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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거울
로제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6월
평점 :
품절
삶은 왜 이토록 지루하고 우울한 걸까. 몇 잔의 커피로도 맑아지지 않는 의식, 가슴에 상처가 되어 박히는 차가운 언어들, 지루할 만치 반복되는 일들과 습관적인 두통......그런 생의 우울한 껍질들이 로제 그르니에의 단편 속에서 마치 편안한 옷을 입는 것처럼 내 속으로 달라붙는다. 삶의 속살위로 나지막이 들러 붙는 우울한 그 껍질들, 그 서걱거림이 꽤나 익숙하게 느껴진다. 내 우울도 이제 지겨울 만큼 익숙해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르니에의 문장이 그 우울과 지나치도록 닮아 있기 때문일까.
그의 문장 속에서 나는 오래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이젠 내 것이 아닌 듯한 기억을 더듬거리거나 진한 커피를 홀짝거리며 솟구쳐 오르는 기억들을 애써 짓누르기도 했다. 또 가끔씩은 문장 사이로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눈물들을, 그 서걱거림들을 감당해 내느라 조금 마음이 저리기도 했던 것 같다.
그의 단편들 속에서 나는 삶의 마디마디에서 매번 힘들어하는, 누가 어깨라도 다독거려주면 곧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이들을 만난다. 조금 뻔뻔하게 살아내도 되건만, 아무렇지 않은 듯 쏘아붙이면 되건만 그게 쉽지가 않다. 그들에게 때때로 삶은 늘 치료가 필요한 것이고 언제 재발할지 알 수 없는 병이다. '육체의 병은 아니지만 죽음으로 몰고 가게 할 수도 있는 병' 그런 병을 앓고 있는 여자. 삶 자체가 아픔이고 눈물이고 고통인 여자. 그 여자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내 초조한 일상을, 불쑥 튀어나와 당황하게 만드는, 나 자신조차도 알 수 없는 삶의 불가항력적인 반응들을 생각해낸다. 천천히, 부드럽게 삶을 즐기기에 삶은 너무 가차없고 매몰차니까, 라는 변명들까지 생각해낸다.
그리고 또 한 여자. 불행조차 고상하고 멋지기만 한 연극 속의 인물과는 달리 '삶이 하루하루 그녀에게 가져다 준 불행은 추악한 것이어서' 연극 속의 인물과 실제 자신의 삶과의 균형을 맞추기가 힘이 드는 여자. 지나간 시절을 떠올리며 회한에 찬 눈물을 쏟아내는 여자. 지나간 일들을 눈물없이 이야기할 수 있을까. 감정의 굴곡없이 꺼내볼 수 없는 시간들. 그 시간들이 여자의 말 속에 묻어나온다. 그 이야기들 속에서 나 또한 내 지난 시간들을 젖은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던 것 같다.
또 서글픈 단편 하나. 약간 시든 금발의 여자. 구질구질한 일들 앞에서 당돌차게 세상을 조롱할 수 있는 여자. 자신을 무너뜨리려는 것들 앞에서 오히려 호탕하게 웃을 수 있는 그녀였지만 삶은 그녀를 괴롭히기를 그만두지 않는다. "당신은 불행을 가져오는 여자같아." 그녀가 세상에 대해 경멸찬 시선을 보내어도, 조롱에 찬 웃음을 퍼부어도 그녀의 불행은 쉬이 멈추지 않겠지.
슬프다기보다 서글픈 일상의 단면들. 건조한 듯하면서도 군데군데 물기가 스며있는 문장들. 평범한 일상 속에 숨어 있는 삶의 무게, 무게들. 필연적인 외로움, 어찌할 수 없는 고독들이 마치 생의 자연스런 한 부분인 듯한 느낌. 그래서였을까. 다섯 편의 단편을 읽으면서 나는 그 서글픔 속에서도 그것이 아주 익숙했고 편안했다. 가끔씩 내 우울들이 낯설게 느껴질 때, 그것들을 받아들이기가 힘이 들 때, 나는 로제 그르니에를 들춰 보게 될 것 같다. 그리고 다시금 그 우울한 껍질들을 아주 익숙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