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정세의 이해 (제2개정판) - 미국 패권 시대의 지구촌의 아젠다와 국제관계
유현석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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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사회에서 '정치' 혹은 '정치학'만큼 전문적인 지식이 천시당하는 분야도 드문 것 같다. 이러한 현실은 심지어 그 분야의 실무적/학술적 전문가로 하여금 대중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정치에 대해 너무나 많은 말을 한다는 푸념으로 이어지곤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정치에 관한한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대중의 그 말의 많음 자체에 있다기보단, 대중 자신이 자신의 정치에 대한 얕은 인식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현실에 있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곤한다. 이는 다른 부문과 달리 정치라는 영역 자체가 대중의 참여 자체가 절실히 요구되는, 아니 대중의 참여에 의해 존재할 수 있는 영역이기에 현실정치에선 더욱 악화되는 모습으로 확대 재생산되곤 한다.

국제정치의 영역에 이르면 이러한 현상은 가히 점입가경이라 할만한 수준인데, 사실 이는 우리의 언론이 국제정치를 다루는 수준과 대중의 즉자적인 관심을 종합하여 유추해보아도 이러한 현실이 그리 어렵잖게 분석이 되기는 한다. 세계화가 어쩌네 지구화가 어쩌네 운운하며 헐리우드 스타의 연애나 결혼소식은 번개처럼 빨리 전달되고는 하지만 세계방방곡곡에 어떤 분쟁으로 어떤 결과가 발생했는지, 그리고 그 분쟁에 대해 누가 어떤 태도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기초적이라고 하기 민망할 정도로 얕으면서도 (특히 미국쪽으로) 편향된 듯하다. 여기에는 사실 대중이 쉽게 접할만한 국제정치 관련 서적이 드문 현실도 한몫하는 듯 싶다.

대중이 쉽게 접할만한 국제정치학 입문서를 찾기 어려운 현실은, 많은 부분 국제정치학이 다루는 국제정치라는 환경의 특수성에 기인하는 부분도 있다. 한두해가 멀다하고 이곳저곳에서 무시하기 어려운 대형사고가 빈발하는 국제정치는, 그 사건의 다발성으로보나 비중으로보나 어지간한 기동성으로는 커버하기 어려운 다이나믹함을 지니고 있다. 더군다나 국제정치가 다루는 범위는 통시적, 공시적 양 측면에서 너무도 광범위하기에 단순히 몇몇이론으로 꿰어 설명하는 방식으로 보편성을 확보하기에도 지난한 측면이 있다. 결국 이론과 시사성을 적절히 융합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 점 또한 쉬운 일은 아니다.

결국 그 대안으로 조지프 나이의 입문서가 많이 쓰이는 것 같은데, 모든 인문사회과학 분야가 그렇듯 '시각'의 문제가 잔존한다. '제국'으로서의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미국인의 시각과 우리의 시각은 아무리 보편적인 측면을 추려보려해도 어마어마한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평화와 미국이 생각하는 평화는 사실 그 수단과 의미 양면에서 모두 상당한 차이를 노정하고 있음은 북핵과 관련한 다양한 외교적 노력속에서도 이미 목도한 바 있다. 본서는 앞에서 언급한 한계를 그나마 가장 극복한 입문서로 보이는데, 적어도 고등학생 이상이라면 재미있게(?!)읽을만한 난이도에 국제문제에 있어서 다양한 이슈들을 총망라해서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 국제문제를 바라봄에 있어 몇가지 대표적인 이론을 설명하는 것 또한 빼놓지 않았다. 물론 본서에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국제문제를 구성하고 해결함에 있어 사실 현실적인 행위자라 할만한 주체가 강대국이기에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어느정도 거리를 유지하려는 저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분의 서술이 서방을 주체로 하여 전개되는 듯 싶다. 아울러 아무래도 국제정치의 전통적인, 혹은 시사적인 수많은 이슈들을 모두 언급하고 설명하려다보니 깊이면에서 무언가 전개되다 끝나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본서는 그 서술에 있어서 우리가 국제정치를 공부해야 하는 구체적인 목적-평화의 획득과 유지-을 중심으로 담담하게 풀어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패권주의적 정향과 경마식 보도로 점철된 언론으로 인해 오염된 우리의 시각을 환기시켜주는 역할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국제정치학의 목표가 무슨 '세계정복'정도 되는 줄 아는 듯한 주류 언론의 서술과 은근히 알게모르게 그러한 시각에 묵시적으로 동의하는 듯한 대중적 인식이 만연해 있는 오늘의 현실 속에 '평화'야말로 국제정치학이 존재하는 진정한 목표이고, 그러한 목표아래 여러 수단을 신중하게 검토하는 본서같은 입문서야말로 전공자가 아닌 '대중'에게 좀더 많이 읽혀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만주벌판 달리고 대마도를 정벌하기 위해 국제정치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 눈에는 그야말로 '심심'하기 이를데 없는 국제정치학 입문서가 얼마나 감흥을 일으킬지 의문이긴 하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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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선거이야기 - 1948 제헌선거에서 2007 대선까지
서중석 지음 / 역사비평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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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형식을 가진 민주주의(흔히 자유민주주의라고 칭해지고, 혹자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라고 말하기도 하는)가 어떠한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는지를 일일히 부연설명하지 않더라도 현대의 정치구조 속에 선거가 갖는 강력하면서도 특수한 함의를 부인할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선거의 특수하달법한 기능은 그 자체로서 우리에게 몇가지 논점을 제시하는데 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첫번째로는 현대 정치구조에서 선거가 가지는 그 특수한 위상이 과연 합리적이라 할만큼 선거라는 제도가 그 나름의 민주적 정당성을 담지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이는 불법, 탈법선거라는 선거과정에서 참여자의 비위를 차치하고라도 제기할 수 있는 문제로서 결국 민주주의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선거가 과연 민주적인 것이냐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결과적으로 다수의 '인기'에 기반한 인물을 뽑는다는 발상이 정치 자체를 '정치 없는 정치'로 희화화 시킬 수 있는 우려가 있다는 점(이는 오늘날엔 미디어의 발달과 자본집적의 고도화(?)로 심지어 '구조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까지 한다.)뿐만 아니라 다수의 의사가 일반의사와 과연 얼마나 일치하느냐는 의문은, 지역이기주의에 기반하여 당선된 수많은 '반민주적'성향의 국회의원을 보며 부정적 확신으로 변화하기까지 한다. 아울러 선거란 정치적 열망의 표출기재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열망을 억압하고 순화시키는 역할 또한 하고있는데(특히 개인적으로는, 최근의 우리사회에서의 선거가 이런 도구로 부쩍 자주 쓰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조금 있다) 이는 역사적으로 시도된 수많은 다른 시도들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선거가 중심이 된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어느 정도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될 중요한 이유 중 하나로 보인다.

두번째로는 선거라는 제도 자체가 민주적이건 그렇지 않건간에 현대 사회에서 선거 자체가 갖고 있는 현실적인 힘을 염두에 둘 경우 피할 수 없는 논제인데, 과연 우리사회가 치뤄 온 선거의 결과가 사회에 실질적으로 어떠한 변화를 이끌어냈으며 그 변화의 결과는 어떠한지에 대한 평가부분이다. 사실 현대사회에 보통선거가 갖고 있는 현실적인 영향력은 거의 주술적(!)이라 칭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고, 이는 오랜기간 군주제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말이지 군주제에 대해서는 '뒤도 안돌아보고'공화제와 보통선거를 도입한, 아울러 해방이후 최대의 국민운동이란게 결국 '대통령 직선제 쟁취'를 위한 것이었던 우리 사회에는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처참하달만큼 저조한 투표율에 단 1~2%차이로 당락이 갈린 지난 교육감 선거를 두고 '국민은 경쟁을 택했다'운운하던 언론의 설레발이나 그러한 선거결과로 인해 '실제로도' 그만한 정치적 추진력이 주어지게 되는 구조를 생각해보라!) 때문에 이는-선거라는 제도는 그저 자본주의를 합리화하기 위한 과정일 뿐이라는 급진주의자의 주장에 동의한다 하더라도-우리가 선거라는 화두에 대면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매우 중요한 이유가 된다.

본서는-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굳이 따질 것도 없이 두번째 문제의식에 따라 서술된 역사 서적이다.(즉, 본서 뒷면의 '선거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결코 상식이 될 수 없다'는 광고(?) 문구를 두고 아무리 토를 단다해도 남의 다리 긁는 격이 될 수밖에 없다는 소리다.) 본서와 비슷한 형식, 즉 선거를 중심으로 서술된 역사서적으로 언뜻 떠오르는 것은 개마고원에서 출간된 '진보와 보수의 영국사'(이하 '영국사')정도인데, '영국사'가 단순히 역사 서술의 기술적 용이성을 위해 선거를 중심으로 서술한 것으로 보인다면, 본서는 오로지 대선과 총선만을 중심화두로 언급하며 거기에 다른 부분은 선거와 '관련하여' 곁들여진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겠다. 아무튼 한겨레 문화센터에서 2007년 초에 열린 바 있던 시민강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본서는 강좌를 바탕으로 한 책이 일반적으로 그렇듯 읽기편하고 지루하지 않다는 장점은 있지만-시간제약이 있는 '강좌'라는 한계로 인해-깊이가 부족하고 몇가지 논점은 아예 무시하고 넘어간다는 점에서 아쉬운 점이 많은 책이다.

그 중에도 특별히 아쉬운 부분을 꼽자면 먼저 제2공화국 시절의 선거를 서술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4.19 이후 심지어 지금까지도 가장 자유롭고 다원적인(?) 정치의 장이 열렸다고 해도 될 법한 것이 그 시절이거니와, 2공화국의 구조가 지속되었다고 가정할 경우 이는-그것이 좋건 나쁘건-오늘날 우리가 '가보지 못한 길'이었을 확률이 높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당시의 선거를 분석하는 것이 무의미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더군다나 정부가 어떠한 정책을 추진하기도 전에 비합법적인 수단으로 인해 무너져, 사실 분석할만한 유의미한 정치적 사건이라곤 선거밖에 없는 것이 2공화국이기에 당시의 선거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은 그 아쉬움이 더욱 크다 하겠다. 아울러 투표율의 변화와 관련해서도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점 또한 아쉬운 점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선거를 바라보는 저자의 자세 또한 얼마간 한몫하는 듯 싶기도한데, '선거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상식이 아니다'라는 저자의 대전제는, 결국 투표율이 낮은것에 대해 '나쁘다'외에는 별로 할말이 없어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에서도 언급했듯 선거는 완전무결한 제도가 아니고, 때문에 투표거부나 선거에 대한 무관심 또한 가볍게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선거가 우리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투표를 거부하는 행동 또한, 그것이 부정적인 것이건 긍정적인 것이건 가볍지 않은 함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본서가 얕은(?)분석에 기인한 단점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해방이후 남한만의 첫 단독선거부터 1공화국 사이의 분석은 분량으로보나(5회 강의 중 2회가 여기에 할애되었다) 깊이로 보나 나름대로 만족스러웠다. 더군다나 60년 선거역사동안 그나마 집권층의 인위적인 조작이 없는 최소한의 의미에서 '정상적인' 선거를 해본 역사라곤 15년 남짓밖에 되지 않는 우리 역사속에서 어디까지가 선거의 '진짜'결과인지를 추출해내고 그에 따라 판단하는 저자의 과학적이고 사려깊은 서술은, 자칫 잘못하면 그저 무협소설로 빠질수도 있을 법한(실제 우리의 '주류'언론은 선거를 그런식으로 다뤄왔고, 다루고 있다)주제를 과학적으로 구해(?)낸 듯 싶다.

하지만 무엇보다 본서가 갖는 현실적인 '미덕'은 얼토당토 않은 협잡과 반칙만이 난무하는 우리의 지난 선거사를 서술하면서도 그 협잡과 반칙이 그것을 행한 세력에게 어떻게 부메랑으로 돌아가 더 나은 오늘을 낳는데 도움이 되었는가를 날카롭게 분석해내고 있다는 점에 있다. 정치는 무조건 더럽고 추하다는 인식이 비정상적으로 만연해 있는 듯한 오늘날, 그리하여 참여 자체부터 불공정하게 짜여져 있는 '자본'(혹은 '경제')이라는 영역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참여자체의 평등성이 보장되어 누구나 사회 변화를 도모할 수 있는 가능성의 장이라 할법한 '정치'의 영역이 외면받아 축소되고 있는 오늘날, 이러한 우리의 역사적 '사실'을 되돌아보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정치'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바로잡는 첫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정치라는 것, 그 정치의 한 수단으로서 선거라는 것은 인간의 불완전성으로 인해-경제라는 영역이 그렇듯, 윤리라는 영역이 그렇듯-완벽하지는 못하지만, 그만큼의 완성도도, 그만큼의 가능성도 담지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이 영역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시킬 수 있으며, 또 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절망적인 변화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진보의 주춧돌이 되는 우리의 지난 역사는, 이에 대한 우리의 의지와 용기를 북돋워주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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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놈들의 제국주의 - 한.중.일을 위한 평화경제학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3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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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여년간의 한국사회를 돌아볼 때, 하나의 흐름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콕집어 무엇이라 명명하기 어려운 어떠한 특이한 현상이 있었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러한 흐름은 황우석 사건이나 디워 논쟁에서 극대화된 바 있는 흐름으로, 이 사건이 남긴 충격은 진보세력으로 하여금 결국 이전의 탄핵열풍이라던지 2002년 월드컵 열기의 실체가 무엇인가마저 다시한번 고민해보게 만들 지경에 이르렀다. 이 흐름을 누군가는 쇼비니즘이라 했고 누군가는 파시즘이라고 했지만, 그것을 그렇게 단순히 파악하기에는 그 사건이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괴이했으며, 황우석의 논문조작 사실이 드러나고 디워가 미국에서 참패하는 등 따지고 보면 파국으로 끝났음에도 여전히 잔존할 정도로 강한 생명력(?)을 지닌 흐름이란 점에서 그러한 간단명확한 설명에 다소간의 석연찮은 점이 있었음은 사실이다.

본서는 이러한 흐름을 정치경제학적 견지에서 비교적 명확하고 일관된 논리로 해석한 거의 첫번째 시도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는 듯 하다. 사실 책에서 주장하는 논리라는 것이 그리 복잡한 것은 아니다. 과도한 수출지향적 경제구조라던지, 건설산업이 과부하 상태에 있는 산업구조의 극단적인 불균형 속에서 우리 경제는 어느덧 내외부의 식민지를 필요로 하는 제국주의적 단계의 초입에 들어섰지만, 우리는 사실 식민지를 경영해본 경험도, 경영할 수 있는 능력도 존재하지 않기에 '촌놈들'의 제국주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정도의 차이는 있지만-역시나 비슷하게 생존을 위해서는 팽창을 도모할 수밖에 없는 경제구조를 지니고 있는 일본과 중국과 얽혀져 향후 동북아의 긴장을 불러일으킬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인데, 저자는 이러한 패권주의와 제국주의적 경제체제라는 화두로 불안정하더라도 최대한 도모해야하는(그리고 할 수 밖에 없는)평화적 경제체제를 모색하고 있다.

한국경제 대안시리즈의 세번째로 그의 이전의 두 저서('88만원 세대'와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수 있을 법한 마지막 1%(?!)마저도 장기적으로는 안정적으로 발전을 도모할 수 없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한 본서는 결국 우리의 공격적이고 천박한 자본주의가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음을 방증하는 듯하다. 다른 책과는 달리 비교적 장기적인 문제를 논하고 있는 터라, 본서는 많은 부분 그 대상을 지금의 10대에 집중하여 서술하고 있는데, 이러한 의도는 그 내용과 문체와도 엮어져 사실 중고등학생이 읽더라도 어렵잖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쉬운 서술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우석훈의 문체는 단순히 쉬움을 뛰어넘는다는 점에서 본서는 다른 사회과학 서적들과 그 궤를 달리한다.

대북 지원의 내용상의 변화과정이라던가 이라크 파병결정 과정에서의 명분과 논리들, '경제영토'라던지 '동북아 중심국가'라는 수사학, 거기에 황우석 사태와 디워 논쟁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현상에 대한 것이 우석훈의 잡담하는 듯한 화법에 걸려 들어가면, 뭐랄까 굉장히 색다르면서도 날카로운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러한 비판과 분석의 적절성은 단순히 정치경제학 뿐 아닌 심리학, 미학, 철학등 제반학문들과 최신 이론에 의해 우리에게 굉장히 새로운 시각을 선사하는데, 단순히 서구 누구누구 학자의 학설을 늘어놓으며 우리의 현실을 꿰어맞추기 급급한 학계의 현실에서 이러한 분석을 접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신선할 지경이었다. 솔직히 이 땅에 살고있는 시민이라면 단순히 넘어가기 어려운 황우석 사태라던가 월드컵 쇼비니즘에 대해 칼럼수준을 넘어서는 분석을 해낸 사회과학 서적이 얼마나 있을까? 이 점은 다시금 해외로 해외로 팽창을 도모하면서도 정작 팽창을 할만한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 우리의 '촌놈스러움'을 떠올리게 만든다.

저자는 '평화의 조건은 평화로울 때 만들어야 한다'며 여러가지 대안을 제시한다. 이는 의외로 굉장히 현실적이고 예상보다 훨씬 구체적이었는데, 평화로 인해 이득을 볼 '평화산업'의 비중을 전쟁과 관련한 산업에 비해 늘이는 것이라던지, 한중일 3국판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을 추진하는 것이라던지 등이 그것이다. '평화로 인해 이득을 보는 사람이 많아질 때 평화는 지켜질 수 있을 것'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으로 보이는 명제는 역설적으로 지극히 이념적이고 이상적인 대안과도 연결되는 면이 있다. 사실 '평화산업'이라는 모호한 대상을 명확히하는 과정 속에서 평화적 삶의 양태, 평화적 삶의 가치관등을 정립하는 것이 가능 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의 이 '촌놈들의 제국주의'적 흐름은 생태적이고 평화적인 흐름을 도모하는 세력의 현실적인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외려 생태적이고 평화적인 '삶의 양태'가 정립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어느정도 맹아가 형성되는 단계에서 판판히 깨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점에서 저자의 문제제기는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지극히 보편적으로 다가온다.

어찌보면 저자의 예상과 달리 하느님이 보우하사 한반도에 향후 30년안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아니 전쟁은 고사하고 저자가 말한만큼의 유의미할 정도로 극단적인 긴장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팽창주의적이면서도 천박하게 공격적인 한국의 자본주의적 특성은 그러한 대외적 팽창이 억압(?!)된만큼 다른 부분에서 사고를 칠 수 있을만한 여지는 충분하다. 그것은 내부의 소수자를 강도높게 억압하는 것으로 발현될 수도 있고, '금수강산'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그 아름다운 자연을 극단적으로 폐허로 만드는 것으로 발현될 수도 있다.(또 그러한 발현과정이 진행중에 있음을 우리는 곳곳에서 어렵잖게 목도할 수 있다.) 때문에 본서의 논리를 단순히 '전쟁에 대한 몽상적일 정도로 과도한 위협론'정도로 일축하는 것은 누구보다 그 말을 하고있는 자신 스스로를 속이는 일일 것이다.

국민소득 이만불만 되면 행복할 줄 알았던 우리의 삶은 여전히 불안하고, 현실은 여전히 시궁창이다. 경제는 나름대로 돌아간다고 하긴 하는데 그게 아무리 긍정적으로 보려해도 결코 아름다워보이지는 않는다. 경제활동이란 우리가 좀더 행복하게 살기 위해, 서로 돕고 평화롭게 살기위해 하는 것이고 해야만 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현실적으로건 단순히 논리속에서만 가능한 일이건 심지어 전쟁으로 귀결될 가능성마저 있는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는 우리의 경제생활은 '목적전치'라는 말을 붙히는 것마저 감지덕지할 정도로 가히 정신분열증적이라 할만하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우리의 삶이 적어도 좀더 나은 가치를 지향해 나갈 수 있도록 방향전환을 함에 있어 우석훈의 문제제기는 매우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의 또다른 근작인 '직선들의 대한민국'과 함께 읽어보는 것도 괜찮을 듯 싶은데,(저자가 의도한 바인지는 모르겠지만, 두책은 여러부분에서 묘하게 엮인다.) 아무튼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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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와 민주주의 현대의 지성 59
노르베르토 보비오 / 문학과지성사 / 199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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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 조금 섞어서 20세기 이탈리아가 낳은 최고의 정치학자라고 할만한 노르베르토 보비오의 본서를 처음 접한 것은 대학 학부과정의 마지막 학기였던 4년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정치학의 'ㅈ'조차 전문적으로 접해보지 못한 나로써는 본서를 꽤나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땐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그랬던건지 어쩐건지 하여간 4년전보다는 눈꼽만큼이라도 조금 더 교양을 쌓은(과연?)오늘 이 책을 읽음에 있어서 들었던 의구심은 '어떻게 그땐 그렇게 쉽게 이 책을 읽을수 있었는지'하는 것. 사실 본서가 그리 어려운 이야기들을 늘여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굳이 난이도로 따지자면 여느 정치사상서적의 평균적인 난이도를 뛰어넘는 수준은 아니라는 것이다. 외려 본서의 그 난해함은 책에서 등장하는 그 수많은 이데올로기들-자유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에 맑스주의까지-이 무엇을 겨냥하여 운위되는 것이며, 저자 또한 누구에게 누구를 위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가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는 점에 있다는 것인데, 이는 크게 두 부분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은 이탈리아 정치사의 특수성을 들 수 있겠다. 이탈리아는 어느 정치학자가 언급한 바, 서구의 정치적 흐름이 가장 극적으로 표출되는 지역이라는 특징이 있다. 이 나라는 무솔리니의 손녀가 조부의 뜻을 계승하는 정당 소속으로 무려 현직 국회의원을 하고 있는 나라임과 동시에 서구에서 가장 강한, 거의 단독으로 수권이 가능한 공산당을 가졌던(그리고 그 후신이 여전히 강한 세력을 유지하며 가끔씩(?!)집권하기도 하는)국가이기도 하다. 해서 적어도 동구의 몰락 이전까지는 보비오가 속해있던 사회당 등 중도좌파 정당마저 다른 서구의 중도좌파정당과는 달리 공산당에 조금 더 적대적이었고, 때문에 심지어 공산당의 집권을 저지하기 위한 연립정권 블록에 참여한 이력을 갖고 있기도 하다. 이런 상황때문인지 저자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의회민주주의 등 자유민주주의적 가치를 수용한 사회주의를 논하는 과정에서 자유주의적 가치를 과소평가하는 맑스주의에 대한 비판에 굉장히 많은 부분을 할애하며 사회주의와 맑스주의를 구분하고 있는데, 이는 사회민주주의적 가치마저 논해본 역사가 일천한 우리로써는 뜻하지 않은 난해함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그 다음으로 들 수 있는 요인은 자유주의, 민주주의, 그리고 나아가 사회주의에 대한 우리 사회의 개념이 어느정도라도 합의된 바 없으며, 그러한 이념이 형성되는 과정을 우리 사회가 주체적으로 겪어내지 못했다는 측면에 있겠다. 절대왕정체제를 타파하며 자유주의가 민주주의와 함께 도래한 서구의 역사적 상황, 그 시민혁명의 주체가 담지한 사회적 지위의 특수성과 민주주의 이념의 보편성이 괴리를 일으키며 겪게되는 갈등, 그것이 산업사회의 도래와 노동자의 성장으로 인한 사회주의의 도전으로 인해 분절되는 역사적 경험을 가지지 못하고 어느날 갑자기 총선거를 치르고 대통령을 뽑은 우리의 역사적 경험은, 군사독재 시절, 아니 심지어 지금까지도 자유주의의 기본가치-언론 출판의 자유라던지 양심의 자유라던지 하는 것-에 대한 침해에 대해 매우 나이브한 이해를 가진 사람들이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는 현실과 겹쳐지면서 보비오의 주장을 이해하는 것을 더욱 무망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러한 우리사회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상의 난맥상은 오늘, 우리사회에서의 이 책의 필요성을 더욱 높이는 요인이 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벵자멩 콩스탕의 매우 고전적이면서도 날카로운 지적 즉 자유주의는 국가권력의 제한에 초점이 맞추어져있고 민주주의는 권력을 골고루 분배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에 둘 간의 관계는 언제나 긴장관계일수밖에 없다는 명제로 시작한 본서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한 하나의 화두 모음 혹은 에세이로 읽혀질 정도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흘러흘러 풀어놓는다. 그 속에는 기실 민주주의보다는 자유주의적 덕목의 강력한 수호를 원했던 토크빌이나, 그보다는 좀더 평등에 대한 세련된 고찰을 해낸 밀도 등장하고, 자유주의와는 달리 역사적으로 민주주의와의 관계에 있어 조금 더 친화적인 것처럼 보였던 사회주의가 민주주의, 그리고 자유주의와 어떠한 긴장관계에 있는지도 논하여진다. 한편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한 사상사로 읽혀지면서 여러 화두가 다소 파편화되게 읽히는 측면도 없지않은 본서가, 그럼에도 하나의 흐름을 두고 읽혀질 수 있게되는 것은 본서의 놀랍다싶을 정도의 편집이 한몫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본문의 마지막 장에 '하나의 사족'으로 보비오의 다른 논문인 '민주주의의 미래'를 이어붙힌 것이나, 부록으로 '그람시와 시민사회의 개념'을 수록한 후 마지막장에 이탈리아 정치에 대한 저명한 학자인 리처드 벨라미의 '현대 사회주의와 노르베르토 보비오의 정치사상'을 수록한 것은 굉장히 성공적인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나처럼 '철없는'독자들을 위한 좋은 길잡이가 되고 있다.

막스 베버의 유명한 한마디-예언과 선동은 학문의 강단에 소속된 것이 아니다-를 인용하며, 매우 조심스럽게 역사와 현상에 대해 언급하며, 온통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양자와 사회주의가 얼마나 모순적이면서도 뗄레야 뗄수 없는 관계에 있는지 어지러울 정도로 설명하고 있는 저자가 본서에서 중점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부분은 크게 두 가지로 하나는 '자유주의를 무시한 사회주의'이고, 이와 연동하여 '급진적인 참여 민주주의'정도로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 저자는 간접민주주의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좀 더 다양한 참여를 도모한다는 명목으로 추진되고 있는 직접민주주의를 향한 과도한 흐름이 결국 복잡하고 다층적 사회에서 역설적으로 비민주적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음을, 자유주의에 적대적인 맑스주의가 언론, 출판의 자유 등 '개인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며 등장한 자유주의의 정치적 발현으로써의 민주주의마저 질식시키는 길임을 이야기하며, 모호하고 모순된 대안만을 내놓는 급진적 사회주의보다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좀더 민주적이고 좀더 평등지향적인 사회를 건설하는 것은 결국 자유주의의 덕목을 받아들인 일종의 불완전한(?!) 사회주의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주장에 반대가 될만한 논거들-주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태생적 모순성에 기인한-에 대해 인정할 것은 인정하면서도 저자는 결국 그러한 논거들이 아직 다원주의에 기반한 자유민주주의를 뒤엎을만큼의 이유는 되지 못한다며 자유민주주의의 현실적인 필요성을 역설한다. 

위와 같이 저자의 집필 목적만 따른다면 본서는 '개혁주의 정책'을 옹호하는 한 사민주의자의 급진주의자에 대한 이론적 항변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한반도'의 '21세기'를 살고 있다는 시공간적 배경의 상이함 때문인지 다른 부분이 좀 더 도드라지게 읽히는 것이 사실이었다.(아마 이처럼 시공간을 초월하며 상이하지만 생산적인 해석이 가능하기에 이 책을 정치학의 '고전'으로 분류해도 무방할 듯 싶다) 유의미한 급진주의 세력이 없고, 한가로이 '옹호'하고 있을만큼 어떠한 일관성있는 개혁 정책이 추진되는 것도 아닌 이 땅의 현실 속에서, 본서는 외려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을 마치 전가의 보도인 양 행사하는 보수세력의 행태가 얼마나 민주주의를, 혹은 자유주의를 질식시키고 있는 것인가를 고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나아가 사회주의와의 관계는 그것이 어느 쪽으로건 자연스럽게 연결될만큼 간단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이념간의 난맥상은 사회의 복잡 다변화 속에서 더욱 가중되면 가중되었지 결코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자유민주주의'를 화석화시켜 상대를 공격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오늘의 세태는 결과적으로 자유민주주의의 참 의미에 대한 심각한 훼손으로 귀결될 따름이다.(그 모습을 우리는 오늘날 너무나도 명명백백히 사회 곳곳에서 목도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발전은 더 많은 복지를 요구하며 이는 더 큰 국가, 더 많은 관료 그리고 역설적으로 더 적은 민주주의로 귀결된다. 자유주의의 발전은 더 많은 소유권을 요구하며 이는 더 많은 빈부격차, 그리고 빈민층의 자유에 대한 극심한 침해로 귀결된다. 그렇다고 자유주의적 가치를 배제한 사회주의로 민주주의를 구하려는 시도는 그 '개인주의'적 함의로 인해 자유주의와 함께 교호적으로 발전해 온 민주주의의 특성을 무시하게 되어 또다른 모순으로 귀결된다(과거 동구권, 그리고 지금의 위쪽 동네에서 우리는 그 모습을 어렵잖게 발견해온 바 있다.) 이러한 패러독스 속에서 우리가 가야 할 우선적이고도 유일한 길은 인간의 다원성과 인식론적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시작점으로 되돌아가 미래를 기획하는 것이겠다. 그런 점에서 다시 자유주의로, 다시 민주주의로 돌아가 그 둘의 관계를 검토하며 오늘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문제들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것인지를 다시금 질문하는 본서는 읽혀져야만 할 이유가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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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전집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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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책보다는 TV를, 글보다는 이미지를 좋아하는 나는 그리 현명한 독자는 되지 못한다. 덕분에 비유나 축약으로 가득한 운문은 나에게는 거의 쥐약에 가깝다고 봐도 과언은 아닌데, 본서 또한 이부분 저부분 조금씩 읽다가 결국 거의 9년이 다 지나서야 완독하게 된 셈이다.(그럼에도 여전히 어느정도 감흥이 일 정도의 이해라도 가능했던 작품은 고작해야 절반정도 되는 것 같다.)

대학 신입생 시절, 교양국어 강사의 다소 호들갑스럽다 할만한 극찬으로 인해 알게 된 기형도의 이 전집에는 '입속의 검은잎'에 수록된 작품 외에 이전에 발표된 바 없는 다른 시와 소설 및 수필과 평론들도 수록되어 있다. 입속의 검은 잎 말미에 수록되어있던 김현의 평론이 빠져 있다는 것은 다소 안타깝긴 하지만, 그럼에도 시인 본인이 습작처럼 쓴 소설이나 수필들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사실 몇몇 소설의 경우 다소 투박한 부분이 보이기도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시인'으로 등단했다는 사실이 무색하게 대부분의 소설이나 수필들은 굉장히 재미있고 심오하게 읽힌다. 

기형도의 글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흐름은 역시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그로테스크한 묘사라던지 고독과 슬픔의 정조일 것이다. 그리고 그 고독이나 슬픔의 정조는 군중 속의 고독, 형식적으로 소통은 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사방으로 고립되어버린 현대인의 정서와도 어느정도 상통하는 것이기에 그의 글 특유의 정말이지 철저하다싶은 어두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중적으로(?!) 읽혀지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책을 읽으며 조금씩 불편한 부분이 있었고, 처음에는 그것이 기형도 글의 난해함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 불편함의 원인은 다른 곳에 있었던 것 같다.

대학 3학년 때쯤이었나, 그 정도만 되어도 동아리나 학회에서 원로(?)역할을 하게 되던 시절, 문화운동(?!)동아리에서 여전히 활동을 하던 한 친구가 농담삼아 했던 이야기가 기억난다. 그 친구가 신입생이었을 때 한 3년 터울의 선배가 나와서 '..XX운동의 끝자락에서..'라고 자신을 소개했었는데, 이젠 자신이 그런 식으로 자신을 소개하게 되었노라고.

어찌보면 우리들이 기형도의 시를 읽고 그것에 공감하는 것은 많은 부분 그의 시적 표현보다는 그것을 관통하는 정조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기형도가 이야기하고 있는 고독과 슬픔의 정조는, 우리 세대의 고독이나 슬픔과는 다소, 아니 꽤나 많이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소위 '88만원세대'의 시작을 알린 우리 세대의 대학시절은, '소비'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시작한 우리세대의 삶은,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가 느끼게 된 고독과 슬픔의 감정은 기형도 시절의 그것과 달라도 아주 많이 다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의 시를 읽고, 그의 시로 말하며, 그의 고독과 슬픔의 언어를 곱씹는다.

내가 느낀 불편함은 전적으로 이 부분에 기인한다.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우리의 대학시절이 결국 은연중 언제나 과거만을 바라봤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거의 10년 가까이 'XX흐름의 끝자락'을 내세웠던 우리는-그것이 대외적인 여건 때문이건, 스스로의 역량부족 때문이건-우리의 흐름을 만들 생각도, 우리의 언어를 만들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좋았다던 선배들의 시절을 동경하며, 그 시절을 따라서 노래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정작 우리의 애환이 담겨있는 대학시절은, 우리의 추억이 담긴 우리의 시대는 누가 노래해줄까? 정작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그저 기형도를 통해 이야기할 수 있을 뿐. 그리고 그의 시로 이야기하는 우리는, 또 한번 과거를 향해 가슴아프게 늙어간다. 그래서 슬프고, 그래서 우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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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이 2008-08-19 10:39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우리의 시대와 우리의 언어......

率路 2008-08-19 17:15   좋아요 0 | URL
여기서 보게되니 신선(?!)하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