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준비는 되어 있다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말랑말랑하면서도 조금은 딱딱한, 조금 서늘하면서도 따사롭고 무언가 아릿한, 그런 글들을 읽고 싶었나 보다. 요즘의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한순간 머리가 멍하니 비어버리는 순간이 많은, 꽤나 규칙적인 생활에 길들여져 가면서도 때로는 한없이 감상적이 되어버리는, 그런 요즘의 변덕스러운 나에겐 그리 힘들이지 않고 슬슬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싶다.

에쿠니 가오리. 그녀의 소설을 많이 읽어보진 못했지만 이 소설만으로도 그녀의 느낌을 아주 많이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새로울 것 없는 일상들, 그래도 그 일상을 견뎌내야만 하는 시간들. 그리고 더이상 새로울 것 없는 사랑과 그 사랑이 지나가고 난 뒤의 쓸쓸한 풍경들.

돌이켜 보면 무엇하나 유쾌한 일이 없었던, 아무래도 상관없고 별 재미없었던 그런 날들. 그런 일상들. 서로를 사랑하는 두 여자. 그리고 이젠 사랑하는 어떤 느낌마저 없어진 부부. 누군가는 사랑하고 또 누군가는 사랑하다 멀어져가고, 누군가는 사랑받지 못해 아프고 또 누군가는 이젠 사랑할 수 없어 아프다. 그리고 때로는 서로를 사랑하는 것 자체가 아픈 이들도 있다.

에쿠니 가오리의 글은 의외로 담담하다. 그러다 문득문득 일순간 정지해버리게 만드는, 그런 싸한 느낌들의 문장과 마주친다.
이를테면, "인생은 연애의 적이야"
"우리 한때는 서로 사랑했는데, 참 이상하지. 이제 아무 느낌도 없어."
"보호한 기억은 늘 윤곽이 애매하고, 보호받았던 기억만이 가슴을 파고든다."
"그때 내 심장의 일부는 이미 죽었다. 너무나도 외로워 말라 비틀어져."
같은.

삶의 순간순간, 무엇이 우리를 서늘하게 만드는지, 그녀는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별일없이 지나갈 거라 믿었던 일상의 어느 순간, 그녀가 툭 건드리면 내 가슴은 서늘해지고 삶은 그저 막막한 터널같은, 알 수 없는 어떤 것이 된다. 내가 잘 견뎌 나갈 수 있을지 조금 걱정이 된다. 어린 날의 어느 저녁, 해질 무렵 엄습해 오던 한없는 막막함과도 같은 그런 느낌들.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의 구석 구석을 담아내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싸해져 오는 감정들. 그녀는 날카롭다. 아무렇지 않은 듯이 이야기하면서 마음을 아프게 만든다. 아주 천천히, 사랑과 그 사랑을 감싸던 날들도 그저 먹먹해져 온다. 어쩌면 이렇게 천천히,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나는 그녀에게 중독되어 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에쿠니 가오리,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어쨌든.

울고 나면 조금 괜찮아질 거야, 생각했지만 살아가면서 나는 울면 울수록 더 아파진다는 걸 알았다. 실컷 울고 나면 마음 한 구석이 굳어져 버린 듯한 느낌. 눈물이 많아질수록 굳어져 버리는 느낌이 더 강해지는 듯한 느낌. 눈물을 흘릴수록 삶은 따뜻해지는 게 아니라 서늘하게 굳어져 간다. 딱딱한 마음 속의 어떤 덩어리들이 점점 늘어 간다.

그런 서늘함. 아픔. 두려움. 그리고 막막함. 아무렇지 않은 듯 그녀가 툭툭 친다. 어쩌면 이 말을 하기 위하여. 당신, 울 준비는 되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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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11 08: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ALINE 2005-02-12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추천 고마워요^^ 요즘 책이 잘 읽히지 않았는데 이 책은 그래도 슬슬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답니다. 아무렇지 않게 책장을 넘기다가 조금씩 싸해지는 기분...그런 것들도 좋았구요. 님..늦었지만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늘 건강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