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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외출
조지수 지음 / 지혜정원 / 2023년 11월
평점 :
#조지수 작가의 장편소설, <마지막 외출>
오랜만에 여운이 길게 남는 소설을 읽었다.
마지막 장을 다 읽고나서도 내 안에서 해결되지 않는 질문들이 얽혀있어서, 그것들에 대한 답을 찾아내느라 생각을 한참 정리해야만 했다.
스스로 충분히 생각하고 답을 찾지 않은 상태에서 글을 쓴다는 건 거짓된 행위이기에.
나는 내 인생에 대하여서도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해왔고, 내 앞에 들이닥치는 끝없는 질문들에 대하여서도 도망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해왔다. 그리고 그 답을 찾아내기까지 때로는 발걸음 닿는 대로 걸어야만 하는 긴 여정도 마다하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오롯이 나의 진실한 마음과 의지가 담겨있지 않다면, 그 선택이 초래할 결과와 미래는 내 것이 아닐 뿐더러, 그것들 앞에서 나는 불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리 잘못된 방식이 아니라는 것도 이 소설을 읽으며 다시금 깊숙히 느낄 수 있었다.
좋은 소설은 좋은 삶의 방식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한다.
이 소설의 여주인공이 결국 놓쳐버린 진실한 사랑에 대해서 생각하다보면, 누군가를 진실하게 사랑하는 '마음'과 그 대상을 사랑하는 '방식'이 같은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며, 사랑하는 마음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어낼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과 개선이 없는 태도와 올바르지 못한 사랑의 방식은 사람의 인생을 파멸로 이끈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깨닫게 될 것이다.
사람을 제대로 사랑하는 방식과 방법에 대해서 우리들은 이토록 서툴고 어리석을 수 있다.
잃고 싶지 않은 소중한 사람이 있다면 그를 제대로 사랑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그 사람을 사랑하는 나 자신에 대하여서도 진지하고 깊숙하게 통찰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소설의 여주인공처럼 생의 진실한 사랑을 찾았으면서도 결국은 제 손으로, 기어이 자신의 의지로 놓쳐버리는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된다.
비극은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것에서 오는가? 아니면 내가 선택하지 않은, 의도하지 않은 뜻밖의 것들에서 오는가?
비극은 이 우주 속에 존재하는 그 어느 것으로부터도 오겠지만 진정한 비극이란 건, 나 자신이 정답을 다 알면서도 내가 원하지 않는 다른 것들을 선택하는 것에서 비로소 오는 것 같다. 결국 '내'가 원인일 때 거기서 오는 비극과 그것이 초래하는 파멸이라는 감정은 인생을 벼랑 끝으로 내몰 수도 있는 강력한 절망을 최대치로 끌어낸다.
여주인공은 자신의 인생에서 소울메이트라고 할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인 K교수라는 사람을 우주 속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고, 그녀의 의지로 사랑했다. 오로지 '그'만을 선택할 수 있었던 기회가 정말 여러번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언제고 다른 사람을 선택하고 거짓 사랑을 했다. 심지어 다른 남자들을 만나면서도 K교수를 사랑했다. 이것이 그녀가 결국 인생의 전반에 걸쳐 불행했던 이유였다. 그녀가 만났던 수많은 남자들이 그녀에게 준 불행이 아닌, 그녀의 온전한 의지로 선택한 불행이니, 불행은 결국 자기 자신이 불러낸 것이다. 나는 그녀가 참 싫었고, 이해되지 않았고, 답답했다. 그러나 그녀의 독백과 자기 고백적 언어들을 따라가다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식과 자기 자신에 대한 많은 반성과 통찰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 소설의 진정한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대학생이었을 때 K교수에게 고했던 이별이 그녀의 어리석은 첫번째 선택이자, 이 거대한 '비극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그녀가 K교수와 동시에 만나고 있었던 D라는 남학생이 K교수와 헤어질 것을 종용하는 장면에서 그녀는 기어코 D의 명령대로 K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이별을 고한다. 아, 정말 왜 그랬을까? 그녀의 선택을 이해해보려고 참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우선 그녀는 아직 대학생의 나이였다. 많은 공부를 했더라도 사회적으로 사리분별이 미숙한 나이였고, 어리숙한 행동을 할 수도 있다고 짐작은 해본다. 그녀는 1년 정도 K교수와 함께 하며 그의 학문적 성취, 그의 내면과 가치관 등등. 그만의 독특한 세계를 이해했다고는 하지만, K교수라는 사람에 대해서 맹목적인 신뢰를 가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여성 편력이 심한 남자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단순히 용기만을 가지고는 어려운 법이다. 반대로 남성 편력이 심한 여자를 맹목적으로 사랑하고 헌신하는 남자가 있을까? 앞으로 이 사람만을 사랑하겠노라는 맹세와 다짐을 명확히 보여준대도 그것이 사랑을 굳건히 지속시키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다. '사랑한다'는 말 만으로 사랑이 시작되거나 완성되지는 않는다. 언어보다는 그 사람 전체를 보게 되어 있다. 물론 그조차도 현실에서는 서로의 허상 속에서 길을 잃으며, 닿을 수 없는 실체에 다가가려다 사랑에 실패하고 말지만. K교수와 함께 할 미래를 그려보는 것에 있어서 그녀는 확신이 없었던 것 같다. 그에 대한 믿음도, 그를 사랑하는 그녀 자신에 대한 믿음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주인공이 아직 대학생이었을 때 K교수에게 이별을 고한 것은 나름대로 설득이 되고 이해를 할 수 있다.
누군가를 진실되게 사랑하기 위해선 그 대상에 대한 나의 '믿음'이라는 것이, 사랑이라는 감정에 앞서서 존재해야만 하는 것 같다. 사랑이 시작되고 나서도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려고 드는 연인들의 투정과 싸움을 오랜시간 관찰해온 나로서는, 사랑이 흔들리는 이유의 본질이 바로 사랑이라는 감정에 앞서는, 대상에 대한 '믿음'의 부존재에 있다고 판단해왔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믿는다면, 그 대상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믿게 되고,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게 된다. 흔들리지 않는 사랑을 언제까지고 계속 지속해나갈 수 있다. 만약 그 대상이 믿음에 배반되는 행동을 하여 사랑이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고 해도, 그 사람을 믿은 건 '나 자신'이기 때문에 그를 사랑했던 나의 '선택'만을 후회하거나 비난할 수 있게 된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건 그 대상이 나의 것이 되기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 자신으로서의 '그'를 사랑하겠다는 것이므로.
진정한 믿음이란 자기 자신에서 시작하여 자신에게로 귀결되는 가장 고귀한 것이기에, 사랑의 파멸 앞에서도 대상이 아닌 오로지 '나'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여주인공은 K교수를 사랑하는 데에 있어 바로 이 '믿음'이 부족했다. 아니, 애초에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나서 다시 K교수와 재회하여 그와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때에도 여전히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 존재하지 않았고, 자신의 불행했던 결혼생활에 대한 보상 심리로 더욱더 K교수에 대한 소유욕이 커지게 된 것이다. K교수를 그 사람, 존재하는 그 자체로 바라보고 믿었더라면, 그녀는 K교수와 행복한 결말을 맺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온전한 '믿음'이 존재하지 않을 때에,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고자 하게 되고, 구속하게 되고, 그를 자신의 뜻대로 통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게 된다. 그것이 '사랑을 망치는 이유'이다.
사랑을 망친 장본인이 그녀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이미 K교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게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은 언제나 그 대상을 완전히 잃고 나서야, 자신이 진정 사랑받았음을 깨닫는다.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마츠코라는 캐릭터에서도 이 면모가 드러난다. 사랑받기 위해서 올바르지 못하게 대상들을 사랑해왔던 마츠코는 어느새 파멸해가고 있던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고, 자신이 누군가에게 진정 사랑 받았음을 깨닫는다. 그 땐 이미 너무 늦었고, 다시 세상을 사랑해보려고 용기냈을 때는, 자신조차 남아있지 않게 된다. 믿음과 비극의 관계는 세상 어느 문학과 예술에서나 파국적으로 드러난다.
나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종교적인 믿음에 대해서는 잘 모르나, 대상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감정에 앞서 그 대상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임을 안다. 그래야만 그 대상이 온전한 그 자체로 있을 수 있게 되고, 사랑을 지킬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진정한 믿음이란 자기 자신에서 시작하여 자신에게로 귀결되는 가장 고귀한 것이기에, 대상을 온전히 믿고 사랑한다면 그 대상 또한 그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게 된다. 나와 대상이 각자 독립하여 자신으로서 존재하면서도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녀의 사랑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이 드넓은 우주 속에서 K교수라는 사람의 진면목을 알게 된 그녀였기에. 그리고 K교수 또한 그녀가 진정 어떠한 사람인지 다 알면서도 사랑했기에. 누군가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랑은 참 드물다. 사랑하면서도 서로의 가치를 알아주고 인정하는 관계는 정말 이상적인 것이라서 두 사람의 사랑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이 비극적 결말에 얼마간 고통스러웠던 것 같다.
그녀가 남편과의 관계가 좋지 않고, 원만한 결혼생활을 할 수 없었던 것도 바로 여기에 이유가 있다. 서로에 대한 진실한 이해와 믿음에 기반하지 않은 결혼은 그저 남편과 아내라는 '역할'에 충실한 것만이 결혼의 전부이게 된다. 그 사람만의 고유한 가치를 서로가 알아주고 인정하는 것 없이, 그저 가정에서의 역할과 위치에서 서로를 바라보게 되니, 이것이 불행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얼마전 추석 연휴에 친구를 만나 그 친구의 연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 또래의 사랑과 결혼에 대해서 참 많은 이야기를 했다. 일자리의 경쟁에 치여 취직이 늦는 세대라서, 다들 결혼 시기가 많이 늦어졌다. 친구는 원래 비혼주의자였고, 연애를 하면서 조금은 결혼에 대해서 생각이 열렸다고 한다. 30대 초반이 되면서 또래의 여자친구들이 하나둘씩 결혼하고 있다. 그 중에는 서로 오랫동안 사랑한 끝에 결혼하는 친구들도 있지만, 사랑에 기반하지 않은 소개팅이나 맞선으로 인연을 맺고 결혼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다. 소설과 영화에서만 사랑이 어려운 것이 아니다. 현실에서는 사랑이 이토록 더 어렵고 힘들다. 누군가를 천천히 알게 되고, 그 사람만의 진가를 보게 되고, 한 사람의 세계를 품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이렇게 사랑을 쌓아나가는 오랜 과정들 없이 소개팅이나 맞선 자리에서 사람을 알게 되고 결혼하는 건 내 기준에 있어서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맞선 자리에서 본 사람을 정말 운명적으로 사랑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그러한 운명적인 일이 있던가? 맞선이나 소개팅은 '결혼'이 목적인 이유가 대부분이기에 모든 만남의 과정이 결혼에 맞추어 흘러가게 된다. 그 사람이 진정 어떠한 사람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탐구보다는, 그 사람이 결혼하기에 적당한 사람인가에 대한 판단이 중요하게 된다. '적당히'라는 말은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있어서 절대로 판단 기준이 되면 안 되는 것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적당한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30대 초반 아직 미혼으로 남은 사람들에게 사회가 요구하거나, 결혼에 조급한 사람들이 세상과 타협하게 되는 기준이 되어버렸다. 적당한 사람이라는 기준에는 결국 그가 가진 배경, 재력, 능력 등등 그 사람의 본질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한 사람이 가진 고유한, 진정한 가치들은 '적당한 사람'이라는 조건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 소설의 여주인공도 마찬가지이다. K교수와 헤어지고 나서 결혼한 남편이 그녀에게 있어 어떠한 사람인가? 남편의 진면목과 가치를 인정하고 그를 온전히 이해하고 사랑해서 한 결혼이었나? 아니다. 그녀도 결국 사회적, 경제적 조건들을 따지고서 그녀가 생각하기에 '적당한 사람'이라는 기준에 적합한 사람이었기에 남편과 결혼한 것이었다. 그러니 그 결혼 생활은 오로지 '조건'들이 유지되기 위해서만을 위해 흘러갈 뿐, 애정이나 신뢰같은 정신적인 가치같은 것들은 애초에 결혼생활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들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K교수를 진정 사랑하게 되면서 자신이 어떠한 사람을 사랑하고 어떠한 가치들을 중요하게 여길 수 있는지 분명히 겪었다. 한 사람이 가진 가치를 알아보고 품을 줄 아는 진실한 사랑을 했던 그녀라면, 선택도 그러했어야 한다. 결국 생각 뿐이었고 행동은 그것을 반영하지 못했다. 그녀가 물질적 가치들만이 중요한 결혼을 선택했다는 것이 그녀의 두번째 비극인 것이다. 역시 그녀가 자초한.
진정한 사랑을 버리고 그 자리에 매번 거짓된 사랑을 채워 넣은 것이 그녀의 세 번째 비극이다. 그녀 자신의 진실한 사랑에 배반되는 행동과 선택이 남성편력으로 흘러가는 모습을 보면서 내 마음도 점점 무너져 내려갔다. K교수의 여성 편력과는 또 결이 다른 것 같다. 그녀는 남자들을 사랑한 게 아니라 그저 이용한 것 같다. 언제나 자신의 감정, 욕구, 위선, 사회적 지위 등에 가치를 부여하며 보여주기 식의 사랑을 해온 것이다.
정말 K교수를 사랑했다면,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을 대체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와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해도 평생 마음 속에 그 사람을 품고서 혼자서 살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내 가치관대로 그녀를 판단하면 안되겠지만, 그녀는 욕심이 참 많은 사람이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절대 사랑으로 행복해질 수 없다. 사랑은 가져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하는 것이라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대학생일 때의 어느 정도의 순수함마저 잃어버린 그녀는 K교수와 재회하고나서 그와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되었을 때, 통제할 수 없는 소유욕에 미쳐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K교수를 조현병으로, 죽음으로 몰고 간다. 사람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고자 하는 그녀의 잘못된 사랑의 방식이 한 사람을 파괴했다.
그녀가 K교수를 사랑하는 마음에 문제가 있었나? 아니다. 그녀는 진실하게 그를 사랑했다. 그를 사랑하는 방식에 결국 문제가 있었다. 이것이 맨 처음 말한 '믿음'과 절대적으로 관련이 있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K교수를 믿지 않았고, 그가 캐나다의 건강식품점 여자에게 간 것에 눈이 뒤집혀 그를 추적하다가 그와 충돌하게 되고, 그를 파멸로 이끌게 된다. 결국에는 그녀 자신의 파멸이기도 한. 그를 끝까지 믿지 않고, 돌이킬 수 없는 상처와 모욕을 던진 것이 그녀의 마지막 비극인 것이다.
사랑을, 사람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은 정말 많은 비극을 만들어내지만, 그 중에 가장 큰 비극은 그 사람이 가진 고유한 빛과 가치를 잃게 만든다는 것이다. 한때는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된 이유였던 것들이 점차 빛을 잃어가고 중요하지 않게 되는 건 그 사랑의 대상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내 것으로 만들고, 내 뜻대로 통제하고 편하게 여기게 되어버렸기 때문인 것이다.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가진 진정한 가치가 그 빛을 잃지 않을 수 있도록, 언제까지나 반짝반짝 빛날 수 있도록 지켜주어야 한다. 이것이 사랑이라는 감정보다 사랑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소중한 것임을.
이 소설 여주인공이 한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과 사랑하는 마음의 변모를 함께 따라가다보면, 진정한 사랑은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지막 외출>이라는 소설의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독자들도 마음껏 소설 속의 인물을 비평해보기도, 자신을 반성해보기도 하면서, 사랑에 대한 자신만의 통찰을 해볼 수 있길 바란다.
->꽃에 투영된 철학 이야기가 너무 귀엽다.
*개인적으로 여주인공의 독백과 자기고백적 언어 위주의 흐름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시선으로 본 K교수와 다른 인물들의 묘사 또한 인상 깊었다.
통찰 부분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양이 많지만,
자신의 시간적 여유에 맞게 호흡을 나누어 천천히 읽으면 될 일이다.
책의 가치라는 것을 평가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그동안 서평을 쓰진 않았지만,
많은 책들을 읽어온 지금에서 느끼는 건
어떤 책을 읽기 전과 후의 나 자신은 분명 다르다는 것이다.
책이 지닌 가치 중에 가장 소중한 것이 바로 이것인 것 같다.
책을 읽고 나서의 변화는 쌓이고 쌓여 한 사람의 성장을 구성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