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뒷모습
정채봉 지음 / 샘터사 / 200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무조건 착하게만 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일종의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그래서 착한 사람들 얘기만 나오는 '좋은 생각' 보다는 다양한 삶의 모습들이 나오는 '샘터'를 읽는다. (어쩌면 이것은 편견일 수도 있다.) 정채봉 선생님의 글은 어떠한가. 그 분이 쓰신 책들의 내용은 어떻게 보면 내가 거부감을 느낄 수 있는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분의 글들을 사랑한다. 아마도 직접적으로 착해야 함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게다. 시인 정호승님의 말씀에도 잘 나와 있다.

'정채봉의 글을 읽고 있으면 결코 용서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슬그머니 용서하게 되고, 끝끝내 용서받고 싶지 않는 마음도 슬그머니 용서받고 싶어진다. 그는 사람이 어떻게 해야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것을 이미 다 알고 있다.'

아직 선생님의 책들을 많이 읽은 것은 아니지만, 글을 읽다보면 법정 스님께서 말씀하신 '맑고 향기롭게' 라는 말이 떠오른다.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단점과 잘못을 인정하고 그것을 어떻게 바꾸고 고쳐서 타인과 함께 사는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할 때 이 세상은 조금씩 맑고 향기로워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의 내용 가운데 정말 기록해 두고 싶은 문장들을 적어본다.

- 모름지기 살아간다는 것은 '소유'가 아니라 '이룸' 입니다. 진정한 이룸은 가득 채워져서 더 들어갈 수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비워 가며 닦는 맑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꽃뫼에서 : 풀꽃은 절대로, 큰 소리로 떠들지 않는다. 들릴락 말락하게 속삭일 뿐이다. 그것도 마음이 가난한 이들이나 알아들을 정도로, 풀밭에 누워 빈 마음으로 그 작은 얼굴을 바라보면 들려올 것이다. 마음의 어룽을 지워 주고 한없이 날아가고픈 동심을 심어 주는 풀꽃의 귀띔이.

- 그대 뒷모습 : 자연을 보고 있자면 시작도 물론 아름답다. 먼동이 터 오는 아침, 봄날의 여린 새싹들, 어린 새들의 재롱. 그러나 자연의 아름다운 뒷모습은 이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해질 무렵의 저녁노을, 저 불붙는 듯 화려한 낙엽들. 새들도 죽을 때 우는 울음이 가장 빼어나다 하지 않던가. 그 사람의 실체는 정작 본인이 떠난 다음에 그가 머문 자리에서 운명처럼 향기처럼 남는 것이다. 앞모습보다는 뒷모습이 아름다운 이들의 이웃이고 싶다.


- 나는 언젠가 고향의 바닷가에서 갈대밭 사이 뻘길을 기어 다니는 늙은 게 한 마리를 본 적이 있다. 어둠과 밀물이 저만큼 다가오고 있는데 집을 찾지 못하고 갈대밭 사이 뻘길을 방황하는 게. 우리 남매를 키울 때의 우리 할머니의 초조와 외로움이 그러했으리라.

- 밖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비 오는 주말. 혼자 떠나는 길손. 낭만일 것 같지만 가슴 한편에 젖는 우수가 있다. 내 생의 절반 정도를 나는 서울에서 살았다. 그 혼탁과 다난과 어울려서 파도 앞의 모래알처럼 굴러다녔다. 늘 가면을 느꼈고 내가 살고자 한 삶이 아닌 타인의 삶을 사는 듯한 착각을 느껴 오던 터였다.

- 인간 세상으로 뻔질나게 드나드는 단골 악마 :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게 하는 나태'와 '깨우침이 없는 어제처럼 오늘을 살게 하는 관습'과 '한 일보다도 나타냄이 약간 높은 선심' 그리고 '쥐꼬리만한 앎을 가지고 황소 머리만하게 드러내기 좋아하는 교만'과 '모든 예지를 눈멀게 하는 애욕'. 

- 유혹, 그 동사와 피동사 : 나는 바깥의 유혹보다는 내 안의 유혹이 더 무섭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10대 때는 이것이 눈에 몰려 있는 듯 하였다. 20대에 들어서는 유혹이 귀로 쏠리는 듯 하였다. 그러던 것이 30대에 들어서는 혀에 곤혹을 느꼈다. 그러다 40대에 이른 지금에서야 나는 비로소 남이 나를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유혹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내 스스로가 그런 빌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나태의 유혹을, 관습의 유혹을. 그리하여 핑계만 있으면 고통스러운 영혼의 의지를 떼어 버리고 몸이 편하자는 대로 살려고 하지 않는가.

- 마음의 문을 열고 : "아름다움이란 꽃이 어떤 모양으로 피었는가가 아니야. 진짜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에게 좋은 뜻을 보여 주고 그 뜻이 상대의 마음 속에서 더 좋은 뜻이 되어 다시 돌아올 때 생기는 빛남이야."

- "하늘이 내린 복을 다 받지 마라."는 말이 있다. 새 세기를 맞는 과학인과 기술인들은 주가 먼저 내놓느냐는 경쟁에서 한 걸음씩 물러나 처음의 마음, 곧 인간을 위한, 인류의 미래를 위한 의의와 윤리를 다시 챙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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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털이 2004-05-17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길이가 긴 글은 일단 읽기 불편하다. 그래서 나도 긴 글쓰기를 피하려고 하는데 책 내용을 옮겨 적다 보니 길어져 버렸군 :(
 


 제목 : 키스의 전주곡 (1992)   출연: 알렉 볼드윈, 멕 라이언

 줄거리 :  두 사람의 결혼식 날, 어떤 노인 (시드니 워커)이 나타나, 신부에게 키스를 청한다. 그러나, 키스를 하는 순간 리타 (멕 라이언)와 노인의 영혼이 바뀌어 버린다. (중략) 그들은 기억을 더듬어 리타는 아무 걱정 없는 노인을, 노인은 리타의 젊음과 생명력을 얼마나 부러워 했었는지를 깨닫는다. 그리고 다시 간절히 예전으로 되돌아가기를 원한다... 노인도 더이상 오래 산다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리타도 그 경험을 통해 세상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치유되었다.

이 영화를 보았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줄거리를 보니까 TV에서 본 것 같기도 하다. 잡지에서 어떤 사람이 쓴 글을 보았는데 할인마트에 갔다가 굉장히 귀여운 어린 꼬마를 보고서 이 영화가 생각이 났다고 한다. 그 아이와 자신의 영혼이 뒤바뀐다면? 그래서 '지금 갖고 있는 지식과 기억을 가지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면'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지금의 기억과 정신연령을 가지고 중학생으로 돌아간다면 좋겠다 하는... 지금 알고 있는 걸 그 때도 알았더라면 하는 후회를 하지 않도록 이것저것 해 보며 살 수 있을 것 같다. 중고등학교 때 공부 때무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아직도 내일이 당장 시험인데 국어, 국사 같은 과목을 하나도 공부 하지 않아서 놀라는 꿈을 가끔 꾼다 --; 대학 때는 오히려 열심히 공부 하지 않은 것을 지금 와서 후회한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내 삶의 주인으로서 내가 능동적으로 주도한 시간이 과연 얼마나 되는가?'

전에 술자리에서 어떤 형에게 이런 얘길 했더니 과거로 돌아가면 오히려 불행해질 거라고 한다. 왜냐고?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이니까. 하긴 그 때 그렇게 재미있었던 친구들과의 이야기며 놀이가 지금 다시 한다면 별로 재미 없을 것 같기도 하다. 그 나이 때 했던 고민과 지금 하는 고민도 많이 다를 거고...

무엇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맺은 좋은 사람들과의 인연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그 동안 실패와 좌절만 겪었던 것도 아니고 그 사람들로 인해 신나고 즐거웠던 일들도 많지 않았는가. 또 힘들고 고통스럽고 후회되는 일들은 그만큼 나를 단련시켜 왔을 것이다. 그런 경험들이 없었다면 "사람은 착하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 착함을 지키기 위한 강함도 같이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라는 전우익 선생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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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꼭 '씨네21'에 나오는 '건달, 무슨무슨 영화를 보다' 같은 말투다. 그리고 무슨 일기도 아닌데 매일매일 일상다반사를 적고 있다. 음... 내가 이렇게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던가. 그럼 알라딘 알기 전에는 어떻게 지냈단 말인가? 그래도 이곳에 와서 이렇게 '서재놀이'를 하는 게 재미있다. 전에 어떤 친구가 나에 대해서 '어떤 것에 흥미를 느껴도 그리 끈기 있게 오래 가는 스타일이 아니'라는, 조금 섭섭할 정도로 매우 객관적인 평을 한 적이 있었다. 흠... 그래도 아직은 서재에 글 쓰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번엔 좀 오래가게 될 것 같다. ^^ (그래도 일상다반사보다는 책 많이 읽고 리뷰를 많이 써야 할텐데...)

스승의 날인 오늘 대구에서 선배 결혼식이 있어서 KTX를 타고 다녀왔다. 음... 시승 소감은? 글쎄... 빠르긴 하더라. 정차역 없이 대전에서 동대구역까지 50분이 채 걸리지 않았으니까. 정방향이어서 말 많은 역방향 느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승차감도 괜찮았고. 불편한 점이라면 1) 터널을 지날 때 소음이 심하더라 2) 가끔 귀가 멍~해지더라 (높은 데 올라간 것도 아닌데 왜 그러지? 나만 그런가? --a 3)옆으로 다른 기차가 마주치며 지나가면 옆으로 흔들리는 느낌에 깜딱 놀랬다 ㅎㅎ

오늘 결혼한 선배는 나와는 학부 학번이 5년 차이 나는 형으로 석사 했던 랩에서 2년 동안 같이 지냈었다. 내가 2년 동안 실험실 막내였는데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나를 부를 때면 귀염둥이를 줄여서 '둥아~'하고 부른다 --; 결혼식을 올리는 형의 모습은 늠름해 보였다. 신랑 입장도 씩씩하게 하고 만세 삼창도 잘 하고. 신부 되시는 분도 예쁘더라. 사실은 5년 전 형이 처음 소개팅 하고 나서 나도 우연히 본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내가 '별로던데요...' 한 마디 했다가 지금까지 두고두고 그 형에게서 구박받아 왔다. 제발 그 일은 잊어주시고 앞으로 행복하게 서로를 잘 위해주며 잘 사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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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1월, 신경생물학 분야의 가장 큰 학회인  Society for Neuroscience의 annual meeting이 미국 남부 뉴올리언즈에서 있었는데 교수님과 함께 둘이서 참석했었다. 촌놈이 태어나서 첨으로 외국에 나가본 것이라 이것저것 신기한 게 많았다 ^^;

11월인데도 남부의 휴양도시 뉴올리언즈는 후덥지근한 날씨였다. (여름에는 가지 않는 게 좋을 듯 싶다.) 흑인과 재즈로 유명한 도시, 루이 암스트롱, 미시시피강이 바다로 나가는 곳. 1주일의 학회 기간 동안 보고 느낀 게 많았다. 그 넓은 학회장에서 만난 2만8천여명의 사람들과 그들이 발표한 포스터 및 강연을 보며 연구에 대한 자극을 많이 얻을 수 있었고, 저녁이면 프렌치쿼터에 있는 버본 스트리트에 가서 creole이나 gumbo, jambalaya 같은 음식을 먹은 뒤 (별로 맛은 없었다 --;) 거리를 거닐며 말타고 관광하는 사람들도 구경하고 재즈 공연도 보았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Preservation Hall은 1시간 넘게 줄서서 기다려야 했는데, 과연 100년이 넘은 재즈 연주장답게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 있는 좁은 공간에서 연주자들과 관객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표현의 자유분방함과 악기의 다양성 (색소폰, 피아노, 트럼펫, 트롬본, 베이스, 클라리넷, 반조 등)에 재즈의 매력이 있는 것 같다. 오늘 공연에선 흑인이 한 명 밖에 없어서 아쉽긴 했지만 6개월 전의 느낌이 다시 생각나는 그런 금요일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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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털이 2004-05-15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미국 갔다 와서 했던 다짐들... '연구를 열심히 하겠다', '영어를 유창하게 말하고 잘 알아듣도록 연습하겠다' 하나도 지키지 않고 있다 --;

Choice 2004-05-19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회갔다오면 언제나 그 두 가지 결심을 하지만 두 서너 달만 지나면 또 빈둥대고 있죠.--; 저만 그런건 아니었군요!

머털이 2004-05-19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두 서너 달'은 하셨군요. 저는 시작도 안 했다는... ^^; 이제 시작해야죠 ㅎㅎ
 

오전 랩미팅 시간에 교수님께서 흰 셔츠에 검은 넥타이를 하고 오셨길래 어디 조문 가시는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작년 풍동실험실 폭발사고로 숨진 학생에 대한 1주기 추모식이 오후에 있으니 생각있는 학생들은 가보라는 말씀을 하셨다. 아, 오늘이구나. 그새 1년이 지났네...

학교에서 준비한 추모식은 숙연한 분위기에서 추모사, 헌시 낭독, 박사학위 추서, 헌화 및 묵념 등의 순서로 진행이 되었는데 맨 마지막에는 조정훈 학우 아버님의 말씀이 있었다. 자식을 먼저 보낸 아버지의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말씀이었다. '지난 1년 동안 제가 어떻게 죽지도 않고 미치지도 않고 지금까지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식은 부모를 땅에 묻지만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고 했던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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