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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디안텀 블루
오사키 요시오 지음, 김해용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이 책에 앞서 만났던 동일작가의 [파일럿 피쉬]라는 책의 잔향이 몇달 채 가시지 않고 코 끝에 간질간질 매달려있다.
가을 바람이 와 그 잔향을 툭하고 건드린다.
파일럿 피쉬, 파일럿 피쉬... 입안으로 몇번을 읊조린다.
나에게 파일럿 피쉬가 되어준 그 사람이 있는 쪽을 쳐다본다.
사실 지독한 방향치인 난 그 쪽이 어느 쪽인지 확실히 알지 못한다.
그저 내 시선이 머무는 그 쪽에 그 사람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대학생이라는 모라토리엄이 계속될 것 같았던 나... 그리고 지금 이 모라토리엄도 계속될 것 같은 나... 그런 내가 나처럼, 필요한 시간 속에서 방향을 잃은 한 남자를 만났다.
R Y 라고 하는 그 사람, 야마자키 류지.
한 때 나처럼 대학생이라는 모라토리엄이 계속될 것 같았던 지독한 방향치인 그 사람은 이제 자신이 사랑했던 한 여자 요코의 죽음이라는 모라토리엄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에게 요코는 너무나 선명한 기억으로 망막 한 구석에 맺혀있다.
그의 사랑이었던 요코라는 그녀, 너무 늦게 암성복막염 진단을 받았다. 세상이 뭔가에 비친 광경처럼 보여 물웅덩이를 사랑했고 아디안텀이란 식물을 좋아했으며, 지독한 새치였던 그녀에게 선택권이란 생명을 며칠 연장해 줄 수 있는 병원의 치료뿐이다. 하지만 그녀는 병원에서의 치료를 선택하지 않는다. 아마도 아디안텀의 죽음을 지연시킬 뿐, 근본적인 우울을 치료할 수 없던 자신이 폭탄이라 부르던 영양제 같았기 때문이리라... 그녀에게 브롬프톤 칵테일(진통제)는 병원에서 제조해주는 약이 아닌 따뜻한 니스의 햇살과 야마자키의 사랑.
아디안텀은 키우기 쉬운 식물이 아니다.
생장기간 동안 높은 공중습도와 충분한 토양수분을 필요로 하며 늘 덥지도 춥지도 않은 기온과 너무 어둡지도 환하지도 않은 상태를 요구한다.
한번 건조하거나 찬바람을 맞아 잎이 상처를 받으면 그 우울을 극복하지 못한 채 잘 회복되지 못한다.
하지만 그 아디안텀 블루를 한번 겪어낸 아디안텀은 햇빛을 받아들여 초록빛 숲을 보여준다.
그것이 아디안텀이라는 식물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다.
정확한 실제도, 완전한 환상도 아닌 적당한 물 웅덩이 같은 세상을 살았던 요코는 몇번의 아디안텀 블루를 겪고나서야 행복한 아디안텀이 될 수 있었던걸까.
야마자키, 요코,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 그리고 우리.
모두 아디안텀 블루를 겪고있지 않을까.
물웅덩이처럼 뭔가에 비친 세상을 살고있으면서, 그 물웅덩이에서 더 큰 의미를 끌어낼 수 있고, 몇번의 아디안텀 블루를 겪은 후에야 더 초록빛의 세상을 뿜어낼 수 있는 것이 우리가 아닐까. 그것을 명확하진 않지만, 물웅덩이에 비친 세상처럼 알려주기 때문에, 진부할 수도 있는 불치의 병 - 죽음 으로 이어지는 마치 [장미빛 인생]이라는 드라마 시나리오 같은 전개가 진부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계절은 어느새 가을로 변해 있었다. 볼에 닿는 바람은 나름대로 차가워서, 여름의 바람과는 다른 무기질의 딱딱한 느낌이었다. 바람에서는 나무를 태우는 듯한 희미한 냄새가 났고, 그것을 느낄 때마다 내 가슴은 태엽을 감듯 끼릭끼릭 조여들었다.
같은 계절을 느끼며, 야마자키의 담배 연기를 뿜어보았다. 나름대로 차가운 바람 속을 가르는 내 입김이 야마자키의 담배 연기처럼 뿌옇게 흩어진다. 사실, 파일럿피쉬로 인한 지나친 기대감 때문인지 그 기대감을 온전히 채워주진 못했다. 하지만, 그 때의 그 애잔함이 다시 마음을 덮는다.
그래, 나도 지금 아디안텀 블루를 겪고 있는거야. 이 아디안텀 블루를 겪어내면 난 더 싱싱한 초록빛을 뿜어낼 수 있을꺼야...
[아디안텀adiantum: 고사리과의 식물로 양치류 중에서는 가장 많이 보급되어 있으며 열대에서 온대에 걸쳐 약 200종이 있으나 대부분은 열대 아메리카 원산이다. 은행나무 잎과 흡사한 작은 잎을 가지고 있고, 성숙함에 따라 밝은 초록색을 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