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심리학 하룻밤의 지식여행 4
딜런 에반스 지음, 이충호 옮김, 오스카 저레이트 그림 / 김영사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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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심리학'이 엄밀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면서도 웬지 끌렸었지만, 학창시절 생물과목은 언제나 잼병이었고 덕분에 이쪽에 대한 공포심은 가히 병적이었던지라 그것과의 만남(?)을 차일피일 미뤄오던 차, 김영사의 '하룻밤의 지식여행'시리즈 4번째 책으로 진화심리학이 출간되어 있길래 별 생각없이 구입했다. 여담이지만, 김영사의 '하룻밤의 지식여행'시리즈 중 이전에 읽은 바 있던 '데리다'에 비해서는 확실히 '그림'이 많아서 읽기 편했다.(학교가는 지하철 안에서 오가며 다 읽을 정도였으니)

사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의도하건 안하건 심리학적 혹은 진화론적 견지에서 논의를 전개하는 것을 종종 봐왔고, 어찌보면 그만큼 진화심리학이 단순히 학계에서 뿐만 아닌, 사회 저변에 각광받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책을 읽은 결과 그만큼이나 '진화생물학'에 대한 오해도 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오해에 있어서는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_-v)

진화생물학과 인지심리학이 결합된 학문인 진화심리학은 인간의 '마음'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인간의 유전자는 행동을 직접 일으키지는 않지만,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를 속에서 마음의 '모듈'을 만드는데 기여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인간의 마음은 수많은 모듈을 지니게 되며 결국 이러한 수많은 모듈을 탐구하는 것이 진화심리학이다.(맞나요?^^) 문제는 이것이 모듈에 의한 것이냐 아니면 모듈의 파생효과에 의한 것이냐는 건데, 책은 이에 대한 설명도 간략하면서 명확하게 잘 해내고 있다. 솔직히 개인적으로도 책을 읽으면서 진화심리학의 몇몇 부분은 다소 갖다 붙힌다는 느낌이 들었고 어떤 부분은 다분히 의제적이라는 생각도 종종 들곤 했지만, 인간의 마음을 '진화'와 '적응'이라는 색다르지만 합리적인 틀 속에서 살펴본다는 점에서 인간이라는 '동물'은 기본적으로 어떤 동물인가를 파악해 나가는데 크나큰 역할이 기대된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우리라 생각된다.

문제는 진화심리학의 '아픈 과거'이다. 스펜서류(類)의 사회적 다윈주의는 '적자생존'을 내세우며 가혹한 자유방임주의에 기여하기도 했으며, 나아가 나치시대 대학살에 일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책은 사람들이 진화심리학에 이러한 딱지를 갖다 붙히는 것은-역사적인 이유로-이해는 가긴 하지만 옳지 못한 지적이라고 이야기한다. 사실 저러한 유전자 결정론은 인간의 보편적인 마음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며 그 보편적인 마음이 어떻게 환경적 요인에 의해 달리 표출되느냐를 탐구하는 진화심리학과는 출발부터 다른 것이 사실이다. 진화심리학은 그 자체로 어떤 정치적 의미를 담고있는 학문이 아니며, 문제는 그 학문을 탐구하는 인간이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 결국 이러한 마음모듈을 지닌 인간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는 연구자를 비롯한 인간들에게 맡겨진 문제로 보인다.

아무튼 사회를 변혁하기 위해서건 유지하기 위해서건 '우리'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부터 시작해야 함은 자명하고, 그러한 질문에 대해 철학이나 사회학적 접근만으로는 부족한 점이 많은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진화심리학은 인문학의 그러한 부족함을 채워줄 구세주같은(?)학문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때문에 앞으로도 수많은 발전이 이루어져야만 하는, 그리고 이루어 질 학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튼 읽어보시라. 무엇보다 책에서 소개된 진화심리학의 모듈들은 '재미있다.' 실제 진화심리학이 갖는 그 '재미'의 지나침은 종종 진화심리학 비판자들의 먹잇감(?)이 된다고 한다ㅋ(여담이다만, 개인적으로는 역시나 남성과 여성 관련 모듈 부분에 특히 흥미가 갔는데, 뭐 나만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ㅋ 하여간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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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 시대 초국적기업의 실체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80
장시복 지음 / 책세상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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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라는 단어도 그렇지만, 이러한 세계화의 '본좌'(?)라 할만한 '초국적 기업'이라는 단어도 정의내리기는 굉장히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몇 국가 이상에서나 기능을 해야 '초국적'일까? 그 국가에서의 활동정도는 어느정도 이상이 되어야 '초국적'인 것일까? 저자는 이처럼 모호한 의미를 가진 '초국적 기업'을 정의내리는 것으로 서술을 시작한다. 저자가 정의하는 초국적 기업이란 '거대한 규모를 가지고 본국의 기반을 바탕으로 자본 축적을 세계적 규모에서 수행하며, 이러한 축적을 가능하게 하는 전략과 조직을 갖고 있는 기업'이다. (아마 이러한 정의에 대해 크게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1장에서는 마치 정치경제학의 기초이론을 설명하려는 듯, 세세하면서도 핵심적으로 초국적 기업의 발전과정을 설명한다. 2장에서는 초국적 기업의 행태(기업 내부거래나 초국적 기업의 금융화 등등등)와 초국적 기업의 또다른 구성원이라 할만한 노동자들의 '바닥으로의 경쟁'(이는 선진국 노동자들도 예외는 아니다)을 서술하고 있다. 3장에서는-개인적으로 가장 만족스러웠던 부분인데-초국적 기업과 국민국가와의 관계를 다루며, '세계화'시대에 국민국가는 단순히 축소되거나 복구되어야 할 대상인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시대의 새로운 착취형태(?)로서 탈바꿈한 것일 뿐이라는 설명을 한다. 4장에서는 세계기구가 어떻게 초국적 기업에 복무하는지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고('다자간투자협정'의 내용은 다시봐도 경악스럽다) 5장에서는 그러한 초국적 기업에 대한 '초국적 저항'을 논하고 있다.

내심 불만스러웠던 것은 5장이었다. 애초 '초국적 저항'이라는 것이, 그리고 그것의 '승리'라고 말해지는 조그마한 성과라는 것이, 초국적기업의 지금까지의 행태에 비하자면 민망할 정도로 보잘것 없을 정도(?)로 보이는게 솔직한 심정이었고, 아울러 오늘의 시대에 대한 대안이라는 것 또한 이런저런 결함을 안고있음에도 저자는 그에 대한 지적만 할 뿐 별다른 대안은 내어놓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저 구체적인 언급없이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의 말을 빌어 '문제는 희망을 배우는 일이다'라고 할 뿐이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러한 나의 불만이 오히려 더욱 큰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지고보면 미래에 대한 모든 기획이란 불완전한 인간의 산물이다. 어떠한 진보적 기획도 완벽한 적은 없었고, 그러한 불완전한 기획 속에서 인간은 진보하고 발전해 왔던 것이 우리의 역사였다. 지나친 지적, 동적 결벽증은 사실상 우리의 현실을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했으며, 심지어 종종 현실에 대한 무관심과 게으름에 대한 괜찮은 변명꺼리로 구실해온 것도 사실이지 않던가. 물론 그렇다고 이론이나 기획, 그리고 그에 대한 고민을 무시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것은 '실천'이라는 것이다. 완벽한 기획에 대한 요구는 어찌보면 일종의 '노예근성'은 아닐까? 따지고보면 파시즘이나 스탈린주의같은 지난 시대의 전체주의적인 야만도 근대성이라는 '완벽한' 기획에의 요구와 그에 대한 충실한 복무 속에서 싹튼 것 아니던가? 결국 행동하며 고민하고, 그리하여 만들어진 '대안'을 '실천'하며 다시 그 대안을 보완하는 대안과 실천간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속에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이러한 대안과 실천을 위해서는 우선 오늘,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함이 자명할 것이고 이러한 문제들을 날카롭게 고찰하며 환기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본서는 분명-그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탁월하다. 본서의 문제제기와 고찰이 독자로 하여금 다소간의 답답함과 실천적 공허함(?)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답답함과 공허함은-역설적이게도-현실을 변화시키는 밑거름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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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혁명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51
전진성 지음 / 책세상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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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본서를 구입하는 데에 있어 어느정도의 학연과 지연이 작용했음을 시인해야겠다. 저자(라고 칭해도 될까 조심스러울 지경-_-;;;;;)의 소개에 따르자면, 나와 같은 동네에 살면서 같은 학교와 같은 정서를 갖고 살았던 분으로 보이는데(물론 나이는 내가 근 15년 가까이 어리지만ㅋ) 혹여 어린시절 나도모르게 지나치지 않았을까, 하는 반가움에 별 이유없이 구입했다.

도입부에서부터 저자는 이 책이 우리의 현실과는 별 상관없는 고답적이고 학술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가능한한 지루하게 서술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고, 나 또한 그 대목을 보며 구입을 잠깐 후회했지만, 정작 굉장히 재미있게(?!)읽었다. 아울러 본서의 내용이 우리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20세기 초 독일의 보수적인 '교양시민계급'지식인들의 이야기이지만, 그렇다고 오늘, 여기에 사는 우리에게는 아무 쓸모없는 이야기라 치부하는 것은 못내 아쉬운 일일 것 같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나만의 생각인가?

이 보수혁명의 주인공들은 유럽에서는 어쨌건 '늦은 근대'를 맞이했다는 독일에서 20세기 초,중반에 맹활약(?)한 독일의 교양시민계급이다. 그들은 물질과 기술지상주의적인 자본주의 근대화의 물결도 마땅찮았고, 온갖 '잡것'들이 설치도록 내버려 두는(?) 민주주의도 사회주의도 공산주의도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들 입장에서는 지극히 암울했을 근대화의 시기를 지나 1차 대전이 시작되자 이들은 환호했는데, 전쟁터야말로 그들이 생각하던 이상-희생, 형제애, 신뢰같은-이 실현되는 공간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직접 전쟁에 참여하며 전쟁터가 그렇게 낭만적인 공간은 아님을 느끼게되고, 전쟁터에서 놀라운 기술 발전이 보여준 화력을 체험한 그들은 다시 한쪽 극으로, 즉 기술에 대한 맹신의 길로 간다.

전반적인 우울함 속에서, 그렇다고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워졌기에 이들은 결국-저자의 표현에 따르자면-'앞으로의 도주'를 감행한다. 이러한 앞으로의 도주는 다양한 모습을 띠고 있다.(심지어 '민족볼세비키'란 이름으로 극좌파인 볼세비키와 연대하는 부류도 있다.) 물론, 이들의 다수는 대놓고 나치즘을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나치즘을 수용하는 보수주의적 입장에 서 있었고, 때문에 나치즘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고 봐야하겠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건 유의미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집단은 아니었다. 그들의 성향자체가 '반정치적'이었기 때문이다.

책에서 보여진 이들의 수많은 정신적 아이러니들은 혼란스러운 시기 인간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서술은 모습들은 우리의 혼란스러운 시기를 다시 정리, 해석해 보고자하는 의욕을 부추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책을 읽는 내내 이젠 미디어에 일상다반사로(?) 얼굴을 내비치는 소위 '운동권출신 극우보수 변절자'들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그들은, 애초부터 변절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런지??) 자칫, 방향을 잃고 헤맬 수 있을 주제이지만, 저자가 탁월한 문체로 매혹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정말이지 지금, 여기의 현실과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주제이지만, 어떤 사람이 읽건 실망하지 않을 만한 내용이다. 당근 별 다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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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분단체제
백낙청 지음 / 창비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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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청 선생님의 분단체제론 관련 두번째 저서이다. 확실히 '분단체제'라는 말이 여기저기 많이 쓰이고는 있지만, 그 개념이 확실하지는 않고 쓰는 사람마다 각기 조금씩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기에 개인적으로는 본서를 통해 그러한 '분단체제'에 대한 어떤 확고한 설명이 있기를 기대했지만 본서에 꼭 그런 설명이 있지는 않다. 물론 책은 결과적으로 분단체제론이 '설명된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어쨌건간에 이러한 명확한 설명이 없는 것은 저자가 독자들에게 더 많은 상상의 가능성을 부여하기 위한 일종의 '전략'으로 사료되기는 한다.(그리고 저자 또한 이러한 '전략'을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아무튼 책은 분단체제 전반에 대한 총론 성격의 글들의 모음인 1장과 각론 성격의 글 모음인 2장으로 나뉜다. 따지고 보면 '논문집'인 본서를 죽 읽어나가다보면 분단체제에 대해 어느정도 '감'이 잡히기는 하는데, 결국 세계 자본주의체제가 한반도의 경우에는 특수하게도 '하위구분'으로서 분단체제를 매개로 남북한을 규정짓는다고 보는 것이 이 입론의 얼개로 보인다. 이러한 분단체제는 남북한 민중들의 일상생활 부문까지도 어느정도 규정하며, 지속적으로 재생산되는 '체제'로서의 특성을 갖는 한편, 그렇다고 자기완결적인 체제는 아니기에 끊임없이 변화하고 움직인다. 이러한 분단체제는 어떻게건 통일이 된다고해서 극복되는 것은 아니다. 아울러 분단'체제'는 체제로서의 구속성 또한 가지고 있기에 '올바르지 못한' 극단적 통일론은 외려 민중의 삶을 지금보다 더 피폐하고 왜곡되게 할 수 있다. 결국 중요한건 '바람직한'통일을 통한 '분단체제의 극복'이라는 것. 암튼 저자는 이러한 분단체제론을 기반으로 하여 이 분단체제를 넘어서기 위한 대안제시, 각각의 부문 운동과의 연대 방향, 장기적 전략과 단기적 전략의 고찰 등등을 하고 있다.

혹자는 백낙청선생님의 이러한 '분단체제론'을 걍 NL로 묶어버리는 폭력(?)을 행사하곤 해왔고, 나 또한 얼추 그렇게 생각하곤 했는데, 책을 읽고 난 후 드는 생각이지만 그러한 과격한(?) 구분법은 기본적으로 분단체제론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의 이야기였거나 한반도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논자의 부당한 공격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찌되었건 선생께선 통일문제 즉, 민족모순을 논의하는 내내 주모순으로서의 계급모순 문제를 결코 잊지 않고 계시고, 사분오열된 운동조직을 가능한 한 합리적이고 통합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계시며, 아울러 무엇보다 갈수록 사변적이 되어 실천적 함의를 상당부분 잃어버린 수많은 운동론을 뛰어넘기 위한 상상력은 눈이 부실 지경(오반가요?^^)이었다.

물론 몇몇 독자로부터 다소 개량주의적이지 않느냐, 혹은 결과적으로 통일문제 환원론 아니냐는 볼맨 소리가 있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하지만, 최대한 합리적인 절충점을 찾아내어 현실적이고도 바람직한 통일운동론을 고민하는 선생님의 노력속에서 독자들은 수많은 모티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사실 통일론 관련된 논의 중에 분단체제론만큼이나 현실적이면서도 이상적인,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할만한 입론이 또 어디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듣기좋은 노래도 한두번이라 그런건가, 어느덧 '통일'이란 지겹고도 시시한 주제가 된 것같아 보이는 것이 오늘의 사회 분위기이지만, 사실 '올바른'통일을 통한 '분단체제의 극복'이야말로 오늘 한반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사상적 문제를 해결할 첫번째 발걸음이자, 궁극적으로는 세계적 차원의 새로운 방향제시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땅을 살아가는 우리모두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문제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고로 한번쯤은 꼭 읽어볼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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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의 토론의 법칙 원앤원북스 고전시리즈 - 원앤원클래식 1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음, 최성욱 옮김 / 원앤원북스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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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의 주저라 할만한 '의지의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구경조차 해본적 없고, 그의 사상이라거나 생애에 대해서도 문외한인 나이지만, 이상하게 '쇼펜하우어'하면 뭔가 괴팍한 무엇인가가 느껴지곤 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의 꽁해보이는 인상, 헤겔에 대항(?)하여 같은 시간 강의를 편성했다가 와장창 깨진 전력, 아울러 그를 '염세주의자'로 축약하고야 마는 교과서의 못되먹은 관행(?) 때문이 아닐까 싶은 추측을 하곤했다. 그리고, 이 책은 기존에 내가 갖고 있던 쇼펜하우어의 그 괴팍한 인상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 하는데 적잖은 기여를 했다고 볼수도 있겠다.^^

쇼펜하우어는 명확하게 정의한다. 토론은 '이기기'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그리하여 본서에서는 토론에서 이기기 위한 38가지 방법들이 나오는데, 따지고 보면 참 틀리다고 할수는 없는 이야기긴 하지만, '점잖지는 못한'방법들이 주를 이룬다. 토론학(?)의 마키아벨리즘이라고 할까나, 책에는 토론에 이기는 방법으로 상대의 주장을 과장해석해 비판하기, 화나게 만들기, 기정사실화하기, 두서없이 말하기, 뿐만아니라 심지어 마지막 38번째 방법으로 '인/신/공/격'까지 소개되는데 그가 소개한 방법들 자체도 그렇고, 그 방법에 대한 부연설명도 그렇고 꽤나 노골적이라 시종일관 실실쪼개면서 즐겁게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럼 명색이 '고고해야할'철학자였던 그가 이렇게 어찌보면 '비윤리적(?)'이라 할만한 토론법칙들을 소개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개인적으로는 애초 책을 읽으면서, '비윤리적인' 상대가 사용하는 이러한 '나쁜방법'들을 짚어내어 이를 무력화시키도록 하기 위해서 이런 책을 쓴게 아니었을까라고 지레 짐작했었지만,(책 뒤 날개에도 그런식으로 설명이 되어있다.) 쇼펜하우어는 여기서 한발 더 나가는 듯 싶다. '에필로그'에서 그는 이 책을 저술한 목적을 넌지시(?) 언급하고 있는데 거기서 저자는 아예 '토론 자체의 의의'에 대해 묻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토론을 하다보면 밀릴 때도 있고 몰아붙힐 때도 있다. 몰아붙힐 때는 제외하고 밀릴 때를 생각해보자. 그래서 당신의 입장이 바뀌었는가? 아닐 것이다. 아마 대부분은 '아, 내가 그 토론할때 왜 그 근거를 빼먹었지?','그런 예시는 생각해보면 말이 안되잖아? 근데 왜 내가 그걸 지적하지 않았지?'이런 생각을 하며 자책(?)하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혹여 토론을 통해 입장이 바뀌었다면 그것은 애초 토론자가 자신의 입장에 대해 명확한 확신이 없었을 것이거나, 애초 관심없는 사안에 대해 토론했을 경우, 혹은 형식은 토론이었지만 실질적으론 학습이 이루어졌을 때(즉, 애초 토론자 자신이 기본적인 정보에 무지할 때, 혹은 애초부터 토론자 스스로 배우려는 자세로 토론에 임했을 때)뿐이리라.

쇼펜하우어는 이야기한다. 논리학과 토론술은 분리되어야 한다고. 토론술은 객관적 법칙을 찾기 위한, 논리적인 주장을 하고 받아들여 진리를 찾기 위한 분야가 아니라고. 따지고보면 사실 그렇다. 올바르고 논리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알자면 한정된 시간을 정해놓고 청중들 앞에서 토론을 하기보다는 오랜 시간을 갖고 서로 글로써, 행동으로써, 혹은 말로써 협동하여 의논해 나가는 것이 더 합리적인 일일 것이다. 결국 그는 토론은 고상한 '싸움'일 뿐이고, 어찌보면 인간이 '확실하게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시간을 갖고 고민하는 것은 물리적으로(그리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에, 어쩔 수 없이 해야하는 필요악일 뿐이라는 것을, 그래서 단순히 토론의 승패여부만 가지고 진리성을 판가름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때문에 토론술은 논리학이 아닌 토론술 그 자체-즉, 토론에서 '이기는 방법'을 논하는-로 다루어져야 함을 주장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시종일관 즐겁고, 가볍게 읽었지만 그리 가벼운 결론이 나진 않았다. 과연 토론은 우리에게 그 자체로 선한 것인가 아니면 필요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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