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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반역
오르테가 이 가세트 지음, 황보영조 옮김 / 역사비평사 / 2005년 5월
평점 :
책 표지에 나와있는 소개에 따른다면 본서는 스페인 근대 철학의 3대 명저 중 하나라고 하며, 옮긴이가 인용한 잡지의 언급을 빌린다면 '20세기를 대변하는 책'이라고 한다. 다소 과장된 감이 없잖긴 하지만 어찌되었건 간에 20세기가(그리고 이어지는 21세기도) 대중의 시대였다는 점에서 본서의 통찰이 무의미하다고 할만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본서가 다소 보수적인, 아울러 엘리트주의적인 시각을 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보적이랄만한 출판사인 '역사비평사'에서 간행되었다는 점, 그리고 책 표지의 소개 또한 진보진영에 속하는 임지현 교수가 썼다는 것인데, 실제로도 본서는, 그만큼 보수적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진보적 관점에서도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갖고 있는 듯 싶다.
책이 쓰여진 시기는 1930년으로, 당시는 저자의 말에 따르자면 과학기술의 발달과 자유민주주의라는 훌륭한 제도(저자 또한 이 두가지가 인류사에 둘도없는 업적임을 인정하고 있다)로 인해 인류는 수적으로 급격하게 늘었을 뿐더러, 그 인간 한명한명의 가능성의 영역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과거에는 단순히 소수자가 이끌어가던 역사의 흐름 속에서 수동적으로 이끌려가던 대중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여 모든 부문을 잠식하고 지배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즉, 교양있는 소수자들이 목소리를 내는 시기는 갔다는 이야기다.(물론 흔히 오해되듯 이 소수자는 특정 계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계급에서도 이러한 소수자는 존재할 수 있고, 존재해 왔다고 그는 언급한다)
문제는 바로 이 시대와 그 지배자인 대중의 성격이다. 인류는 이제 과거 그 어느 시기에 비해서도 우월함을 느끼며, 때문에 과거는 모두 숨쉬기 곤란한 답답한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상한것은 이처럼 자신만만한 인류가 한편으로 그 넓어진 가능성 때문에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며, 과거와의 단절로 인해 외로워한다는 것이다. 이는 이전의 시대와는 매우 다른 상황이다. 이전 시대에는 시대가 불만족 스러울 경우 과거로의 회귀를 외치거나, 전통적 가치의 복원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오늘의 시대에 사람들은 과거도 부정적이지만 미래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의 지배자인 대중은 현재의 완벽함 때문에 자신이 어떻게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고, 어떻게 강한 힘을 지니게 되었는지 무관심해진다. 교양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멀어지며, 역사에 대한, 세상에 대한, 순수과학에 대한 고마움도 잊는다. 어디 그 뿐인가, 대중의 집단적 우월감은 근거없는 자신감만 북돋워 자만심을 부추기고, 교조적이고 과격한 행동을 일삼게 하며, 남의 충고는 무시하게 만든다. 반면 대중은 자신의 존재 속에 내재된 불안감으로 인해 여기저기 휩쓸리게 되고 자신의 자주적인 규범을 갖지 못한 이들은 국가에 의지하려고만 든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자유도 내팽게치고 암울한 야만의 세계에 스스로 빠져든다. '전문가'의 양산은 이러한 '대중시대'의 명암을 확실히 보여주는 좋은 예인데, 이러한 전문가들은 자신의 전문분야에 대한 지식으로 인해 우월감을 갖게 되지만, 사실 그 분야를 제외하고는 과거보다 더욱 복잡해진 현대 사회에서 그 이전의 교양인 보다 아는 것이 더 없다는 점에서 정말이지 한심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여간 저자는 책을 통해 망해가는(?)유럽문명에 대한 푸념을 그치질 않는다. 그렇다면 저자의 해결책은 무엇일까? 바로 새로운 도덕규범의 정립이다. 분명 19세기에 인류가 이뤄낸 진보는 눈부시며,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미친 짓이란 것은 저자도 인정하는 바이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이 시대의 지배자인 대중은 자신의 도덕을 알지 못한다. 즉, 대중의 사회는 무도덕의 사회이고 질서없는 사회라는 것이다. 철부지같은 대중은 똥오줌도 못가리면서(?), 아무런 대안조차 없으면서, 세상을 지배하려 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저자는 기존 질서, 즉 유럽의 지배가 해체된다는 것은 그저 무규범의 사회로 가는 것이고, 이러한 대중시대를 불러온 그 진보마저 파괴하는 야만으로 가는 첩경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주장한다. 유럽을 하나의 국가(?)로 묶자는 것이다. 기존의 편협한, 단기적인 이익에 집착하여 소국의 경계를 운운하려 하지 말고 통합적인 공동체를 이루자는 것이다. 이러한 미래에 대한 기획으로부터 '시대의 충만함'을 되찾고 새로운 미지의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면, 한때는 진보적 함의를 담는 그릇이었지만, 지금은 기존의 넓어진 가능성을 담아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국민국가는 발전적인 방향으로 해체될 것이고, 이는 무도덕의 대중 사회를 벗어날 탈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본서는 그 화려한 찬사와 수식어에도 불구하고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가부장주의, 인종주의, 서구중심주의에 푹 빠져 있다는 것은 그 시대 서구인들 대다수의 한계였으니 좀 많이 봐준다고 하더라도, 그가 무엇보다 기본적으로 대중의 능력을 너무 우습게 알았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저자의 예측대로 독일이나 이탈리아 등 서구에서는 '대중의 반란'에 기반한 파시즘이 맹위를 떨쳤고 동구에서는 스탈린주의가-그의 걱정대로-어느정도 경제적인 성공을 거둠으로 인해 또다른 '대중의 반란'이 일어난 것도 사실이며, 때문에 그로 인해 어떠한 야만적 결과가 일어났는지는 우리모두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 대중은 수많은 경험을 통해 배웠으며(참고로 그는 본서에서 '경험'을 굉장히 무시하고 있다) 오늘날 더욱 훌륭한 민주주의를 이루어 냈다. 즉, 대중은 우매하고 과격한 행동을 해 온 만큼이나 현명하고 정의로운 행동을 해온것도 사실이라는 거다. 아울러 소유권에 기반한 민주주의는 그의 예상만큼 평등을 보편적으로 이루어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외려 다른 측면에서의 문제가 더 심각한 상태인 것도 사실이기에 그의 예측이 오늘날 완전히 정합성을 지닌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결국 다른 것에 기대지 않는 '자신의 도덕'을 가져야 한다는 것. 대중에 기대고, 국가에 기대며, 시류에 기대어 '대중'에 편입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이 되어야만 오늘의 민주주의사회(그리고 대중사회)는 그 진정한 빛을 발할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 준다는 측면에서 본서는 그 함의가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통합적 공동체(물론 여기선 유럽에 국한된 이야기지만)에 대한 저자의 주장이 담긴 '2부:누가 세상을 지배하는가'는 이 책의 백미이며, 좌파진영에서도 이 책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로 보인다. 여기서 펼쳐진 저자의 역사관과 국가관은 수많은 상상을 가능하게 만들며, 기존의 편협한 국가 이데올로기에 대한 변증법적 대안이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대부분의 사안에서 다소 보수적으로 기운 결론을 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분석은 다른 여러가지 대안을 가능하게 하며, 그 대안의 수많은 선택을 가능하게 한다. 아울러 그의 대중 전반에 대한 분석 또한 절반 혹은 그이상의 진실을 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하기에 이 책은 아직도 읽혀질만한 가치가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본서를 '고전'이라 부를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