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고 보는 길 - 정채봉 에세이
정채봉 지음 / 샘터사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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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내가 읽은 고 정채봉 선생님의 세번째 책이다. 1998년 말 간암이 발병, 병원에 입원해서 수술을 받고 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그는 글을 썼다. 그래서 나온 책이 '눈을 감고 보는 길'이다. 자신이 겪은 고통과 삶에 대한 의지로 엮어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삶을 뒤돌아보며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자기 성찰의 글들이다. 안좋은 버릇이지만 나는 책을 읽을 때 가슴에 와 닿는 문구를 보게 될 때 조그맣게 그 페이지를 접는 버릇이 있는데 다 읽고 난 지금 다시 책장을 넘겨 보니 괜히 접었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많았기 때문에...


이 책의 서문엔 법정 스님의 글이 있다. 스님 스스로도 말씀하시길

"일찍이 안하던 짓을 그(정채봉)의 청에 기꺼이 선뜻 따른 것은 다시 건강을 되찾은 그를 무슨 일로든 거들고 싶어서다. 작년 이맘때 조마조마했던 일 돌이켜보고 고맙고 기쁜 나머지 이 책에 사족을 붙인다."

이 책이 출간될 때는 정채봉 선생님의 항암치료가 잘 되어서 퇴원을 했던 무렵이다. 선생님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따르는 두 분으로 수필가 피천득 선생과 법정 스님을 얘기하곤 했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그 분이 부럽다. 자기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분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그들과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는 건 정말 기쁜 일일 거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다음 리뷰에서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이 두 분 외에도 김수환 추기경, 이해인 수녀님 같은 분들과도 인간적, 문학적 교류가 있었으니 이만하면 정말 부러워 할 만 하지 않은가.

첫번째 글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힘내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 말이 책을 읽는 우리에게 뿐만 아니라 당시 선생님 자신에게도 한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 나이 한 살' 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병원에서 맞게 된 새해를 앞두고 12월 31일, 그 동안의 헌 나이를 지우고 다시 얻게 된 생의 첫 해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한 살 / 새 나이 한 살을 / 쉰 살 그루터기에서 올라오는 새순인 양 얻는다 (중략) 엉금엉금 기어가는 아기 /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벌거숭이 / 그 나이 이제 / 한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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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뒷모습
정채봉 지음 / 샘터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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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는 무조건 착하게만 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일종의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그래서 착한 사람들 얘기만 나오는 '좋은 생각' 보다는 다양한 삶의 모습들이 나오는 '샘터'를 읽는다. (어쩌면 이것은 편견일 수도 있다.) 정채봉 선생님의 글은 어떠한가. 그 분이 쓰신 책들의 내용은 어떻게 보면 내가 거부감을 느낄 수 있는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분의 글들을 사랑한다. 아마도 직접적으로 착해야 함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게다. 시인 정호승님의 말씀에도 잘 나와 있다.

'정채봉의 글을 읽고 있으면 결코 용서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슬그머니 용서하게 되고, 끝끝내 용서받고 싶지 않는 마음도 슬그머니 용서받고 싶어진다. 그는 사람이 어떻게 해야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것을 이미 다 알고 있다.'

아직 선생님의 책들을 많이 읽은 것은 아니지만, 글을 읽다보면 법정 스님께서 말씀하신 '맑고 향기롭게' 라는 말이 떠오른다.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단점과 잘못을 인정하고 그것을 어떻게 바꾸고 고쳐서 타인과 함께 사는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할 때 이 세상은 조금씩 맑고 향기로워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의 내용 가운데 정말 기록해 두고 싶은 문장들을 적어본다.

- 모름지기 살아간다는 것은 '소유'가 아니라 '이룸' 입니다. 진정한 이룸은 가득 채워져서 더 들어갈 수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비워 가며 닦는 맑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꽃뫼에서 : 풀꽃은 절대로, 큰 소리로 떠들지 않는다. 들릴락 말락하게 속삭일 뿐이다. 그것도 마음이 가난한 이들이나 알아들을 정도로, 풀밭에 누워 빈 마음으로 그 작은 얼굴을 바라보면 들려올 것이다. 마음의 어룽을 지워 주고 한없이 날아가고픈 동심을 심어 주는 풀꽃의 귀띔이.

- 그대 뒷모습 : 자연을 보고 있자면 시작도 물론 아름답다. 먼동이 터 오는 아침, 봄날의 여린 새싹들, 어린 새들의 재롱. 그러나 자연의 아름다운 뒷모습은 이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해질 무렵의 저녁노을, 저 불붙는 듯 화려한 낙엽들. 새들도 죽을 때 우는 울음이 가장 빼어나다 하지 않던가. 그 사람의 실체는 정작 본인이 떠난 다음에 그가 머문 자리에서 운명처럼 향기처럼 남는 것이다. 앞모습보다는 뒷모습이 아름다운 이들의 이웃이고 싶다.


- 나는 언젠가 고향의 바닷가에서 갈대밭 사이 뻘길을 기어 다니는 늙은 게 한 마리를 본 적이 있다. 어둠과 밀물이 저만큼 다가오고 있는데 집을 찾지 못하고 갈대밭 사이 뻘길을 방황하는 게. 우리 남매를 키울 때의 우리 할머니의 초조와 외로움이 그러했으리라.

- 밖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비 오는 주말. 혼자 떠나는 길손. 낭만일 것 같지만 가슴 한편에 젖는 우수가 있다. 내 생의 절반 정도를 나는 서울에서 살았다. 그 혼탁과 다난과 어울려서 파도 앞의 모래알처럼 굴러다녔다. 늘 가면을 느꼈고 내가 살고자 한 삶이 아닌 타인의 삶을 사는 듯한 착각을 느껴 오던 터였다.

- 인간 세상으로 뻔질나게 드나드는 단골 악마 :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게 하는 나태'와 '깨우침이 없는 어제처럼 오늘을 살게 하는 관습'과 '한 일보다도 나타냄이 약간 높은 선심' 그리고 '쥐꼬리만한 앎을 가지고 황소 머리만하게 드러내기 좋아하는 교만'과 '모든 예지를 눈멀게 하는 애욕'. 

- 유혹, 그 동사와 피동사 : 나는 바깥의 유혹보다는 내 안의 유혹이 더 무섭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10대 때는 이것이 눈에 몰려 있는 듯 하였다. 20대에 들어서는 유혹이 귀로 쏠리는 듯 하였다. 그러던 것이 30대에 들어서는 혀에 곤혹을 느꼈다. 그러다 40대에 이른 지금에서야 나는 비로소 남이 나를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유혹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내 스스로가 그런 빌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나태의 유혹을, 관습의 유혹을. 그리하여 핑계만 있으면 고통스러운 영혼의 의지를 떼어 버리고 몸이 편하자는 대로 살려고 하지 않는가.

- 마음의 문을 열고 : "아름다움이란 꽃이 어떤 모양으로 피었는가가 아니야. 진짜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에게 좋은 뜻을 보여 주고 그 뜻이 상대의 마음 속에서 더 좋은 뜻이 되어 다시 돌아올 때 생기는 빛남이야."

- "하늘이 내린 복을 다 받지 마라."는 말이 있다. 새 세기를 맞는 과학인과 기술인들은 주가 먼저 내놓느냐는 경쟁에서 한 걸음씩 물러나 처음의 마음, 곧 인간을 위한, 인류의 미래를 위한 의의와 윤리를 다시 챙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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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털이 2004-05-17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길이가 긴 글은 일단 읽기 불편하다. 그래서 나도 긴 글쓰기를 피하려고 하는데 책 내용을 옮겨 적다 보니 길어져 버렸군 :(
 
스무 살 어머니
정채봉 지음 / 샘터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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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채봉 선생님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 TV를 통해서였다. 솔직하고 순박해 보이는 분이 화면에 나오면서 그 분이 주로 '어른을 위한 동화'와 에세이를 많이 쓰신다는 걸 알았다. <오세암>의 원작자라고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알지도 모르겠다. 그 때 조금만 더 독서에 관심이 있었더라면 바로 선생님이 쓰신 책을 찾아 봤을 텐데 그냥 막연히 나중에 읽어봐야지 하는 생각만 했더랬다. 그 나중은 대학에 입학한 후도 아니었고 대학원에 입학한 후도 아니었다. 2001년에 그 분께서 간암으로 돌아가셨다는 뉴스를 듣고 그제서야 다시 기억이 났으니 어쩌면 난 이렇게 내 서재 첫 화면에 선생님을 기린다는 말을 쓸 자격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선생님의 책 가운데 에세이집 두 권을 먼저 읽었는데 '그대 뒷모습'과 '스무살 어머니'이다. 왜 스무살 어머니인가. 무슨 뜻일까?

p.70 "열일곱에 시집와서 열여덟에 나를 낳고 꽃다운 스무 살에 이 세상살이를 마치신 우리 어머니.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어머니의 얼굴을 모른다. 그러나 어머니의 얼굴은 기억하지 못해도 어머니의 내음은 때때로 떠오르곤 한다. 바닷바람에 묻어 오는 해송 타는 내음..."

선생님은 1946년 전남의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나 세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도 없이 할아버지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 어머니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이 느껴지고 할머니에 대한 추억이 나타나고 고향의 자연을 떠올릴 수 있다. 얼굴도 못 본 어머니가 평생 얼마나 그리웠을까.

p.78 "엄마, 엄마께 한 가지 감사드릴 일이 있어요. 그것은 하얀 눈이 소복소복 내리는 음력 동짓달에 저를 낳아주신 것입니다. 엄마,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제가 엄마를 만나러 그쪽 별로 가는 때도 눈 내리는 달이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습니다. 엄마, 끝으로 하나 고백 할게요. 엄마가 못 견디게 그리울 때는 해질 무렵이라는 것입니다. 엄마 나이 스물에 돌아가신 산소 앞에 가서 마흔이 넘은 나이로 울고 온 적도 있으니까요. 엄마, 그쪽도 지금 낙엽지는 가을인가요? 안녕히 계세요.  엄마의 제일(祭日) 전날 밤 아들 올림"

책 앞부분에 보면 실제로 선생님은 2001년 1월, 동화처럼 눈 내리는 날 짧은 생을 마감하셨단다.

선생님께서 투병중 발간한 첫 시집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가운데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이라는 시가 있다.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반나절 반시간도 안 된다면

단 5분

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

원이 없겠다.

 

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

엄마와 눈맞춤을 하고

젖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한 번만이라도

엄마!

하고 소리내어 불러보고

숨겨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

 

 

나도 눈물이 나려 한다. 그러고보니 내일이 어버이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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