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떠나는 여행]
47회 사고 싶은 책과 읽고 싶은 책
2014,12,05 금, 추으나 맑음
장정일의 책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을 읽었다. 몇 달 전. 오늘도 꺼내 몇 곳을 골라 읽는다. 책이란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 때 읽었다고 망각으로 던질 책이 아니다. 책은 언제나 새롭다. 그건 내가 새롭기 때문이다. 서두에 독서일기에 대한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독서일기 라는 말이 여기저기 워낙 많이들 사용하고 있어서, 원래부터 그런 글쓰기 용례나 단어가 있기나 한 듯이 자연스럽게 여기고 있지만, 실은 이 용어가 생긴 것은 1994년 [나의 독서일기]가 나오면서부터다. 그때부터 독서일기란 신조어가 일반적인 독후감이나 독서 감상문과 같은 층위의 일반 명사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모두들 이 단어를 무심히 사용하기 때문에 쉬워 보이지만, 실제로 독서일기란 실현 불가능한 글쓰기다. p11
이런! 이건 문장도 아니다. 군더더기도 많은데다 한 문장이 너무 길다. 한 숨에 읽기에 버겁다. 출처는 2010년 8월 30일 발행본이다. 고작 3년 전 책이다. 장정일! 문장력이 조금 그렇다. 지금은 많이 달라진 것으로 보인다. 그 때는 그랬다. 지금까지 마티에서 3권이 나온 것으로 안다. 검색해 보니 아직도 판매 중이다. 순전히 책 이야기만 담았다. 독서읽기가 맞다. 지금 내게는 마지막 3권을 뺀 두 권이 있다. 첫 책은 꺼내 여기저기 읽어 낸 흔적이 보이지만, 둘째 권은 아직도 구석에 처박혀 있다. 장정일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닌지 내심 걱정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스타일의 책인데 말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건 순전히 저자의 책임이 가능성이 농후하다. 왜? 무엇 때문에? 그건 문장력이다.
그렇다고 장정일이 문장력이 형편없다거나 낮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성향에 맞지 않을 뿐이다. 나는 장정일을 읽었고 계속 읽을 것이니 더 이상 비판의 날을 세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여기서는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싶다.
책을 쓸어가면서 문장 주워 담기를 좋아 한다. 그래서 인지 나의 독서노트에는 문장 담는 곳이 따로 있다. 서평이나 감상문을 적은 다음 마지막에 항상 밑줄 긋기라든지 주워 담은 문장이란 제목을 걸고 책 속에서 감동적이거나 중요한 문장을 담아 놓는다. 종종 그 문장들이 요긴하게 쓰일 때가 많다. 한 권의 책보다 한 문장이 절대적일 때가 있다는 것은 문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반증하는 것은 아닐까.
예를 들어보자 고 박완서의 <세상에 예쁜 것>이란 산문집이 있다. 재미있게 읽었던 책인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딱 한 문장은 망각의 괴물이 잡아먹지 못했다. 왜냐고? 노트에 적어 놓았거든. 바로 이 문장.
“내 기억의 창고도 정리 안 한 사진 더미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건 뒤죽박죽이고 어둠 속에 방치되어 있고 나라는 촉수가 닿지 않으면 영원히 무의미한 것들이다. <중략> 아무리 어두운 기억도 세월이 연마한 고통에는 광채가 따르는 법이다. 또한 행복의 절정처럼 빛나는 순간도 그걸 예비한 건 불길한 운명이었다는 게 빤히 보여 소스라치게 되는 것도 묵은 사진첩을 이르집기 두려운 까닭이다.”
멋지지 않는가. 그래서 장정일의 책은 좋지만 가치가 적은 책이다. 나의 문장 담기 독서법에는 말이다. 장정일씨 앞으로 멋진 문장 많이 써주길 바랍니다. 허세가 아닌 실존적 지혜가 담긴 문장을 말입니다. 말이 나왔으니. 장정일이 좋아하는 작가를 알아보자. 서두에 이렇게 밝힌다.
박노자 씨와 고미숙 씨의 책처럼 학문적 기초가 충분하면서도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책들을 좋아합니다.
박노자, 고미숙. 고미숙은 몇 권 읽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다. 공부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 철학이었다. 근대적 교육이 지식과 몸이 분리된 이원론적 공부라면, 동양적 공부는 지식과 몸이 일체된 공부다. 지식과 몸이 따로 놀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자전거 타는 공부처럼 말이다. 경향신문에서 주도했던 <알파 레이디 북토크>에서도 고미숙은 한 부분을 차지하는데, 이곳에서도 여전히 몸의 인문학을 강조한다. 나도 고미숙의 책은 좋아 한다. 고미숙의 책을 더 찾아보니 꽤 된다.
고미숙에게 가장 적합한 책은 아마도 <고미숙의 몸과 인문학>이리라. 나머지는 이 책의 해설이나 주석쯤 되리라.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역시 고미숙 다운 책이다. 고미숙은 전체적으로 동양적 사고를 가지고 있기에 한의학에 관련도 책도 여럿 보인다. 가장 대표적인 책이 <동의보감>이다. 춘천에서 태어난 고려대를 졸업하고 이곳에서 박사까지 마친다. 특이하게도 공부 공동체인 <수유+너머>를 만들어 활동하다 2011년부터는 <남산강학원>과 <감이당>에서 활동하고 있다. 감이당의 모토를 몸, 삶, 글의 일치라고 하니 몸에 대한 집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나의 관심을 끄는 책은 <누드 글쓰기>다. 보관함에 담아 두었다 살 작정이다.
박노자는 누구일까? 박노자, 본명이 아니었다. 러시아인이었다. 2001년 한국인으로 귀화했다. 본명은 '블라디미르 타코노프'이며, 소련에서 태어났다. 소련이 무너지고 자본주의 성향의 러시아로 변화하는 과정을 지켜본다. 2000년 3월에 노르웨이로 이주한다. 현지 오슬로 대학 한국한 교수로 있다. 사회주의에서 태어났는데도 사회주의에 대한 추억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자본주의에 대한 혐오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이상주의 나라를 꿈꾸는 것을 보면 그는 분명 공평한 세상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알라딘 검색을 통해 박노자를 검색하니 50권이 넘는 책이 검색된다. 대체로 그의 책은 역사에 관련된 것으로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나는 아직까지 단 한 번도, 한 권도 박노자를 읽지 못했다. 이름은 들었지만 그의 성향이 무엇인지는 오늘 독서일기를 쓰기 위해 자료를 검색하면서 알았다. 참 나도 무심하다. 하여튼 장정일은 이러한 진보적 성향의 작가들을 좋아한다.
그럼 나는? 나 역시 장정일의 성향과 비슷하다. 그가 첫 권에서 언급한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에서 이렇게 말한다.
복거일이나 고종석의 저작을 읽으면서 그들이 지지하는 정치적 이념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책을 온전히 읽은 게 아니다. 참된 독서란 내 앞에 주어진 개별적인 책을 읽는 것일 뿐 아니라, 그 책을 생성한 유. 무형의 생산 현장 전체를 읽는 일이다.
에밀 파게도 <단단한 독서>에서 저자를 읽어야 한다고 목소를 높이다. 책은 저자의 것으로 저자의 삶, 사상, 그가 몸 담고 있는 문화와 역사를 초월하지 못한다. 저자를 읽어야 제대로 읽는 것이다.
모두가 사고 싶은 책이다. 그러나 읽고 싶은 책은 다르다. 사고 싶은 책은 대체로 자료로 쓰거나, 인용하기 위한 책이다. 지적 성숙과 글쓰기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읽고 싶은 책은 마음을 치유하는 책이다. 이 둘이 만나기도하고, 엇갈리기도 한다. 박노자의 책이 사고 싶은 책에 가깝다면 고미숙의 책은 읽고 싶은 책이다. 장정일의 책은? 읽고 싶은 책에 가깝다. 분명한 선을 그을 수 없는 모호함이 존재하지만 동일한 것은 아니다. 연애에 비유 한다면, 사고 싶은 책은 연애하고 싶은 여자이고, 읽고 싶은 책은 결혼하고 싶은 여자이다. 사고 싶은 책은 호기심과 소유욕과 관련되있고, 읽고 싶은 책은 영혼과 관련된다. 영혼의 깊은 갈망이 요구하는책과 생존에 필요한 책은 다른 것이다.
이 둘이 만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나는 이미 만났다. 그러니 읽고 싶은 책을 먼저 사고, 사고 싶은 책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데 묘하게도 사고 싶었던 책은 종종 책꽂이 꽂혀 나오지 않은 경우가 많으니 이를 어찌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