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쇼펜하우어의 토론의 법칙 ㅣ 원앤원북스 고전시리즈 - 원앤원클래식 1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음, 최성욱 옮김 / 원앤원북스 / 200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쇼펜하우어의 주저라 할만한 '의지의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구경조차 해본적 없고, 그의 사상이라거나 생애에 대해서도 문외한인 나이지만, 이상하게 '쇼펜하우어'하면 뭔가 괴팍한 무엇인가가 느껴지곤 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의 꽁해보이는 인상, 헤겔에 대항(?)하여 같은 시간 강의를 편성했다가 와장창 깨진 전력, 아울러 그를 '염세주의자'로 축약하고야 마는 교과서의 못되먹은 관행(?) 때문이 아닐까 싶은 추측을 하곤했다. 그리고, 이 책은 기존에 내가 갖고 있던 쇼펜하우어의 그 괴팍한 인상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 하는데 적잖은 기여를 했다고 볼수도 있겠다.^^
쇼펜하우어는 명확하게 정의한다. 토론은 '이기기'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그리하여 본서에서는 토론에서 이기기 위한 38가지 방법들이 나오는데, 따지고 보면 참 틀리다고 할수는 없는 이야기긴 하지만, '점잖지는 못한'방법들이 주를 이룬다. 토론학(?)의 마키아벨리즘이라고 할까나, 책에는 토론에 이기는 방법으로 상대의 주장을 과장해석해 비판하기, 화나게 만들기, 기정사실화하기, 두서없이 말하기, 뿐만아니라 심지어 마지막 38번째 방법으로 '인/신/공/격'까지 소개되는데 그가 소개한 방법들 자체도 그렇고, 그 방법에 대한 부연설명도 그렇고 꽤나 노골적이라 시종일관 실실쪼개면서 즐겁게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럼 명색이 '고고해야할'철학자였던 그가 이렇게 어찌보면 '비윤리적(?)'이라 할만한 토론법칙들을 소개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개인적으로는 애초 책을 읽으면서, '비윤리적인' 상대가 사용하는 이러한 '나쁜방법'들을 짚어내어 이를 무력화시키도록 하기 위해서 이런 책을 쓴게 아니었을까라고 지레 짐작했었지만,(책 뒤 날개에도 그런식으로 설명이 되어있다.) 쇼펜하우어는 여기서 한발 더 나가는 듯 싶다. '에필로그'에서 그는 이 책을 저술한 목적을 넌지시(?) 언급하고 있는데 거기서 저자는 아예 '토론 자체의 의의'에 대해 묻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토론을 하다보면 밀릴 때도 있고 몰아붙힐 때도 있다. 몰아붙힐 때는 제외하고 밀릴 때를 생각해보자. 그래서 당신의 입장이 바뀌었는가? 아닐 것이다. 아마 대부분은 '아, 내가 그 토론할때 왜 그 근거를 빼먹었지?','그런 예시는 생각해보면 말이 안되잖아? 근데 왜 내가 그걸 지적하지 않았지?'이런 생각을 하며 자책(?)하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혹여 토론을 통해 입장이 바뀌었다면 그것은 애초 토론자가 자신의 입장에 대해 명확한 확신이 없었을 것이거나, 애초 관심없는 사안에 대해 토론했을 경우, 혹은 형식은 토론이었지만 실질적으론 학습이 이루어졌을 때(즉, 애초 토론자 자신이 기본적인 정보에 무지할 때, 혹은 애초부터 토론자 스스로 배우려는 자세로 토론에 임했을 때)뿐이리라.
쇼펜하우어는 이야기한다. 논리학과 토론술은 분리되어야 한다고. 토론술은 객관적 법칙을 찾기 위한, 논리적인 주장을 하고 받아들여 진리를 찾기 위한 분야가 아니라고. 따지고보면 사실 그렇다. 올바르고 논리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알자면 한정된 시간을 정해놓고 청중들 앞에서 토론을 하기보다는 오랜 시간을 갖고 서로 글로써, 행동으로써, 혹은 말로써 협동하여 의논해 나가는 것이 더 합리적인 일일 것이다. 결국 그는 토론은 고상한 '싸움'일 뿐이고, 어찌보면 인간이 '확실하게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시간을 갖고 고민하는 것은 물리적으로(그리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에, 어쩔 수 없이 해야하는 필요악일 뿐이라는 것을, 그래서 단순히 토론의 승패여부만 가지고 진리성을 판가름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때문에 토론술은 논리학이 아닌 토론술 그 자체-즉, 토론에서 '이기는 방법'을 논하는-로 다루어져야 함을 주장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시종일관 즐겁고, 가볍게 읽었지만 그리 가벼운 결론이 나진 않았다. 과연 토론은 우리에게 그 자체로 선한 것인가 아니면 필요악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