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놈들의 제국주의 - 한.중.일을 위한 평화경제학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3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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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여년간의 한국사회를 돌아볼 때, 하나의 흐름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콕집어 무엇이라 명명하기 어려운 어떠한 특이한 현상이 있었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러한 흐름은 황우석 사건이나 디워 논쟁에서 극대화된 바 있는 흐름으로, 이 사건이 남긴 충격은 진보세력으로 하여금 결국 이전의 탄핵열풍이라던지 2002년 월드컵 열기의 실체가 무엇인가마저 다시한번 고민해보게 만들 지경에 이르렀다. 이 흐름을 누군가는 쇼비니즘이라 했고 누군가는 파시즘이라고 했지만, 그것을 그렇게 단순히 파악하기에는 그 사건이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괴이했으며, 황우석의 논문조작 사실이 드러나고 디워가 미국에서 참패하는 등 따지고 보면 파국으로 끝났음에도 여전히 잔존할 정도로 강한 생명력(?)을 지닌 흐름이란 점에서 그러한 간단명확한 설명에 다소간의 석연찮은 점이 있었음은 사실이다.

본서는 이러한 흐름을 정치경제학적 견지에서 비교적 명확하고 일관된 논리로 해석한 거의 첫번째 시도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는 듯 하다. 사실 책에서 주장하는 논리라는 것이 그리 복잡한 것은 아니다. 과도한 수출지향적 경제구조라던지, 건설산업이 과부하 상태에 있는 산업구조의 극단적인 불균형 속에서 우리 경제는 어느덧 내외부의 식민지를 필요로 하는 제국주의적 단계의 초입에 들어섰지만, 우리는 사실 식민지를 경영해본 경험도, 경영할 수 있는 능력도 존재하지 않기에 '촌놈들'의 제국주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정도의 차이는 있지만-역시나 비슷하게 생존을 위해서는 팽창을 도모할 수밖에 없는 경제구조를 지니고 있는 일본과 중국과 얽혀져 향후 동북아의 긴장을 불러일으킬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인데, 저자는 이러한 패권주의와 제국주의적 경제체제라는 화두로 불안정하더라도 최대한 도모해야하는(그리고 할 수 밖에 없는)평화적 경제체제를 모색하고 있다.

한국경제 대안시리즈의 세번째로 그의 이전의 두 저서('88만원 세대'와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수 있을 법한 마지막 1%(?!)마저도 장기적으로는 안정적으로 발전을 도모할 수 없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한 본서는 결국 우리의 공격적이고 천박한 자본주의가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음을 방증하는 듯하다. 다른 책과는 달리 비교적 장기적인 문제를 논하고 있는 터라, 본서는 많은 부분 그 대상을 지금의 10대에 집중하여 서술하고 있는데, 이러한 의도는 그 내용과 문체와도 엮어져 사실 중고등학생이 읽더라도 어렵잖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쉬운 서술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우석훈의 문체는 단순히 쉬움을 뛰어넘는다는 점에서 본서는 다른 사회과학 서적들과 그 궤를 달리한다.

대북 지원의 내용상의 변화과정이라던가 이라크 파병결정 과정에서의 명분과 논리들, '경제영토'라던지 '동북아 중심국가'라는 수사학, 거기에 황우석 사태와 디워 논쟁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현상에 대한 것이 우석훈의 잡담하는 듯한 화법에 걸려 들어가면, 뭐랄까 굉장히 색다르면서도 날카로운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러한 비판과 분석의 적절성은 단순히 정치경제학 뿐 아닌 심리학, 미학, 철학등 제반학문들과 최신 이론에 의해 우리에게 굉장히 새로운 시각을 선사하는데, 단순히 서구 누구누구 학자의 학설을 늘어놓으며 우리의 현실을 꿰어맞추기 급급한 학계의 현실에서 이러한 분석을 접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신선할 지경이었다. 솔직히 이 땅에 살고있는 시민이라면 단순히 넘어가기 어려운 황우석 사태라던가 월드컵 쇼비니즘에 대해 칼럼수준을 넘어서는 분석을 해낸 사회과학 서적이 얼마나 있을까? 이 점은 다시금 해외로 해외로 팽창을 도모하면서도 정작 팽창을 할만한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 우리의 '촌놈스러움'을 떠올리게 만든다.

저자는 '평화의 조건은 평화로울 때 만들어야 한다'며 여러가지 대안을 제시한다. 이는 의외로 굉장히 현실적이고 예상보다 훨씬 구체적이었는데, 평화로 인해 이득을 볼 '평화산업'의 비중을 전쟁과 관련한 산업에 비해 늘이는 것이라던지, 한중일 3국판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을 추진하는 것이라던지 등이 그것이다. '평화로 인해 이득을 보는 사람이 많아질 때 평화는 지켜질 수 있을 것'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으로 보이는 명제는 역설적으로 지극히 이념적이고 이상적인 대안과도 연결되는 면이 있다. 사실 '평화산업'이라는 모호한 대상을 명확히하는 과정 속에서 평화적 삶의 양태, 평화적 삶의 가치관등을 정립하는 것이 가능 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의 이 '촌놈들의 제국주의'적 흐름은 생태적이고 평화적인 흐름을 도모하는 세력의 현실적인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외려 생태적이고 평화적인 '삶의 양태'가 정립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어느정도 맹아가 형성되는 단계에서 판판히 깨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점에서 저자의 문제제기는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지극히 보편적으로 다가온다.

어찌보면 저자의 예상과 달리 하느님이 보우하사 한반도에 향후 30년안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아니 전쟁은 고사하고 저자가 말한만큼의 유의미할 정도로 극단적인 긴장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팽창주의적이면서도 천박하게 공격적인 한국의 자본주의적 특성은 그러한 대외적 팽창이 억압(?!)된만큼 다른 부분에서 사고를 칠 수 있을만한 여지는 충분하다. 그것은 내부의 소수자를 강도높게 억압하는 것으로 발현될 수도 있고, '금수강산'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그 아름다운 자연을 극단적으로 폐허로 만드는 것으로 발현될 수도 있다.(또 그러한 발현과정이 진행중에 있음을 우리는 곳곳에서 어렵잖게 목도할 수 있다.) 때문에 본서의 논리를 단순히 '전쟁에 대한 몽상적일 정도로 과도한 위협론'정도로 일축하는 것은 누구보다 그 말을 하고있는 자신 스스로를 속이는 일일 것이다.

국민소득 이만불만 되면 행복할 줄 알았던 우리의 삶은 여전히 불안하고, 현실은 여전히 시궁창이다. 경제는 나름대로 돌아간다고 하긴 하는데 그게 아무리 긍정적으로 보려해도 결코 아름다워보이지는 않는다. 경제활동이란 우리가 좀더 행복하게 살기 위해, 서로 돕고 평화롭게 살기위해 하는 것이고 해야만 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현실적으로건 단순히 논리속에서만 가능한 일이건 심지어 전쟁으로 귀결될 가능성마저 있는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는 우리의 경제생활은 '목적전치'라는 말을 붙히는 것마저 감지덕지할 정도로 가히 정신분열증적이라 할만하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우리의 삶이 적어도 좀더 나은 가치를 지향해 나갈 수 있도록 방향전환을 함에 있어 우석훈의 문제제기는 매우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의 또다른 근작인 '직선들의 대한민국'과 함께 읽어보는 것도 괜찮을 듯 싶은데,(저자가 의도한 바인지는 모르겠지만, 두책은 여러부분에서 묘하게 엮인다.) 아무튼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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