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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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박 두 시간을 걸려 도착한 지방의 소도시, 어느 카페에 앉아 당신의 책을 읽었어요. 왠지 그곳이 당신의 소설을 읽기에 아주 좋은 장소 같았거든요. 지나간 팝송이 희미하게 흘러나오고, 깔깔거리며 수다를 떠는 사람들 틈에 앉아 당신의 소설을 펼쳐 들었습니다.

한 장 한 장 조심스럽게 넘기며 당신의 문장 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가라앉았다는 표현이 적절한지, 잠시 생각해봅니다. 조금 침울한 표현 같기는 해요. 아니면, 마음을 담그었다고 할까요. 당신의 이야기 속에 천천히 내 마음을 모두 맡겼어요. 많은 말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졌어요. 차마 겉으로 표현하지 못했던 말들이, 그저 내 안에서 삭히려고만 했던 말들이 어두움 속에서 천천히 올라와 나를 흔들어 놓았어요. 그리움이라든가, 사랑이라든가 외로움, 그리고 내 생을 단단히 감싸고 있는 슬픔 같은 말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당신은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이 흔들리고 흔들렸을까. 얼마나 많은 말을 걸러 내고, 걸러냈을까. 이 한 권의 책을 태어나게 하기 위해 당신 안에서 얼마나 많은 말들이 풍화 작용을 거쳤을까. 그 시간들을 상상하는 일이 나에겐 얼마나 아득하고 또 아득해지는 일인지. 당신은 알까요.

태어나자마자 소멸해 가는 존재를, 이토록 눈물나게 그려내기 위해, 당신은 얼마나 아프고 아픈 시간을 견뎌냈을까. 사진으로 손을 건네는 서하처럼, 어쩌면 당신도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우리에게 자신의 손을 건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그 손을 오래도록 잡고 있고 싶어요. 마주잡은 손의 온기만큼 삶은 조금 더 따뜻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이야기를 늘어놓던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또 새로운 이야기를 늘어놓는 카페. 그 안에서 꼬박 몇 시간을 앉아 당신의 소설을 다 읽었습니다. 천천히 어둠이 내려앉는 시간, 나는 ‘이야기’로 누군가를 위로해주고, 누군가를 따뜻하게 만들고, 누군가를 흔들어 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 일인지를 생각하며 책을 덮었습니다. 책을 덮고 나서도, 자꾸만 매끄러운 책의 표지를 쓰다듬었어요. 마땅히 그래야만 할 것 같았지요. 당신이 건넨 편지에 한동안 또 내 마음이 애틋해지고, 아득해질 거라는 걸 예감하면서요.

‘이야기’로 누군가를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건, ‘이야기’로 누군가를 울 게 만들 수 있다는 건 참 근사한 일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무슨 말이라도 써서 편지를 보내야만 할 것 같게 만드는 사람. 바로 당신이에요.

 

말을 가져서 덜 아플 수 있다는 것.

아름의 편지에 나오는 이 말에 내 마음은 또 얼마나 애틋해졌는지. 애틋하다는 표현밖에 쓰지 못하는 나는 또 얼마나 작고 초라한 말을 가지고 있는지. 그래도 참 다행이에요. 이렇게 말이 있어서 당신이 만들어낸 이야기를 읽을 수 있으니까요.

너무 아스라해서 손에 쥐면 꺼질 것 같은 이야기를, 너무 아득해서 그려볼 수 없는 이야기를, 너무 슬퍼서 꺼내기 힘든 이야기 속에서 고요하게 가라앉도록 만들어준 당신. 그런 당신에게 고맙단 이야기를 꼭 하고 싶었어요. 당신의 이야기를 읽으며 강렬하게 살고 싶었던 한 순간을, 삶이 너무나 아름다워 눈물이 날 것만 같았던 순간을, 누군가를 보고 참 아름답다 생각했던 순간을 떠올렸습니다. 모든 슬픔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든다면 견딜 만해진다. 라는, 극작가 딘센이 했던 말도 함께 떠올랐어요.

당신의 이야기를 읽었던 시간은 내가 했던 수많은 말들과 그 말들 속에서 겹겹이 쌓여 있는 그리움을 꺼낸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간 동안, 내 마음의 물결이 얼마나 찬란한 빛으로 일렁거렸는지, 당신은 알까요.


이제야 알겠습니다. 당신의 편지를 기다리는 일이 내게는 참 행복하고 애틋한 일이라는 것을요. 당신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김애란. 당신의 다음 편지를 기다리며 조금 더 두근두근거려도 괜찮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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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박물관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27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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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했던 순간, 언젠가 이 순간이 그리워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기에 애틋해했던 적이 있다. 행복한 감정의 끝에 늘 슬픔이 물들어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건 그 때문일까. 오르한 파묵의 첫 연애소설을 읽는 내내 느껴야 했던 감정도 그런 것이었다.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는 것을 몰랐다.” 라는 첫 문장을 읽을 때, 나는 이미 이 소설이 가져다 줄 슬픔을 알았다. 결국에는 슬픔으로 치달을 것을 알면서도 사랑에 빠져드는 사람처럼, ‘이제 다시는 연애를 하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하면서도 대책 없이 연애를 시작하는 사람처럼 나는 이 소설이 가져다 줄 슬픔과 고통을 알면서도, 이야기의 깊숙한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이미 나는 이 소설과 사랑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지독한 사랑에 빠져버린 남자의 이야기지만, 지독한 질병에 걸린 남자의 이야기를 읽는 것만 같았다. 사랑이란 치유할 수 없는, 영원한 상처를 마음에 품는 일인 걸까. “사랑은 교통사고” 그리고 “사랑은 심각한 질병”이라고 말하는 작가의 생각은 이 소설에 그대로 묻어난다. 남자는 이 심각한 질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애쓴다. 때로는 이 질병으로부터 벗어났다고 생각할 때도 있지만, 증상은 계속되고 오히려 상황은 더 나쁘게 흘러간다. 남자는 이 질병으로부터 영원히 회복될 것 같지 않다. 오직 고통을 달래줄 방법을 찾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남자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랑의 고통을 달랜다. 사랑하는 여자와의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만지며 추억을 떠올리는 행위는 그에게 가장 훌륭한 처방전이 된다.


“하지만 가장 행복한 순간을 생각했을 때, 그것이 이미 아주 오래전 일이며,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우리에게 고통을 준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 고통을 견딜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황금의 순간이 남긴 물건을 소유하는 것이다. 행복한 순간들 이후에 남겨진 물건은 그 순간의 기억, 색깔, 보고 만지는 희열을, 그 행복을 느끼게 해 준 사람들보다 더 충실히 간직하고 있다.” 125-126쪽

시계, 찻잔, 머리핀, 자, 빗, 그리고 담배꽁초까지 사랑하는 여자의 향기가 묻어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에게는 훌륭한 약이 되었다. 물건들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순간들 속으로 잠시나마 돌아갈 수 있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행복했던 순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고통을 잠시나마 희미하게 만들어줄 수 있었다. 어떤 기억이 스며있는 물건은 함부로 버리지 못한다. 그것이 담배꽁초라 해도, 특별한 기억이 들어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 담배꽁초는 특별한 것이 된다.


남자가 자신의 약혼식 이후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을 때, 그리고 결국 약혼한 여자와 파혼하고 사랑하는 여자를 다시 만났을 때, 그녀가 이미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리고 결혼한 그녀를 계속 만나면서 자신의 사랑을 삭이려 할 때에도 그를 사랑의 고통에서 구해주었던 것은 물건들이었다. 사랑하는 여자의 향기가 배어 있는 물건들. 그 물건들 속에서 그는 사랑이 주는 고통과 처절한 싸움을 벌인다.

남자의 한 여자에 대한 사랑은 “서서히 그녀의 모든 세계, 그녀와 관련된 모든 것, 그녀의 모든 순간과 물건으로 퍼졌다.” 8년 동안이나 사랑하는 여자의 집에 가서 그녀의 가족들과 저녁 시간을 보내면서, 그리고 통행금지 시간 전에 가까스로 그 집을 빠져 나오면서 남자는 그 집에 있는 것들을 한 가지씩 훔쳐 온다. 남자는 도자기 개 인형, 담배, 라크 잔, 설탕통 등 그녀의 집에 있는 물건 하나하나를 이제 그녀의 일부로 생각한다.

잠깐 잠깐씩 소개되는 정보를 통해 사랑하는 여자의 일부로 생각했던 그 물건들이 남자가 만드는 박물관에 전시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야기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이제 수많은 박물관을 찾아다니며 자신만의 박물관을 만들려고 애쓰는 남자를 만나게 된다. 남자는 이제 자신의 마지막 남은 생을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삶의 전부였던 사랑을, 사랑의 역사를 아주 작은 것 하나까지 세세하게 정리하는 인류학자가 된다. 우리는 이 남자가 만든 박물관에서, 한 사람에게 사랑의 순간이 어떻게 다가왔는지를, 사랑이 어떻게 한 사람의 삶에 퍼져나갔는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사랑이 사치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사랑이 삶의 전부다. 소설 속 남자는 그의 삶에서 사랑을 빼면 어떤 것도 의미가 없다. “사랑을 영원히 잃어버린 것을 깨달은 후의 삶에는 단지 ‘저속한 소일거리’만 남아 있었다”라고 말한, 네르발이라는 시인의 말은 남자에게도 정확하게 적용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은 남자에게 그저 무의미하고 속될 뿐이다. 사랑의 고통 때문에 목을 맨 네르발의 운명을 남자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언젠가는 사랑하는 여자를 만날 것이라는 믿음이, 그리고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는 언젠가 그녀와 사랑을 나누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남자를 살게 만들었고, 살아내게 했으니까.

삶의 모든 것은 단지 사랑하고 있느냐, 아니냐의 두 가지 문제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걸 믿는다면, 이 책 속으로 빠져드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이 책 안으로 너무 깊이 빠져버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책을 읽고 나서, 너무 오랫동안 지나간 사랑 속에서 헤매지 않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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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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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별 것 아닌 것들이 위로가 되는 순간이 있다. 지친 저녁,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커피를 들이키는 순간이나 머리가 멍한 아침에 달콤한 초콜릿 한 조각을 먹으며 힘을 얻는 순간처럼.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순간들이 떠올랐다. 한 모금의 따뜻한 커피와 달콤한 초콜릿 한 조각으로 쓰디쓴 일상을 위로했던 것처럼, 이 책이 선물해주는 것들도 그런 달콤한 순간들이 지닌 마법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일상적인 삶에서 잠시 벗어나, 책장을 넘길 때 나는 내 삶이 조금 더 달콤해지는 상상을 했다. 그 달콤함을 조금 더 오래 유지하고 싶어서, 단편 하나하나를 아껴가며 읽었다.

열세 편의 이야기들 속에 저마다 다른 삶과 일상이 직조되어 있지만, 이 연작소설의 중심에 있는 인물은 올리브 키터리지라는 여성이다. 이야기의 중심에 나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거나, 때로 잠깐 스쳐지나가는 조연으로 등장하지만 그럴 때조차 그녀가 남기는 발자국은 크게 느껴진다. 커다란 체구를 가지고 있지만, “음식이 주는 위안을 내던질 생각은 없는” 사람이고, 누구에게나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고(심지어 가족에게도) 변덕스러운 기분을 휘둘러 자신의 가장 가까운 사람을 망치기도 하는 사람이다. 변덕스러운 기분을 휘두르며 미안하다고 말할 줄 모르는, 이 사람이 전혀 이해되지 않다가도, 어느 순간 그녀의 삶에 강한 연민을 느낀 것은 우리 삶 자체가 변덕스러운 신의 장난 같다고 느낀 적이 많았기 때문이었을까.


작가는 인터뷰에서, “일상적인 매일의 삶이 쉬운 것만은 아니라는 점, 그리고 존중할 만한 것이라는 점”을 독자들이 느끼길 바란다고 말했다는데, 올리브 키터리지는 그런 작가의 말을 가장 잘 전달하는 인물처럼 여겨진다. 누군가에게는 변덕스럽고, 괴팍하고, 거만하게 보일지라도, 그녀 자신은 결코 쉽지 않은, “일상적인 매일의 삶”을 견뎌내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내가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연민을 느꼈던 인물 가운데 하나로, 올리브 키터리지라는 인물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올리브 키터리지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 숨어 있는 고통과 슬픔을 저마다 다른 빛깔로 촘촘하게 엮어냈다. 누가 무엇을 하는지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는지까지 훤히 알 것 같은 작은 마을 안에서, 벌어지는 삶의 풍경들은 다들 고만고만한 슬픔과 기쁨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네 삶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특별한 것은 없지만, 다들 저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헤쳐 나가고 있지 않은가. 이웃집 사람들을 슬며시 엿보는 것처럼, 이들의 삶을 조심스럽게 훔쳐보았다.


남편의 병이 나으면 함께 여행가자고 여행 책자를 모으며 행복한 공상을 하지만, 결국 남편을 보내야 하는 여자도 있고, 혼자된 여자를 보며 아내 몰래 애틋한 마음을 품는 남자도 있다. 누군가의 슬픔을 보며 위안을 받으려 하지만 그것마저 쉽사리 되지 않는 여자도 있고, 이제 더는 애틋하지도, 다정하지도 않은 아내에게 상심을 느끼는 남자도 있다. 모두가 그럭저럭 살아내는 듯 보이지만, 그 속에 스며있는 슬픔은 지독해서 놀랄 때도 많았다.

“사람들은 그럭저럭 살아낸다는 그 말. 올리브는 확신하지 못한다. 거기에도 여전히 파도는 있지, 올리브는 생각한다.” 314쪽
 
소설을 읽기 전, 나는 이 소설이 달콤할 거라 생각했다. 이 책에 쏟아진 수많은 찬사를 보며 이 소설을 읽으면 삶이 조금 더 따뜻해질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하나하나 단편을 읽을 때마다 나는 당혹스러웠고, 심지어 괴로운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그래도 연속해서 읽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을까. 소설을 읽으면서, 삶에서 우리를 절망에 빠뜨리는 것은 불행한 사건이 아니라, 관계에서 비롯되는 슬픔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연하게 인질극을 경험한 키터리지 부부는 불운한 그 사건 때문이 아니라, 그 사건 당시 서로 주고받았던 말 때문에 상처받는다. 변덕스러운 어머니 때문에 힘들었던 아들은 결혼해서 어머니의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면서 상처를 극복하려 한다.

그럼에도 결국 모든 단편의 밑바탕이 되는 것은 모든 삶을 지탱시켜주는 유일한 힘은 ‘사랑’이라는 사실이다. 나이가 들어 주름이 져 보기 흉한 얼굴도 누군가에게는 사랑하는 이의 얼굴이라는 걸, 늙어서도 우리의 심장은 여전히 사랑 때문에 더욱 가파르게 뛸 수밖에 없다는 걸, 그 사실을 나는 마치 새삼스럽게 확인한 것처럼 약간 들떴다. 올리브 키터리지는 자신과는 너무나도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가진 사람에게 기댄다. 남편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녀는 외로움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걸,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사람을 죽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입니다.”라는 문장은 은근슬쩍 작가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을 끼워 넣은 것만 같다. 결국 모든 삶의 결과는 사랑과 결부되어 있다고, 나는 쉽게 단정 짓는다.

그리고 또 하나. 지친 일상에 찌들려 잊기 쉬운 사실을 작가는 넌지시 찔러준다. “정말 어려운 게 삶”이고, 언제나 “너무 늦었을 때에야 뭔가를 깨닫는 것이 인생”이며 “인생은 뼈와 마찬가지로 서로 얽혀 직조되며 어긋난 뼈는 치유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래서 가끔씩 누군가는 남겨질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고 삶을 끝내기도 하지만, 그래도 “삶은 선물이라고” 우리는 이 선물 같은 삶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단편 하나하나를 읽었던 순간은 약간 괴롭기도 했지만, 책 전체를 다 읽고 나서 드는 느낌은 괴로움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앞에서도 말했듯이, 달콤한 기분이었다. 어떤 괴로운 삶에도 삶을 만끽할 수 있는 순간은 존재한다. 그런 순간들 덕분에 마치 건망증 환자처럼, 삶이 괴롭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우리는 삶을 선물처럼 받아들인다. 누군가를 수십 년 동안 알면서 지낼 수 있다는 것이 행복이라는 걸, 자신과는 생각이 달라도 외로움으로부터 구해줄 누군가가 있다는 게 행복이라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의 순간순간을 정교하게 빚어내는 작가의 솜씨는 단편 하나하나에 세밀하게 스며들어 있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슬픔에서 일어설 수 있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작가는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쪽지 하나 없이 가까운 사람들과 이별할 생각을 품다가도, “내가 당신 곁에 있어요.”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곁에 있기에 그럭저럭 삶을 이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펼쳐 보인다. 일상을 달콤하게 요리하다가도 날카롭게 선을 그어버리는 작가의 능력 덕분에 아주 오랜만에 근사한 선물을 받은 것 같은 기분으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은 달콤한 초콜릿을 맛보거나,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 순간처럼 일상에 작은 기쁨을 주는 순간이 하나 더 생긴 것만 같았으니까.


이 책을 읽고 나서, 내가 가장 먼저 했던 일은 포스트잇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아무렇게나 적은 거였다. 때때로 사랑하는 사람이 최근에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무엇인지 물어보기, 선물 같은 삶을 마음껏 즐기기,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가 당신 곁에 늘 함께할 거라고 말해주기, 내 변덕스러운 기분으로 다른 사람의 기분을 망치지 않기, 같은. 약간의 흥분과 약간의 들뜸이 섞여 있는 것만 글씨를 바라보며, 가끔씩 이 작은 책이 주었던 선물을 기억해낼 것이다. 그러면서 달콤씁쓸한 초콜릿을 삼키듯,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기분으로 이 책에 빠져들었던 시간도 함께 떠올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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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06 23: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19 2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22 11: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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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좋은 사람
줌파 라히리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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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고 나니 언젠가 보았던 영화의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영화 속에서 늙은 남자는 어느 날 갑자기 아내를 잃고 혼자가 된다. 아버지를 짐처럼 여기는 자식들 속에서 남자 또한 쓸쓸하게 죽음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영화를 보고 나서 한동안 마음이 서걱거렸던 것처럼, 이 소설집을 읽고 나서도 한동안 마음이 아렸다. 소설을 읽는 내내 너무 힘든 길을 걸었던 탓이다. 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소설 속으로 걸어 들어가 숨고 싶었다. 하지만 숨을 곳을 찾지 못한 채 계속 헤매기만 했다. 숨을 곳을 주지 않고, 예리하게 드러내 보이는 작가의 문장 앞에서 한없이 쓸쓸해졌고, 고독해졌다. 언젠가 경험했던 고독이었고, 쓸쓸함이었다. 그 익숙한 감정들이 책장을 넘기는 순간, 순간 파고들었다. 한 장, 한 장 넘기기가 참 힘들었지만, 끝까지 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마주하는 그 고독과 쓸쓸함이 때로는 편안하게 느껴지기도 했으니까.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들은 거의 비슷하다. 자신이 태어난 곳을 떠나와 낯선 땅에서 살아가는 이민자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미국으로 떠나온 인도인들이다. 낯선 땅에 정착한 만큼 그들에게 외로움이나 고독은 더 절박한 생의 조건처럼 여겨진다. 그렇기에 가족에게 기대는 무게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는 이질적인 문화를 나누어 가지면서, 서로 낯선 사람이 되어간다. 부모 세대는 인도 전통 문화를 고수하지만, 자식 세대는 미국식 문화가 더 익숙하다. 단편 <길들지 않은 땅>에서 딸이 우연하게 발견한 아버지의 엽서는 딸이 모르는 벵골 어로 쓰여 있다. 어머니가 죽은 뒤에 딸과 아버지 사이에 싹트는 불안한 씨앗은 딸에게는 낯선 언어로 쓰여 있는 그 엽서 때문에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이제 그들의 관계에서도 낯선 언어들이 차곡차곡 쌓여 갈 것임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작가는 각각의 단편에서, 부부, 부모와 자식, 형제 등 가족 속에서 어긋나고 삐거덕거리고 무너지는 관계를 예리하게 담아낸다. 아내를 잃은 남자는 딸네 집에 가서 일주일을 보내고 난 뒤 가족이라는 무게를 끔찍하게 여기며 도망치듯 떠난다. 결혼식에 참석한 남자는 술에 취해 아내를 혼자 결혼식에 내버려두고, 호텔로 와 잠이 든다. 누나는 알코올 중독에 빠진 동생에게 너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고, 동생은 그런 누나에게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소설을 읽다 보면,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가족을 이루는 그 평범한 풍경들 속에 도사리고 있는 고요한 어둠을 조금씩 맛본 느낌이 든다. 조금씩이지만 거의 모든 것을 다 알아버린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편안하고 때로는 말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하지만, 또 때로는 지독하게 외롭고 슬픈 느낌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서로 공존할 수 없는 느낌들이 함께하는 생활. 전혀 알지 못했던 누군가를 만나서 함께 살고 또 전혀 알 수 없을지도 모를 누군가가 더 생겨나면서 커져 가는 복잡함. 가족이야말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라고 착각하는 데서 생겨나는 외로움. 그런 여러 가지 감정들이 얽히면서 소설을 읽는 일은 점점 힘든 일이 된다. 결국 “가족을 이루는 일 자체, 이 땅에 아이들을 낳는다는 자체가 때로 만족감을 주는 만큼 애초부터 어딘가 잘못된 일”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1부에서 가족이나 연인처럼 가까운 이들 간의 어긋나는 관계 속으로 카메라를 바짝 갖다 댔다면, 2부의 ‘헤마와 코쉭’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는 세 편의 단편은 그보다 더 나아간 느낌이다. 작가는 고독하고 쓸쓸한 삶의 원인이 결국 우리가 삶의 끝에 언젠가는 다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있다는 것을 들추어낸다. 잘 아는 여자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 눈물을 터뜨리는 여자 아이. 시간이 흘러 또 다시 가까운 이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더 깊고 더 자욱한 슬픔이 죽음 위로 드리운다. 엄마를 잃은 남자가 엄마의 그림자 속에서 아주 오래 외로웠던 것처럼 여자 또한 남자의 그림자 속에서 오래도록 아플 것이다.

소설을 이끌고 나가는 것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는 이들이고, 그들과 어울려 사는 삶이지만 무엇보다도 소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죽음의 이미지다. 결혼을 앞둔 여자는 자신이 하려는 결혼이 어딘가 죽음과 닮아 있다고 여긴다. 딸은 엄마가 언젠가 자신의 몸에 점화 용액을 붓고 성냥을 그으려고 했던 순간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바로 가까이에서 죽음의 현장을 목격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여자 아이는 눈물을 터뜨린다. 작가는 평온하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 갑자기 죽음을 끼워 넣는다. ‘끼워 넣는다’는 표현이 적절한지 모르겠다. 새로운 여행을 계획하고, 새로운 삶을 꿈꾸는 순간,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누군가 죽는다. 하지만 남은 사람들은 알고 있다. 가까운 이의 죽음 뒤로도 아득한 날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누군가는 그 죽음 속에서 가까스로 생활을 이어나간다. 그리고 누군가는 어떻게든 죽음을 견뎌낸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누군가를 죽음에서 구해내는 것은 가장 가까이 있는 가족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점화 용액을 몸에 붓고 죽음 바로 앞에 다가갔던 여자를 구해낸 건, 남편이나 자식이 아니라 이웃집 여자였다. 알코올 중독에 빠진 남자를 구해낸 건 부모와 누나가 아니라, 같이 살게 된 여자였다. 가족은 가장 가까이 있지만 가장 멀리 있고,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는 건 같이 살아온 삶의 무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서로 많은 부분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또한 많은 부분을 함께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만큼 쓸쓸한 것이 또 있을까.

죽음이라는 직접적인 사건의 묘사보다 더 서늘하게 만드는 것은 죽음과도 같은 관계에 대한 묘사이다. 항상 가까이 있지만 언젠가부터 가장 가까운 관계라 믿었던 그 관계가 어느 순간, 예기치 않게 무너져 내린다. 그것은 죽어버린 관계나 마찬가지다. 작가는 관계가 끝나는, 바로 그 순간 속으로 독자를 데려간다. 무너져 내린 관계 앞에서 느끼는 막막한 두려움은 온전히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앞으로도 어떻게든 이어지겠지만 이미 죽어버린 관계, 더 이상 회복될 수 없는 관계에 대한 상실감이 책장을 덮고 나서도 끝없이 이어진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씁쓸함이 남아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것은 죽어가는 관계를 예리하게 포착해내는 작가의 능력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처음엔 슬픔인 줄 알았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슬픈 게 아니었다. 소설이 주는 느낌은 슬픔이라기보다 쓸쓸함이다. 그리고 그 쓸쓸함은 낯선 것이 아니고 익숙한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오래도록 쓸쓸함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던 이유는 그 쓸쓸함이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나는 앞으로 생의 책갈피, 책갈피마다 이 작가가 주었던 쓸쓸함을, 두려움을, 막막함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내 가까운 사람들이 아주 멀리 있다고 느낄 때마다. 그리고 어긋나는 관계들 속에서 삶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는 것을 느낄 때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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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란 무엇인가 - 책 만드는 사람의 거의 모든 것에 대하여
김학원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S로부터 이 책을 선물받은 건, 아마도 최종 교정을 보느라 신경 쇠약의 날들을 보내고 있을 때였을 것이다. “너에게 꼭 필요한 책 같아서”라며 건네주는데 넘겨보니 면지에는 신문에서 오려낸 듯한, 이 책의 소개기사가 붙어 있다. 신문에서 보고 부리나케 주문했을 S를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무엇보다 그 마음이 고마웠고. 면지에 빼곡히 적어놓은 S의 사랑스러운 잔소리 같은 글을 뒤로 하고, 책장에 책을 꽂아두고 한동안 잊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이 책을 들여다 본 건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인쇄가 끝나고 이래저래 마음을 추스르고 싶었던 때, 이 책을 들여다보며 찬찬히 지난 시간들을 떠올렸다. 마치 열정적인 연애에 빠진 사람처럼, 책에 빠져들던 그 때의 시간들을.


밑줄을 치며 꼼꼼하게 책을 읽었다. 그저 편집자를 꿈꾸었던 시절에 읽었다면 마음에 와 닿지 않았을 말들이 읽는 순간, 푹푹 스며들었다. 잘 알지 못했다면, 그저 흘러들었을지도 모를 말이 때로는 후회로, 때로는 생생한 충고로 스며들었다. 저자는 독자를 세 집단(편집자 지망생, 1∼3년차 편집자, 5∼7년차 편집자)으로 생각하며 썼다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 책의 핵심 독자는 1∼3년차 편집자가 아닐까 한다. 편집자 지망생에게는 어쩌면 마음에 바로 와 닿지 않을 충고들이 많다. 그것은 지금 한창 일에 빠져든 시기, 현실에 바로 적용해볼 수 있는 조언들이 많다는 얘기도 되겠다.


“편집자는 책으로 모든 것을 말하는 전문가이다.” 179쪽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은 편집자는 자신의 분야에 있어서만큼은 책을 쓰는 저자보다도 더 전문가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전문성을 쌓는 과정은 참으로 험난한 과정이라는 것. 편집자의 세계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한 권의 책이 그저 저자가 뚝딱 만들어내는 것인 줄만 알았다. 한 권의 책이 탄생하기까지 얼마나 길고 험난한 과정이 숨어 있는지 미처 몰랐을 때 얘기다.


저자가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편집의 영역 중에서 기획에 비중을 두었다. 어떻게 저자를 섭외하고, 기획안을 작성하는지 책의 밑바탕을 그리는 작업을 상세하게 알려준다. 하지만 이 책은 책의 내용을 어떻게 구성하고 저자와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조언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책의 디자인에서 책이 나온 후 홍보까지, 그야말로 책의 탄생에서부터 날개를 입히는 일까지 책 만드는 일의 거의 모든 것을 다룬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거의 각 장마다 끝에 있는, 놓치기 쉬운 결정적인 실수,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 현장에서 쓴 편집자 노트였다. 잊어버리기 쉬운 사실이나 잘 알면서도 매번 실수하게 되는 것들을 지적해준 부분이었다. 오랜 시간, 무수한 시행착오 끝에 얻은 사실들이기에 더 생생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포스트잇에 써서 잘 보이는 곳에 붙여 놓고 싶은 말이 참 많았다.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읽으면서는 얼마나 마음이 많이 찔렸는지 말하고 싶지 않다. 한 가지 더. ‘한국의 편집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제목이 붙은 12장은 편집자의 세계를 다시금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55명의 편집자에게 설문조사를 한 결과를 정리한 결과물인데, 현장에서 일하는 편집자들의 생생하고 다양한 조언들과 경험담을 엿볼 수 있었다. 읽으면서 계속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또는 ‘맞아, 맞아.’ 또는 ‘어머, 어떡해!’하는 말을 속삭였던 것 같다.


편집자로 일하면서,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어 답답했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좋은 선배나 상사를 만나지 못한다면, 혼자서 모든 것을 짊어지고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편집자를 위한 책이 너무 늦게 나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이런 책이 나올 수 있어서 참 기쁘고 좋다. 정말 책 만들기에 미쳐 있고, 평생토록 책 만들기에 빠져들고 싶은 사람. 매일매일 책과 연애에 빠져있는 사람. 좀 더 잘 만들고 싶고, 좀 더 근사한 책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고 싶은 사람. 이 책은 그런 사람을 위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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