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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채식주의자 (개정판)
한강 지음 / 창비 / 2022년 3월
평점 :
#폭력, 욕망, 그리고 구원에 관한 이야기
현실과 타인의 시선에서 영혜는 정신분열증과 신경성 거식증을 앓고 있는 환자이다.
소설 속 인물들 대부분은 자신의 위치와 관점에서 영혜를 바꾸려고, 고치려고 한다.
역시나 그들이 생각하는 정답은 정신질환의 완치, 육식의 식생활, 사회와 가정 내의 역할에 충실함 등...
한 인간이 진실하게 추구하는 것 따윈 고려되지 않은, 오로지 타인의 관점에서 옳다고 여겨지는 '거짓과 위선'의 것들이다.
우리들은 과연 훌륭한 연극의 구성원이 되어 역할 놀이를 하기 위해 태어난 것인가?
아니라는 것을 다들 알면서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타인에 의해 정의되고, 타인을 정의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아기조차도 점점 자라면서 결국은 인간과 세상을 '정의'내리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소설 <채식주의자>가 말하는 폭력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한 사람이 진정 원하는 것, 그가 욕망하는 것, 그 사람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타인과 세상에 의해 철저히 '부정'되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소설에서 그려지는 폭력의 본모습이다.
폭력이라는 것은 그것의 겉모습이 눈에 뚜렷하게 잘 보여야 굉장히 거창한 것이 되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인식하게 된다는 허점을 이 소설에서는 반대로,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영혜의 아버지는 월남전에 참전하여 무공훈장을 받은 군인이었다.
아버지의 가정에서의 폭력적 행위들은 이 소설 속에서 겨우 몇 문장 내로 설명된다.
자녀들 중 말 수가 적고, 온순하고, 고지식했던 영혜가 가장 많이 맞고 자랐고, 그녀는 온 몸으로 그 폭력의 기억들을 전부 흡수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영혜의 언니가 마지막 장 <나무불꽃>에서 말한다.
아버지가 영혜에게 가한 폭력은 그렇게 자세히 그려지지도, 드러나지도 않는다.
때린 것 외에 언어적 폭력, 아버지 자신의 가치관의 강요, 영혜의 정신적 가치들에 대한 무관심 등등 겉으로 보이지 않는 폭력은 단순히 언어로 묘사되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님을 역설적으로 일깨워준다.
영혜의 정신착란과도 같은 이상 행위들에서 폭력의 잔재를 짐작해봄으로써 폭력의 형체는 점점 큰 발걸음으로 우리 앞에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형태도 없고, 소리도 없는. 조용하고 은밀하게 인간 내부로 모조리 흡수되어버리는 폭력의 얼굴.
그것이 우리 사회에, 개인에 만연한 저마다의 폭력의 모습을 암시한다.
그러나 영혜의 채식 행위와 정신분열증의 직접적인 원인이 바로 아버지의 폭력때문이었을까?
표면적으로 그렇게 보이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폭력은 피할 수 없이 육체와 정신으로 스며든다는 점에서 인간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지만, 그 사이에는 인간 정신의 근원에 자리잡힌 '욕망'과 '구원'의 영역이 있다.
인간으로 태어나 온 정신과 육체에 걸쳐 강렬하게 원하는 것.
무슨 일을 겪는다해도 나를 지켜내고 살아가게 만드는 인간 정신 내부의 어떤 강한 힘.
어떤 소설이든, 영화든 이야기의 중심에는 반드시 인간들의 욕망이 있고, 각자 그것을 대하는 태도에서 다른 삶의 방식이 정해지고, 다양한 인간 군상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욕망에 의해 스러지고, 무너진 인생 앞에서 구원의 방식을 달리하며 인간은 생의 끝까지 나아가게 된다.
영혜에게도 왜 그것들이 없었으랴.
폭력이 인간을 무너뜨리고, 사람의 의지 또한 꺾어버리지만,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인간은 당하고만 있지 않는다.
폭력에 대해 강렬히 저항하는 사람, 자신이 겪은 폭력을 또 다른 이에게 가하면서 고통을 치유하는 사람, 살기 위해 자신이 겪은 폭력을 철저히 외면하고 무시하는 사람, 그리고 영혜처럼 폭력을 정신과 육체로 모두 흡수하여 그 고통에 결국 잠식당하는 사람 등등.
폭력을 경험하고 그것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따라 인간의 삶의 방식은 전혀 다르게 전개된다.
이 소설에서 아버지는 영혜를 결국 미쳐버리게 만든 장본인이며, '악'으로 상징되는 인간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겠지만, 폭력을 행하는 '인간' 자체는 그저 겉껍데기에 불과하다.
폭력은 형체를 가지지 않고, 한 인간의 내부에서 외부로, 다시 다른 인간 내부로 끊임없이 전달되고, 깊숙히 파고든다.
끝없이 생명이 탄생하고 죽고, 다시 탄생하는 우주의 섭리 속에서 폭력은 유전처럼 전해지고 가해진다. 생명이 창조되고 탄생하는 순간의 경이로움은 잠시, 생명은 폭력 속에서 무참히 짓밟히고 다시 일어서며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이것을 외면하고 부정해야만 오늘을, 내일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폭력과 고통에 무감각해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의 실체를 마주하고 파고들어가는 순간, 영혜처럼 인간 근원의 죄의식에 잠식되어버리니깐.
영혜가 갑자기 채식 행위를 시작하게 된 원인은 무엇이었나?
'꿈을 꿨어'라고 말하는 영혜의 대사들과 중간 중간 등장하는 꿈 속 해괴하고 잔인한 내용들.
처음에는 형체를 알 수 없는 것들과 핏덩이 고기들이 등장하지만, 영혜가 가족들 앞에서 손목을 긋고, 피가 솟구치는 장면과 함께 그 모든 정신착란의 원인을 알 수 있는 영혜의 어린시절 기억이 등장하게 된다. 아마 소설에서 가장 잔인하다고 할 수 있는 이 장면의 묘사가 인간이 자행하고 있는 폭력의 실체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아홉살의 영혜는 키우던 흰둥이 개에게 다리를 물린다. 아버지는 흰둥이를 나무에 매달아 불에 그슬리나, 두들겨패지는 않는다. 대신 오토바이에 매달아 동네를 몇바퀴 째 계속해서 달린다. 흰둥이의 목에서 피가 솟구치고 눈에는 핏물이 고이고. 그렇게 개는 잔인하게 죽는다. 죽어가는 모습을 어린아이였던 영혜는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본다. 아버지의 학대가 다 끝나자, 흰둥이는 분해되어 음식으로 등장한다. 이웃들과 아버지는 그걸 먹는다. 개에 물린 상처는 개를 먹어야 낫는다면서 영혜도 먹게한다. 들깨냄새로도 가릴 수 없는 누린내를 맡으면서 영혜는 한그릇을 다 비워낸다.
이 장면이 영혜가 자해를 시도한 장면과 함께 등장하면서, 영혜의 채식 행위의 원인은 결국 어린시절 흰둥이에게 가한 영혜 자신의 폭력이라는 것을 독자들은 알 수 있게 된다. 키우던 개를 잔인한 방법으로 죽이고 먹게 만든 건 아버지이지만, 그 모든 과정을 영혜는 지켜보기만 했다. 아홉살짜리 어린아이가 과연 아버지의 행동을 말릴 수 있겠냐마는, 영혜를 미치게 만든 기이한 꿈들의 근원에는 결국 영혜 자신이 행한 폭력에 대한 '죄의식'이 담겨있었던 것이다.
자신도 한 생명을 죽인 방관자임을 깨달으면서 영혜는 채식을 하게 된다. 고기를 먹지 않으면 그 공포스러운 꿈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영혜의 죄의식은 단순히 폭력에 대한 반성으로 끝나지 않는다. 영혜는 분명 자신이 행한 폭력과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 속에서도 삶 쪽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채식을 하면서 영혜는 그렇게 살면 되었다.
한 인간의 죄의식과 반성, 그것에 대한 개선의 의지는 분명 살아서 꿈틀거렸다. 영혜는 그때까지만해도 정신분열증의 증상을 보이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어렵게 찾아낸 삶의 방식을, 생의 의지를 부숴버린 건 가족들의 새로운 폭력이었다. 그녀의 뜻을 존중하지 않는 아버지, 어머니, 남편, 언니, 남동생 모두들.
그녀의 뺨을 때리고, 강제로 입을 벌려 고기를 먹이는 잔인한 폭력 속에서 아마 영혜는 느꼈을 것이다. 자신이 어린시절, 바로 그 '흰둥이'같은 존재라는 걸. 자신도 목이 매달려 그렇게 피가 솟구치면서 결국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영혜는 그때 어렴풋이 느끼지 않았을까?
자신의 죄에 대한 반성과 개선의 의지를 가진 참된 인간이었던 영혜는 그렇게 가족과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부정되고, 버려진다.
영혜가 원하는 삶의 방식, 영혜의 욕망, 영혜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은 가족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렇게 영혜는 정신병원으로 가게 되고, 아직 그 실체도 없었던 정신분열증의 병까지 그녀에게 씌워진다. 세상이 바라보는 방식대로 그녀는 정의되는 것이다. 가장 끔찍한 폭력이 바로 이것이다.
영혜는 자신의 죄의식과 고통스럽게 정면으로 마주했고, 그 속에서 삶의 방법을 찾아내었다.
채식을 하는 것은 죽어가는 행위가 아니라, 살고자 하는 영혜의 강렬한 의지였다.
그러나 가족들은 한결같이 그녀가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책을 읽어나가면서 그것이 너무나도 답답했다.
왜 아무도 영혜가 살고자 하는 의지를 읽어내지 못하는거야?
그 연둣빛의 꿈틀거리는 눈부신 의지와 욕망을 어째서 아무도 보지 못하는 거야?
아무리 고통스러운 폭력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삶에서 밀어낼만큼 강력한 것이 바로 '욕망'이다.
이것은 한 인간을 살게 만드는 근원이다.
'욕망'
언젠가부터 욕망이라는 단어는 밖으로 꺼내자마자 비인간성을 상징하는 무시무시한 괴물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다.
욕망이란 인간이 강렬하게 원하고 바라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것이다.
욕망이란 한 사람을 추악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태양보다도 더 반짝이게 할 수도 있는 것임을.
그것의 긍정적 속성까지도 외면하는 것이 욕망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왜 현대사회는 한 개인의 욕망을 세상 밖으로 표출하는 것이 타인에게 비호감을 받는 것으로 여겨지게 된걸까?
겉으로 꺼내져서는 안되며 인간의 깊숙한 곳에서만 간직되어야만 하는 것이 마치 도덕법칙인 것 마냥, 욕망은 그렇게 아주 더럽고 은밀한 것으로 정의되어버렸다.
변질된 욕망의 뜻에서 순수한 욕망을 구분해내는 작업을 먼저 하지 않으면 이 소설의 진정한 아름다움과 가치가 왜곡될 것 같아서 앞으로 '순수한 욕망'이라고 언급할 것이다.
이 소설 속에서 가장 순수하고 진실한 욕망을 추구하고 실현시키려 했던 두 사람이 바로 '영혜'와 그녀의 '형부'였다.
온 몸에 꽃과 줄기와 잎사귀들을 그리고 그것이 결합하는 행위였던, 그들의 정사 장면이 나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이렇게 생각하는 내가 정상인 걸까? 라고 스스로에게 수없이 질문했어야 할 만큼. 이것을 글로 써내고 눈 앞에 그려볼 수 있게 해준 작가에게 무한히 감사하면서.
형부, 그는 영혜의 생에 대한 의지와 욕망을 밖으로 끄집어내게 만든 사람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이렇게 느꼈다.
"그것은 구석구석 일체의 군더더기가 제거된 육체였다. 그는 그런 육체를, 육체만으로 그토록 많은 말을 하는 육체를 처음 보았다."
영혜의 남편도, 아버지도, 언니도 영혜를 '말수가 적은'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가족이지만 이토록 영혜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게 원통하게 느껴진다.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다고 해서 한 사람의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님을 그들은 왜 모르는 것일까?
영혜는 입 밖으로 말을 꺼내는 대신 자신의 언어를 온 몸 속으로 흡수하고 품어온 것이다.
형부는 그녀의 육체에서 그녀가 진정 하고 싶은 말을 읽어냈다는 점에서 표면적으로는 변태 성욕자로 보일 수 있겠으나, 영혜의 삶에 대한 욕망을 유일하게 알아본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비디오 영상 작가이다. "광고, 드라마, 뉴스, 정치인의 얼굴들, 무너지는 다리와 백화점, 노숙자와 난치병에 걸린 아이들의 눈물들을 인상적으로 편집해 음악과 그래픽 자막을 넣는 것"이 그가 해온 작업들이다. 그는 그것에서 환멸을 느끼며 구역질이 난다고 했다. 거짓과 위선의 작업들을 하느라 밤새도록 시달렸던 순간들이 '폭력'으로 느껴졌다고 하는 대목에서 그가 지향한 건 상업 쪽이 아니라 예술임을 알 수 있다.
예술가로서의 작업을 할 수 있길 기대하면서도 그는 그렇게 오랫동안 쭉 상업 작가로서의 일을 해온 것이다. 그랬던 그가 자신이 원치 않는 작업을 해야만 했던 순간을 '폭력'이라고 직시하게 된 계기가 바로 영혜의 자해 시도였다. 영혜가 손목을 긋고 피가 솟구칠 때, 가장 먼저 지혈하고 들쳐 업고 병원으로 달려간 건 바로 형부였다.
줄곧 방관자였던 그가 그렇게 필사적이 되었던 순간은 분명 그가 자신을 제대로 마주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십년이 넘도록 자신이 해온 모든 작업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2년의 공백기를 가지면서 그를 처음으로 진정한 예술가로서의 작업을 할 수 있게 해준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벌거벗은 몸에 꽃과 줄기와 잎사귀들이 그려져있고 그 나신들이 교합하는 장면. 그의 머릿 속을 강렬하게 사로잡은 이미지이며, 영상 작업으로 만드는 것에 어떤 운명적인 갈증을 그는 계속 느껴온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실현시키기에는 부족했던 찰나에 아내의 말이 그를 비극으로 치닫는 예술을 하도록 만들었다.
'몽고반점'. 아내가 그에게 영혜의 엉덩이에 아직 남아있다는 몽고반점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자신이 그토록 갈망해 온 이미지가 비로소 완성되었다.
'엉덩이 가운데에서 푸른 꽃이 열리는 장면'을 떠올리는 건,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예술가로서의 '비상'을 꿈꾸게 만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에게 있어 영혜는 처제이기에, 그는 죄의식에 사로잡힌다. 스스로를 경멸하기도 하고, 자신을 낯선 존재로 인식하기도 하는 등, 그는 자신에게 도덕적 질문들을 던진다.
그러나 결국 그는 그 작업을 해야만 한다는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을 행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벌거벗은 몸에 꽃을 그리고 영상으로 촬영한다는 것을 그가 영혜에게 제안한 것이 영혜에게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미쳤다고 욕하며 제안을 거절했을테지만, 영혜는 수락한 것에 이어 적극적으로 임한다.
오히려 자신의 나체에 꽃과 식물의 것들을 그리는 것에서 영혜는 생에 번뜩이는 감정들을 느낀다. 자신의 육체에서 자연의 일부를 꽃 피워낸다는 것이 영혜에게 있어, 그녀가 줄곧 벗어날 수 없었던 죄의식을 벗어던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그녀가 연둣빛으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고 삶을 느끼는 장면에서 나는 그녀가 살아낼 수 있을 것이라 희망을 가졌었다.
형부가 처제의 알몸에 그림을 그린다는 건 현실에서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지만, 이것은 두 사람이 각자 자신의 욕망을 표출하는 것과 그것이 일치했다는 점에서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형부는 자신이 그토록 갈망해온 예술 작업을 실현했다는 점에서, 영혜는 채식 행위로도 씻어낼 수 없었던 죄의식의 근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욕망은 일치했고, 그 결과가 바로 '몽고반점 1- 밤의 꽃과 낮의 꽃' 이라는 제목의 비디오 테이프였다.
그는 이 영상으로 예술가로서의 작업을 한 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멈출 수 없다는 또 다른 욕망에 사로잡혀 결국 그는 넘어서는 안되는 선을 넘게 된다.
그의 후배인 J와 영혜의 교합 장면 촬영이 실패로 돌아가고, 그는 작업의 끝까지 지켜왔던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다.
그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영혜에게,
"내 몸에 꽃을 그리면, 그땐 받아주겠어?" 라고 말하는 그의 말이 왜 그렇게 비참하고 처절하게 들렸을까.
이 전까지 그는 영혜의 벌거벗은 엉덩이의 몽고반점을 보면서도 성적인 느낌과는 전혀 무관하게 그것이 태고의 것이며 진화 전의 것, 광합성의 흔적을 연상시킨다고 했다. 그는 그것에서 무한한 예술적인 영감을 느끼는 것에 압도되는 '예술가'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영혜의 육체를 성적인 것이 아닌, 마치 조물주가 창조한 경이로운 것인 마냥 바라보았다. 그래서 작업이 끝날 때까지도 그는 숨죽이며 오로지 자신의 예술 작업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가 만든 작품은 철저히 그의 외부에 존재해야만 했다. 그는 절대로 그 작품 안에 들어가면 안되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들어가고야 만다. 그리고 그 작업물의 주인공이 되어버린다. 돌이킬 수 없는 걸음 바로 전에 그는 일종의 고해성사같은 눈물을 흘린다.
"죽었으면 좋겠어"라고 수없이 되뇌이며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는 자신의 온 몸에 꽃을 그리고는, '석유를 부은 불처럼 타오르는 욕망' 을 품고서 영혜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들의 적나라한 교합의 장면이 흘러나온다.
교합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그것이 남녀간의 애정이 담긴 행위가 아니라 말 그대로 꽃과 줄기와 잎들이 서로 맞물리는 행위만이 눈앞에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식물의 것도 아닌, 아주 기괴한.
(일본의 테라야마 슈지라는 영화감독이자 연극 연출가인 예술가가 있었다. 그의 실험극 영화가 바로 이러한 종류의 것이었다. 내용은 다르지만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는 영상 작업이다. 유투브에 영상이 있었지만 매우 기괴하고 선정적이라서 언젠가부터 볼 수 없는 것으로 되었다. 하지만 예술가로서의 그의 작품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형부의 영상 작업을 이해하는 것이 이 소설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이 장면이 소설에서 가장 논란이 된 장면이었다.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당연히 그럴만하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의 욕망과 영혜의 욕망에 대한 본질적인 것을 되짚어보는 것이다.
영혜는 이 모든 것이 끝난 이후에, "이제 무섭지 않아요. 무서워하지 않을 거에요." 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전에 촬영 작업이 끝난 이후에도 그에게 계속 몸에 그림을 그려달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자신의 죄의식의 근원을 직시하고 새롭게 살아갈 삶의 방식을 찾은 듯 해보였다 분명히.
그러나 내가 헷갈리는 건 형부인 그의 욕망에 대한 것이다. 알몸에 그림을 그리고 영상 촬영을 한 것이야 예술 작업을 하겠다는 욕망이 반영된 것이지만, 그 또한 몸에 꽃을 그리면서까지 그녀를 탐하는 욕망은 과연 단순한 성욕일까 아니면 영혜에 대한 사랑일까.
나는 아직까지도 그것에 대한 해답을 찾진 못했다.
한가지 추측해볼 수 있는 건, 소설에서 묘사한 영혜와 형부의 성향에 대한 것들이다.
영혜도 말 수가 적고 온순하고 고지식한 사람이었고, 형부 또한 그런 성질의 사람이었다.
둘 다 타인에게, 세상에게 비위를 맞추어 살아갈만큼의 면모는 없는.
사회로부터 부유하는 듯 살아가지만,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둘은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을 직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폭력의 근원을 마주하고, 그것에서부터 벗어나려는 욕망을 품고, 스스로를 구원하려는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어쩌면 형부는 영혜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걸지도 모른다.
결국 그는 영혜에게서 발견한 자신의 모습에게 연민을 느끼게 되고, 자신을 진정 사랑하고자 했던 것 아닐까? 영혜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나르시시즘일까?
예술가로서의 작업을 하고 싶었으나 정작 현실에선 거짓과 위선으로 점철된 작업물만 만들어내는 자신에 대한 연민과 사랑. 그것이 영혜와의 관계에 투영된 그의 욕망이라고 추측해본다.
그러나, 적어도 한 순간만큼은 내 가슴이 절절할 정도로 설레었었다.
그가 자신의 온 몸에 꽃과 식물을 그리고 그녀에게 달려가는 장면.
그녀를 탐하는 것이 그녀에 대한 사랑이 아님을 알면서도 나는 한 순간 어떠한 형태의 사랑을 느꼈었다. 그의 발걸음 하나, 하나에 담긴 비장함과 숨결이 진실하게 와 닿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와 그녀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비상'이다.
이 다음날 아침 영혜의 언니인 인혜에게 둘의 현장이 발각되고, 인혜는 구급차를 불러 영혜를 결국 정신병원으로 보낸다. 그리고 형부는 잠적한다.
영혜와 형부의 순수한 욕망이 그들에게 잠재한 폭력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더라도, 현실 속 처방은 윤리적 잣대에 충실한 것이기에 그들의 행동은 더 이상 용납되어서는 안되는 것으로,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영혜가 원했듯이, 또 예술작업의 일환으로써, 그녀의 몸에 형부가 꽃과 식물을 그리고 촬영하고.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현실에서는 말도 안되는 정신이상자의 행동인 것이다. 나조차도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기까지 고통스러운 공감과 이해가 필요했으니깐.
더 이상 작업을 할 수 없게 된 것은 형부에게 있어서는 예술가로서의 종말이고, 영혜에게는 정신분열증의 시작이 되어버렸다.
'구원'
영화 올드보이의 대사 중에 이런 것이 있다.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
성경에 나오는 구절이라고도 한다. 자신을 구할 수 있는 건 역시 자신이라는 것.
나에게 가해진 폭력을 거두어 내고, 그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이 소설은 한 개인에게 가해진 폭력이 어떠한 것인지보다, 그것을 온 몸으로 흡수하며 고통스러워하는 한 인간의 상처와 내면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만큼 몸 안에 깊숙하게 들어와 있는 폭력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폭력과 그것의 죄의식에 잠식된 인간이 그 모든 것들을 벗어던지기 위해서 필요한 용기나 강함 같은 성질의 것들은 오히려 영혜에게 있어 또 다른 폭력이 된다.
정말 영혜를 구하려고 했다면, 필요했던 유일한 건 가족들이 영혜의 삶의 방식을 존중해주는 것이었다.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서도 영혜는 백화점 일자리를 구하려고 했고, 자취방에 혼자 살면서도 자해를 하지 않았었다. 그녀는 분명 자신이 삶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찾아내는 중이었다.
그러나 형부와의 관계로 인해 결국 영혜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거기에서 다시 해답을 찾아낸다. '물구나무 서서 땅을 받치고 있는 나무가 되는 것'.
영혜가 여기까지 이르지 않도록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언니 인혜는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혜의 생각 속에만 존재할 뿐, 인혜조차도 영혜를 구원하지 못한다.
바로 여기에서 스스로 구원한다는 진정한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영혜가 자신의 죄의식에 마주하고,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채식을 선택한 것도 스스로를 구원하는 행위였다.
영혜가 형부의 예술 작업 제안을 받아들이고, 온 몸에 물감칠을 하게 된 것도 스스로를 구원하는 행위였다.
그리고, 정신병원에 갇혀 물구나무 서서 땅을 두 팔로 받치고 있는 나무들을 보면서 자신도 나무가 되기 위해 영양분 섭취를 아예 끊어버리며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것도 스스로를 구원하는 행위였던 것이다. 이것은 독자들에게 온전히 이해되기 힘들수도 있을 것이다. 죽음을 택하는 것이 구원이라니.
영혜는 자신의 내장이 퇴화해가는 과정을 기뻐한다. 자신의 육체에서 인간의 성분들을 모조리 비워내고 게워내는 과정을 기꺼이 선택한다. 이것이 구원이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나조차도 비정상일지도 모르겠지만, 영혜는 그렇게 기꺼이 죽음을 기대하고 맞이한다.
몽고반점 이야기에서 영혜는 식물이었다. 자신의 푸른 생명력을 그때까지만해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식물은 허공에서 자라지 못한다. 결국은 땅 속에 뿌리내려야 살아갈 수 있다. 그녀는 나무불꽃 이야기에서 그 진실을 깨닫게 되고, 기어이 땅 속에 뿌리내린다. 그러나 인간은 식물이 아니기에, 푸른 빛의 생명은 나무가 되지 못하고, 영혜는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마른 육체 안에 얼마 남지 않은 피마저도 토해내며 생의 끝자락을 향해 나아간다.
인간의 순수하고 진실한 욕망이 인정받지 못할 때, 삶의 방식이 존중받지 못할 때, 인간은 이렇게 절벽에 서게 된다. 추락하는 것 말고는 달리 살 길이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사람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세상의 모든 폭력들을 경계하라고, 마지막 장인 <나무불꽃>은 공포에 질릴 정도로 무섭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나무의 잎사귀들을 '초록빛의 불꽃'이라고 묘사하는 장면에서 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섬뜩함을 느꼈다. 그것을 영혜의 언니가 무언가에 항의하듯 어둡고 끈질긴 눈으로 바라보는 모습이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언니의 눈빛에서 말하고 있는 무수한 언어들을 독자들이 이어보길 바란다. 그것에서 많은 질문도 던져보고, 답도 찾아보길 바란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굉장히 무거운 감정 속에서 한동안 힘겨울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 내부의 깊숙한 곳까지 들여다본다는 것은 그 어떠한 공포 영화보다도 무서운 일이다.
그러나 무엇이 되었건, 살아내었으면 한다.
영혜는 그저 무기력하게 죽어가던 것이 절대로 아니다.
생에 대한 눈부신 의지가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렸고, 생생히 살아있었다.
그것을 분명 꽃 피워내려고 했었다.
내가 이 소설에서 포착한 생명력을, 여러분도 느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것이 당신을 살게 하는 힘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