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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 - 개정판
조나단 스위프트 지음, 신현철 옮김 / 문학수첩 / 1992년 7월
평점 :
중학교 때 쯤이었던가. 갑작스레 동화로 알고 있던 소설들의 완역본이 절찬리에 출판되던 시기가 있었더랬다. 언뜻 기억나는건, 로빈슨 크루소의 후편이라던지 키다리아저씨의 후편같은 것인데, 그 와중에 나온것이 바로 이 걸리버 여행기의 완역본이었다. 책 소개만 보자면, 흥행적 요소(?)가 부족해 완역본까지 출간되진 못한 여타 다른 책들과는 달리, 특이하게도 '우리의 암울한 정치사와 관련해 완역 소개되지 못하였다'는 본서는, 당대의 보수주의자인 스위프트의 풍자마저도 수용할 수 없었던 그 시절 우리시대의 편협함을 증언한다는 (치욕적인)역사의 기록물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도 갖고 있는 셈이다.
흔히 걸리버의 소인국, 대인국 '여행기'정도로 편집되어 읽히곤 하는 본서의 '동화버전'은 사실상 완역본과는 전혀 다른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이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본서에 대한 스위프트의 세세한 주석서(이를테면 소인국 릴리퍼트의 예산이 얼마고 어쩌고 하는 식의)가 존재할 정도로 섬세하게 쓰여진 책이라고도 하며, 이에대한 다른 이런저런 이야기꺼리로 엮어진 책도 존재할 정도로 '할말이 많은' 책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동화버전은 이 책의 주요 메시지랄 법한 풍자와 3,4편의 내용이 완전히 삭제된 셈이기에, 사실 '걸리버 여행기'라는 타이틀을 다는 것이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우리가 아는 소인국, 대인국의 이야기와 하늘을 나는 섬 이야기(와 그 외에 다른 여러 나라의 이야기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들이 사는 휴이넘의 이야기를 통해 스위프트가 이야기하는 것은 현실사회에 대한 풍자이다. 동화버전에선 보통 걸리버가 엄청 '고생하는 것'으로 나오는 대인국이 사실은 그나마 인간이 살아가는 국가 중에 가장 모범적인 국가로, 저자는 그러한 대인국 사람들의 입을빌어 당대의 영국을 매섭게 비판하고 있으며, 소인국과 하늘을 나는 섬의 이야기에서는 그 나라에 사는 위정자나 시민, 교수들의 '인간성'을 꼬집어 역시나 당대 인간사회를 풍자하고 있다. 마지막 '휴이넘'의 세계에서 이러한 인간 전반에 대한 풍자는 극에 달하는데 이는 심지어 저자가 '인간 혐오증'에 걸린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울 지경에 이른다.
스위프트가 생각하는 '좋은 사회'는 사실 굉장히 혁신적이고 진보적인 사회라고 보기는 힘들다. 외려 스위프트는 '건전한 보수적 가치가 온존하는 사회'를 이상사회로 꿈꾼 듯 싶다. 사소한 일로 다투는 소인국은 당대 자유당을 빗댄 것이고, 인자하고 대범하며 다툼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사는 대인국은 당대 왕당파를 빗댄 것이라는 해석을 들이대지 않아도, 새로운 연구라던지 새로운 풍습에 대한 저자의 반감은 소설 곳곳에 스며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진정한' 보수적 가치라는 것을 그 누구도 운위하지 않는 우리의 시대, 진보건 보수건 사소한 이익이나 이해관계를 위해서는 그 어떤 신중함과 평화로움을 내던질 각오가 되어있는 것만같은 오늘의 시대, 스위프트가 말하는 건전한 보수의 가치란 단순히 넘기기엔 아쉬운 구석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으로는 누군가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를 다시읽겠다고 한다면 가장 먼저 추천하고 싶은 책이 본서이다. 사실 이런저런 사회적, 철학적 의미를 차치하고라도 굉장히 재미있는, 너무나 '잘 쓰여진'소설이다. 물론 그 오래 전에 쓰여진 풍자가 오늘날까지 우리 가슴에 와닿는 것을 보면 스위프트의 '인간혐오증'에 나도 모르게 동조하게 된다는 단점(?^^;;)이 없지 않기는 하지만 말이다. 암울한 시대의 사생아(?!)로 태어나 아직까지(!) 읽어볼 기회를 갖지 못한 불행한 분이라면 특히나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