이었다. 18-19세기, 새로운 식물종을 발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대륙을 탐험하던 식물학자, 모험가들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새로운 꽃과 모종을 얻기 위해 열띤 경쟁을 벌였던 유럽인들, 새로운 종을 무사히 본국에 들여오기 위한 식물사냥꾼들의 사투, 고고학자가 발견한 2000년 전 씨앗을 발아시킨 이야기(심지어 이름이 '므두셀라'라니! 성경에서 가장 장수한 인물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산불이 일어나야만 싹이 트는 놀라운 식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을 때에는 아예 구글 검색을 켜 놓고 주인공들의 모습을 확인할 정도였다. 토용나리(Lilium superbum), 달리아 덩이줄기(Dahlia tuber), 튤립(Tulip) 구근,  Erica verticillata, Serruria florida, Bee orchid, Vanilla planifolia, Pu gong ying… 적극적인 독서를 가능케 하는 구달 박사의 능력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책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한 식물들의 모습에 매료될 즈음, 저자는 식물을 오용하는 우리 인간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한다. 대마, 양귀비, 코카나무, 페요테 선인장, 담배, 궐련… 대규모 경작을 위한 농장에서 벌어지는 잔인한 학대, 무분별한 채집으로 식물을 멸종에 이르게 하는 인간들, 이도 모자라 식량 생산성을 높인다는 명목으로 곤충을 죽게하는 GMO(유전자 변형 농산물), 그리고 내성을 가진 슈퍼버그, 슈퍼 잡초의 등장.


나는 "지구는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아니다. 후손들에게서 빌린 것이다."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불행히도 이 말은 더 이상 진실이 아니다. 우리는 지구를 빌린 것이 아니라, 훔쳤다. 아직도 아이들의 미래를 훔치고 있다. (본문 442쪽)

그럼에도 구달 박사는 식물이 가진 생명력과 의지를 희망의 이유로 꼽는다. 죽음을 거부하는 할머니 나무가 있고, 원자 폭탄에서도 생을 놓지 않은 나무가 있다. 9.11 테러에서 살아남은 나무는 지금도 그라운드 제로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구환경을 우리의 아이들에게서 빼앗아 소모해버린 탐욕스러운 세대, 인간들의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구달 박사의 말대로, 식물들이 '공정한 대우'를 받을 수 있길, 너무 늦기 전에 '내'가 그들을 구할 수 있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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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하면 따져봐 - 논리로 배우는 인권 이야기
국가인권위원회 기획, 최훈 지음 / 창비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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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식 교수의 <불편해도 괜찮아> 재미있게 읽은 독자라면  후속편인 <불편하면 따져봐> 발간되었다는 소식이 반가울 것이다. <불편해도 괜찮아> 인권 침해 현실을 고발하고 소수자들의 이해를 높이기 위함이었다면 책은 그런 현실을 극복할  있는 적극적인 논리를 제공하고 논의의 장을 열기 위함이라 한다논리학 베스트셀러 저자가 집필했다는 출판사의 소개에전편보다 실생활에적용 가능한 논리가 등장할 것이라 기대하게 된.

 

책은 12편의 글로 이루어져 있다사생활 간섭표현의 자유학생 인권양심적 병역 거부여성 차별동성애 편견지역인종학력차별장애인피의자 인권사형제도와 심지어 동물권에 이르기까지   쯤은 듣고 의문점을 가졌을 법한 주제들이다불편하면 조목조목 따져보는저자의 말처럼 '따지스트' 되어보자는 마음으로 하나씩 읽었.

 

오류인지 모르고 저질렀는 실수의 실례가 조목조목 반박된다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올해는 취직해야  텐데.",  "결혼은 언제 할거니?", "아이는  가져?" 무심코 던지는 친척의 .

이효리이상순 부부가 결혼  명절에 해외여행을 갔다는데 못마땅해하는 네티즌의 악플.

술을 거절하는 사람에게 "술도  마시는  남자야?"하고 자신만의 남자관을 강요하는 사람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낱말의 뜻을 자신만의 방식대로 재정의하고 거기에 맞지 않는다고 상대방을 비판하는 '은밀한 재정의의 오류' 저질렀다는 점이다 하나는 의도와는 관계없이 듣는 사람은 불쾌해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는 .

 

"그렇게 짧은 치마를 입어도 ?"라고 말한 사람은 여자를 염려해서 그런 말을 했다고 하겠지만이런 말은 상대방에게 수치심을 일으킬  있으므로 성희롱으로 판단합니다다양한 성희롱 예방 교육을 통해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인지하고 있습니다사생활 간섭도 성희롱처럼 의도와 다르게 상대방에게 수치심을   있습니다결혼하지 못한 것에 대해 또는 아이를 낳지 못한 것에 대해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들은 " 결혼  ?" " 아이  가져?"라는 질문을 받으면 충분히 수치심을 느낄  있으니까요그렇다면 성희롱이 인권의 문제인 것처럼 사생활 침해도 인권의 문제가 됩니다. (37)

 

어리석은 사상과 표현도 인권의 권리로 보장되어야 하는 이유두발과 복장이 단정해야 학생다운 모습이라고 주장할  없는 이유유독 한국에만 '된장녀' 많아 보이는 이유학력 차별을 비난해야 하는지 옹호해야 하는지피의자의 얼굴과 신상 공개 여부를 결정하는 문제 책이 제시하는 길을 따라가며 함께 고민하다 보면 더욱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군가가 나를 가두어두면 괴로운 것처럼  흑인도 가두어두면 괴로울 것이라고 역지사지하는 그게 바로 이성적인 사고이고 윤리적 판단의 기본(273)"이라는 말처럼,  내가 상대방 입장에 처했을  억울하다고 느낄 만한 일이면 '인권 침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이제  흐름에 익숙해 질만 하니 급하게 마무리되는  같아 아쉽긴 하지만우리가 미처 생각 못하고 저질렀던 오류를 다시 짚어볼  있는 계기를 제공하고더불어 논리학에서 쓰이는 오류에 대해서도 다양하게 접할  있는 책이라는 데에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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