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는 지혜의 원천인가?
초등학교 시절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와 유난히 다툼이 잦았다. 어린 시절이라 누구의 편도 들줄 몰랐다. 잘 몰라서.. 지금 생각하니 세대 차이이거나 서로를 이해못한 성격의 차이일 수 있겠다 싶다. 어쨌든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그렇게 건장하신 분이 어느 날 메주를 두었던 안 방을 치우시고 누우셨다. 이상하게.. 정말 이상했다. 그렇게 이틀을 앓으시고 그대로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왜 메주를 치우냐고 난리였다. 엄마의 심정도 이해간다. 메주를 잘못하면 된장도 간장도 김장도 못한다. 할머니가 그렇게 돌아가실 줄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할머니 자신은 알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원래 쓰시던 방을 두고 안방으로 가실리 없다.
왜 할머니 이야기를 하냐? 할머니는 어쩌면... 어쩌면... 나를 유일하게 아껴주신 분이었기 때문이다. 육남매.. 나는 위로 누나와 형, 아래로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다. 중간이란 애매한 자리는 아무의 관심도 받지 못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나를 아꼈다. 나만 아낀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나는 당시에 나만 아끼는 줄 알았다.
궁금하면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 이게 뭐야?"
"할머니 소는 왜 잠을 안 자?"
등등
할머니는 그리 친절한 분은 아니셨지만 대답은 잘 해주셨다. 그런데 해던 말은 기억에 하나도 나지 않고 배 아플 때 손으로 만져 주신 기억만 생생하다. 할머니 손은 약손이라면... 미신이라며 우겼지만 이상하게 할머니가 배를 만지면 대부분... 열의 아홉은 좋아졌다.
문명이 발달하자 할매는 바보가 되었다. 버스 타줄도 모르고, 전화 받을 줄도 모르고, 지하철 탈줄도 모르다. 바보 할매다. 얼마 전 할매들은 은행에서 돈이 안 되다면 잘 안 받는다고 한다. 모든 것이 기계화된 시대 속에서 할매는 바보가 되었다. 세상은 경제적 논리를 따라 불필요한 존재로 치부한다. 세상은 그렇게 흘러간다.
그런데 난 아직 할매가 그립다.
<할매의 탄생>은 할매의 들의 이야기를 글로 담은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말이다. <해월 딸 용담할매>는 소설이지만 픽션에 근거한다. 박막례 할매는 말할 것도 없고.
종종 지독한 편견과 암호가 걸려 있어 해독이 필요하긴 하지만 할매는 여전히 지혜의 원천이다. 난 그렇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