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늦어도 11월에는
한스 에리히 노삭 지음, 김창활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11월
평점 :
가을의 정취를 맘껏 누리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성큼 다가온 겨울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 지나온 계절에 대한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알싸하게 밀려드는 그런 시간. 놓쳐버린 것들을 주워 담기엔 너무 많은 계절을 살아낸 듯한 느낌을 주는 그런. 내게 11월은 그런 시간이다. 그리고 어쩌면 11월은 생의 마지막 모험을 감행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그런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늦어도 11월에는> 속의 두 남녀에겐 말이다.
사업가의 남편이자 한 아이의 엄마인 여자. 평범하고 안락한 일상을 그럭저럭 견뎌내는 그녀에게 어느날 문득 나타나는 남자. 그는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조금 위험하게 그녀의 삶 속에 끼어든다. 그리고 그 한 마디 말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여자. 이제 그들에게 남은 건 생이 조금 더 관대하기를 바라는 것뿐.
"하지만 내가 운 건, 언젠가는 이렇게 될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늘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써왔다.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항상 조심했다. 나는 내 삶이 안전하기를 바랐다. 아주 조심해야, 운이 좋아야 이런 상황을 피할 수 있으리란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잘해나가고 있었다. 누구도 나를 흔들어놓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안다. 자신의 삶이 더이상 안전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멈출 수가 없다. 여기서 멈추면 괜찮을 텐데, 아직 멀리 오지 않았으니까 금방 되돌아 갈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삶은 때때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것. 예민하고 가녀린 그녀의 내면 풍경이 불안하게 이어진다. 다소 불안하고 때로는 신경질적인 남자와의 생활. 그와 떠나오면 모든 것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생활은 지루하고 때로는 불안하기까지 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떠나온 여자의 일상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황량하다. 예정된 외로움. 그렇게 여자는 다시 집으로 되돌아온다.
그렇지만 다시 돌아온 그녀의 일상은 이제 예전과 같지 않다. 안락한 삶을 뿌리칠 만한 모험을 감행한 사람에게 평온한 일상이 의미있을 수 있을까? 그녀는 늘 두렵다. 그가 찾아올까봐, 그를 다시 만나게 될까봐. 그리고 마치 예정되어 있었던 것처럼 그가 다시 찾아왔을 때 그녀는 조용히 그를 따라 나선다. 그녀는 알고 있다. 이제 더이상 그녀에게 주어지는 길을 비켜 설 수 없다는 것을. 비켜서기에 너무 많이 와버렸다는 것을.
평온한 일상에 어느날 문득 끼어드는 사랑. 그 사랑보다도 한 여자의 섬세한 내면의 풍경이 더 인상적이었다. 남자 작가가 썼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예민하고 부드럽고 섬세하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쓸쓸한 달이라 하기에 11월은 너무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나는 그 11월의 두려움과 떨림을 이 소설 속에서 새삼스레 발견했다.
난 내 삶이 안전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여느 달과 마찬가지로 11월도 무사히 보낼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