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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소년을 만나다 ㅣ 세계신화총서 8
알리 스미스 지음, 박상은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평점 :
내 소녀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마, 하고 할아버지가 말했다. 책의 첫 문장 고개를 갸웃거린다. 할아버지는 소년이어야 했던 것이 아닌가? 책을 앞으로 돌려 표지를 마주한다. 소녀, 소년을 만나다. 그 제목도 그 표지도 책의 첫문장도 꿈을 꾸는 듯 하다. 내가 제대로 된 글자를 읽고 있는 것이 맞는 것일까?
신화는 인간과 너무도 비슷한 욕망을 지니고 있는 신들의 이야기이면서도 인간의 삶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 분위기라고 해야 하나? 그들의 삶에도 인간과 같은 희노애락이 있고 사랑과 증오가 있고 열정과 욕망이 가득하지만 그들의 생활은 뭔가 신비롭고 몽환적이다. 그래서 우린 신화를 읽는 것을 즐거워한다. 그것은 마치 신의 생활을 훔쳐보는 것과도 같은 기분이다.
이 책 <소녀, 소년을 만나다>(알리 스미스, 문학동네,2007)는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서 따온 이피스 신화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변화'를 소재로 한 그 신화를 바탕으로 새롭게 알리 스미스 스타일의 신화를 탄생해 낸 것이다. 위에서 말한 책의 첫 문장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다양한 형식의 시도로 충만하다. 마치 소설의 진화(진화 역시 변화에 해당할테니까)까지 계산에 넣어 이피스 신화를 말하고 싶어하는 듯 하다. 하지만 그래서인지 얇은 두께의 책이지만 읽어내기가 녹록치는 않다. 아니, 쉽게 쉽게 읽혀지지만 순간 혼동에 빠질 때가 많다. 도대체 뭘 말하고 있는거지?
하지만 그 혼동 속에서 발걸음을 멈춰서는 안 된다. 그 혼동 속에 발걸음을 멈췄다가는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변화'에 휩쓸리지 못하고 주변인인 진정한 '독자',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 그러나 우리가 소설을 읽는 재미, 그리고 신화를 읽는 재미, 그것은 무엇이었던가. 나와 다른 삶에 빠져보고자 하는 '변신'의 욕망이 불러일으키는 재미가 아니었던가. 그 재미를 놓치고 싶지 않다면 혼동, 그 자체를 즐겨야 한다. 그러다보면 어스름한 이미지가 순간 다가온다. 이 책이 지속하고 있는 그 이야기가 보이는 것이다.
플라톤의 '향연'에는 사랑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태초에 세상은 여자와 여자, 남자와 남자, 여자와 남자가 한 몸인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들이 신의 위엄에 대항하려 하자 그에 분노를 느낀 신이 그들을 반쪽으로 갈라놓고 서로를 그리워하며 살아가게 만들었다는 이야기. 그것은 바로 사랑의 시작이었다. 그 이야기는 이 세상에 다양한 사랑의 형태를 모두 인정할 수 있게 해 준다. 우리가 단지 '소수 취향'이라고 치부해 버리거나 혹은 '나쁜 취향'이라고 외면해 버리는 그 사랑이 얼마나 정당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이 책은 이피스 신화에 기본을 두고 있지만 그 이야기와도 아주 닮아 있다. 이모겐은 동생 앤시아의 사랑을 부정하려 했지만 그것을 인정하는 동시에 자신의 사랑을 깨닫게 된다. 앤시아는 소년을 만났지만 그것은 소년 시절을 겪고 있는 로빈이었고 그것은 앤시아의 변신이자 로빈의 변신이자 이모겐의 변신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모두 함께 변화의 과정을 겪었다. 그리고 언젠가 앤시아는 혹은 로빈은 자신의 소녀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아버지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 편안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훗날에 다시 가져올 것이다.
책은 아름다웠다. 비록 모든 사랑에 주변의 인정이 따르진 않지만 그것은 우리가 마음 한 구석에 편협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닌지 생각해 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자신만의 사랑을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그 사랑을 인정해 주는 것. 책은 그 아름다운 세계 그 자체였다. 소녀가 소년을 만나고, 소년이 소녀를 만나고 소녀가 소녀를 만나고 소년이 소년을 만나고. 그 모두는 사랑이었고 그 사랑에 우리 모두는 변화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