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중심리
귀스타프 르 봉 지음, 이상돈 옮김 / 간디서원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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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민당 출신의 독일 전 총리 헬무트 슈미트는 젊은 시절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대중의 반역'과 본서를 읽고 매료되었다고 한다. 특히나 본서에 대해서는 특별히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본서가 히틀러와 나치가 유발한 대중의 심리를 분석한 선구적인 책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라고. 다른 한편, 본서는 정작 저자인 르봉이 살던 시기에는 진보적 자유주의자들로부터 숱한 비난을 받았다고 하는데, 저자의 주장이 민주주의에 반하는 귀족주의적 시각에 기반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당대에도 그렇거니와 오늘날까지도 좌-우 양쪽으로부터 찬양과 비난을 동시에 받을 수 있는, 그 해석의 여지가 다양한 책이기에 본서는 오늘날에도 고전으로 남아있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책이 쓰여진 시기는 1895년이다. 당시는 프랑스 혁명의 기반이 되었던 계몽과 이성의 기획이 그 수많은 정치적 부침과 혼란 속에 회의되고 재검토되기 시작한 시기였으며 이러한 혼란은 저자의 시각 속에서도 녹아있는 듯 보인다. 사실 본서를 읽고 르봉을 어떤 '주의자'로 해석하기는 굉장히 어렵다. 그는 책속에서 오로지 현상 혹은 사실만을 이야기 할 뿐 결코 당위를 이야기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언한다. 새로운 시대는 군중의 시대일 것이라고. 좋건 싫건 우리는 그 시대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저자가 이야기하는 군중은 그저 수많은 인파가 모인 것만으로 이루어지는 조직은 아니다. 심리적으로 어떠한 근본적인 원인이 작동할 경우에야 군중은 군중으로서 등장하는데 이는 숫자의 다소를 묻지 않는다. 군중은 그저 맹종하기만을 원하며(심지어 '무신론'까지도 신의 위치에 놓고 맹종한다), 단순한 암시에 의해 좌우되는 존재며, 감정에 휩쓸려 극단적이면서도 언제나 유동적이기에 믿을 수 없으며, 집단 논리에 의해 '멍청하게도'자신의 이익에 반해 뜻하지 않게 윤리적인 행동을 하는 존재이다. 즉, 이성은 없이 행동만 빠른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그 구성원의 도덕성이나 전문성이 얼마나 탁월한지 여부에 의해 좌우되는 것도 아니다.(이런건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본다) 모든것은 군중과 연관되면 극단화되고 단순화되며, 심지어 훌륭한 사상도 군중의 윤리가 되는 순간 타락한다.(수많은 종교에서 이미 목격한바 있다.) 더군다나 작금의 시대는 '군중의 시대'. 아무리 고고한 사상가도, 철학자도, 사상도 이 틀을 크게 벗어날 수 없다. 벗어난 자의 현실은 그저 고달플 따름이다. 물론 그가 죽고난 한참 후 그 사상을 군중들이 수용함으로써 뒤늦게 알려질 수는 있겠지만.

군중이 종종 통계상의 합리적인 자료보다 이미지의 힘에 이끌린다던가, 언어에 의해 좌우된다던가, 실제의 영웅보다 전설의 영웅을 선호한다던가 하는 그의 지적은 정말 소름끼치게 적나라했으며, 군중의 리더는 합리적인 사람보다는 반미치광이 광신도가 더 적합하며 리더는 군중을 설득하려들지 말고 홀려야 한다는 그의 리더관(觀)은 그 솔직함(?)에 섬?했으며, 시험위주 교육을 비판하고 군중의 여론과 신조를 논하는 부분은 정말이지 흥미로웠다. 군중의 모든 행동을 이성적으로 해명하려 했던 당대의 주류적 흐름을 뒤집고 군중의 감정적 특성을 집어낸 저자의 주장은 오늘날의 독자가 읽어도 정말 탁월한 것만은 사실이다.(이런 점에서 본서를 읽는 내내 마키아벨리가 계속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현상을 이야기 할 뿐 당위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어찌되었건 군중의 시대는 도래하였고, 종국에는 군중만이 남을 것이며 때문에 우리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할 뿐이다. '군중'이라는 퇴폐적 존재(?)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대안을 내놓기는 하지만, 결국 뒤죽박죽 되고만다.(그 어떤 인간도, 사상도 '군중'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그의 주장에 기반한다면 이는 매우 당연한 현상일런지도 모르겠다) '대중이 범할 오류라면 전문가도 범할 수 있는 오류'라며 배심원제를 받아들이거나 의회제를 실컷 욕하고 어쨌건 탁월한 제도라 이야기하는 그를 보면, 혼란 상황 속에서 새로운 윤리를 찾지못한 당대 지식인의 고뇌가 느껴진다. 어쨌건, 때문에, 이 책을 '어떻게 이용할 것이냐'는 오늘의 독자에게 완전히 일임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현재의 독자는 본서를 어떻게 이용해야 할까? 우선 본서의 한계를 염두에 둬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르봉은 당시까지 군중을 '이성적 인간'으로만 판단하던 당대 주류적 시각의 안티테제로서 인간의 감정적 측면을 부각시켰고, 이는 본서의 가능성이자 한계이기도 하다. 즉, 이성적 인간과 감정적 인간을 변증법적으로 통합해 내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사실 그의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와 인종주의적 시각은 모든 군중을 이성적으로 보는 것 만큼이나 그의 논의를-그 탁월함에도 불구하고-관념적으로 만든것도 사실이다. 아울러, 의회주의에 대한 무관심을 민주주의의 병폐로 해석, 결국 의회주의와 민주주의를 동일시해버리는 민주주의에 대한 몰이해를 보여준다거나 스펜서류(類)의 '사회 다윈주의'에 푸욱 빠져있는 것은 시대의 한계를 보여주는 듯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르봉의 날카로운 지적과 그가 보여준 '절반의 진실'속에 어떠한 방향을 설정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먼저 새로운 '신조'의 확립이다. 즉 일종의 '종교아닌 종교'의 확립이다. 군중의 감정이 애초 무엇인가를 믿고 따르기를 원한다는 그의 주장은 틀린것 같으면서도 맞다. 따지고보면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부르주아 민주주의 질서에 따라 투표하고 결과를 따르는 것은 그러한 신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조는 확립되기도 어렵지만, 그만큼 한번 만들어진 신조를 붕괴시키기도 어렵다. 이러한 신조를 조금 더 합리적인 모습으로 만들기 위해 '이성'의 힘을 빌린다면 어떨까? '군중'속에서도 '자아'를 잃지 않도록 하는 올바른 교육, 군중이 되기 전에 자유로운 개인이 되기 위한 주체적인 노력, 그리고 그들이 모여 군중을 이루었을 경우, 그 군중의 악덕이라 할만한 지나친 유동성을 안정화하고 개개인에게 책임감을 부여하게 만들 수 있는 '민주화된 민주주의'의 정립, 이러한 노력을 기울인다면 우리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군중의 시대는, 르봉의 묘사만큼 야만적이고 암담한 사회는 커녕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자유로운 개인의 자유로운 사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여하튼 책은 몇몇 부분만 제외한다면 오늘날 읽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만족스럽다. 아울러 번역 또한 자연스럽다. 여기저기 새로운 영웅이 뜨고 지며, '다른'사람에 대한 몰이해와 그로인한 폭력이 극에 달한, 때문에 '군중'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사건이 여기저기서 터지고 있는 오늘의 우리사회에서 한번쯤 꼭 읽어봐야 할 고전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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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18 0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率路 2011-08-24 13:31   좋아요 0 | URL
어휴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