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도에 그렸던 것. 손으로 그리고 색칠한 거라 어색하지만 재밌었다. 질릴만큼 그림 연습하면서 느꼈던 건, 그림에는 재능이 없구나! 라는 것. 뭐든 해봐야 안다. 해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말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꿈도 그렇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꾸지만 말고 행동으로 바로 옮겨야 한다. 실제로 해보면 나의 길이 아닌 것과 나의 길인 것이 이렇게도 다르다는 걸 처절하게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을 최고로 잘 해내는 사람들에 대한 경외감도 가지게 된다. 그건 질투가 아니다. 부러움도 아니다. 그저 '존경심'일 뿐이다. 창작의 고통을 감내해야만 한다는 두려움과 그것을 무던히 해낸 창작자에 대한 존경의 마음. 살면서 좋은 작품들 많이 읽고 보고 느끼는 것. 그것은 '행복한 관객'의 길이다. 창작의 고통 속에서 인생을 다 바쳐 작품을 완성해내는 '프로'의 길을 아마추어들은 절대 따라가지도 못하겠지만, 그래도 그들의 여정을 알고 바라보는 우리 감상자들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프로들의 작품이 세상에 빛을 발할 수 있을테니. 무엇이든 저마다의 자리에서의 풍경이 있는 법이다. 가질 수 없는 것을 애써 가지려 하지 않고, 헛된 꿈으로 자신을 고통 속에 던지지 말고, 자신의 여정에 충실하는 것. 그것에서 예술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낀다. 감상자들도 예술이 아닌 부분에 있어서는 오로지 자신만의 인생이 있고, 그 부분을 어떻게 헤쳐나갈지에 대한 삶의 진지한 고민들은 예술가들의 열정과 다르지 않을 것이므로.)


#한때 꿈이었던 것들에 대한 그 첫번째 이야기 _ (1) '만화가'


인생에서 가장 책을 많이 읽었던 시기가 언제였던가, 생각해보았더니 초등학생 때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독서를 많이 했었다. 다독이라는 관점보다는, 항상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있었을만큼 책과 하나가 되었던 것 같다. 그도 그럴것이 부모님께서 책을 좋아하셨고, 방 전체가 하나의 서재처럼 책장으로 꽉 차 있었다. 초등학생이었던 나와 동생을 위한 외국의 고전 소설 전집, 역사와 과학 백과사전 전집, 초등학생이 읽어야 할 필독도서들, 아버지 취향의 경영과 경제학 도서들, 어머니 취향의 수필과 문학 도서들. 이사할 때마다 이삿짐 센터의 직원 분들께서 오죽하면 책 때문에 돈을 더 받아야한다고 우스갯소리로 말하시면서 우리 가족은 다같이 이삿짐을 옮기며 웃곤했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부모님께서는 책을 '많이' 읽는 것을 전혀 강요하지 않으셨다는 점이다. 그저 부모님께서는 다양한 책들을 읽으며, 다양한 관점에서 다채롭게 생각하고 사람과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아이가 되길 바라셨다. 책을 읽고 그 속의 인물들과 세계관을 이해한다는 것은, 언제나 자신이 갇힌 새장을 부수고 밖으로 나가는 일이기도 하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렸을 때부터 나는 선입견과 편견이라는 것들을 깨부수기 위해 어떤 것이든 이해해보려는 시도를 항상 했었다. 아마도 그건 선천적으로 생각이 많았던 기질 탓이었을 수도 있다. 그것이 고등학교 가서는 현 교육 시스템에 대한 소심한 반항으로 이어져서 다들 수능과 대학 입시에 매달릴 때, 나는 내가 평생 살아가야 할 나만의 인생과 내가 진정 되고 싶은 그 무언가의 꿈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느라 입시에 소홀했다. 그것이 학생의 본분에 있어서는 잘못된 행동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나는 학생들의 꿈보다 대학 입시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한국의 교육 시스템에 왜 그렇게 서운하고 실망했는지 모르겠다. 어쨋든 고등학교 3년의 시간은 내 이상과 현실과의 괴리로 인해 많이 힘들었다. 대부분이 날들이 인생에서 가장 '잿빛'의 하늘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막막한 시간들 속에서도 나는 최선을 다해 내가 좋아했던 것들에 파묻혀 살긴 했었다. 책을 좋아하긴 했지만, 상상 속의 이야기를 언어로만 펼쳐 놓는 것에 무언가 권태를 느낄 때가 아마 내가 중학생 때였을 것이다. 언어가 보여주는 세상이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다운지는 그동안 책을 읽으면서 많이 느꼈지만, 언어가 다 보여주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어떤 호기심과 의문이 내 안에서 넘쳐 흐르고 있었다. 그 시기에 나는 새로운 친구들과 친해지게 되면서 친구의 취미 세계에 발을 들이며, '만화' 혹은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에 처음으로 접근하게 되었다. 물론 어머니께서 젊은 시절 만화를 그려서 공모전에도 수상하고 온라인에 연재도 하셨을 만큼 만화에 대해 지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종이에 그려진 그림과 글의 형식이 '영상'으로 재현될 때의 충격을 그때 처음 알게 된 것 같다. 지금 한국의 만화, 특히 웹툰 시장은 일본을 압도할 만큼의 수준과 규모이지만, 내가 중학교 2학년이었던 2006년은 일본의 드라마, 만화, 애니메이션이 훨씬 우세하였던 시기라서 그 친구의 만화 세계를 구성했던 작품들도 다 일본의 것이었다. 친구가 추천해 준 일본 만화들을 보면서, 나는 언어가 다 보여주지 못하는 어떤 세상을 비로소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영상으로 재현되는 만화는 시각적으로 그 작품 속의 세계관과 메세지를 전부 다 보여준다. 우리들이 통찰을 해볼 수 있는 부분도 있기야 하겠지만, 화면 속에서 펼쳐지는 이야기가 우리의 상상력을 압도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인간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한 인간의 상상의 세계가 '어디까지' 표현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 있어서 '만화가'라는 사람은 위대한 창조자이다. 만화라는 영역이 소설과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소설이 언어로 표현될 때, 만화는 언어가 배제된 세계를 표현해내야만 한다. 만화 속 명대사들도 우리에게 수많은 감동을 선물하지만, 이것이 만화의 본질은 아니다. 대사들로 이어나가기만 한다면 만화는 만화가 아니게 된다. 하나의 장면과 그 다음, 다음으로 연속되는 장면들이 어떻게 선택되어지는지, 무엇을 보여줄 것인지, 누구를 통해 말할 것인지, 작품 속의 시공간은 어떠한 상황인 것인지 등등에 있어 작가는 절대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영역을 그림으로 전부 그려내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3D의 영상으로 다시 재탄생되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노동력과 기술을 필요로 하는 고단한 작업이기도 하다. 만화가가 만들어내는 캐릭터는 인간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단 하나'로써 존재해야만 하기 때문에, 어디에도 없는 단 하나의 캐릭터를 창조한다는 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예술가의 진지한 작업과 다르지 않다. 만화가 비록 상업적이고 세속의 것이라고 해서 그 진실한 작업을 저평가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캐릭터와 더불어, 만화 속 세계관을 구성하는 다양하고 신비스런 요소들까지 생각한다면 그 거대한 세계가 탄생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고와 영감이 필요한 것인지 추측해볼 수 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든 정도가 아니라, 만화가의 인생과 영혼을 통째로 갈아넣어야 비로소 '작품'이 완성된다. 그것을 중학생 때 경험하게 되었던 것은 나에게 참 기적같은 순간이었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수단들은 만화 뿐만 아니라 참 다양하게 존재하는데, 그것이 나에게는 만화였던 것이다. 물론 모든 만화들이 작품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서도 좋은 작품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있고, 이것을 분별하는 것은 사람마다 취향과 가치관의 차이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영상으로 재현된 만화를 접하게 된 이후로, 종이책으로 그려진 만화책의 가치를 더 제대로 깊게 느낄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영상으로 제시된 내용이 무조건 전지전능한 것도 아니다. 단지 종이 위에 놓여진 언어와 그림들이 전해주는 감동과 매력은 화면에서 움직이는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가치가 있다. 영상매체와 종이책이 가진 차이점들을 비교해보고 직접 느낄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좋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한다.


만화와 관련하여 부끄럽지만, 중학교 때의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한다.

그 시절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다니던 피아노 학원에 계속 다니고 있었고, 클래식 뿐만 아니라 뉴에이지 음악이라고 불리우는 현대 음악들에 푹 빠져 있었다. 연주할 수 있는 악기가 겨우 피아노 하나였기 때문에, 좋아하는 곡을 발견하면 그것을 피아노로 연주하는 것에 굉장한 취미가 있었다. 마침 그때 로또 3등에 당첨된 아버지께서 내가 피아노 연주를 너무 좋아하는 걸 보고서는 그 당첨금과 돈을 더 보태어 피아노를 사주셨다. 그 돈으로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는 것들을 살 수 있었을텐데도 내가 좋아하는 피아노를 사주신 아버지께 감사해서라도 나는 열심히 연주했었던 것 같다.

그러던 와중에 만화를 사랑하던 친구로 인해 만화의 세계를 알게 되고, 나도 나만의 만화 취향을 무의식적으로 형성하려 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제일 먼저 음악을 주제로 한 만화에 빠졌었다. 어떻게 알게 된 것인지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마츠모토 토모' 라는 작가의 <KISS>라는 작품을 알게 되었고, 그 속에 나오는 음악들을 한시라도 빨리 들어보고 피아노로 쳐보기 위해 나는 급히 만화책방에 들렀다. 다행히도 그 만화책이 있었고 전 권을 꺼내어 카운터로 갔는데 사장님께서 대여가 안된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아니 이게 왠걸. 그때 마침 교복을 입고 있었던 터라 사장님은 내가 중학생인지 다 알고 계셨고, 나는 그 만화책이 15금인지 몰랐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만13살의 나이였으니깐. 그 만화책은 절대 야햔 것도 아니고 음악이 주제인 순정 만화일 뿐이라고. 그러니 제발 빌려달라고, 마음 속으로만 여러번 외쳤고, 사장님은 단호했다. 포기할 수 없었던 나는 집에 가서 어머니를 만화책방으로 모셔와서 다시 그 책을 빌려갔다. 내가 어머니를 데리고 다시 나타났을 때의 사장님의 그 어이없는 표정을 아직도 기억한다. 당시에 내성적이었던 내가 굉장히 필사적이고 적극적이었던 몇 안되는 행동 중에 하나였기에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만 난다. 어쨋든 나는 그 만화책을 빌려와서 읽게 되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꼈던 감동에 설레었다. 음악이 목적이었지만, 그 만화책의 인물들과 내용에 완전히 몰입하여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원래 순정만화가 주는 설레임이 엄청난 것이지만, 마츠모토 토모의 <KISS>는 다른 순정만화와 결이 달랐다. 모든 장면에 음악이 흐르고 있어서 그럴수도 있겠지만, 인물들의 내면과 서로에게 닿는 감정과 행동의 영향들이 실제로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 같아서 아직도 내 마음 속에 생생히 살아있는 작품이다. 거기에 등장했던 음악들 중에 <Say you love me> 라는 피아노 곡이 있다. 당시에 나는 그 곡에 푹 빠져서 곧바로 피아노로 연습했었다. 곡 후반부의 트릴 연주 부분은 마치 건반 위에서 손가락이 춤을 추는 듯해서 피아노를 이렇게도 생동감있게 연주할 수 있구나, 라며 감탄했었다. 이 곡의 모든 음표들이 마지막의 트릴로 이어지는 여정을 느껴보니, 음악을 진정으로 좋아하게 된 것도 이 때였던 것 같았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Say you love me를 들으면서 이 글을 작성하고 있다. 그 경쾌함이 내 귀에서 아직도 감미롭게 들린다. 이토록 어린 시절의 취향은 어른이 되어서도 변함이 없는가 보다.


이렇게 만화의 세계에 빠지게 되고 나서 다양한 매체의 장르들을 더 폭넓게 이해하는 것도 가능해졌다고 생각한다. 작품에 접근하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선입견과 편견을 가지고 있으면 접할 수 있는 작품의 폭도 좁아지게 되고, 느낄 수 있는 영역 또한 줄어들게 된다. 그래서 좋은 작품들을 진정 이해하고 알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편협한 사고방식부터 개선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좋은 작품들이 많다. 죽기 전에 그것들을 다 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많다. 창작자의 입장이 아닌 관객의 입장에서는 조바심이 난다. 그것들을 다 보고 싶다는. 이걸 보면 이 시대의 감상자들은 행복한 것이다. 감사하게 여기고 있다. 좋은 작품들을 살아서 느낄 수 있다는 것에 대하여.


나는 한때 만화가가 되고 싶었다. 스토리는 무궁무진하게 머릿 속에 자라나고 있었는데, 결정적으로 부족했던 건 그림 실력이었다. 그런데 그 '실력'이란, 단순히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이 아니었다. 만화가들이 캐릭터와 배경들을 세밀하게 잘 그리기 때문에 그들의 작품이 칭송받는 것이 아니다. 자신만의 캐릭터를 창조하는 것은 그림을 잘 그리는 것과는 다른 일이다. 아라카와 히로무의 '강철의 연금술사', 이사야마 하지메의 '진격의 거인', 토가시 요시히로의 '헌터X헌터' 등의 만화책을 보면 알겠지만, 그들의 그림 실력이 뛰어난 것은 절대로 아니다. 작가가 만화책에서 보여주는 세계관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을 창조하는 것은 그림을 잘 그리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라는 것을 그림 연습을 하면서 깨닫게 되었다. 만화가의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나니,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처절하게 깨닫고, 포기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 비참하지는 않았다. '만화가'라는 사람들을, 그리고 그 직업의 일을 정말로 존경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누구든 자신의 '인생 작품'이라고 여기는 훌륭한 작품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소설,시,영화,만화,드라마 등등 다양한 장르의 것일 테고, 각자가 인상 깊게 본 작품들은 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같은 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그 작품들을 접하기 이전과 이후는 정말 다른 세계라는 것이다. 내 인생을 바꿔 놓을 만큼의 강력한 작품들은 인생의 마지막까지 가져갈 수 있는 힘이 되어주기도 한다. 이 작품이 이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에 왠지 나는 인생 끝까지 용기내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의 그것.


영상으로서의 명작 애니라고 한다면 역시나 일본 만화들이 우선순위에 오르겠지만, 적어도 종이책으로 출판된 만화라고 한다면 한국의 작가들이 절대 일본에 지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아니, 한국 만화가들이 만화책에 있어서는 오히려 작화와 감수성, 스토리, 구성 등에 있어 일본 작품들보다 더 우아하고 세심하고 아름답다. '마스카'의 김영희 작가, '풀하우스'의 원수연 작가, '스노우드롭'의 최경아 작가, 'I Wish'의 서현주 작가, 그리고 만화도 멋지지만 그의 인생에 대한 에세이에 더 감동 받았던 이현세 작가 등등. 다 읽어보지도 못한 좋은 작품들이 너무 많아서, 앞으로 그것들을 읽을 생각에 마냥 행복하다.


그러나 이 모든 작가와 작품들을 압도하는, 나에게 있어 최고의 만화가는 바로 '하일권' 이다. 하일권 작가님의 만화책을 20살 때 처음 접했고, 그 이후의 내 인생은 마치 그의 작품 '안나라수마나라'에 나오는 '나일등' 의 자기 인식과 자기 변화와 같을 정도로, 많이 달라지게 되었다. 만화에 교훈이나 메세지가 반드시 담겨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통찰들은 각자의 인생과 현실에 대한 반성을 할 수 있는 강력한 것들이기에 나는 하일권이라는 작가의 매력에 푹 빠졌다. 만화가 보여줄 수 있는 세계가 바로 이런 것이구나, 라는 감동은 만화에 대한 본질과 정체성에 대해서 제대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도 되었다. 

하일권 작가님의 작품들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기도 하고, 자신있게 추천하는 작품은 바로 '안나라수마나라' 이다.

작품이 가진 가치들 중에 언제나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그 작품이 나에게 끼치는 영향과 그것이 어떠한 '변화'를 이끌어 낸다는 점이다. 그것을 통해 나는 그 작품들을 깊이 이해하기도 하며, 내게 있어 소중한 작품이 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 있어서 '안나라수마나라' 속의 '나일등' 이라는 캐릭터는 분명 작품 속에서만 존재하는 인물이지만, 동시에 현실 속 우리들이 반성해야 할 계기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작품 안과 밖을 연결해주는 중요한 인물이다. 나일등이 부모님과 사회가 제시해 온 엘리트의 길을, 그 차가운 아스팔트 길을, 자신도 당연하게 여기며 걸어왔던 길에서 비로소 스스로 벗어나게 되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과, 온전한 자신의 의지로 개선과 변화를 이끌어냈다는 점은 이 시대를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귀감이 될 만하다. 주인공들보다도 나일등이라는 인물이 더 인상 깊었다. 개과천선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동적으로 살아왔던 인물이 능동적으로,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선 노력 이상의 것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어쩌면 나일등의 변모는 역설적인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만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현실 속에는 절대 존재하지 않기에 더 감동을 주는. 하지만, 그것이 바로 하일권 작가가 보여주는, 작품과 독자 사이의 '긴장감'이다.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강요가 아닌, 독자 스스로 생각해볼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그러나 혹독한 자기 반성을 필요로 하는.


작품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과 개선의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작가는 흔하지 않다. 독자들은 달콤하고 칭찬 가득한 표층적인 위로나 아니면 철저하게 비판할 수 있는 영역을 제시하는 작가를 더 좋아할 수도 있겠으나, 나는 이렇게 결국 자기 자신으로 향하게 만드는 작품들을 좋아하는 것 같다. 더 좋은 '내'가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을 돌아보고 끊임없이 개선해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나일등의 독백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나일등이 처음으로 자기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된 장면이라 기억에 남는다. 동시에 현 교육 시스템에 대한 비판과 통찰이 아스팔트 위의 길로 비유하여 제시된다. 부조리한 시스템 속에서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전교 1등의 학생이 자신의 길에 대해 진정 생각해본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어떻게 알았지? 내가 아스팔트 길을 달리고 있다는 걸. 나는 아스팔트가 깔린 곧고 평평한 길을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다. 그 길은 일방통행이라 헤맬 일도 없고 고속도로라 차가 막힐 일도 없다. 더러운 흙기로, 혹은 구불구불하게 꼬인 길로, 항상 막히는 길로 다니는 사람들과는 달리. 난 능력 있는 부모님이 깔아주신 이 아스팔트를 달린다. 주변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그렇게 앞만 보고 달린다. 달리다 보면 난 항상 1등이다.'




-> 나일등의 저 길쭉한 얼굴이 자기 인식 이후에 말끔하게 잘생긴 얼굴로 변모한다는 점이 이 만화책의 재미있는 요소들 중 하나이다. 한 캐릭터의 내면의 변화를 다채롭게 표현해내는 작가님의 능력 최고! (이 만화책이 드라마로도 제작되어 있지만, 만화책의 가치가 드라마로 다 표현되기에는 무리였던 것 같다. 하일권 작가의 만화책은 그저 만화책 그대로 읽어야 그 감동을 백퍼센트 느낄 수 있다. 원작을 뛰어넘는 영상 작업들도 많지만, 하일권의 작품들은 종이 만화책에서 그 가치가 생생하게 살아숨쉰다.)




 

-> '마츠모토 토모' 작가의 <KISS>는 '음악을 주제로 한 순정 만화'라는 걸 다시 한번 강조한다ㅎㅎ 제목 때문에 이 작품의 가치가 오해 받기도 하지만, 이 만화를 보게 된다면 왜 제목이 반드시 이것이어야 했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나저나 애장판 구매도 못했는데 절판이라니ㅠㅠ 재출간 해주신다면 바로 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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