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하하는 저녁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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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울 준비는 되어 있다>의 에쿠니 가오리가 마음에 들었었다. 적당히 서늘하고 적당히 건조하고 적당히 지루한 그런 어떤 것이 나의 어떤 부분에 적당히 들어맞는 느낌이 좋았었다. 아무튼 자연스런 다음 단계처럼 나는 노을빛 표지의 이 책을, 낙하하는 저녁을 읽게 되었다. 표지에 "에쿠니 가오리의 실연을 담은 소설"이라고 적혀 있다. 사실 그냥 지나쳐도 상관없을 그 말에 조금 신경이 쓰였다. 쓰지 않았으면 좋았을 말이다. 조금 상업적인 냄새가 난다고 느껴지는 건 내가 지나치게 민감하기 때문일까. 그렇지만 책표지가 노을빛인 건 마음에 들었다. 해질 무렵의 싸한 느낌을 그대로 전해주는 것만 같은, 그런 슬프고도 아릿한 저녁의 색깔. 저녁 나절에 가장 맑고 냉철하다는 에쿠니 가오리. 냉철하고 차분하고 그러면서도 절망하고 있는 것을 좋아한다는 그녀. 그런 저녁의 차분하고 맑은, 그러면서도 절망적인 어떤 무언가. 그런 작품을 쓰고 싶었다고 그녀는 말한다. 낙하하는 저녁은 그런 소설이다. 저녁의 차분함과 냉철함과 슬픔과 절망이 적당히 섞여 있는. 그리고 나의 마음과 적당히 들어맞았던 부분도 어쩌면 그런 차분함과 절망의 이상한 조합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8년간 같이 살던 남자가 갑자기 이별을 통보한다. "미안해"라고 말하는 남자에게 여자는 "괜찮아"라고 말한다. 그동안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남자는 떠나고 여자는 남는다. 아니, 남겨진다. 남자에게 이별이란 그저 짐을 꾸리고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가는 것과 같다. 그의 흔적이 남겨진 곳에서 떠나지 못하고 그저 그 흔적들 속에서 생활해야 하는 건 여자의 몫이다. 여자는 의외로 담담하게 일상을 꾸려 나간다. 담담하고 차분하게 생활하는 듯 하면서도 가끔씩 치밀어 오르는 슬픔이나 절망같은 것을 완전히 떨쳐 버릴 수는 없는 듯 보인다. 떠나간 그의 전화를 받는다든지 할 때 그녀는 고통스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집세가 비싼데도 그녀는 그 곳을 떠날 수가 없다. 남자와의 기억이 완전히 끊겨질까 두려운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여자가 그녀의 일상에 불쑥 끼어 든다. 그를 떠나가게 한 여자. 하나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녀의 집으로 들어와 살게 된다. 그가 있었던 그 자리에 이제 그의 새로운 여자가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이 여자, 이상하게도 그의 새로운 여자와의 일상에 서서히 익숙해져 간다. 하나코가 없는 집안을 적막하게 느낄 정도로. 하나코가 있는 집은 이상하게 생기가 넘친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하나코와의 생활을 통해 그녀는 서서히 그의 부재에 익숙해지기 시작한다. 소설은 떠나간 남자와 남겨진 여자, 그리고 그 속에 끼어든 새로운 여자의 일상을 오고가면서 진행되지만 이상하게도 새로운 여자 하나코가 유독 도드라져 보인다. 실연을 당한 여자 리카보다 그녀의 사랑을 빼앗아간(?) 여자, 사랑을 받고 있지만 외롭고 어딘가 절망적인 여자, 하나코에게 자꾸만 시선이 간다. 자유롭게 삶을 즐기는 듯이 보이고 사랑이라는 집착에 연연해 하지 않는 듯이 보이는 그 서늘한 캐릭터의 매력을 표현해 내는 작가의 능력에 감탄하게 된다. 미워해야 하는 여자를 더 돋보이게 만들어 내다니!

소설은 남자의 갑작스런 떠남과 여자가 그 이별을 받아들이는 과정, 그리고 남자가 새로 사랑하는 여자의 일상이 두 가지 선율로 변주되는 듯 하다. 소설의 중심부로 들어갈수록 새로운 여자의 일상이 더욱 더 큰 소리를 내며 울려온다. 한 사람의 부재에 서서히 익숙해져 가면서, 자유로운 영혼이 서걱대는 듯한 여자의 삶에 빠져 들면서 천천히, 천천히 읽어 내려갈 수 있는 소설이다. 에쿠니 가오리가 좋아하는 저녁의 시간. 그 저녁의 색깔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는 소설이다. 해질 무렵, 그 진한 주황색으로 물든 하늘을 바라보는 데에는 서늘한 가슴이 필요하다. 그 서늘한 가슴으로 읽어 내려가야만 하는 소설. 아무렇지도 않게 책장을 덮을 수 있으려면 말이다.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더! 책장을 덮기전 역자후기를 읽으면서 나는 화가 났다. 역자후기의 끝에 짤막하게 덧붙여진 번역의 오류에 대한 변명이 너무 어처구니없었기 때문이다. 번역 작업을 하면서 남자 이름을 다케오라 읽었고 나중에 그것이 겐고라는 것을 알았지만 소설의 이미지상 겐고보다 다케오라는 이름이 더 어울릴 듯하여 굳이 오류를 범하였다는 번역가의 말은 한마디로 독자를 조롱하는 처사다. 작가가 가장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여 만들었을 인물의 이름을 번역가 마음대로 고치는 행위는 아무리 너그럽게 받아들일려고 해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아무리 유명한 번역가라 해도 번역의 원칙은 지켜져야 하는 것 아닐까? 소설의 잔잔한 여운이 역자후기에서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번역가의 엉뚱한 고집을 받아들이는 출판사의 행동도 이해할 수 없다. 소설의 뒷맛을 어처구니없이 구겨버린 것, 어떻게 보상해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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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김산해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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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는 불가해한 꿈은 꾸지 않는다. 현실 속에서 고민하는 딱 그만큼만의 질량만큼 꿈을 꾸고 고뇌한다. 불가해한 현실들만으로도 생은 너무 벅차기 때문이다. 그런데 때때로 책읽기는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꿈을 꾸게 만든다. 오래전부터 계속되고 있었지만 내가 느끼지 못했던 그런 무의식의 경험 속으로 나를 불러들인다. 활자화된 언어가 내 망각된 꿈들을 불러내는 지점, 바로 그 지점에서 꿈꾸는 책읽기가 시작된다. 꿈꾸는 책읽기, 어쩌면 신화는 (적어도 나의 주관적인 생각으로는)그런 나의 몽롱한(?) 독서방식과 무관하지 않은 지점에 놓여 있다. 신화를 읽는 일은 오래된 인류의 기원 속으로, 그 몇천년의 시간이 겹겹이 쌓인 무의식의 꿈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다. 지금 여기 머무르는 우리 존재의 근원 속으로 내딛는 걸음, 걸음들이다. 지금 나를 여기 있게 한 그것. 삶과 운명과 어쩌면 죽음이 처음으로 시작된 그 곳. 그 곳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한 걸음, 한 걸음...그 발자국을 따라 가며 만나게 되는 최초의 꿈들. 꿈의 흔적들. 나의 신화 읽기는 그런 꿈의 흔적들을 찾아가는 작업이다. 그렇게 나는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를 만났다.

처음에 이 책을 접했을 때 나는 그저 막연하게 최초의 신화, 최초의 서사시라는 흐릿한 정보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최초'라는 사실을 그리 의미있게 받아들이지 못했었다. 최초의 신화, 그 탄생의 비밀을 읽으면서 차츰 내가 앞으로 하게 될 독서가 꽤나 의미있는 작업이라는 것을 조금씩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 문장을 읽으면서는 가슴이 조금 두근거리기도 했던 것 같다. 저자의 말대로 "최초의 신화, 최초의 서사시를 접할 수 있는 시기에 태어난 행운"을 나도 누리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것은 어쩌면 여기 숨쉬고 있는 여리기만 한 내 존재의 까마득한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작업이기도 할테니까 말이다.

이 책은 길가메쉬 서사시가 세상에 그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하는 과정에 대한 설명〈최초의 신화, 그 탄생의 비밀>과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전문, 그리고 길가메쉬 서사시에 대한 저자만의 독특한 해설을 엿볼 수 있는 <비극의 전주곡, 죽음의 공포>, 수많은 점포서판에 기록된 그 수많은 사연들을 200행으로, 더 간략하게 88행으로 압축해놓은 수메르 신화와 수메르 왕명록, 연대기로 이루어져 있는 <황금시대의 전설> 이렇게 4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의 미덕은 무엇보다도 길가메쉬 서사시에 대한 저자 나름의 해설에 있다. 그것은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저자가 20여년동안 매달려 이룩해낸 연구의 성과이기에 더욱 빛난다. 

내가 특히 주목한 것은 저자의 해설 중에서 여자에 관한 부분이다. 대부분의 신화에서 여성들의 위치가 지극히 비참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길가메쉬 서사시에서 여성은 남성을 문명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길가메쉬의 친구 엔키두는 신전의 음탕한 여자 샴하트를 통해 원시적인 삶에서 벗어나 '인간'으로 눈뜨게 된다. 또한 길가메쉬가 죽음이라는 인간의 숙명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무모한 모험을 감행하려 할 때 여신의 충고는 여성의 현실적 사고방식을 잘 드러내 준다는 점에서 의미있다. "길가메쉬. 배를 채우세요. 매일 밤낮으로 즐기고, 매일 축제를 벌이고, 춤추고 노세요. ...... 이것이 인간이 즐길 운명인 거예요. 그렇지만 영생은 인간의 몫이 아니지요." 끝이 있는 인생, 달콤한 순간, 순간을 즐기라고. 이미 영생의 이룰 수 없는 꿈에 깊이 빠져버린 길가메쉬의 무모한 모험은 여성의 현실적 인식을 더 각인시키는 효과를 가지게 된다. "여자의 정확한 통찰력은 언제나 남자의 생을 이끈다"는 저자의 말이 황홀하게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이다.

길가메쉬 서사시는 대부분의 서사시가 그러하듯 영웅의 이야기이다. 3분의 2는 신이고 3분의 1은 인간인, 키가 무려 11완척인 그는 무엇 하나 무서울 게 없는 영웅. 초야권을 행사하며 권력을 휘두르는 그에게 그의 힘을 제압할 친구이자 동료 엔키두가 등장한다. 엔키두와 함께 삼목산을 지키는 무시무시한 괴력의 소유자 훔바바와 하늘의 황소를 무찌르는 그는 모든 것을 다 제압할 듯한 힘을 자랑하는 영웅의 모습 그대로다. 그러나 그에게서 그러한 영웅적 면모보다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더 강하게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은 삼분의 일 존재하는 인간 때문이다. 단지 삼 분의 일밖에 존재하지 않는 그것이 그의 모든 생을 규정짓는다. 친구 엔키두의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그는 그저 연약한 한 인간일 뿐이다. 이제 그 자신에게도 죽음이 다가오리라는 걸 인식하는 인간일 뿐이다. 그로 인해 길가메쉬 또한 인간이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고독을 겪어내야만 한다. 인간이기에 맞닥뜨리지 않을 수 없는 그 거대한 끝. 그 고독한 심연. 그 길고 긴 두려움의 맛. 그런 죽음도 맛볼 수밖에 없다. 어쩔수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그 인간의 운명 때문에. 영웅의 서사시가 주는 장엄한 결말을 예상할 수 있는 건 바로 이 부분에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죽음이라는 것은 결국 삶의 문제가 아닌가. 삶의 반대어처럼 느껴지는 죽음에 내포되어 것은 다름아닌 삶, 때론 진절머리나게 싫은, 구질구질해서 끝내버리고 싶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살아내야만 하는 그런 삶이 아닌가. 죽음으로 귀결되는 것을 알면서도 열심히 살아낼 수밖에 없는 삶의 딜레마. 그런 삶의 딜레마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인간의 삶이, 그 삶의 갈등적인 모습들이 반복되는 구절 속에 잘 드러난다. 거대한 힘을 가지고 태어난 영웅이라고 해도 인간인 이상, 죽음을 피해갈 수는 없는 법. 그가 어쩔수 없이 죽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은 영웅이기에 더욱 장엄하고 그 반향은 더 강하게 남는다. 한편의 거대한 서사시는 여린 운명을 타고난 최초의 인류, 그들 자신에게 따뜻한 위안이자 죽음을 극복해가는 삶을 살아내게 하는 주술과도 같은 것이었으리라. 필연적인 고독들로 점철되어 가는 생을 보듬는 치료제로서 그들은 점토판에 그 숱한 고독들을 새기고 또 새기었으리라.

웅장한 한 편의 영화를 보듯 긴 서사시를 읽고 나면 결국 길가메쉬의 그 험난한 여정이 죽음에 이르기 위한 고된 여정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떠한 영웅도 피해갈 수 없는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기나긴 한편의 시였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인간의 창조주 엔키가 길가메쉬에게 하는 충고는 결국 죽음 앞에 한없이 무력하기만 한 우리 인간에게 들려주는 메시지다.

"인간의 가장 어두운 날이 이제 너를 기다린다. 멈추지 않는 밀물의 파도가 이제 너를 기다린다. 피할 수 없는 전투가 이제 너를 기다린다. 그로 인한 작은 접전이 이제 너를 기다린다. 그러나 너는 분노로 얽힌 마음을 갖고 저승에 가서는 안된다......"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어쩔 수 없는 숙명이라면 그것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것. 달콤했던 생의 기억들을 고이 접고, 또한 분노와 슬픔으로 얼룩진 삶도 조용히 떨쳐버리고 그저 평안한 안식을 누릴 것. 그저 편안히 잠들 것. 이제 또다른 꿈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책장을 덮고 나서 마치 지독한 꿈을 꾸고 난 것처럼 길가메쉬의 반복되는 절규가 남아서 내 뇌리속을 맴돌았다. "나는 죽을 것이다! 나도 엔키두와 다를 바 없겠지. 너무나 슬픈 생각이 내 몸속을 파고드는 구나! 죽음이 두렵다." 죽을 것이다, 죽음이 두렵다...반복되는 죽음의 공포가 내 몸속을 파고드는 순간, 나는 문득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마지막 책장을 덮는다. 기나긴 꿈에서 깨어난 듯, 삶의 비밀스러운 모든 것을 맛본 듯한 달콤한 느낌이기도 했다가 삶의 모든 것을 알아버려서 더이상의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는 그 허탈하고 쓸쓸한 느낌이기도 한, 그 지독한 꿈의 여운.... 한 달 내내 이 책을 들고 지냈던 것 같다. 꿈에서 깨어났다 다시 이 오래된 꿈 속으로 들어가기도 했고 다가오는 죽음 속에서 길가메쉬와 함께 나도 서서히 침잠해 들어가는 순간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기도 했다. 꿈과 꿈을 오고가면서 마치 오래된 꿈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기분으로 책을 읽어 내려갔다.

수많은 상징과 해독 불능인 점토판의 기록들을 나름대로 유추해내면서 영웅의 이야기에서 인간, 바로 나 자신의 이야기를 끄집어내었고 영원의 시간 속에서 지금 이 순간을 마음 한 켠에 담았다.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진실은 그가 무엇을 가졌든 언젠가 지금 여기의 삶이 끝난다는 사실. 지금 이 순간 순간을 달콤하게 즐길 의무가 있다는 사실. 바로 그러한 것들을 느낀 것만으로도 오래된 꿈 속으로 들어간 나의 책읽기는 다소 성공적이었다 말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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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3-02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생사용법이라는, 책 제목을 따라 왔습니다.
책이 나왔을 때 제목에 끌려 메모해놓고 까맣게 잊고 있었네요.
가끔 들러서 님의 글 읽고갈게요.
울림이 있는 리뷰입니다.

urblue 2005-03-02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림이 있는 리뷰'라는 로드무비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ALINE 2005-03-03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urblue님.
한 달 내내 이 책만을 들고 있었던 것 같아요. 아직도 그 여운이 남아 있네요.
리뷰 좋게 봐주셔서 고마워요.^^

플레져 2005-03-13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각사각... 님의 리뷰에선 언제나 그 묘한 소리가 납니다. 한동안 서재에 못 들어왔던 즈음에 올리셨네요. 그래도 지금,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어 좋아요. 시를 읽은 것 같아요....

ALINE 2005-03-16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고마워요. 시을 읽은 것 같은 느낌...저야말로 님의 리뷰를 읽을 때마다 그런 느낌을 가졌답니다^^
 
울 준비는 되어 있다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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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랑말랑하면서도 조금은 딱딱한, 조금 서늘하면서도 따사롭고 무언가 아릿한, 그런 글들을 읽고 싶었나 보다. 요즘의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한순간 머리가 멍하니 비어버리는 순간이 많은, 꽤나 규칙적인 생활에 길들여져 가면서도 때로는 한없이 감상적이 되어버리는, 그런 요즘의 변덕스러운 나에겐 그리 힘들이지 않고 슬슬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싶다.

에쿠니 가오리. 그녀의 소설을 많이 읽어보진 못했지만 이 소설만으로도 그녀의 느낌을 아주 많이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새로울 것 없는 일상들, 그래도 그 일상을 견뎌내야만 하는 시간들. 그리고 더이상 새로울 것 없는 사랑과 그 사랑이 지나가고 난 뒤의 쓸쓸한 풍경들.

돌이켜 보면 무엇하나 유쾌한 일이 없었던, 아무래도 상관없고 별 재미없었던 그런 날들. 그런 일상들. 서로를 사랑하는 두 여자. 그리고 이젠 사랑하는 어떤 느낌마저 없어진 부부. 누군가는 사랑하고 또 누군가는 사랑하다 멀어져가고, 누군가는 사랑받지 못해 아프고 또 누군가는 이젠 사랑할 수 없어 아프다. 그리고 때로는 서로를 사랑하는 것 자체가 아픈 이들도 있다.

에쿠니 가오리의 글은 의외로 담담하다. 그러다 문득문득 일순간 정지해버리게 만드는, 그런 싸한 느낌들의 문장과 마주친다.
이를테면, "인생은 연애의 적이야"
"우리 한때는 서로 사랑했는데, 참 이상하지. 이제 아무 느낌도 없어."
"보호한 기억은 늘 윤곽이 애매하고, 보호받았던 기억만이 가슴을 파고든다."
"그때 내 심장의 일부는 이미 죽었다. 너무나도 외로워 말라 비틀어져."
같은.

삶의 순간순간, 무엇이 우리를 서늘하게 만드는지, 그녀는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별일없이 지나갈 거라 믿었던 일상의 어느 순간, 그녀가 툭 건드리면 내 가슴은 서늘해지고 삶은 그저 막막한 터널같은, 알 수 없는 어떤 것이 된다. 내가 잘 견뎌 나갈 수 있을지 조금 걱정이 된다. 어린 날의 어느 저녁, 해질 무렵 엄습해 오던 한없는 막막함과도 같은 그런 느낌들.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의 구석 구석을 담아내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싸해져 오는 감정들. 그녀는 날카롭다. 아무렇지 않은 듯이 이야기하면서 마음을 아프게 만든다. 아주 천천히, 사랑과 그 사랑을 감싸던 날들도 그저 먹먹해져 온다. 어쩌면 이렇게 천천히,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나는 그녀에게 중독되어 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에쿠니 가오리,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어쨌든.

울고 나면 조금 괜찮아질 거야, 생각했지만 살아가면서 나는 울면 울수록 더 아파진다는 걸 알았다. 실컷 울고 나면 마음 한 구석이 굳어져 버린 듯한 느낌. 눈물이 많아질수록 굳어져 버리는 느낌이 더 강해지는 듯한 느낌. 눈물을 흘릴수록 삶은 따뜻해지는 게 아니라 서늘하게 굳어져 간다. 딱딱한 마음 속의 어떤 덩어리들이 점점 늘어 간다.

그런 서늘함. 아픔. 두려움. 그리고 막막함. 아무렇지 않은 듯 그녀가 툭툭 친다. 어쩌면 이 말을 하기 위하여. 당신, 울 준비는 되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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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11 08: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ALINE 2005-02-12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추천 고마워요^^ 요즘 책이 잘 읽히지 않았는데 이 책은 그래도 슬슬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답니다. 아무렇지 않게 책장을 넘기다가 조금씩 싸해지는 기분...그런 것들도 좋았구요. 님..늦었지만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늘 건강하셔요~
 
물거울
로제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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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삶은 왜 이토록 지루하고 우울한 걸까. 몇 잔의 커피로도 맑아지지 않는 의식, 가슴에 상처가 되어 박히는 차가운 언어들, 지루할 만치 반복되는 일들과 습관적인 두통......그런 생의 우울한 껍질들이 로제 그르니에의 단편 속에서 마치 편안한 옷을 입는 것처럼 내 속으로 달라붙는다. 삶의 속살위로 나지막이 들러 붙는 우울한 그 껍질들, 그 서걱거림이 꽤나 익숙하게 느껴진다. 내 우울도 이제 지겨울 만큼 익숙해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르니에의 문장이 그 우울과 지나치도록 닮아 있기 때문일까.

그의 문장 속에서 나는 오래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이젠 내 것이 아닌 듯한 기억을 더듬거리거나 진한 커피를 홀짝거리며 솟구쳐 오르는 기억들을 애써 짓누르기도 했다. 또 가끔씩은 문장 사이로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눈물들을, 그 서걱거림들을 감당해 내느라 조금 마음이 저리기도 했던 것 같다.

그의 단편들 속에서 나는 삶의 마디마디에서 매번 힘들어하는, 누가 어깨라도 다독거려주면 곧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이들을 만난다. 조금 뻔뻔하게 살아내도 되건만, 아무렇지 않은 듯 쏘아붙이면 되건만 그게 쉽지가 않다. 그들에게 때때로 삶은 늘 치료가 필요한 것이고 언제 재발할지 알 수 없는 병이다. '육체의 병은 아니지만 죽음으로 몰고 가게 할 수도 있는 병' 그런 병을 앓고 있는 여자. 삶 자체가 아픔이고 눈물이고 고통인 여자. 그 여자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내 초조한 일상을, 불쑥 튀어나와 당황하게 만드는, 나 자신조차도 알 수 없는 삶의 불가항력적인 반응들을 생각해낸다. 천천히, 부드럽게 삶을 즐기기에 삶은 너무 가차없고 매몰차니까, 라는 변명들까지 생각해낸다.

그리고 또 한 여자. 불행조차 고상하고 멋지기만 한 연극 속의 인물과는 달리 '삶이 하루하루 그녀에게 가져다 준 불행은 추악한 것이어서' 연극 속의 인물과 실제 자신의 삶과의 균형을 맞추기가 힘이 드는 여자. 지나간 시절을 떠올리며 회한에 찬 눈물을 쏟아내는 여자. 지나간 일들을 눈물없이 이야기할 수 있을까. 감정의 굴곡없이 꺼내볼 수 없는 시간들. 그 시간들이 여자의 말 속에 묻어나온다. 그 이야기들 속에서 나 또한 내 지난 시간들을 젖은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던 것 같다.

또 서글픈 단편 하나. 약간 시든 금발의 여자. 구질구질한 일들 앞에서 당돌차게 세상을 조롱할 수 있는 여자. 자신을 무너뜨리려는 것들 앞에서 오히려 호탕하게 웃을 수 있는 그녀였지만 삶은 그녀를 괴롭히기를 그만두지 않는다. "당신은 불행을 가져오는 여자같아." 그녀가 세상에 대해 경멸찬 시선을 보내어도, 조롱에 찬 웃음을 퍼부어도 그녀의 불행은 쉬이 멈추지 않겠지.

슬프다기보다 서글픈 일상의 단면들. 건조한 듯하면서도 군데군데 물기가 스며있는 문장들. 평범한 일상 속에 숨어 있는 삶의 무게, 무게들. 필연적인 외로움, 어찌할 수 없는 고독들이 마치 생의 자연스런 한 부분인 듯한 느낌. 그래서였을까. 다섯 편의 단편을 읽으면서 나는 그 서글픔 속에서도 그것이 아주 익숙했고 편안했다. 가끔씩 내 우울들이 낯설게 느껴질 때, 그것들을 받아들이기가 힘이 들 때, 나는 로제 그르니에를 들춰 보게 될 것 같다. 그리고 다시금 그 우울한 껍질들을 아주 익숙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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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져 2004-12-22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삶이...재발하는 병이었군요... 슬픔과 서글픔은 정말 다른 옷, 멋진 리뷰예요. 몽환적이면서 흔들리고 갈등하는 시선들이 가득합니다. 땡스 투! 저도 읽어보고 싶어요.

ALINE 2004-12-22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고마워요^^ 쓰고 나서 너무 감상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감정적인 여운들을 남겨두고 싶었어요...
 
늦어도 11월에는
한스 에리히 노삭 지음, 김창활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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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정취를 맘껏 누리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성큼 다가온 겨울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 지나온 계절에 대한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알싸하게 밀려드는 그런 시간. 놓쳐버린 것들을 주워 담기엔 너무 많은 계절을 살아낸 듯한 느낌을 주는 그런. 내게 11월은 그런 시간이다. 그리고 어쩌면 11월은 생의 마지막 모험을 감행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그런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늦어도 11월에는> 속의 두 남녀에겐 말이다.

사업가의 남편이자 한 아이의 엄마인 여자. 평범하고 안락한 일상을 그럭저럭 견뎌내는 그녀에게 어느날 문득 나타나는 남자. 그는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조금 위험하게 그녀의 삶 속에 끼어든다. 그리고 그 한 마디 말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여자. 이제 그들에게 남은 건 생이 조금 더 관대하기를 바라는 것뿐.

"하지만 내가 운 건, 언젠가는 이렇게 될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늘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써왔다.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항상 조심했다. 나는 내 삶이 안전하기를 바랐다. 아주 조심해야, 운이 좋아야 이런 상황을 피할 수 있으리란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잘해나가고 있었다. 누구도 나를 흔들어놓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안다. 자신의 삶이 더이상 안전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멈출 수가 없다. 여기서 멈추면 괜찮을 텐데, 아직 멀리 오지 않았으니까 금방 되돌아 갈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삶은 때때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것. 예민하고 가녀린 그녀의 내면 풍경이 불안하게 이어진다. 다소 불안하고 때로는 신경질적인 남자와의 생활. 그와 떠나오면 모든 것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생활은 지루하고 때로는 불안하기까지 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떠나온 여자의 일상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황량하다. 예정된 외로움. 그렇게 여자는 다시 집으로 되돌아온다.

그렇지만 다시 돌아온 그녀의 일상은 이제 예전과 같지 않다. 안락한 삶을 뿌리칠 만한 모험을 감행한 사람에게 평온한 일상이 의미있을 수 있을까? 그녀는 늘 두렵다. 그가 찾아올까봐, 그를 다시 만나게 될까봐. 그리고 마치 예정되어 있었던 것처럼 그가 다시 찾아왔을 때 그녀는 조용히 그를 따라 나선다. 그녀는 알고 있다. 이제 더이상 그녀에게 주어지는 길을 비켜 설 수 없다는 것을. 비켜서기에 너무 많이 와버렸다는 것을.

평온한 일상에 어느날 문득 끼어드는 사랑. 그 사랑보다도 한 여자의 섬세한 내면의 풍경이 더 인상적이었다. 남자 작가가 썼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예민하고 부드럽고 섬세하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쓸쓸한 달이라 하기에 11월은 너무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나는 그 11월의 두려움과 떨림을 이 소설 속에서 새삼스레 발견했다. 

난 내 삶이 안전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여느 달과 마찬가지로 11월도 무사히 보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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