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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199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어제, 당신은 무엇을 꿈꾸고 있었는지. 그저 막연하기만 해서 도무지 확신할 수 없었던, 그러나 너무나 강렬해서 때로는 그것에 압도당할 것만 같던 그런 꿈들이 아니었는지. 꿈이 아니었다 해도 자신의 마음 한 구석을 점령한 채 현실에서 자꾸 벗어나도록 부추기는 그런 것들이 아니었는지. 하지만 어느샌가 아무렇지도 않게 텅 비어버린 일상을 그냥 그렇게 살아내고 있는 건 아닌지. 쓸쓸한 일상. 어느샌가 낯설어져 있는 것들. 그런 쓸쓸한 일상 속에 <어제>가 있다. <어제>의 고독이 있다.
자신의 선생님과 창녀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라는, 아픈 과거에서 도망쳐 나와 이국의 낯선 땅에서 둥지를 튼 망명자, 토비아스. 그에게는 수치심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려고 했던 어두운 과거가 있다. 그는 낯선 이국 땅에서 단순한 업무를 반복하는 공장 일을 하면서 어두운 과거로부터 적당히 도피하며, 그리고 같은 처지에 있는 망명자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낯선 곳에서 느낄 수밖에 없는 외로움들을 적당히 잊으며 지낸다.
그런 그에게 한 가지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어린 시절 그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던 이복동생 린을 만나는 것이다. 그저 린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꿈이 그를 현실의 무거운 그늘로부터 지켜주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기다리던 린이 막상 그에게로 왔을 때부터 그의 비극은 시작된다. 린과 함께 살고 싶어하는 그의 소망은 린의 남편을 죽이려고 하는 시도가 좌절되면서 실패한다. 그에게는 현실의 운명을 물리칠만한 힘이 없다. 이제 그는 그저 자신에게 다가오는 운명에 조용히 순응한다. 여자친구와 결혼해 평범한 일상을 꾸려나가는 것이다.
그 어떤 시도도 실패로 돌아간 후에 그가 선택한 것은 거의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삶, 평범하게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는 그런 지극히 평범한 삶이다. 살아 있지만 죽은 것과 같은 삶. 결국 그는 그가 그렇게 꿈꾸었던 글마저 더 이상 쓸 수 없게 된다. 이제 그에게는 더 이상, '어제' 혹은 '내일'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현재의 무의미한 반복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제 더이상의 내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적당히 자신을 위로하며 현실에 안주하는 삶, 오직 그런 삶이 있을 뿐이다.
"내일, 어제, 그런 단어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현재가 있을 뿐. 어떤 때는 눈이 온다. 또다른 때는 비가 온다. 그리고 나서 해가 나고, 바람이 분다. 이 모든 것은 현재이다. 그것은 과거가 아니었고, 미래가 아닐 것이다. 지금 일어나고 있다. 항상. 모든 것이 동시에. 왜냐하면 사물들은 내 안에서 살고 있지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서는, 모든 것이 현재이다."
짧고 군더더기 없는 문장에서 새어나오는 짙은 슬픔의 냄새. 그저 표면적인 타인과의 관계들. 웃고 떠들며 얘기하지만 내면에 숨겨진 외로움의 강은 더욱 깊어만 가는 그런 쓸쓸한 관계들. 현실의 무의미한 반복에 조용히 순응하며 살아가는 삶. 그런 삶의 고독. 결코 외면할 수 없는 그런 삶의 고독과 순간, 순간 마주쳐야 하기에 이 책을 읽는 일은 힘이 들었다. 게다가 <어제>의 고독 속에서 한동안 빠져 나오기가 쉽지 않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