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상당히 어려운 제목이다. 그런데 이 다섯글자를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끌려 들어간다. 내가 에밀 아자르, 혹은 로맹 가리였다면 ‘여생(앞으로 남은 생)’이라는 원제를 박수치며 포기했을 것이다. 어떻게 이런 조합의 말을 만들어냈지? 도대체 이 한국제목은 누가 지었을까!. 찬양한다. 하지만 역시 쉬운 제목이 아니다.

모모는 여러 겹의 아이다. 10살이기도 하고, 14살이기도 하고, 유태인이기도 하고, 아랍인이기도 하다. 여러 개의 자기가 있는 존재의 생은 사실 쉽지 않았고 앞으로도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떠한 생의 기쁨이나 고난이든 그 모든 걸 너무나 쉽게 초월해 버리는 모모와 로자 아줌마의 사랑은 독자의 생을 무장해제 시켜버린다.

이 소설은 인간의 모든 감정들, 특히 슬픔이 무엇인지를 알아나가는 방식이 참으로 아름답다. 이미 로자 아줌마의 여생은 시시각각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서서히 세상에서 희미해져가는 걸 겪어 본 사람은 안다. 그것이 얼마나 피말리는 슬픔인지를. 그 끝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가슴이 터질 것 같은지를. 그리고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우리 모모는 어떻게 했을까?

우리 모모는 그것을 사랑했다.

신약성경 코린토 13장 『사랑』.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 예언도 없어지고 신령한 언어도 그치고 지식도 없어집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은 없어집니다.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생각하고 아이처럼 헤아렸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 적의 것들을 그만두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사라지고 사라져도, 죽음이 육신을 가져가고 슬픔만 남겨 놓더라도, 나는 모모는 괜찮을 거라는 걸 안다. 성경의 코린토 전서 『사랑』부분을 이다지도 완벽하게 구현해 낸 아이는 이 세상에 다시 없으니.

소설 내내 모모는 로자 아줌마 자신이 원하는 것처럼 헛된 연명치료를 받지 않고 자연스레 떠나게 해 주려고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세상을 떠난 아줌마 옆에서 화장품과 향수로 그 생을 붙잡아 보려는 모모도 모모다. 그 갈피에 서서 여러 개의 자기를 보고 있는 모모가 나는 너무나 슬펐다. 모모가 온몸으로 슬픔을 알아가는 동안, 어른인 나는 슬픔을 다시 배웠다.

문장은 따뜻하지 않고 일견 냉소적으로까지 보이는데, 결국 마지막까지 읽어내면 상당히 감정적으로 만드는 소설이다. 겨울이 가기 전에 가슴을 따듯하게 할 수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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