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 | 12 | 13 | 14 | 1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사필 - 사론(史論)으로 본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번역팀 엮음, 김문식 감수 / 한국고전번역원 / 201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추천권유도 : 9

 

역사를 모르는 자에게는 미래가 없지만 역사를 알고도 개선하려 노력하지 않는 자에게는

미래는커녕 오늘도 없다.

 

작품을 읽으며 우리 선조들이 자신이 모시는 주군을 어떻게 모셔왔는지에 대한 단면을

엿보는 시간이 되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선조들처럼 주군을 모시며 자신의 목숨까지도

초개와 같이 던지며 주군을 향해 직언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현재 우리의 주군인

대통령 곁에는 얼마나 존재할까 깊이 생각해 보는 시간도 되었다.

이는 아마도 어느 땐가 대통령이 배석한 보좌진을 향해 꼭 대면 보고를 해야하나요?“

라는 질문을 던질 때 웃음으로 화답하던 우리의 자랑스런 보좌진들의 모습이 클로즈업

되면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국정농단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맞고 있는 나라에서 혼미한 시대를 살고 있는

후손들을 사필로서 군주에게 쓴 소리를 하셨던 선조들이 바라본다면 무어라 이야기하고,

후세를 위해 무엇이라 기록하실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지만 그냥 답답하다는 느낌 외에는

달리 다른 생각이 들지를 않는다.

 

십 수 년째 작품이라는 것을 읽고 나름대로의 의견을 개진하기 위해 짧은 지식을 갖고

나만의 잣대를 들이대 작품에서 얻었던 여러 소회에 대해 시시비비를 논하고는 하였으나

작금 벌어지고 있는 이 시대의 일그러진 리더(?)들의 저급한 플레이를 보면서 열화와

같이 솥아내고,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고갈되어 더 이상 쓰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으나

작금의 우리의 사태를 옆에서 관망하며 고소해하며 지랄하는 쪽바리 색히들과 툭하면

지랄하는 마적떼 후손 색히들의 병신 삽질하는 소리와 깁 밥 옆구리 터지는 저급한

행동으로 인해 혼자만의 울분(?)이 터져나와 여기에 조금 끄적거려 본다.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이웃 집 색히들이 그렇게 지씨부리도록 떠들게 만든 우리의 현실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너나 할 것 없이 정치사회판 개그콘서트웃차사를 보는 듯해서

우리 사태를 갖고 짓까부는 색히들만 갖고 난리치기도 뭐하지만 더욱 참을 수 없는 것은

이런 혼란한 와중에 누구보다 정신을 차려야 할 잠룡인지 지렁이들인지는 모르겠으나

팔삭둥이 같은 인간들이 자신들의 본분을 잊고 자기만이 시대의 정신이라고 깐족대고

이죽거리는 것을 보면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인간들로 밖에는 보이지를 않아 패 죽이고

싶은 심정이다.

작품에 대한 소회를 적기보다는 작금 벌어지고 있는 이야기로 작품의 내용을 대신해

마적떼 후손들이 지랄 염병을 하는 싸드 문제와 쪽바리 색히들이 지랄하는 소녀상

설치 문제에 대한 개인적인 해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이 모든 이야기에 앞서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에 대한 반성하는 의미에서 작금 우리

사회의 큰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김영란 법의 폐해에 대해 바라보는 우리의 언론들의

시각과 언론인의 자세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먼저 김영란 법이 시행되어 우리나라 농축산 및 화훼 농가는 물론 중소 음식점까지

어느 정도 심각한 경영상의 문제에 직면했다고 우리의 언론들은 연일 난리도 아니다.

그런 내용은 상당부분이 맞고 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법으로 인해 마치 우리

경제 전반이 붕괴될 것 같이 마치 커다란 문제가 있는 것처럼 난리를 치는 언론 보도에

대해 개인적으로 나는 동의를 못하겠다.

마치 김영란 법에 의해 모든 것이 망가진 것처럼 이야기를 한다면 김영란 법이 발효되기

전에는 우리 경제가 뇌물선물 공화국이어서 경제가 활성화 되었었다는 이야기인지

반문하고 싶고 김영란 법을 폐지하면 여기저기서 선물뇌물이 활개를 쳐서 경제가

활발해 진다는 논리인지를 묻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분들이 그동안 받아 오던 선물을 예전처럼 제대로 받지 못해 그런

기사를 쓰는 것인지 아니면 진정으로 소상공인과 관련 종사자들과 업종을 위해서 앓는

소리를 하는 것인지가 자못 궁금하다.

그런 기사나 이야기를 하기 전에 그런 보도를 하는 사람들이 하루라도 이 땅에서

살아보고 이야기를 했으면 한다. 여기 저기 눈치보며 살아야 하는 참담한 로 살아

보고 이야기를 하라는 이야기다.

선물 한 번 받아본 적 없고, 축화 화한 하나 받아 본 적 없으며 어쩌다 외식하려면 얇은

지갑을 원망해 왔던 대다수의 서민들은 언론들이 이야기하는 김영런 법의 문제에 그리

심각한 동의를 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를 지적하려면 모두가 공감을 얻도록

해야지 시류에 편승해 우리의 농축산과 화훼 산업이 무너지고 있다는 부분적인 논리로

나라 전체를 뇌물공화국으로 몰고 가는 언론들을 보면 너무 편협한 생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대다수의 침묵하는 국민들은 과거 스크린 퀘터제 도입 반대 이유가 그랬고, 사패산

도룡농 문제로 스님 앞에 어느 청와대 수석이 읍소할 때 그랬으며, 소고기 수입 반대를

외칠 때 어느 연예인이 수입고기 대신 청산가리를 먹겠다고 외칠 때 우리 모두를 파탄

으로 몰고간다고 아우성을 쳤음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국민의 눈높이에서 기사를 언급하는 것은 좋으나 이익과 폐해

그 모두를 아우르는 정확한 기사로 무지몽매한 국민을 선도했으면 하는 바이다.

 

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가서 싸드배치문제와 위안부 소녀상설치에 관한 문제로

먼저 싸드 배치문제는 마치 우리가 중국의 한한령으로 인해 모든 경제적 활동이

지금 당장 죽어가는 것처럼 보도를 해 버리면 마적떼 후손 색히들이 너무나 즐거워할

것이라는 것이 뻔한데도 연일 호들갑을 떨면서 보도를 하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하다.

우리와 중국이 교역을 시작한지 얼마나 되었는가. 지금의 보도 논리라면 중국과 교역이

없던 시절의 우리나라는 먹고 살만한 게 없었고 굶어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는 이야기다.

참으로 우스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연예인들의 공연이 취소되는 것은 그 색히들 수준이 낮아서 공연허가를 안 해 주는

것이고 예술이 뭔지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런 작태를 벌이는 데 왜 우리가 그리도 호들갑

을 떠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우리의 산업이 연예분야만 있는가?

관광객이 안 온다고 우리 경제가 당장 작살나는가? 그 색히들 얼마나 더러운 색히들이고

씨그러운 놈들인데 돈 좀 써 준다고 알랑방귀를 뀔 이유가 없다.

지금까지 우리가 짱꼴라 색히들 때문에 먹고 살아 온 것처럼 침소봉대해서 호들갑을

그만 떨었으면 한다.

제주도 주택 및 토지거래 시장이 짱꼴라 큰 손이 안 들어와 분양이 안 된다고도 난리다.

마적떼 후손 색히들이 제주에 관광 와서 얼마나 난리를 치고 지랄을 해 왔는지 또 강북

동대문 상권근처에서 무단횡단으로 우리의 운전자들의 가슴을 얼마나 쓸어 내리게 하고

있는지를 우리 모두는 보도를 통해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푼 돈 좀 받아 보겠다고 너무

굽신거린다.

우리가 벌이는 사업마다 마적떼 후손 색히들이 반대한다고 포기하고 재 검토한다면

앞으로 그 어떤 것도 모두 그 놈들 눈치보며 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자결권에 관한 사항에 대해 이웃 국가에 다 물어보고 하면 나라꼴이 뭐가 되겠나

여하튼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우리의 언론들은 또 어떤가?

그런 것 갖고 내부 갈등을 유발하는 이야기에 집착하지 말고 마적떼 색히들이 우리의

영해에서 해경 목숨을 위협하고 해적질하는 것과 미세먼지로 우리를 괴롭히는 환경

문제를 국제사회에 공론화시켜 집요하게 몰아붙이는 게 언론의 올바른 사명이지 연일

우리의 안보와 관련된 일을 갖고 정부만 몰아 부치고 있는 지렁이 후보들 편에 서서

난리를 치고 있으니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중국이 우리의 싸드를

이유로 보복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납품하는 제품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인지

심층 분석도 하지 않고 무작정 안 되면 다 싸드 탓으로만 돌리려는 보도 태도 역시

반성해야 할 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진정으로 그들이 싸드 한 개 배치한 것 갖고 지랄하면 연평도에도 배치하고 설악산에도

배치하자 하나 갖고 지랄하면 두, 세 개 더 설치하자. 그런 이야기를 왜 못하는가?

환구시보인지 개지랄 신문인지가 짱꼴라 색히들 국익을 대변하는 이야기를 대서특필할

때 우리의 자랑스런 신문과 언론은 미친년 기사와 부족한 군주 깍아 내리기에 혼신의

힘을 쏟고 있었고, 어느 뱀눈깔 녀석의 아들을 운전병으로 채용한 것이 이렇다 저렇다

궁시렁거리기만 할 뿐 짱꼴라 색히들에게 한마디 뻥긋 못하는 삽질하는 소리만 하고

앉아있으니 한심하다 못해 불쌍한 생각 밖에는 다른 생각이 들지를 않는다.

세월호 속의 학생들과 세림이는 죽어서 원통하다고 울고 있고, 가습기 피해자들은 연일

관련자들 처벌하라고 외치고 있고, 배고파 막걸리 2병 훔쳐먹다 걸린 젊은이는 일자리가

없어 한숨쉬고 앉아 있는데, 우리의 언론은 표 세기에 바쁜 잠룡인지 지렁이들 지랄하는

모습이나 취재하고 의기양양하게 자신들의 본분을 다 한 것처럼 폼잡고 앉아 있으니

한심하다 못 해 불쌍한 생각 밖에는 없다.

 

지난 주 베트남 출장을 다녀왔다.

베트남은 중국에 의해 오랜 세월 지배를 받은 민족으로 역사적으로 양국은 철천지 원수

지간이라 한다. 우리와 일본과의 관계 이상으로 적대시하는 상황이다.

어느 주재원이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베트남인들이 중국인을 얼마나 싫어하냐 하면 중국인 손님이 돈을 아무리 많이 줘도 절대

중국인들에게는 미소는커녕 써빙을 위해 곁에 가지도 않습니다. 얼마전 중국인 회사에

대표로 일하는 한국인이 본사에서 중국인이 와서 접대를 한다고 자기랑 친한 베트남

업소에 손님과 같이 갔는데 자기에게는 무지하게 살갑게 대했지만 중국인 본사 손님에게

는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써빙도 하지 않으려 해 참으로 난감했었다고 하면서

그 자리에서 베트남 종업원들에게 평소보다 더 더 많은 팁을 주겠다고 제안을 하자

그 날 써빙하러 나온 아가씨들이 전부 그만두고 집에 가겠다고 해 굉장히 곤란했다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얼마나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이야기인가.

 

현대사를 보면 중국이 베트남을 대상으로 주접을 떨다 된통 당한 적이 있습니다.

인민 해방군 20만명이 베트남을 침공해 왔으나 결과는 1만 여명이 작살나고 도망가는

그런 전쟁이었죠. 그런 뒤부터 베트남한테는 찍소리도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마적 후손색히들은 자기들이 세상의 중심이라도 여겨 인접 국가를 예로부터 아주 우습게

보는 그런 놈들입니다.

예로서 서융(西戎, 중국인들이 서방 이민족을 일컫던 말)’, 남만(南蠻, 중국인이

자기나라 남쪽에 사는, 깨지 않은 겨레를 얕잡아 일컫는 말)벌레’, 북적(北狄, 중국

북쪽에 사는 족속들을 멸시하여 이르는 말)이리인데, 우리 민족만은 동이(東夷) ,

큰 활을 찬 사람들이라는 용어를 써 왔습니다. 아마도 양만춘 장군이 쏜 화살에 의해

자기네 황제 눈깔이 빠지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봤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시말해 우리 민족을 두렵게 여긴다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날 싸드 문제로 우리가 된통

당하고 앉아 있으니 답답할 따름입니다. 이런 우리가 그런 색히들의 자잘한 제한조치에

알랑방귀나 껴서 되겠습니까. 마적떼 색히들에게는 강하게 나가야 합니다

 

또 한가지 위안부 소녀상문제에 관한 사항입니다.

소녀상 때문에 일본 대사가 자국으로 소환되었다고 합니다. 쪽바리 대사가 한 달째 돌아

오지 않는다고 또 언론은 호들갑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는 데 그 색히 오지 말라고 이야기 해 주고 싶습니다.

언제 그 쪽발이 대사가 국내에 있어서 양국간의 관계가 우호적이었던 적이 있었습니까?

그 색히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입니다.

그 색히들은 이웃이 어려울 때 우리를 졸로 보고 도움은커녕 어려움만 가중시켰던

잡놈들입니다.

IMF때는 빌려 준 돈 떼인다고 만기도 안 된 돈 싹 걷어가고, 위안부 소녀상 강행하니까

통화 스와프 협정 중단한 양아치 색히들입니다. 그게 나라입니까? 조폭 집단이지.

개 씨부랄 말코같은 색히들에게 절대 꿀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돈이 없어 교역이 어려우면 모라토리옴나 국가 부도를 내면 되고 그 색히들에게 아쉬운

소리 안하면 그만인 것입다.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면 되는 것입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과하라니깐 100억 정도 줘 놓고 책임을 다했다고 저 안하무인격

난리를 치는 색히들하고 무슨 놈의 협력이고 협치를 하자는 것입니까.

100억원 돌려주고 우리의 기존 방식대로 세계 곳곳에 위안부 잔혹상을 기억하게 하는

광고와 영상물을 지속적으로 전파해 국제사회에서 완전히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소녀상은 독도의 정상에도, 마라도에도 일본쪽을 향해 세워야 합니다.

자유의 여신상보다도 더 큰 것으로 말입니다. 

위안부 소녀상은 일본 색히들 대사관뿐만이 아니라 일제 침략당시 국내에 들어와 우리

선조들의 고혈을 빨아 먹은 쪽바리 기업 앞에도 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작은 일, 예를 들어 일본식 주점을 찾더라도 독도를 다케시마로 주장하는

단체를 지원하는 쪽바리 기업이 만든 제품을 찾지 말아야 할 것이며 말로는 일본기업

색히들 반대하며 외치고 나서 목마르다고 다케시마를 후원하는 기업들이 만든 맥주를

마시고 있으니 그 색히들이 우리를 얼마나 졸로보고 깔보겠습니까?

인간이 인간을 미워할 수 없어 하늘이 그 색히들이 하늘처럼 떠받드는 메이지 천황이라

불리우는 놈에게 천벌을 내리지 않았습니까? 그 천황 놈은 당뇨와 만성신염을 앓다가

요독증으로 되졌다고 합니다. 쪽바리 색히들은 대대로 그런 천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에도 여기 지면을 통해 이야기했지만 우리의 군대가 공해상에서 군사훈련을 할 때는

반드시 일본에 지진을 유발하는 단층대를 찾아내 그 쪽에다 폭탄은 물론 기뢰, 대전차

미사일, 포격 훈련 등을 집중해 일본 색히들 지역에 어떤 형태로든 지진이 일어나게

만들어 그 색히들 영토를 지구상에서 아주 흔적을 없애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욱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김정은이에게도 정확한 좌표를 찍어줘서 대포동 미사일,

무수단 미사일 등을 우리 영해에 쏟아 붓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두고두고

우리 후손을 상대로 지금같은 저질스런 일을 지속적으로 반복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최근 신문을 아직 상영도 안 한 군함도라는 영화를 갖고 지랄합니다. 병신들...그렇게

캥기는 게 많은지 사사건건 지랄입니다. 영화진흥과 관련된 일을 하는 문체부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쓸데없는 블랙 리스트 만들지 말고 이런 영화 만드는 제작사 리스트를

만들어 제작비를 왕창 지원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 색히들이 쓸데없이 지랄하면 우리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졸라게 갈궈야 합니다.

강남 최모시깽이 아줌씨를 위해 문체부가 편성해 주었다는 예산을 활용해 유럽지역은

물론 세계 각처에 무료 상영관을 만들어 쪽바리 색히들이 우리와 역사 앞에 지은 죄를

까발리는 영화를 주구장창 무료로 방영해야 합니다. 그리고 영화관 앞에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고 계시는 여러 국가의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을 앉혀 놓고 기자회견을 해야

합니다.

주접떨고 지랄하다 원자폭탄 두들겨 맞은 색히들이 지들이 피해자라고 난리를 피우고

있습니다. 이 색히들의 적반하장격으로 지랄대는 싹을 완전히 잘라내야 합니다.

동네 양아치가 어느 선량한 사람 두들겨 패다 그 사람이 자위적인 방어조치를 하기 위해

휘두른 주먹에 맞아 상처가 났다고 양아치가 피해자라고 우기는 그런 형국입니다.

개색히들....아베 색히 면상 좀 보십시오 꼭 쥐색히처럼 생겨갖고 하는 짓도 우리나라

시궁창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시궁쥐처럼 생겨서 하는 짓도 졸라 얄밉습니다.

우리에게 돈을 빌려주면 떼일 것 같다고 개소리한 아소다로인지 존만한 색히는 난쟁이

똥짜루만한 색히가 터진 입이라고 항시 우리에게 독설을 내뱉곤 합니다.

이참에 계룡산에 계신 여러 무속인 여러 애국 무속인들에게 부탁드립니다.

여러분들이 항상 접신하시는 그런 신령님들을 부르셔서 그 색히 아가리에 독침을 물리게

하는 것이 무속인 여러분들이 그동안 계룡산에서 굿을 한다, 신점을 친다해서 자연을

작게나마 훼손헤 왔는데 이렇게 하는 것만이 그 모든 잘못을 덮고 애국하는 가장 좋은

지름길이라는 생각을 해 봤는데 제 생각이 잘못되었는지요?

우리는 도대체 무어란 말입니까?

짱꼴라한테 치이고 쪽바리 색히들에게 업신여김 당하고 말 한마디 못하고 앉아 있으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사필인 언론인 - 여의도에 계시는 분들에 대한 기대는

예전에 포기를 했기 때문에 더 이상 기대도 안 합니다 - 당신들은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잠룡인지 지렁이인지...그대들도 정신차리쇼.....나같은 민초가

나만의 사필로서 당신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나의 후손 중 한 명이 어느날 할아버지는 잠룡이라고 하지 않고 지렁이라고 했어?’

그러면 내가 뭐라 답할 것 같습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이 버린 천재들 - 역사의 선각자로 부활하다
이덕일 지음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1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추천권유도 : 6

 

작품에서는 총22분의 인물들이 소개되고 있다.

소개되신 분들은 살아계실 동안 세상으로부터 높이 추앙받았던 분도 계시겠지만 거의가

그 분들이 살아계실 동안에는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다가 역사에 관심 있는 일부 개념있는

후손(?)들이 그 분들의 숨겨졌던 업적들을 발굴하면서 추앙받을 만한 분들이라고 후대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부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사람들은 제외하고 대부분이 저자의 주관적 평가에

의한 것이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국민 모두가 완전히 합의한 인재(?)’라고 평가되는 그런

인물들은 아니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소개한 인물 중 작품을 읽은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요즈음

우리나라 돌아가는 형국과 끝모를 나락으로 추락하고 있는 우리의 정치사를 보면서 유독

세 분에 대해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첫 번째 인물은 남명 조식 선생이다.

이 분은 여러 역사관련 서적을 접하게 되면 꼭 거론되는 인물이다.

조식 선생은 조정으로부터 외척인 윤원형 일파가 활개치던 조정에 나갈 마음이 없었지만

거주지 인근의 단성현감 자리를 명종이 제안하지만 이를 사양하고 오히려 작심하고 주군

명종을 향해 재야 인사로서의 의견을 강력하게 제시하는데 이것이 [단성소(丹城疏)]

불리는 을묘사직상소이다.

 

전하의 나랏일은 이미 잘못되었고, 나라의 근본은 이미 없어졌으며,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나버렸고 민심도 이반되었습니다. 낮은 벼슬아치들은 아랫자리에서 히히덕

거리며 술과 여자에만 빠져 있습니다. 높은 벼슬아치들은 빈둥거리며 뇌물을 받아

재산 모으기에만 여념이 없습니다. 온 나라가 안으로 곪을대로 곪았는데도 누구

하나 책임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사직상소가 올려진 배경은 중종의 대를 이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명종은 어머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는데 외척인 윤원형 일파가 권력을 농단하면서 민심이 흉흉해

지면서 급기야 임꺽정의 발호와 왜구의 침략 등으로 국내외의 혼란이 가중되던 시기로

그로 인한 가장 고통받는 민초들의 삶을 목격하게 되자 조식 선생은 사직상소를 올려

신성불가침적인 존재인 국왕과 대비를 향해 일갈하게 된 것이었다.

그는 심지어

 

대비(문정왕후)는 구중궁궐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국왕은 아직 어리니 돌아가신 왕의 한 고아일뿐이다

라는 상상도 못할 극언을 남기며 왕에게 충언을 올리고 있다.

그는 또 왕이 좋아하는 일이 도대체 무엇이냐고도 따져 물었다. 왕이 좋아하는 것에 따라

나라의 존망이 달렸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상소문을 받아본 명종은 본질은 외면한 채 고아과부라는 표현에 격노하며 조식을

불경죄로 처벌하라고 명령했다.

이 일을 두고 [조선왕조실록] 사관은 왕이 신하의 상소에 대해 답을 하지 않고 도리어

문책하는 것은 자유로운 언로를 막는 것이라 하면서 임금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알게 되어 모두 비위 맞추는 데로 몰리게 될 것이다라며 애석해 했다.

재야 지식인으로서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조식은 이 상소로 인해 논란의 중심에

섰지만, 한편으로는 국왕도 무시할 수 없는 재야 사림의 영수로 우뚝 서게 되었다.

 

두 번째 인물은 백헌(白軒) 이경석 선생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1613(광해군 5) 진사가 되고 1617년 증광 별시에 급제

했으나, 이듬해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 상소에 가담하지 않아 삭적(削籍)되고 만다.

인조반정 이후 알성 문과(謁聖文科)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를 시작으로 선비의

청직으로 일컫는 검열·봉교로 승진했고 동시에 춘추관사관(春秋館史官)도 겸임하였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로 몽진하자 승문원주서로 왕을 호종해 조정의

신임을 크게 받는 등 나중에는 이조좌랑·이조정랑에 올라 인사 행정의 실무를 맡는다.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체찰사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활약하는데 이 때에 선생이 쓴

격강원도사부부로서 檄江原道士夫父老書는 특히 명문으로 칭송되고 있다.

병자호란 당시에는 인조를 호종해 남한산성에 들어가기도 했으며 인조가 항복하고

산성을 나온 뒤에는 도승지에 발탁되어 예문관제학을 겸임하며 후대에 크게 문제가 된

삼전도비문 三田渡碑文을 지어 올린 당사자이기도 하다.

삼전도 치욕이후 청나라에 볼모로 가 있던 소현세자(昭顯世子)를 호종하여 심양에서

어려운 대청 외교(對淸外交)를 풀어나가기도 했던 인물이다.

당시 명나라 선박이 선천(宣川)에 들어온 일이 청나라에 알려지자, 그 사건의 전말을

사문(査問 : 조사해 답변함.)하라는 청나라 황제의 명을 받고 서북 지역으로 돌아왔다.

조선의 관련 사실을 두둔하느라 청나라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영부조용(永不調用 : 영구

히 등용되지 못함.)의 조건으로 귀국해, 3년 동안 벼슬에서 물러났다. 1644년에 복직,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좌의정을 역임한 뒤 이듬해 마침내 영의정에 올라 국정을

총괄하였다.

 

그러나 1646년에 효종의 북벌 계획이 이언표(李彦標) 등의 밀고로 청나라에 알려져

사문사건(査問事件)이 일어나게 되었다. 청나라의 사문사는 남별궁(南別宮)에서 영의정

이경석과 정승·판서 및 양사(사헌부·사간원)의 중신 등을 모두 세워놓고 북벌 계획의

전말을 조사, 죄를 다스리고자 해 조정은 큰 위기를 맞는데 이에 끝까지 국왕을 비호

하고 기타 관련자들까지 두둔하면서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려 국왕과 조정의

위급을 면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청나라 사신들로부터 대국을 기만한 죄로 몰려 극형에

처해졌으나 국왕이 구명을 간청해 겨우 목숨만을 부지, 청나라 황제의 명으로 백마산성

(白馬山城)에 위리안치된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1653(효종 4) 겨우 풀려나 관직에 재 등용하게 되었으며 1668(현종 9)

신하로서는 영예인 궤장(几杖)을 하사받는다.

 

정치적 생애는 인조·효종·현종의 350년 동안 시국의 안팎으로 얽힌 난국을 적절하게

주관한 명상(名相)으로 보냈다. 하지만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생애 말년에는 차츰 당쟁

속에 깊이 말려 들어가, 사후에 특히 삼전도비문으로 심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비문의 찬술과정도 인조는 비변사의 추천을 받아 몇 명에게 비문 찬술을 명하는데,

장유, 이경전, 조희일, 이경석에게 명하여 삼전도비를 짓게 하였는데, 장유 등이 상소해

사양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세 신하가 마지못하여 지어 바쳤는데 조희일은

고의로 글을 거칠게 만들어 채용되지 않기를 바랐고, 이경전은 병 때문에 짓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경석이 글을 썼다.(인조실록)

 

이런 과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는 누구도 그를 비문의 찬술자로 비판하지

못했는데 이는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는 사실을 모두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훗날 문제적 인물인 송시열과 그 제자들로부터 비문 찬술을 이유로 수많은

공격과 수모를 당하게 된다.

 

세 번째 인물은 잠곡(潛谷) 김육 선생이다

1605(선조 38)에 사마시에 합격해 성균관으로 들어가지만 광해군 1에 동료들과 함께

올린 문건이 문제가 되어 문과에 응시할 자격을 박탈당하자, 성균관을 떠나 경기도 가평

잠곡 청덕동에 은거한다. 1623년 인조가 즉위하자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2월에 음성현감이 되어 목민(牧民)의 직분을 다한다.

주요 관직에서 자신의 임무를 깔끔하게 처리하면서 한편으로는 민초들의 어려움을 해소

시켜주기 위해 대동법의 시행을 건의하는 한편, 수차(水車 : 무자위·물레방아)를 만들어

보급했으며, 구황촬요 救荒撮要벽온방 辟瘟方등을 편찬, 간행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화폐의 주조·유통, 수레의 제조·보급 및 시헌력(時憲曆)의 제정·시행 등에

착안하고 노력하는 한편, 유원총보 類苑叢寶·황명기략 皇明紀略·종덕신편

種德新編·송도지 松都誌등을 저술, 간행하기도 하였다.

 

16495월 효종의 즉위와 더불어 우의정이 되자, 대동법 확장 시행에 적극 노력하지만

대동법의 실시를 반대하는 김집(金集)과의 불화로 이듬 해 물러앉는다. 잠시 향리에

머무르다가 영의정에 재 임명되면서 대동법 확장 실시에 또다시 힘을 기울여 충청도에서

시행하는데 성공했고, 아울러 민간에 주전(鑄錢)을 허용하는 일도 성공하였다.

1654년 대동법의 실시를 한층 확대하고자 호남대동사목 湖南大同事目을 구상하고,

이를 16577월에 효종에게 바쳐 전라도에도 대동법을 실시하도록 건의한다.

그러나 이 건의에 대한 찬반의 논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죽어, 이 사업은 그의 유언에

따라서 서필원(徐必遠)에 의해 뒷날 성취되었다.

 

근세라는 시대를 평가함에 있어 경제적으로 중요한 키워드는 '상품화경제'로 조선 후기

상품화 경제를 논함에 있어서 대동법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 잠곡은 다음과 같은 조선후기 상품경제발달의 세 가지 결정적인 과제 모두에 기여해

그 중 두 가지를 성공시켰다. 1)대동법 전국 실시, 2) 동전 유통, 3) 원격지 상업 활성화

이 중 대동법은 말 그대로 그의 정치 생명을 건 대역사였으며,

동전의 유통은 효종에게 10년간 추진할 것을 허가 받고 강력하게 추진하였으나, 결국

효종의 지시로 결국 좌절되었다. 그러나 개성과 평안도, 울산 등지에서는 동전이 계속해

사용되었고, 1678년 묵제 허적에 의해 동전 유통이 본격화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김육은 1658년 세상을 떴으나, 1677년 경상도에서 대동법 시행을 갈망한다는 상주가

올라와 마침내 경상도까지 확장된다. 

 

세 분의 인물들이 행한 업적과 행동을 요즘 우리의 정치, 경제사에 대비해 보면 어떤

느낌이 드는지 별도의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큰 공감으로 다가설 것이라 생각한다.

과거 우리가 차선책으로 뽑았던 리더의 일탈된 행동으로 모처럼 찾아온 호기를 만난

비집권 세력과 세칭 잠룡(?, 웃기는 짬뽕들이다. 용은 무슨 용인가 지렁이들이지)들이라

불리우는 이들이 벌이고 있는 봉숭아학당 수준의 비열한 정치공세와 오직 입으로만 나불

거리며 촛불 민심에 어떻게든 올라 타 보려는 저급한 야심을 보면서 그들이 과연 진정

국민과 민생을 해결하려는 의지가 있는 자들인지가 정말 궁금했다.

 

이런 이들을 보면서 모후에게 고아과부라는 기개있는 직언으로 고언을

올리던 조식 선생이 살아오신다면 또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총대를 메고, 글 배운 것을

천추의 한으로 삼으며 삼전도 비문을 적어 나갔던 이경석 선생과 민심의 진정한

어려움을 풀려고 노력했던 잠곡 선생이 살아 돌아오신다면 내 후손들이 이지랄하는

꼴을 보려고 그리 노력했던가?“라는 한탄아닌 한탄을 하시지 않으셨을까?

아무튼 이 시점에 나는 위의 세 분은 지금 이 시기에 우리나라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참다운 관료상이자 진정으로 필요한 인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그런 시간이었다.

일개 범부(凡夫)가 외칩니다.

촛불은 우리들이 들겠으니 정치인 그들은 촛불대신, 머리띠를 동여매고 길거리에서

목놓아 외치지만 말고 자신의 자리에서 시시각각 조여오는 외국의 경제적 파상 공세는

물론 북핵문제를 포함한 민생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며 리더의 헛발질로 공전만하고

있는 우리의 현 상황을 하루 빨리 타개해 주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정말 부탁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 | 12 | 13 | 14 | 1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