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이영직의 [세상을 움직이는 100가지 법칙]을 상당부분을 인용을 했음을 밝힙니다.
토마스 에디슨 vs 니콜라 테슬라
Thomas Alva Edison VS Nikola Tesla
Nikola Tesla / Thomas Alva Edison
“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이루어진다.”
인류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발명가요 실용적인 업적을 남긴 에디슨이 남긴 말이다. 노력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에디슨의 삶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명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즉 에디슨의 의도대로 말한다면 “99%의 노력을 해도 1%의 영감이 없으면 안 된다.”이다. 이 말은 범인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천재를 이길 수도 뛰어 넘을 수도 없다는 말이다. 과연 에디슨은 이 말을 무엇 때문에 한 것일까? 많은 전기 작가들은 에디슨이 이 말을 한 이유를 자신의 ‘천재성’을 자랑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러나 에디슨이 이 말을 한 다음 에디슨은 자신의 말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그에게 자신의 99%의 노력과 1% 영감을 더해도 뛰어 넘을 수 없었던 한 ‘천재’가 나타난 것이다. 그의 이름은 니콜라 테슬라였다.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난 세르비아인 니콜라 테슬라는 에디슨을 훨씬 능가하는 천재였다.
토마스 에디슨
에디슨의 어린 시절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호기심이 많았다. 달걀의 부화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직접 알을 품은 에피소드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직접 체험해 보아야 하고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이러한 에디슨의 성격은 권위적으로 가르치는 교사들에게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는 비판적인 아이로 비추어질 수밖에 없는 골치 덩어리였다. 결국 교사들은 에디슨에게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고 학교에서 추방? 당했다. 에디슨의 어머니는 에디슨을 집으로 데리고 들어와 직접 들었고 홈스쿨을 시작했다. 이러한 부모의 덕분으로 에디슨은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천재로 기억되게 되었다. 전구를 발견하기 위해 2000번의 시도를 했다는 점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호기심이 강하고 집념이 강한지를 알 수 있다. 에디슨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전기 작가들은 에디슨의 아이큐를 따져보면 평범한 아이들보다 더 낮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그가 천재로 비추어진 이유는 포기하지 않는 집념, 바로 그 것 때문이다. 이러한 성격을 알았던 테슬라는 에디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풀숲에서 바늘 하나를 찾아야 한다면 아마도 지푸라기 하나씩 들추어 들이내면서 바늘을 찾는 노동을 하고도 남을 사람이다. 약간만 머리를 쓰면 99%의 노력을 줄일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테슬라가 보기에 에디슨은 무식할 정도로 노력파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에디슨을 '이론적인 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고, 사전에 그 어떠한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지 않았음에도 성실함과 근면함으로 혼자서 위대한 업적을 이룬 인물'이라고 칭송한다. 그렇다. 에디슨은 1%영감 밖에 없었다. 그래서 99%의 노력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테슬라
이에 비해 테슬라는 자손심이 강하고 모든 것을 완벽하게 만들려했던 결벽증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를 보면 마치 아이폰을 만들어낸 또 다른 결벽증 환자인 스티븐 잡스를 보는 것 같다. 어쨌든 그는 확실해 에디슨과 다른 정말 천재였다. 테슬라는 어려서부터 우주인과 교신을 상상했던 유별한 아이였다. 그라츠 공과대학과 프라하 대학에서 수학, 물리학, 기계학 등을 공부했다. 학교를 졸업한 그는 부다페스트와 파리에서 전기 기사로 일했으며 그곳에서 교류 발전기에 대한 아이디어를 창안한다. 테슬라는 그곳에서 자신의 교류 전기에 대한 상용화가 힘들다는 것을 알고는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그곳에서 에디슨과 만나 함께 일하게 된다. 테슬라는 에디슨에게 교류 전기를 추천해 주었다. 에디슨은 테슬라의 추천을 거절하고 끝까지 직류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기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테슬라는 에디슨에게 계속하여 교류를 주장했지만 결국 이기지 못하고 간단하게 직류 발전기를 만들어 주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만들지 못했던 직류 발전기를 간단하게 만든 테슬라를 보고 질투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에디슨은 약속한 보수도 주지 않고 그를 내쫓아 버렸다. 물론 에디슨 테슬라가 만들어준 직류 발전기로 많은 돈을 벌었다.
테슬라는 에디슨과 결별 후에 웨스팅하우스와 함께 교류발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웨스팅하우스는 투자자를 만나지 못해 파산위기에 몰렸다. 테슬라는 로열티 100만 달러 계약서를 찢어 버리고 무상으로 제공해 주었다. 전기 싸움은 테슬라의 완벽한 승리였다. 테슬라가 계속하여 교류를 만들어 성공하게 되자 직류 연구에 많은 재정을 투자했던 에디슨은 자신의 모든 역량을 테슬라는 공격하는데 사용했다. 즉 자신의 직류전기보다 교류전기가 훨씬 위험하다는 것을 계속 알리고 다녔고, 사형집행에 사용하는 전기의자를 교류로 만들어 사람을 죽이는 전기라고 까발렸다.
에디슨 때문은 아니었지만 테슬라는 완전한 무산자가 되고 만다. 비록 테슬라는 재정적인 부분에서 어려움이 있었지만 연구는 멈추지 않았다. 라디오, 형광등, 리모컨, 방사선 이론과 고주파 램프, 음극선과 텔레비전에 사용되는 테슬라 코일, 유도 전동기, 전자레인지 등은 테슬라의 작품이다. 그의 발명품은 800가지에 이른다. 전기장 이론에서도 맥스웰을 앞섰다고 한다. 이러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1809년 노벨상 위원회는 에디슨과 테슬라를 공동 수상자로 내정했지만 테슬라는 거부했다. 자신을 배신한 에디슨과의 공동수상을 수치스럽게 생각했던 것이다. 테슬라는 천재였지만 다른 사람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라디오를 발명한 것으로 알려진 마르코니에게 노벨상을 수상하게 된다.
테슬라의 실패 이유를 찾다.
교과서나 역사에 테슬라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작가들은 먼저 그의 소련의 지배하에 있던 크로아티아-유고 출신이라는 점을 들었다. 또한 당시 막강했던 유명인사요 억만장자였던 토마스 에디슨과 모건, 강철왕 카네기 등과의 사이가 나빴다고 한다. 숨겨진 일화 가운데 하나는 억만장자였던 모건의 딸이 비천한 유고 출신인 테슬라는 사랑한 것이다. 결국 이러한 악재가 겹쳐 많은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아 평생을 가난하게 살다가 8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천재였지만 천재로 기록되지 못했던 테슬라, 평범 이하였던 천재로 기록된 토마스 에디슨의 이야기는 우리의 기억도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천재란 단순한 지적 능력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사회적 관계 속에서 강화 되거나 묻혀 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테슬라가 만약 좀 더 친화적이고 덜 결백했다면 에디슨을 능가하는 위대한 사람으로 기록되었을지도 모른다. 에디슨과 테슬라, 그들은 전혀 다른 성격과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한 길을 갔고, 한 목적을 이루려 했다. 그러나 그들의 운명은 확연하게 달라졌다. 수많은 이유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진실을 담아내는 친화력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