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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만을 보았다
그레구아르 들라쿠르 지음, 이선민 옮김 / 문학테라피 / 2015년 3월
평점 :
"그게 아니었어요. '날을 잡아'라는 말은 야수의 그림자가 아니라, 빛을 잡으라는 거였어요.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거죠. 다른 걸 잡으라고, 미지의 것을 향해 가라고.
인생을 향해 가라고.
이제는 그곳에 가고 싶네요. 미지의 것을 향해."
인생을 향해, 미지의 것을 향해 나아가고 싶다고 말하는 그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선택으로 자기 인생뿐만 아니라, 타인의 인생까지 파멸시킨 사람이다.
그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사람을 파괴할 만큼,
한 사람의 비극 속에 오랫동안 숨겨져 온 야수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그건 소설 속 주인공인 앙투안, 그의 인생 전체를 이해할 때 비로소 알 수 있게 된다.
불행했던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부모님의 따스한 손길과 사랑을 갈구했던 한 소년의 마음에는
'비겁함'이라는 존재가 뿌리 내렸고, 그건 그의 인생 전체를 갉아먹는 괴물이 되어버렸다.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침묵하고, 비겁하게 자신을 숨겨왔던 그가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소리를 내었던 순간.
바로 그의 딸 조세핀에게 총을 겨눈 순간이었다.
이 말도 안되는 행동을 이해하기까지는, 적어도 두 가정의 붕괴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가족이 어떻게 탄생하고 해체되는지 지켜보면서, 현실 속 우리들의 가족은 어떠한 모습인지 돌아볼 수 있게 된다.
언제나 그렇듯 반성은 고통을 동반하기에 이 소설은 참 아프게 읽어야만 했고,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버지가 자신의 딸에게 총을 쏜 행위는 명백하게 범죄이고,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윤리적으로만 생각한다면, 이 소설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의 진정한 가치는 이 비극적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상처를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기까지의 여정' 속에 있다.
"이해한다는 건 타인을 향해 성큼 다가서는 거예요. 용서의 첫걸음인 셈이죠."
주인공 앙투안의 말이다.
앙투안의 비극적인 삶을 제대로 이해하고 용서한 유일한 사람이, 바로 그가 총을 겨누었던 그의 딸 조세핀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파괴한 사람이 자신을 용서하는 과정을 담았기에 이 이야기는 어쩌면 '용서'에 초점을 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용서도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면,
용서함으로써 사랑보다 더 큰, 그 너머에 있는 인간의 행복과 기쁨을 나는 이 소설에서 보았다.
사랑받고자 했고, 사랑만이 구원이라고 생각했던 한 사람의 고통을 지켜보면서
정답은 사랑에 있는 것이 아니었음을 독자들은 알 수 있게 된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에서 행복이 실현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에게,
행복은 사랑의 충족에서 오는 것이 아님을 소리 없이 전달하고 있다.
그럼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고?
그 답을 찾는 것은 역시나 독자들의 몫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왠지 모르지만, '사랑'이라는 것에 큰 의문을 가져왔다.
그것이 인생의 전부도 아니고, 목적도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그보다 더 큰 무엇이 있을거라는 막연한 느낌.
그러나 내가 본 적도 없고 경험한 적도 없는 것이기에, 사랑 그 너머에 있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사랑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만큼은 알았기에 그 누구로부터 사랑을 갈구하지는 않았다.
사랑을 갈구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적어도 사랑으로 인한 외로움은 없게 된다.
원래 외로움을 잘 느끼지 않는 사람이라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앙투안의 외로움을 따라가려면 나도 어떻게든 내 인생의 외로움을 돌아보아야만 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알게 된 건, 사랑받길 원하지 않는 이에겐 사랑받는 일 또한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는 일은 내게 참 어색한 일이기도 했다.
좋아한다는 고백도, 감정도 이해되지 않기에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나를 좋아했던 사람들에겐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다.
그래서 이소라의 노래 중에 '사랑은 비극이어라. 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라는 가사가 있는 걸지도.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과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 사이에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
어느 쪽도 서로를 이해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앙투안과 그의 어머니, 아버지도 마찬가지이다.
앙투안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린 나이에 결혼했다.
시를 사랑했고, 화학을 전공하는 20살의 청년과 작가를 꿈꾸었던 17살의 소녀가 첫눈에 반해 결혼을 했다.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결혼을 했으니, 그 결혼생활이 원만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 자식들은 불행을 선택할 수 없다.
남녀가 만나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게 되는 순간부터, 그 아이의 운명에는 절대로 바뀔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하게 된다.
태어나서 내가 자라게 될 가정이 화목한지, 부모님은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지, 이 가정이 오래도록 존재할 것인지.
이런 것들은 온전히 아기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비극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만약 화목하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고, 가족이 깨어지지 않고 영원히 지속된다면
앙투안이 이렇게 마음 고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 보아도,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아도, 아무리 애원해보아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 같아.
이렇듯 앙투안의 기억 속의 가정의 모습은 화목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앙투안의 어머니는 프랑수아즈 사강의 책을 좋아하는 문학소녀였다.
작가가 되길 희망했으나 일찍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주부가 되었다.
그 현실을 인정하지 못해 이른 아침부터 맥주를 마시고, 멘톨 담배를 끊임없이 피웠다.
현실도피. 그녀는 아이와 아버지가 지켜보는 가족 내에서 끝없이 회피하는 사람이었다.
그녀에게 앙투안과 아버지는 짐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어머니의 '비겁함'이 드러난다.
어머니는 앙투안에게 아버지같은 사람이 되지 말 것을 얘기했다.
아버지의 '비겁함'을 문제삼으면서.
아버지의 비겁한 모습은 아버지 자신이 타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라면,
어머니의 비겁함은 주어진 현실보다 자신의 허황된 꿈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정말 작가가 되고 싶었다면, 그녀는 맥주 대신 펜을 집어들었어야 했다.
물론 육아를 하면서 집필까지 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작가가 되겠다는 '희망'만 있었지, 그것을 이루려는 노력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담배 연기 속에서 언젠가 눈 앞에 펼쳐질지도 모르는 허황된 삶을 꿈꾸셨어.
어머니는 행복을 누릴 수 없는 사람이었지.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셨거든.
앙투안의 말에서 어머니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드러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른다'는 것.
현실 도피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자기 자신을 제대로 마주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자신이 속한 가족을 보려하지 않았고, 결국 가정 내의 자신의 삶조차 내던지게 된다.
앙투안이 5살 때, 부모님은 쌍둥이 여자아이 둘을 또 낳게 된다.
'안'과 '안나'. 그리고 몇 년이 지나 '안'은 원인 모를 이유로 죽게 되고, 안의 죽음을 핑계 삼아 어머니는 집을 나간다.
처음에는 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집을 나간 것이라 추측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집을 나가 수많은 애인들을 만나고 술과 담배에 절어 살게 된다.
앙투안과 안나가 엄마를 보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도 답장하지 않는다.
더욱이 그녀가 작가가 되기 위해 글을 쓰는 행위는 전혀 찾아볼 수도 없었다.
그녀는 집을 나가서도 역시 현실 도피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녀 자신이 비겁한 사람이었던 것.
앙투안과 안나는 아버지에게 어머니를 되찾아 올 것을 바랬지만, 아버지는 어머니를 붙잡지 않았다.
앙투안의 가슴 속에 야수가 자리 잡게 된 배경에는 아버지의 침묵과 소극적인 행동들이 깔려있다.
아버지로서 행동해주길 바랬던 것들과 아버지가 결국 하지 않았던 것들이 맞물려
앙투안의 가슴 속에는 폭발적으로 표출될 수 밖에 없는 야수가 점점 자라게 된 것이었다.
앙투안은 아버지의 비겁함을 줄곧 비난했지만, 어머니 역시 비겁한 사람이었다.
이렇게 앙투안은 부모님이 그랬듯 '침묵과 숨김' 속에서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앙투안은 사랑을 갈구하기 이전에 누군가를 진정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앙투안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는 표현들이 있다.
아버지가 일하시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을 좋아했고,
실험할 때마다 풍겨오는 냄새, 실험이 잘 되지 않을 때 들리던 고함소리, 잘 될 때의 기쁜 외침도
앙투안은 너무나도 좋아했다.
아버지가 아침마다 신문을 펼치던 모습. 그때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건네는 시시콜콜한 몇 마디에 무심하게 핀잔주는 어머니의 모습도 앙투안에게는 예뻐보였다고.
어머니가 담뱃불을 붙일 때의 팔뚝의 움직임이 마치 루돌프 누레예프가 '소 드 샤 saut de chat'를 하듯 우아해 보였다고 한다.
누군가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건 어마어마한 애정이 있다는 것.
앙투안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그저 가정 내의 역할로서가 아니라, 그와 그녀로써 사랑했다는 것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비극이 탄생했다.
아이는 부모를 사랑하지만, 부모는 아이를 사랑하지 않을 때.
엄밀히 말하자면, 앙투안의 부모님은 앙투안을 사랑하지 않은 게 아니라,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줄 '용기'가 없는 비겁한 사람들에 가까웠다.
장장 30년 동안 아버지가 미소 짓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어. 특히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 동안은 단 한번도 웃질 않으셨지.
여기서 말하는 30년은 어머니가 가족을 버리고 집을 나가게 되고, 아버지께서 새로 맞이하신 새어머니와의 30년이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집을 나가고 나서도 붙잡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었다.
잠시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새로운 여자에게 반하게 되고 그녀를 새 부인으로 맞이한다.
앙투안과 안나는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새어머니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새어머니는 그들의 친어머니와는 전혀 달랐다.
'안'이 죽고 어머니가 집을 나가고 나서, 안나는 충격으로 실어증에 걸렸고, 앙투안은 벽을 내려쳤다.
새어머니는 아이들을 걱정해서 아버지로 하여금 정신과 상담을 받게 했다.
자신의 자식들도 아닌데 헌신적으로 챙기고, 30년간 가족을 하나로 묶어왔다.
그것이 그저 어머니라는 '역할'에 충실한 것이라고 평가하기에는 부족하다.
가족을 지탱하려는 노력은 앙투안의 친어머니에게는 없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 어느 가족에게든 반드시 '위기'가 찾아오게 된다.
그 위기 앞에서 가족 구성원들은 서로 다른 슬픔 속에 빠진다.
사랑이 저절로 가족 구성원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주지는 않는다.
이것이 사랑의 충족이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소설 속 인물들은 가족에게 찾아온 하나의 시련을 두고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극복하려 한다.
앙투안의 어머니는 집을 나갔고, 앙투안의 아내 나탈리는 새로운 남자에게로 가서 가정을 꾸렸다.
하나의 가족이 탄생하고 소멸하는 과정 속에서, 가족 구성원들의 마음 속에는 상처가 자리 잡게 된다.
안나는 비록 실어증에 걸렸지만, 자신의 반쪽짜리 언어를 채워줄 따뜻한 '토마'를 만나 상처를 치유하게 된다.
앙투안과 아내 나탈리는 한때 서로 열정적으로 사랑했지만, 나탈리는 바람을 피우고 결국 새 남자에게로 갔다.
앙투안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용기낸 행동으로 인해 회사에서 해고 당하고,
그의 아버지는 말기 암에 걸리고,
아내 나탈리는 바람을 피운 남자와 가정을 꾸리고,
자식들인 조세핀과 레옹도 아내의 새 남자를 영웅처럼 따르게 되자,
앙투안 속에 억누르고 있던 수많은 모욕과 마음의 상처들이 폭발하게 된 것이다.
루거 LCR 22 한자루.
조세핀과 레옹과의 인생 가장 행복한 하루를 보내고 침대에 재우고선,
그는 딸 조세핀을 향해 총을 발사했다.
나중에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서 앙투안은 의사에게 말한다.
그날 밤 날려버리고 싶었던 것은 '불행'이었다고.
자신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자신과 아이들이 죽는다면, 더 이상 고통받지 않을 것이라고.
그러나 총알은 빗겨나갔고, 조세핀의 턱이 날아가는 것에서 그쳤다.
조세핀은 턱뼈와 피부 이식 수술을 마치고 언어 치료를 받고 무사히 발음할 수 있을 때까지 거의 4년이 넘게 걸렸다.
마지막 제 3부 <행복만을 보았다>는 조세핀의 시점에서 쓰여졌다.
자신에게 총을 겨누었던 아버지에 대해 증오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조세핀은 정신과 치료를 병행하며 상처를 치유한다.
"고통이란 이물질 같은 것. 사람은 외피를 만들어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지만, 느끼지 못하면 치유될 수 없는 것."
정신과 치료는 조세핀에게 닥쳤던 비극을 그녀가 제대로 마주할 수 있도록 진행된다.
처음에 '아빠'라는 말을 할 수 없었던 그녀가 마지막에는 아빠라고 말하면서 아버지 앙투안과의 행복했던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린다.
지금의 모습 그대로 중요한 존재가 된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언젠가 나한테 있었던 일을 꼭 얘기하게 된다면 좋겠다.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왜냐하면 한때는 이 모든 두려움 이전에, 공포 너머에 사랑이 존재했을 테니까.
아버지를 원망하고 증오했던 조세핀이 치료를 거듭하면서 아버지를 이해해나가는 과정이 정말 압권이다.
상처를 치유하려면 결국 그 상처를 들여다봐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은 공포스러운 일.
시간이 흘러 조세핀이 친구를 사귀고, 사랑을 하게 되고, 그렇게 성장하면서
점점 더 아버지 앙투안의 내면에 다가가게 된다.
조세핀이 드디어 '날 위한 행복과 평화를 찾고 싶은 마음. 나의 가족과 나의 자리를 되찾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되었을 때,
상담 선생님은 '예전에 살아왔던 모습이 아니라 이제 지금 네 모습 그대로 존재하고 싶은 것'이라고 좋은 현상이라고 했다.
그동안 자신의 비극적 삶에 대해 품었던 연민, 고통, 환멸, 멸시에서 벗어나, 드디어 '행복'해지고 싶다고 말했을 때, 조세핀의 상처에서 새 살이 돋아났음을 알 수 있다.
조세핀이 아버지 앙투안이 멕시코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상담 선생님 앞에서 나이아가라 폭포처럼 눈물을 쏟는다.
아버지에 대한 모든 증오를 다 해소하게 된 순간이었다.
선생님은 여기서 아주 아름다운 한마디를 건넨다.
"원래 탄생의 순간에는 언제나 엄청난 양의 물과 눈물이 동반되는 거란다.
반갑다, 조세핀, 반가워."
아버지를 드디어 용서할 수 있게 된 조세핀은 그를 만나러 멕시코로 떠난다.
두렵지만 '기쁨'을 한가득 품고선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조세핀이 아버지 앙투안의 상처를 진심으로 이해하기까지의 여정은 얼마나 힘들었던가.
그녀가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에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기쁨 때문에 몸이 벌벌 떨린다고 했을 때,
나는 사랑보다 더 큰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사랑 그 너머에 있는 것을 드디어 보았다.
인내와 용서와 이해 끝에서야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기쁨'.
행복은 바로 그 '기쁨'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자신의 상처에서 두려움 너머의 사랑을 볼 수 있게 되고, 그 사랑 너머에 있는 '기쁨'을 진정 느끼게 되기까지.
앙투안과 조세핀은 자신들의 얼룩진 삶 속에서 행복만을 보기까지 많은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조세핀이 비행기에서 헤드셋을 끼고 음악을 듣는데 이 모든 상황을 알고 있다는 듯, 신비한 노래 가사가 흘러나온다.
이 가사를 읽으며 눈물이 쏟아졌다.
"그 사람 얘기 좀 들려줘요, 어떻게 지내죠? 이젠 행복해하나요?"
아버지와 딸이 각자의 상처를 치유하고, 행복을 찾고, 마침내 진정한 가족이 되기까지의 여정을 축복하면서...
->사랑 너머에 있는, 사랑보다 더 큰 '기쁨'을 잘 알고 있는 토마와 안나.
이 둘은 이 소설 속에서 유일하게 행복한 가정을 꾸리면서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실어증으로 인해 반쪽짜리 말만 하는 안나에게 나머지 반쪽의 언어를 채워주는 토마.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관계라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