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김산해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불가해한 꿈은 꾸지 않는다. 현실 속에서 고민하는 딱 그만큼만의 질량만큼 꿈을 꾸고 고뇌한다. 불가해한 현실들만으로도 생은 너무 벅차기 때문이다. 그런데 때때로 책읽기는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꿈을 꾸게 만든다. 오래전부터 계속되고 있었지만 내가 느끼지 못했던 그런 무의식의 경험 속으로 나를 불러들인다. 활자화된 언어가 내 망각된 꿈들을 불러내는 지점, 바로 그 지점에서 꿈꾸는 책읽기가 시작된다. 꿈꾸는 책읽기, 어쩌면 신화는 (적어도 나의 주관적인 생각으로는)그런 나의 몽롱한(?) 독서방식과 무관하지 않은 지점에 놓여 있다. 신화를 읽는 일은 오래된 인류의 기원 속으로, 그 몇천년의 시간이 겹겹이 쌓인 무의식의 꿈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다. 지금 여기 머무르는 우리 존재의 근원 속으로 내딛는 걸음, 걸음들이다. 지금 나를 여기 있게 한 그것. 삶과 운명과 어쩌면 죽음이 처음으로 시작된 그 곳. 그 곳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한 걸음, 한 걸음...그 발자국을 따라 가며 만나게 되는 최초의 꿈들. 꿈의 흔적들. 나의 신화 읽기는 그런 꿈의 흔적들을 찾아가는 작업이다. 그렇게 나는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를 만났다.

처음에 이 책을 접했을 때 나는 그저 막연하게 최초의 신화, 최초의 서사시라는 흐릿한 정보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최초'라는 사실을 그리 의미있게 받아들이지 못했었다. 최초의 신화, 그 탄생의 비밀을 읽으면서 차츰 내가 앞으로 하게 될 독서가 꽤나 의미있는 작업이라는 것을 조금씩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 문장을 읽으면서는 가슴이 조금 두근거리기도 했던 것 같다. 저자의 말대로 "최초의 신화, 최초의 서사시를 접할 수 있는 시기에 태어난 행운"을 나도 누리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것은 어쩌면 여기 숨쉬고 있는 여리기만 한 내 존재의 까마득한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작업이기도 할테니까 말이다.

이 책은 길가메쉬 서사시가 세상에 그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하는 과정에 대한 설명〈최초의 신화, 그 탄생의 비밀>과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전문, 그리고 길가메쉬 서사시에 대한 저자만의 독특한 해설을 엿볼 수 있는 <비극의 전주곡, 죽음의 공포>, 수많은 점포서판에 기록된 그 수많은 사연들을 200행으로, 더 간략하게 88행으로 압축해놓은 수메르 신화와 수메르 왕명록, 연대기로 이루어져 있는 <황금시대의 전설> 이렇게 4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의 미덕은 무엇보다도 길가메쉬 서사시에 대한 저자 나름의 해설에 있다. 그것은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저자가 20여년동안 매달려 이룩해낸 연구의 성과이기에 더욱 빛난다. 

내가 특히 주목한 것은 저자의 해설 중에서 여자에 관한 부분이다. 대부분의 신화에서 여성들의 위치가 지극히 비참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길가메쉬 서사시에서 여성은 남성을 문명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길가메쉬의 친구 엔키두는 신전의 음탕한 여자 샴하트를 통해 원시적인 삶에서 벗어나 '인간'으로 눈뜨게 된다. 또한 길가메쉬가 죽음이라는 인간의 숙명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무모한 모험을 감행하려 할 때 여신의 충고는 여성의 현실적 사고방식을 잘 드러내 준다는 점에서 의미있다. "길가메쉬. 배를 채우세요. 매일 밤낮으로 즐기고, 매일 축제를 벌이고, 춤추고 노세요. ...... 이것이 인간이 즐길 운명인 거예요. 그렇지만 영생은 인간의 몫이 아니지요." 끝이 있는 인생, 달콤한 순간, 순간을 즐기라고. 이미 영생의 이룰 수 없는 꿈에 깊이 빠져버린 길가메쉬의 무모한 모험은 여성의 현실적 인식을 더 각인시키는 효과를 가지게 된다. "여자의 정확한 통찰력은 언제나 남자의 생을 이끈다"는 저자의 말이 황홀하게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이다.

길가메쉬 서사시는 대부분의 서사시가 그러하듯 영웅의 이야기이다. 3분의 2는 신이고 3분의 1은 인간인, 키가 무려 11완척인 그는 무엇 하나 무서울 게 없는 영웅. 초야권을 행사하며 권력을 휘두르는 그에게 그의 힘을 제압할 친구이자 동료 엔키두가 등장한다. 엔키두와 함께 삼목산을 지키는 무시무시한 괴력의 소유자 훔바바와 하늘의 황소를 무찌르는 그는 모든 것을 다 제압할 듯한 힘을 자랑하는 영웅의 모습 그대로다. 그러나 그에게서 그러한 영웅적 면모보다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더 강하게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은 삼분의 일 존재하는 인간 때문이다. 단지 삼 분의 일밖에 존재하지 않는 그것이 그의 모든 생을 규정짓는다. 친구 엔키두의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그는 그저 연약한 한 인간일 뿐이다. 이제 그 자신에게도 죽음이 다가오리라는 걸 인식하는 인간일 뿐이다. 그로 인해 길가메쉬 또한 인간이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고독을 겪어내야만 한다. 인간이기에 맞닥뜨리지 않을 수 없는 그 거대한 끝. 그 고독한 심연. 그 길고 긴 두려움의 맛. 그런 죽음도 맛볼 수밖에 없다. 어쩔수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그 인간의 운명 때문에. 영웅의 서사시가 주는 장엄한 결말을 예상할 수 있는 건 바로 이 부분에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죽음이라는 것은 결국 삶의 문제가 아닌가. 삶의 반대어처럼 느껴지는 죽음에 내포되어 것은 다름아닌 삶, 때론 진절머리나게 싫은, 구질구질해서 끝내버리고 싶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살아내야만 하는 그런 삶이 아닌가. 죽음으로 귀결되는 것을 알면서도 열심히 살아낼 수밖에 없는 삶의 딜레마. 그런 삶의 딜레마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인간의 삶이, 그 삶의 갈등적인 모습들이 반복되는 구절 속에 잘 드러난다. 거대한 힘을 가지고 태어난 영웅이라고 해도 인간인 이상, 죽음을 피해갈 수는 없는 법. 그가 어쩔수 없이 죽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은 영웅이기에 더욱 장엄하고 그 반향은 더 강하게 남는다. 한편의 거대한 서사시는 여린 운명을 타고난 최초의 인류, 그들 자신에게 따뜻한 위안이자 죽음을 극복해가는 삶을 살아내게 하는 주술과도 같은 것이었으리라. 필연적인 고독들로 점철되어 가는 생을 보듬는 치료제로서 그들은 점토판에 그 숱한 고독들을 새기고 또 새기었으리라.

웅장한 한 편의 영화를 보듯 긴 서사시를 읽고 나면 결국 길가메쉬의 그 험난한 여정이 죽음에 이르기 위한 고된 여정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떠한 영웅도 피해갈 수 없는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기나긴 한편의 시였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인간의 창조주 엔키가 길가메쉬에게 하는 충고는 결국 죽음 앞에 한없이 무력하기만 한 우리 인간에게 들려주는 메시지다.

"인간의 가장 어두운 날이 이제 너를 기다린다. 멈추지 않는 밀물의 파도가 이제 너를 기다린다. 피할 수 없는 전투가 이제 너를 기다린다. 그로 인한 작은 접전이 이제 너를 기다린다. 그러나 너는 분노로 얽힌 마음을 갖고 저승에 가서는 안된다......"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어쩔 수 없는 숙명이라면 그것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것. 달콤했던 생의 기억들을 고이 접고, 또한 분노와 슬픔으로 얼룩진 삶도 조용히 떨쳐버리고 그저 평안한 안식을 누릴 것. 그저 편안히 잠들 것. 이제 또다른 꿈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책장을 덮고 나서 마치 지독한 꿈을 꾸고 난 것처럼 길가메쉬의 반복되는 절규가 남아서 내 뇌리속을 맴돌았다. "나는 죽을 것이다! 나도 엔키두와 다를 바 없겠지. 너무나 슬픈 생각이 내 몸속을 파고드는 구나! 죽음이 두렵다." 죽을 것이다, 죽음이 두렵다...반복되는 죽음의 공포가 내 몸속을 파고드는 순간, 나는 문득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마지막 책장을 덮는다. 기나긴 꿈에서 깨어난 듯, 삶의 비밀스러운 모든 것을 맛본 듯한 달콤한 느낌이기도 했다가 삶의 모든 것을 알아버려서 더이상의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는 그 허탈하고 쓸쓸한 느낌이기도 한, 그 지독한 꿈의 여운.... 한 달 내내 이 책을 들고 지냈던 것 같다. 꿈에서 깨어났다 다시 이 오래된 꿈 속으로 들어가기도 했고 다가오는 죽음 속에서 길가메쉬와 함께 나도 서서히 침잠해 들어가는 순간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기도 했다. 꿈과 꿈을 오고가면서 마치 오래된 꿈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기분으로 책을 읽어 내려갔다.

수많은 상징과 해독 불능인 점토판의 기록들을 나름대로 유추해내면서 영웅의 이야기에서 인간, 바로 나 자신의 이야기를 끄집어내었고 영원의 시간 속에서 지금 이 순간을 마음 한 켠에 담았다.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진실은 그가 무엇을 가졌든 언젠가 지금 여기의 삶이 끝난다는 사실. 지금 이 순간 순간을 달콤하게 즐길 의무가 있다는 사실. 바로 그러한 것들을 느낀 것만으로도 오래된 꿈 속으로 들어간 나의 책읽기는 다소 성공적이었다 말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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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3-02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생사용법이라는, 책 제목을 따라 왔습니다.
책이 나왔을 때 제목에 끌려 메모해놓고 까맣게 잊고 있었네요.
가끔 들러서 님의 글 읽고갈게요.
울림이 있는 리뷰입니다.

urblue 2005-03-02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림이 있는 리뷰'라는 로드무비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ALINE 2005-03-03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urblue님.
한 달 내내 이 책만을 들고 있었던 것 같아요. 아직도 그 여운이 남아 있네요.
리뷰 좋게 봐주셔서 고마워요.^^

플레져 2005-03-13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각사각... 님의 리뷰에선 언제나 그 묘한 소리가 납니다. 한동안 서재에 못 들어왔던 즈음에 올리셨네요. 그래도 지금,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어 좋아요. 시를 읽은 것 같아요....

ALINE 2005-03-16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고마워요. 시을 읽은 것 같은 느낌...저야말로 님의 리뷰를 읽을 때마다 그런 느낌을 가졌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