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칼의 노래'를 읽으면서 나는 김훈이라는 작가에게 푹 빠져버렸다. 그동안 어떤 책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허무주의가 뚝뚝 묻어나는 너무나도 덤덤하다 못해 싸늘하기까지 한 문체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한껏 내뿜었다.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날뛰는 듯한 거칠고 산만한 문체를 주로 구사했던 내게 그것은 매우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고, 구태의연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던 조선과 일본 수군이 벌였던 잔혹한 사투와 그 참화를 새로운 시각과 느낌으로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 경험은 너무 낯설어서 그런지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서 맹렬한 거부 반응이 일어났지만, 그건 사람들이 흔히 가지고 있기 마련인 새로운 것에 저항하는 성향이었기에 마땅히 극복해야 했다. 그리고 그 거부 반응은 맑고 상쾌한 바람 같은 충격에 휩쓸려 얼마 지나지 않아 산산조각나 버렸다.

 

'칼의 노래'를 읽은 뒤 한 해가 지났다. 새 소설 '남한산성'이 출간되었다. 일단 김훈이 썼다는 사실만으로도 끓어오르는 흥분을 이기지 못했다. 이미 나는 그 덤덤하고 정갈한 문체가 주는 즐거움을 한껏 즐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일식'에서 진중한 의고체를 끝까지 지켜나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신예 작가치고 정말 대단하다는 평을 받은 히라노 게이치로와 마찬가지로, 감정을 너무나도 철저하게 초탈한 나머지 지루하다는 느낌과 비슷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분명히 다른 어떤 늘어지면서도 팽팽한 모순된 느낌에 읽는 이들을 물들게 하는 그런 문체를, 김훈도 '칼의 노래'에서나 '남한산성'에서나 흔들림 없이 이어나갔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에 나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그 너울거림이 전혀 없는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 희한한 문체로 이루어진 고요한 바다에서 헤엄치면서, '칼의 노래'를 읽을 때와는 분명히 다른 것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그것은 작가가 의도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작가는 허무주의로 표현하는 아름다움에만 외곬을 넘어서 광기에 가까울 정도로 집요하게 매달렸다. 소설을 시작하기 전에 사람들이 이 소설을 오로지 소설로만 읽고 이해해야 한다고 못을 단단히 박은 것에서, 그 강한 집착과 그것이 낳은 허무주의 미학을 읽는 이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작가를 보았다. 그는 소재로 삼은 역사 속 사건을 이 소설에 담아내면서 그것이 진실인가 거짓인가 하는 논쟁에 휘말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나는 그 바람을 쉽게 알아냈을 뿐만 아니라 '칼의 노래'를 읽으면서 그가 원하는 대로 소설을 읽으면 문체가 지닌 매력에 사로잡히는 즐거움을 양껏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터라, 평소와 같이 그런 의도를 단호히 거부하면서 작가가 쓴 글에 담긴 사실과 허구와 관념과 가치 판단을 나름대로 분석하면서 비판하는데 힘쓸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가 원하는 대로 문체 속에 몸을 맡겼고 부드럽고 적막한 흐름에 자유롭게 떠다녔다.

 

하지만 컴퓨터 회로처럼 원하는 작업만 한 치 오차도 없이 할 수 있는 단순한 정보 처리 회로보다 훨씬 뛰어난 뇌에 깔려 있는 복잡한 신경 회로는, 그 아름다움을 마음껏 느끼면서도 오토마톤 효과에 따라 뇌를 움직이는 주체인 나도 모르게 소설 속에 세세하게 나타나는 온갖 사건과 그 연결 고리를 따라가고 있었다. '칼의 노래'를 읽을 때와 분명히 다른 것을 느낀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허무한 아름다움은 한 결 같았지만, 소재로 삼은 사건이 띠는 성격이 극명하게 달랐던 것이다.

 

'칼의 노래'에서 안팎으로 닥쳐오는 고난을 묵묵히 극복해 내며 바람 앞 등불과도 같았던 조선을 임진왜란이라는 대사변에서 구한 이순신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남한산성'에서 본 것은 그런 강인함이 아닌 대책 없는 무능함이었다. 병자호란이라는 두 번째 대사변을 극복하고자 지며리 힘쓰기는커녕 지리멸렬한 무리들이 내놓는 한심한 논의와 대책만 끝없이 이어가다가, 결국 남한산성 안에서 자멸하는 '삼전도의 굴욕'보다 더욱 치욕스러운 항전(?) 과정을 지켜보았다. 앞에서 말한 다른 어떤 것은 사대주의에 물들어 국제 정세를 파악하는 능력은 쥐뿔만큼도 없는 왕실을 바라봐야 하는 절망과 분노였다. 그 속에서는 희망이 싹틀 수 없었다. 말 그대로 불모지였다.

 

임금은 백성들을 걱정하며 꿩백숙에 산나물무침과 무말랭이로 저녁 수라를 천천히 들었다. 굶주린 초병과 백성들은 말과 개를 푹푹 곤 국물에 조밥 한 덩어리씩 말아 먹으며 동상에 걸린 온몸을 녹이고 허기를 달랬다. 서날쇠는 똥국물을 담궈 땅에 묻었고, 용광로에 불을 지펴 병장기를 고치고, 나루를 거둬들였다. 초병들이 말뼈와 개다리를 뜯고 임금과 세자가 닭다리를 뜯자, 성 안은 개가 짖지 않고 닭이 울지 않아 고요해졌다. 임금은 된장을 풀어 끓인 냉이국에 밥을 말아 쌉쌀한 국물과 함께 알알이 밥을 삼키면서 출정과 항복 사이에서 고민했다. 들판에서 앞다투어 냉이를 캐는 민초들은 살아남아야겠다는 집념 하나만으로 움직였다. 김상헌은 나루가 가져온 동치미 국물을 마시며 서날쇠에게 너무나도 어려운 부탁을 했다. 그가 기꺼이 응하자 고맙다면서 성에서 나가면 임금에게 고하여 벼슬을 사하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겨우내 얼어죽고 맞아죽은 병신 같은 시체들이 썩으면서 악취를 풍기며 종말을 알렸다. 칸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포가 불을 뿜었고 성문이 열렸다. 칸은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인조 앞에서 오줌을 갈겼다. 문체가 불러일으키는 차분한 아름다움에 흠뻑 취해 있던 마음과 한심하기 짝이 없는 농성 풍경을 바라보며 흐트러지는 이성 사이에서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다 허물어진 음울한 성에서 군사들과 백성들이 각자 고향으로 살 길을 찾아 흩어졌다.

 

서날쇠는 남한산성에 어가가 들이닥치기 전에 미리 내보낸 아내와 아이들을 불러들였다. 두 아들과 애벌갈이를 하며 맑은 똥물을 져 날라 밭에 뿌렸다. 아내와 나루가 들밥을 날랐다. 작가는 끝까지 차분한 문체를 이어나갔다. 갈등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묵묵히 삶을 꾸려나갈 땅을 가꾸는 그들에게서 나는 한 줄기 희망을 찾았다. 그리고 그들과는 거리가 먼 가식과 허위로 가득 찬 내 삶을 돌이켜 보며 절망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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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치-22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6
조지프 헬러 지음, 안정효 옮김 / 민음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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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I was involved in catch-22 situation yesterday. It means that insanity of the military started to influence me."
 

아마 이 소설 'Catch-22'를 해병대에 오기 전에 읽었더라면, 2006년 2월 7일에 불편한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나는 이렇게 중얼거렸을 거요. 하긴 해병대 안에 도사리는 광기가 이토록 지독한지 그 때는 미처 몰랐기에, 아마 알고 있었더라도 그렇게 중얼거리지는 않았을 거요. 승파관(勝波館)으로 가는 길에서 차가운 공기를 가를 때부터 내가 그동안 간직하고 있었던 모든 영광스러운 이미지에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그건 새로운 세계에 발을 내딛을 때 자연스럽게 생기는 두려움이라고 여기고 마음을 가라앉혔소.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나에게 주어진 임무를 어떻게든지 해내면서, 모든 해병들이 그렇듯이 해병대에 관해 지니고 있던 그런 막연한 이미지가 와장창 박살났소. 대신 군대 안에 도사리고 있는 특수한 집단에서만 통하는 논리와 그에 따른 이치로 포장한 광기가 나를 사로잡기 시작했소. 매우 안타까운 것은 그게 훈련단에서나 실무 부대에서나 마찬가지였다는 거요. 임전무퇴의 기상? 필승의 신념? 명예? 충성? 그 모든 것은 군대 안에 있는 광기를 억누르는 방법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오. 나는 정훈공보처에서 요구하는 수준만큼 정훈 교육 자료를 완벽하게 익히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지만, 그래도 이 무시무시한 광기에서 자유롭지 못하오. 당신들도 마찬가지 아니었겠소?

 

정훈 교육 자료에서 강조하는 그 군인 정신을 완벽하게 몸에 익힌 이상에 가까운 참된 군인이 말 그대로 이상일 뿐이라는 걸 예비역들이 나에게 몇 번이고 강조했는데도, 나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허상에 빠져 있었소. 그러고 보니 예전에 내가 왕성하게 활동했던 글쓰기 동호회가 있었는데, 거기에서 나와 자주 논쟁을 벌였던 '대성이천수'라는 필명을 가진 학생이 떠오르는구려.

 

그는 보통 중학생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해박한 지식과 매끄러운 논리 전개로 많은 회원들을 감탄하게 했소. 하지만 한 가지 커다란 문제점이 있었으니, 군사 독재 정권이 강조한 전체주의에 물든 애국애족 정신에 너무 강하게 사로잡혀 있었다는 거요. 그는 국가를 위해서라면 전쟁터에서 자기 목숨쯤이야 얼마든지 바칠 수 있다고 하면서, 국민을 보호하고 계몽하는 강한 국가와 그를 떠받치는 군대를 찬양했소.

 

그 학생이 이제 몇 살인지 생각해 보니, 이제 대학생이 될 고등학교 3학년이오. 그러면 다음 해에 신체 검사를 받고 곧 군대에 가야 할 것이오. 과연 그가 실제로 군대에서 복무하면서 그 신념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지 나는 정말 궁금하다오. 물론 그 학생은 이미 전체주의에 물들어 있고 또래들과는 견줄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학식을 쌓았기에 요즘 신세대들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매우 높소. 그러니 그토록 찬양하던 군대에도 잘 적응해, 내가 한동안 꿈꿨지만 결국 저버린 이상에 가까운 군인이 될 수 있을 확률도 마찬가지로 높소.

 

그렇다고 해서 말료르카 전래동화에 나오는 오거스틴과 같이 될 가능성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소. 하지만 아무리 그 사람이 지닌 가치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그가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오. 오거스틴은 도둑이 되고 싶다는 명백히 사회에 해를 끼치는 소망을 품고 있었지만, 그 학생이 품은 애국애족 의식은 한편으로는 대한민국에 매우 바람직한 것이기 때문이오. 단지 그 안에 숨어있는 무시무시한 전체주의가 지배한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민중들이 매우 큰 고통을 겪어야 했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경계하는 눈초리를 잠시도 늦추지 않을 뿐이오. 그리고 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는 개인이 지닌 고유한 가치관과 신념을 강제로 깨뜨리지 않고 보장해 주는 것이 다원주의와 민주주의 사회만이 보여줄 수 있는 미덕이므로, 단지 그 학생이 지닌 그 관념에 군대만이 지닌 광기가 덧붙어 버리는 사태만큼은 제발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오.

 

이야기가 잠시 다른 곳으로 샌 것 같은데, 어쨌든 나는 당신들에게 묻고 싶소. 군대, 특히 해병대 안에 도사리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광기와 전투력 사이에 어떤 관계가 성립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있소? 그리고 자기가 바깥에서 기본권과 인권을 보장받는 사회에서 살다 왔다는 것을 인식하고, 군대 안에서 어쩔 수 없이 기본권과 인권을 침해해야 하는 경우 때문에 괴로워해 본 적이 있소? 그저 '해병대가 XX이지', '해병대가 XX하면 되나', 'XX가 XX하면 보기 좋겠느냐', 뭐 이 따위 수준 떨어지는 우격다짐만 내세운다면, 그런 고민과 괴로움 따위는 겪어보지도 않았다고 대놓고 선전하는 것이니 그만하는 게 좋겠소. 예전에 당신들도 그토록 꼴사납고 짜증나는 일을 진저리치게 겪었다면, 나중에 선임이 된 뒤에 후임들에게는 그런 고통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생각을 현실로 옮길 만한 동기가 충분히 생겼을 텐데, 일단 자기가 편해지고 나니까 그런 동기 따위는 아예 완전히 저버린 것이오?

 

이렇게 말하는 나를 보면서 당신들은 이렇게 욕할 거요. 당신들이 군대에 있을 때 모여서 후임들을 비난할 때마다 그랬을 거요. 원래 사람이 자기가 잘못한 것은 잘 모르고 남이 잘못한 것만 잘 보는데, 내가 바로 딱 그런 사람이라고 말이오. 나는 선임들에게 미움을 사는 후임들 가운데 말이 많고 잘못을 인정하지 않기로 당신들 사이에서 유명했으니, 정말 개념 없고 인간 같잖은 후임이라고 꼴도 보기 싫다고 말이오.

 

물론 그런 면도 있고 당신들에게 잘못한 것도 많다고 인정하오. 내가 생각하기에도 정말 잘못한 것은 분명히 마음 한 구석에 담아놓고 다른 이들에게는 절대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항상 다짐하고, 실제로 그러기가 쉽지 않아서 항상 자책하고 있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들이 내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런 질문을 던질 자격이 없다고 비난할 수는 없소. 내가 말하는 것은 잘못했다는 말이 정당한지 따져보면 실제로는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부조리이기 때문이오. 이성이고 논리고 뭐고 통하지 않는 그 우스꽝스럽고 짜증나는 그 어떤 것 말이오.

 

나는 되도록 당신들을 좋게 보려고 했소. 그리고 해병대다운 군기를 유지하려면 어쩔 수 없다는 그런 뭔가 이상한 논리도 어떻게든지 이해하려고 했소. 하지만 아무리 고민하고 수많은 간부들과 후임들과 진지하게 토론해 봐도 그럴 수 없었소. 후임들과도 나름대로 합의를 보기는 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소. 계속 논쟁을 벌여봐야 좋은 소리를 못 들을 게 빤할 뿐만 아니라, 논쟁을 벌이면서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한계에 부닥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오. 당신들도 그런 한계에 지쳐서 한 때 했던 생각을 저버렸을 뿐이라고 나름대로 항변할 수도 있을 거요. 그리고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 이치에 맞고 그럴듯해 보이지만 뜯어보면 이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닌데도 군대라서 어쩔 수 없다면서 버젓이 벌어지는 그런 일 때문에 당신들도 정말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짜증이 시도 때도 없이 치밀었을 것이오. 병들을 괴롭히는 온갖 악습 또한 논리가 통하지 않는 그런 몹쓸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거요.

 

군대에서 '공부 9단 오기 10단'이라는 책을 읽다가 우연히 알아낸 이 책 'Catch-22'를 보면서 나는 가려운 부분을 살살 긁어주는 그런 짜릿한 느낌을 정말 오랫동안 맛봤다오. 당신들이나 나나 항상 시달려야 했던 군대에서 벌어지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정말 어처구니없는 온갖 일을 그토록 재미있고 자세하게 풍자한 조셉 헬러라는 작가에게 경외심을 품을 정도로 그 느낌은 강렬했소. 조셉 헬러는 피아노사 섬이 너무 작아서 이 소설에 묘사된 모든 사건이 일어날 만한 곳이 아닌 것이 분명하며, 지리 배경과 마찬가지로 주인공들 역시 상상했을 뿐이라고 하지만, 그가 폭격기를 타고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던 경력이 있는 만큼 군대에서 온갖 이상한 일을 다 겪었기에 이런 상상을 해낼 수 있었을 것임이 분명하오. 전쟁에 관한 아무 경험도 없이 상상만으로 이 정도 풍자 소설을 써냈다면 조셉 헬러는 정말 엄청난 천재라고 봐야 할 거요.

 

굳이 여러 가지 예를 들 필요도 없이 '공부 9단 오기 10단'을 쓴 박원희가 주목한 단 한 가지 묘한 논리만 살펴봐도 이 소설 전반에 넘쳐흐르는 광기가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알 수 있을 거요. 이 소설에서는 모든 것이 밑도 끝도 없이 그저 혼란스럽고 짜증나고 어처구니없는데, 그런 효과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자 문장도 정신이 하나도 없고 앞뒤도 잘 맞지 않으며 누가 진짜 주인공인지도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들게 해 놨소. 실제로 이 소설을 우리말로 옮긴 안정효도 머리말에서 '수많은 주인공들'이라는 표현을 썼소. 그 가운데 그나마 가장 핵심 같아 보이는 사람이 요사리안 공군 대위인데, 이 군인이 'Catch-22'(여기에서 'Catch'는 조항(대개 article, stipulation, caluse 따위를 쓰는데, 법이나 규칙에 있는 조항이라는 뜻도 있다고 하오)과 함정(trick, trap 따위로 바꿔 쓸 수 있소)이라는 두 가지 뜻을 품고 있으니, 아주 적절한 표현이오)가 파 놓은 교묘한 함정에 어떻게 빠졌는지 보시오.

 

요사리안은 정해진 출격횟수를 다 채우지만 진급에 눈이 먼 윗대가리들이 실적을 쌓고자 자기 마음대로 출격횟수를 자꾸만 늘려서 전쟁터에서 빠져나갈 수 없게 되고 목숨에 심각한 위협을 느끼오. 그래서 기껏 생각해낸다는 논리가 자기는 정신이상이라서 출격을 할 수 없다는 거요. 더욱 기가 막힌 것은 'Catch-22'에 따르면 자기가 정신이상이라는 것을 아는 건 정신이 온전하다는 걸 증명한다는 것이라고 못박아버리니 할 말이 없다는 거요. 결국 요사리안은 전쟁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절대 제정신이 아닌 온갖 사람들과 해괴한 짓이란 해괴한 짓은 모두 일삼고 다니오.

 

내가 보기에 이는 전쟁 속에서 사람이 겪는 충격과 공포 때문에 생기는 광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소. 당신들이나 나나 마찬가지로 군대 안에서 느꼈던 이상하기 짝이 없는 광기와 딱 들어맞는 것이오. 아무리 군대에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하더라도 군대에 장기 복무하겠느냐는 제의를 받으면 대부분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까닭이 거기에 있소. 그건 정훈 교육 같이 세밀하게 잘 짜인 논리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오. 조국, 민족, 전우 같은 거창한 명목은 상명하복과 엄격한 위계질서를 덕목으로 여기는 숨 막히는 조직 속에서 피어오르는 광기를 승화하고자 만들어낸 신화일 뿐, 그런 모호한 개념 자체가 군대를 휘어잡은 광기를 걷어낼 수는 없소. 그 광기가 이 소설에서처럼 사람들을 제대로 미치게 만들지나 않으면 천만다행이오.

 

 

……군법회의에 회부된 사람은 어째서 자기가 그런 처벌을 받는지도 알 길이 없고, 폭격을 해야 할 폭격수는 목표물이 아니라 지상에서 날아오는 포탄만 관측하느라고 바쁘다. 질서는 없고 혼돈뿐이며, 희망과 꿈은 없고 악몽뿐이다. 인디언 화이트 하프오트 추장이 가는 곳에는 항상 석유가 나와서, 결국 석유 회사들에게 쫓겨만 다니다가 피아노사에 와서야 평화를 찾는다. 낙태 수술로 큰 돈을 벌려다가 징집되어 좌절당한 다네카 군의관은 살았으며 죽어서 죽어버린 자기의 생존 증명을 하려고 발버둥친다. 출격만 나가면 추락을 당하던 기계 미치광이 오르는 결국 일부러 추락 연습을 하다가 탈영했음이 나중에야 밝혀진다. 전 세계를 주름잡는 신디케이트를 운영하는 마일로는 7센트에 사온 달걀을 5센트에 팔아서 모든 목적을 달성하고, 독일군과 계약을 맺어 자기 부대를 폭격한다. 시계처럼 정확한 시간에 밤마다 악몽을 꾸는 헝그리 조는 누드 사진을 촬영하려고 미친 듯 쫓아다니지만 언제나 실패한다. 취사장의 스나크 상등병은 인간의 무지를 혐오해서 고구마에 비누를 짓이겨 넣어 모든 사람이 식중독을 일으키게 한다. 중대장이 못 되어서 질투가 난 블랙 대위는 충성의 맹세를 시키느라고 작전에도 차질을 가져온다. 캐트카트 대령은 하느님이 사병과 장교의 얘기에 똑같이 귀를 기울인다는 사실이 못마땅해서 기도회를 취소한다. 알피는 하녀를 강간하고 나서 창밖으로 던져 죽인 다음에, 수많은 사람이 전쟁에서 죽어 가는데 그까짓 하녀 하나쯤 무슨 관계가 있냐고 조금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창녀를 미칠 듯이 사랑하는 네이틀리와 세상의 모든 외로움을 혼자 누리는 메이저 메이저, 열병식에 환장한 셰이스코프, 요사리안을 죽이려고 끈질기게 추적하는 창녀……

 

무엇이나 다 둘로 보이다가 죽은 사람인 주세페의 대역을 하느라고 죽는 시늉을 해야 하는 요사리안, 병원 안에서의 말끔한 죽음과 바깥의 처참한 죽음, 하얀 군인의 존재에 대한 토론, 클레빈저를 처벌하려는 징계 위원회에서 벌어지는 짜증스럽고 어처구니없는 대화, 미국과 이탈리아의 승리와 패배, 그리고 미국과 개구리를 비교하는 네이틀리와 노인의 역설적인 모순이 담긴 언쟁, 서로 죽이는 것은 자신을 죽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임을 상징하는 듯한 마일로의 폭격과 기총소사, 맥워트의 비행기 프로펠러에 상반신이 잘려 다리만 남고 죽어버리는 키드 샘슨, 군목을 체포해서 지하실에서 버리는 심문, 폭격보다는 회피 동작에 더 열중하는 요사리안……

 

 

이건 옮긴이가 쓴 머리말 일부를 옮긴 건데, 내가 머리를 굴려 쓰는 것도 아니고 타자를 치는 것뿐이오. 그런데 그것만으로도 짜증이 저절로 나는구려. 흥미롭게도 이 글을 정신없이 쓰려니 갑자기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안 그래도 낮은 일하는 효율도 더 낮아졌소. 그동안 군대에서 쌓인 스트레스가 한꺼번에 몰려온 것처럼 아프오. 두통약을 먹어도 해결할 수 없는 두통처럼, 사람을 사람답게 한다는 이성을 아무리 들이대도 절대 해결할 수 없는 모순으로 똘똘 뭉친 이 광기는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 같소. 그 때문에 당신들이나 나나 매우 많은 피해를 입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오.

 

이 소설 속에서 군대에 도사리는 광기에서 스스로 구원받는 두 사람이 쓴 방법은 탈영이라는 위법 행위요. 하지만 일단 군대에서 벗어나면 그 안에 도사리는 모든 광기와 부조리에서는 확실히 구원받을 수 있소. 게다가 다행히 전역이라는 법에 어긋나지 않는 구원법이 모든 군인들에게 공평하게 적용되오. 그렇기에 당신들도 어떻게든지 참았고 결국은 전역함으로써 구원받았잖소? 이 안에서 너무나도 증오했던 당신들이 민간인으로서 전화를 했을 때 받았더니, 이 안에 있을 때와는 반대로 사람이 매우 달라진 듯해서 뜻밖으로 은근히 반갑더구려. 역시 온갖 논쟁을 벌일 필요가 없이 서로에게 좋게 빨리 모두 군대에서 벗어나 사회로 돌아가는 것이 모든 악연에서 벗어나는 단 한 가지뿐인 방법이었소.

 

그 방법대로 당신들은 이곳을 떠났고 곧 있으면 나도 이곳에서 벗어날 거요. 아무리 많은 것을 얻었다고 한들 당신들과 마찬가지로 다시 군대로 돌아가는 일은 절대 없을 거요. 또 무슨 악연을 만나고 스트레스를 받고 화를 낼 지 알 수 없기 때문이오. 부질없는 말싸움은 그만두고 군대에서 있었던 모든 일은 다 잊어버리는 게 좋겠소. 설사 끄집어내야 할 필요가 있다 하더라도 혹시나 당신들을 만났을 때 그 앞에서는 절대 들춰내지 않겠소. 서로 괜히 열 받을 필요는 하나도 없으니 말이오. 후임들에게도 지금까지 꾸준히 내 뜻을 전달하기는 했지만, 결국 그냥 꾹 참다가 전역하는 수밖에 없다는 힘없는 결론을 내린 뒤에는 웬만하면 입을 다물고 있었소. 그러다가 이 소설을 읽은 뒤에 결국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은 거요.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이 소설은 전쟁이 단순히 우스꽝스럽고 부질없는 짓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전쟁을 일으키는 근본 원인을 낳는 사회도 풍자하고 비꼬고 있소. 근면한 메이저 메이저의 아버지가 일을 하지 않아서 돈을 버는 어이없는 작태와, 화이트 하프오트 추장이 가는 곳에는 무조건 석유가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추장을 쫓아다니다가 나중에는 추장이 털썩 주저앉으려는 시늉만 해도 추장을 쫓아내고 그 자리를 파헤치는 석유 회사 소속 시추공자 따위가 있소.

 

굳이 여러 가지 예를 들 필요도 없이 '공부 9단 오기 10단'을 쓴 박원희가 주목한 단 한 가지 묘한 논리만 살펴봐도 이 소설 전반에 넘쳐흐르는 광기가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알 수 있을 거요. 이 소설에서는 모든 것이 밑도 끝도 없이 그저 혼란스럽고 짜증나고 어처구니없는데, 그런 효과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자 문장도 정신이 하나도 없고 앞뒤도 잘 맞지 않으며 누가 진짜 주인공인지도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들게 해 놨소. 실제로 이 소설을 우리말로 옮긴 안정효도 머리말에서 '수많은 주인공들'이라는 표현을 썼소. 그 가운데 그나마 가장 핵심 같아 보이는 사람이 요사리안 공군 대위인데, 이 군인이 'Catch-22'(여기에서 'Catch'는 조항(대개 article, stipulation, caluse 따위를 쓰는데, 법이나 규칙에 있는 조항이라는 뜻도 있다고 하오)과 함정(trick, trap 따위로 바꿔 쓸 수 있소)이라는 두 가지 뜻을 품고 있으니, 아주 적절한 표현이오)가 파 놓은 교묘한 함정에 어떻게 빠졌는지 보시오.

 

요사리안은 정해진 출격횟수를 다 채우지만 진급에 눈이 먼 윗대가리들이 실적을 쌓고자 자기 마음대로 출격횟수를 자꾸만 늘려서 전쟁터에서 빠젼갈 수 없게 되고 목숨에 심각한 위협을 느끼오. 그래서 기껏 생각해낸다는 논리가 자기는 정신이상이라서 출격을 할 수 없다는 거요. 더욱 기가 막힌 것은 'Catch-22'에 따르면 자기가 정신이상이라는 것을 아는 건 정신이 온전하다는 걸 증명한다는 것이라고 못박아버리니 할 말이 없다는 거요. 결국 요사리안은 전쟁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절대 제정신이 아닌 온갖 사람들과 해괴한 짓이란 해괴한 짓은 모두 일삼고 다니오.

 

내가 보기에 이는 전쟁 속에서 사람이 겪는 충격과 공포 때문에 생기는 광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소. 당신들이나 나나 마찬가지로 군대 안에서 느꼈던 이상하기 짝이 없는 광기와 딱 들어맞는 것이오. 아무리 군대에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하더라도 군대에 장기 복무하겠느냐는 제의를 받으면 대부분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까닭이 거기에 있소. 그건 정훈 교육 같이 세밀하게 잘 짜인 논리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오. 조국, 민족, 전우 같은 거창한 명목은 상명하복과 엄격한 위계질서를 덕목으로 여기는 숨 막히는 조직 속에서 피어오르는 광기를 승화하고자 만들어낸 신화일 뿐, 그런 모호한 개념 자체가 군대를 휘어잡은 광기를 걷어낼 수는 없소. 그 광기가 이 소설에서처럼 사람들을 제대로 미치게 만들지나 않으면 천만다행이오.

 

 

……군법회의에 회부된 사람은 어째서 자기가 그런 처벌을 받는지도 알 길이 없고, 폭격을 해야 할 폭격수는 목표물이 아니라 지상에서 날아오는 포탄만 관측하느라고 바쁘다. 질서는 없고 혼돈뿐이며, 희망과 꿈은 없고 악몽뿐이다. 인디언 화이트 하프오트 추장이 가는 곳에는 항상 석유가 나와서, 결국 석유 회사들에게 쫓겨만 다니다가 피아노사에 와서야 평화를 찾는다. 낙태 수술로 큰 돈을 벌려다가 징집되어 좌절당한 다네카 군의관은 살았으며 죽어서 죽어버린 자기의 생존 증명을 하려고 발버둥친다. 출격만 나가면 추락을 당하던 기계 미치광이 오르는 결국 일부러 추락 연습을 하다가 탈영했음이 나중에야 밝혀진다. 전 세계를 주름잡는 신디케이트를 운영하는 마일로는 7센트에 사온 달걀을 5센트에 팔아서 모든 목적을 달성하고, 독일군과 계약을 맺어 자기 부대를 폭격한다. 시계처럼 정확한 시간에 밤마다 악몽을 꾸는 헝그리 조는 누드 사진을 촬영하려고 미친 듯 쫓아다니지만 언제나 실패한다. 취사장의 스나크 상등병은 인간의 무지를 혐오해서 고구마에 비누를 짓이겨 넣어 모든 사람이 식중독을 일으키게 한다. 중대장이 못 되어서 질투가 난 블랙 대위는 충성의 맹세를 시키느라고 작전에도 차질을 가져온다. 캐트카트 대령은 하느님이 사병과 장교의 얘기에 똑같이 귀를 기울인다는 사실이 못마땅해서 기도회를 취소한다. 알피는 하녀를 강간하고 나서 창밖으로 던져 죽인 다음에, 수많은 사람이 전쟁에서 죽어 가는데 그까짓 하녀 하나쯤 무슨 관계가 있냐고 조금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창녀를 미칠 듯이 사랑하는 네이틀리와 세상의 모든 외로움을 혼자 누리는 메이저 메이저, 열병식에 환장한 셰이스코프, 요사리안을 죽이려고 끈질기게 추적하는 창녀……

 

무엇이나 다 둘로 보이다가 죽은 사람인 주세페의 대역을 하느라고 죽는 시늉을 해야 하는 요사리안, 병원 안에서의 말끔한 죽음과 바깥의 처참한 죽음, 하얀 군인의 존재에 대한 토론, 클레빈저를 처벌하려는 징계 위원회에서 벌어지는 짜증스럽고 어처구니없는 대화, 미국과 이탈리아의 승리와 패배, 그리고 미국과 개구리를 비교하는 네이틀리와 노인의 역설적인 모순이 담긴 언쟁, 서로 죽이는 것은 자신을 죽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임을 상징하는 듯한 마일로의 폭격과 기총소사, 맥워트의 비행기 프로펠러에 상반신이 잘려 다리만 남고 죽어버리는 키드 샘슨, 군목을 체포해서 지하실에서 버리는 심문, 폭격보다는 회피 동작에 더 열중하는 요사리안……

 

 

이건 옮긴이가 쓴 머리말 일부를 옮긴 건데, 내가 머리를 굴려 쓰는 것도 아니고 타자를 치는 것뿐이오. 그런데 그것만으로도 짜증이 저절로 나는구려. 흥미롭게도 이 글을 정신없이 쓰려니 갑자기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안 그래도 낮은 일하는 효율도 더 낮아졌소. 그동안 군대에서 쌓인 스트레스가 한꺼번에 몰려온 것처럼 아프오. 두통약을 먹어도 해결할 수 없는 두통처럼, 사람을 사람답게 한다는 이성을 아무리 들이대도 절대 해결할 수 없는 모순으로 똘똘 뭉친 이 광기는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 같소. 그 때문에 당신들이나 나나 매우 많은 피해를 입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오.

 

이 소설 속에서 군대에 도사리는 광기에서 스스로 구원받는 두 사람이 쓴 방법은 탈영이라는 위법 행위요. 하지만 일단 군대에서 벗어나면 그 안에 도사리는 모든 광기와 부조리에서는 확실히 구원받을 수 있소. 게다가 다행히 전역이라는 법에 어긋나지 않는 구원법이 모든 군인들에게 공평하게 적용되오. 그렇기에 당신들도 어떻게든지 참았고 결국은 전역함으로써 구원받았잖소? 이 안에서 너무나도 증오했던 당신들이 민간인으로서 전화를 했을 때 받았더니, 이 안에 있을 때와는 반대로 사람이 매우 달라진 듯해서 뜻밖으로 은근히 반갑더구려. 역시 온갖 논쟁을 벌일 필요가 없이 서로에게 좋게 빨리 모두 군대에서 벗어나 사회로 돌아가는 것이 모든 악연에서 벗어나는 단 한 가지뿐인 방법이었소.

 

그 방법대로 당신들은 이곳을 떠났고 곧 있으면 나도 이곳에서 벗어날 거요. 아무리 많은 것을 얻었다고 한들 당신들과 마찬가지로 다시 군대로 돌아가는 일은 절대 없을 거요. 또 무슨 악연을 만나고 스트레스를 받고 화를 낼 지 알 수 없기 때문이오. 부질없는 말싸움은 그만두고 군대에서 있었던 모든 일은 다 잊어버리는 게 좋겠소. 설사 끄집어내야 할 필요가 있다 하더라도 혹시나 당신들을 만났을 때 그 앞에서는 절대 들춰내지 않겠소. 서로 괜히 열 받을 필요는 하나도 없으니 말이오. 후임들에게도 지금까지 꾸준히 내 뜻을 전달하기는 했지만, 결국 그냥 꾹 참다가 전역하는 수밖에 없다는 힘없는 결론을 내린 뒤에는 웬만하면 입을 다물고 있었소. 그러다가 이 소설을 읽은 뒤에 결국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은 거요.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이 소설은 전쟁이 단순히 우스꽝스럽고 부질없는 짓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전쟁을 일으키는 근본 원인을 낳는 사회도 풍자하고 비꼬고 있소. 근면한 메이저 메이저의 아버지가 일을 하지 않아서 돈을 버는 어이없는 작태와, 화이트 하프오트 추장이 가는 곳에는 무조건 석유가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추장을 쫓아다니다가 나중에는 추장이 털썩 주저앉으려는 시늉만 해도 추장을 쫓아내고 그 자리를 파헤치는 석유 회사 소속 시추공자 따위가 있소.

 

2006년 2월 6일부터 나를 구속하기 시작한 'Catch-22'는 2008년 2월 3일에 효력을 저절로 잃어버릴 거요. 하지만 군대보다 훨씬 더 크고 복잡한 사회에 나가면 군대보다도 더한 'Catch-22'가 기다리고 있을 확률이 얼마든지 있으니, 군대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절대 마음을 놓지는 않겠소. 앞에서도 말했듯이 광기에서 휩싸인 사회가 태생이 광기를 타고날 수밖에 없는 군대를 더욱 이상하게 만들고, 그 속에서 내 뒤를 이을 젊은 군인들이 미쳐 나갈 테니 말이오. 심지어 군대에 와서야 평화를 찾는 하프오트 추장 같은 사람도 나올 수 있는데, 그런 비극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하오. 군대가 변하려면 사회가 먼저 변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으니, 사회에서 어찌 내가 사회 참여 운동을 소홀히 할 수 있겠소?

 

이 글은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풀어놓은 것일 뿐이라오. 아마 군 복무 기간을 결산할 때 군대와 사회와 이 소설에 관한 가장 정확한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거요. 그 결론을 내리는 그 날까지 당신들 모두 잘 지내기를 바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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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의 아이들 - 양장본
가브리엘 루아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3월
평점 :
절판


교육열만큼은 이 세상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대한민국 부모님답게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내가 5살일 때 유치원도 아닌 유아원에 나를 입학시키셨다. 석유 냄새 풀풀 나는 주유소 뒤 언덕에 자리잡은 유아원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봐도 나는 그 유아원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찌나 선생님 말을 안 들었는지 도저히 안 되겠다고 선생님과 부모님 사이에 이루어진 합의에 따라 여섯 달도 못 채우고 그만뒀더란다.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유아원에 관한 기억이라고 하면 쪼글쪼글한 건포도가 여러 개 박힌 달콤한 황갈색 머핀, 유아원 2층으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 수업을 한답시고 선생님이 앞에 계셔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무 탁자 밑으로 기어들어가 몸을 바짝 붙였던 바닥에 깔린 부드러운 양탄자, 이 세 가지이다.

 

어쨌든 그 세 가지가 나에게 남아 있다면, 그 유아원 선생님에게는 나에 관한 매우 곤란한 기억이 매우 남아 나를 분명히 특이한 아이로 인식하기에는 충분했을 것이다. 그런 현상은 유아원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처럼 어머니와 함께 노래에 맞춰 신나게 율동을 하지 못하고 삐져 있다가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어떤 여자 아이가 글씨 좀 더 크게 써 달라고 부탁한 걸 가지고 칠판에 글씨 쓰는데 귀찮게 한다고 화를 내는 바람에 대판 싸워버리고, 독후감 숙제를 해 오랬더니 나름대로 삽화를 덧붙여서 아예 신국판 이야기를 만들고, 수학경시대회에서 성적은 시원찮으면서도 다른 아이들이 아무도 못 푼 문제를 나 혼자 풀었다는 까닭으로 온갖 근거 없는 소문에 휘말리고, 다른 아이들이 스타크래프트에 정신없이 빠졌을 때 오락은 안 하고 혼자서 공상 소설 쓰는데 집중하고……이런 식으로 늘어놓자면 밑도 끝도 없다.

 

유치원에서든 초등학교에서든 중학교에서든 어디에서든 나는 어딘가 모르게 남들과 다른 생각과 행동으로 어떻게든지 독특한 놈으로 알려졌던 것 같다. 그건 어릴 때부터 신앙심이 워낙 뛰어나서 축일에는 어머니 젖도 먹지 않았다는 니콜라이 성인과 같은 그런 경건하고 정제된 독특함이 아니었다. 일그러진 유치함이 미약하게 뿜어내는, 하지만 미숙한 정신을 조금씩 무너뜨릴 수 있는 그런 광기였다. 대부분 사람들이 지니고 있기 마련인 유년기에 서리는 자기만의 독특하고 끔찍한 어둠과 본질은 같지만 농도가 훨씬 짙다고 보면 적절할 것 같다.

 

나는 그런 짙은 독특함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마음에 들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너무나도 끔찍했다. 유치한 정신으로도 그것이 끔찍하다는 걸 알아차린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었지만, 알아차리기만 했을 뿐 거기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었다. 유치한 행동은 계속 이어지면서 순수하고 아름다웠다고 기억하고 싶은 내 어린 시절에 숱한 얼룩을 남겼고, 그 때문에 어린 시절로 다시는 되돌아가고 싶지 않고 떠올리고 싶지도 않다. '과거는 곧 후회다'라는 자조 섞인 말에 얼마나 깊이 공감했는지 모른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약 대부분 아이들이 다니는 보통 학교에 들어가지 않고 집에서 가정교육을 받거나 대안 교육을 받는 식으로, 좋든 싫든 낯선 아이들과 어른들과 함께 지내야 하는 의무에서 자유로웠다면 과연 내 삶이 어떻게 바뀌었을까? 소설가 박완서는 유년기를 물들인 어둠과 학교에 처음 갔을 때 느끼는 그 낯선 공포와 두려움과 떨림과 설렘 따위 온갖 감정은 다시는 생각하기 싫으면서도 한편으로 인생을 밝혀 긍정할 수밖에 없는 '빛이 남긴 기록'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무릎과 이마를 탁 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생활기록부에 적혔던 활발하다는 평가와는 다르게 수줍음을 매우 많이 타는 성격이었던 내가 안락한 집에서 벗어나 거칠다면 너무나도 거친 학교에 갔을 때 느꼈던 그 까닭 모를 흥분과 두려움을 너무나도 정확하게 지적했기 때문이다. 또래 남자아이들과 서로 싸우고 공을 차고 티격태격했고 여자아이들 앞에서는 어쩔 줄을 몰랐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막무가내로 좋아했던 광기와 순수함이 뒤섞인 알 수 없는 모순교호집합같은 그 모호함 말이다.

 

그 모호함은 나에게 끔찍한 기억을 수도 없이 남겼지만, 그래도 나는 학교에 적응한 뒤에도 그것을 버릴 수 없었다. 집과는 전혀 다른 그 거칠고 순수하고 유치한 또 다른 세상에서 나는 아이들과 어울리고 선생님에게 가르침을 받으면서 무럭무럭 자랐고, 한 사회에서 아무 이상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어엿한 인격체가 되는 길을 밟았다. 낯선 것에서 불안과 혼란을 느끼다가 그 속에 숨어 있는 질서를 깨달았고, 싸우고 화해하며 말뿐만이 아닌 마음으로 통하는 방법을 익혔고, 아무 까닭 없이 좋아하면서 손을 잡으며 신비로운 사랑에 남몰래 눈을 떴다. 지금은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는 분명한 실체인 시간에 투영된 온갖 일그러진 기억을 되새기며 심하게 비틀어져 전혀 진실 같지 않아 보이는 진실을 애써 찾아내 한 땀 한 땀 한 가닥 실에 꿰어 맞추고 있다.

 

그러면서 나는 가끔씩 나도 모르게 이 책 '내 생애의 아이들'에 나오는 아이들과 같은 그토록 돌아가기 싫어하던 짙은 독특함이 밴 시절로 되돌아갔다. 작가 평론에 나오는 설명을 그대로 옮기자면, 플랑드르 억양을 버리지 못한 로제 베르헤겐, 소용돌이처럼 이탈리아말로 어린 애정을 쏟아놓으며 '마늘과 라비올리와 감초 냄새'를 물씬 풍기는 빈센토, '약간 흐릿하고 쓸쓸한 상아색을 띠는 여린 빛으로 절어 있는' 오래된 아일랜드산 손수건을 뒤늦은 선물로 들고 온 클레르, 폴란드계 유태인 출신인 프티-루이, 이름부터 다른 나라 사람 같은 니콜라이, '모국어'로 노래 부르는 우크라이나 출신인 닐, '자기가 지닌 힘을 넘어서는 어떤 힘, 옛날에는 신비스러우며 무한하며 집단에서 드러내던 것이었던 어떤 열정'으로 글씨를 쓰는 어린 드미트리오프, 프랑스 오베르뉴 출신인 아이들, 프랑스에서 가져온 리넨 시트를 꺼내어 선생님의 침상을 마련하는 앙드레, 인디언 혼혈인 메데릭……

 

그러면서 주인공 가브리엘 루아와 같은 젊은 여선생님을 아이로서 새롭게 만났다. 빈센토처럼 그녀를 막무가내로 끌어안고 키스를 퍼붓고, 메데릭처럼 그녀에게서 사랑을 얻지 못해 안달하다가 그녀를 떠나보내며 들꽃으로 만든 꽃다발을 안겼고, 앙드레처럼 집에 찾아온 그녀에게 말없이 집안 살림을 꾸려나가는 어린아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강인한 힘과 향긋한 커피를 끓이고 빵을 굽는 섬세한 정을 한꺼번에 보여주었다. 내가 살아온 현실과는 전혀 다를지언정 나는 현실 같은 환상 속에서 그 아이들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나 또한 그들과 같은 아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어느 정도'라는 말을 붙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지금 내가 다시는 생각하기도 싫은 유치함을 보였던 어린 시절을 통과한 청년이자,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희망에 부풀어 있는 예비교사로서, 이 책에 나오는 여러 아이들이 보여준 그 다양한 느낌을 마땅히 그대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미 그런 유치함과 순수함은 나에게서 거의 사라졌고 세상살이와 먹물에 찌들면서 나는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아무리 나도 모르게 무의식 속에 깊이 잠겨도 풋내기 교사들과 티 없는 아이들이 공유하는 순수를 듬뿍 담아낸 이 대서사시를 온전히 그대로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다. 이 책이 담고 있는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들이는 공은 앞으로 내 삶에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아이들을 아무 가식 없이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이제 나에게는 가브리엘 루아가 품은 불안과 떨림을 이해할 새로운 기회가 찾아오고 있다. 임용고시에 당당히 합격해 처음으로 교단에 서고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기 시작하면서, 이 책을 완벽하지는 않지만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다가오는 2008년 새해는 그 가슴 벅찬 순간을 맞이할 준비를 시작할 때이다. 그 시작을 빛내는 것은 내 몫이다. 알았으면 움직여야 할 의무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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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사 헤리엇의 마음이 따뜻해지는 개 이야기
제임스 헤리엇 지음, 김석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3년 6월
평점 :
품절


2007년 12월 7일에 있었던 일이다. 당직분대장과 근무를 교대한 뒤 당직병 근무를 서면서 무엇을 할 지 업무 목록에서 고르고 있었다. 그런데 내 왼쪽 옆으로 갑자기 시커먼 뭔가가 빠르게 휙 지나갔다. 요즘 'Supernatural'에 푹 빠져 있던 터라 나는 'Supernatural - Season 1'에 나오는 윈딩고인줄 알고 기절초풍했다. 하마터면 으악 소리를 지를 뻔 했지만, 목구멍까지 밀려나온 비명을 꾹 눌러 참았다. "으악"이 뱃속으로 다 내려가자마자 임길순 해병이 나타났다. 녀석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나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아. 뭘 그렇게 놀라십니까. 전태욱 해병님. 갭니다. 개."

 

"갑자기 웬 개? 어디에서 데려왔어?"

 

"저희도 모릅니다. 순검 청소하기 전에 갑자기 들어오더니, 도무지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아서 그냥 데리고 있었습니다."

 

"당직사령이 뭐라 안 그랬나?"

 

"별 말 안 했습니다. 개 저기 있군요."

 

 

나는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임길순 해병이 가리키는 곳에 갈색 털을 가진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개 한 마리가 있었다. 어디에서 많이 봤다 했더니 사단 본부 쪽에서 본 그 개였다. 온 사단을 굴러다니는 놈이 어쩌다가 여기로 굴러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괜히 놀랐다는 생각에 한숨을 쉬었다.

 

마음을 가라앉힌 뒤 개를 자세히 관찰했다. 혓바닥을 내밀고 발을 쳐들고 헥헥 가쁜 숨을 몰아쉬는 보통 똥개는 분명히 아니었다. 털이 고르고 윤기가 흘렀으며, 몸집도 아담하고 얼굴도 잘 생긴 것이 귀여움을 한 몸에 받게 생겼다. 함부로 왈왈 짖지도 않고 얌전했다. 레이다 기지에서 키우는 덩치만 무지막지하게 크고 귀여운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으며 낯선 사람을 보기만 하면 으르렁거리고 왕왕 짖어대는 정나미 떨어지는 군견과는 과장해서 말하자면 차원이 달랐다.

 

무엇보다도 내 마음을 크게 흔든 건 아무 티 없이 맑은 눈망울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 초롱초롱한 눈에는 아무런 적개심도 탐욕도 없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때만큼은 개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심전심'으로 알 수 있었다. 개는 자기를 보살펴줄 따뜻한 손길을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양현 해병이 사단 전산실에서 근무를 마치고 돌아올 때 잠깐 관심을 보였더니, 계속 쫓아내는 데도 몇 번이고 뒤쫓아온 것이다.

 

그 눈망울을 보고 개 옆에 계속 있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런데 임길순 해병이 사무실에서 개를 계속 돌보겠다고 해서, 일단 다시 업무 목록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뒤 임길순 해병이 자겠다고 사무실에서 나와 생활반으로 들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개가 낑낑거리기 시작했다. 자꾸 신경이 쓰여서 사무실에 가서 문을 열었더니 몸을 웅크리고 낑낑거리던 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벌떡 일어나 나를 바라봤다. 혹시라도 배가 고픈 게 아닐까 해서 라면과 빵, 심지어 우리가 식당에서 몰래 퍼 와 먹다 남은 밥까지 가져다 줬지만 먹지 않았다.

 

문을 닫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자리에 앉은 뒤 몇 초도 안 지나서 또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사무실로 가서 문을 열었더니 나를 보고 벌떡 일어났다. 목이 마른 게 아닐까 해서 물을 퍼 주었지만 마시지 않았다. 문을 닫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자리에 앉은 뒤 몇 초도 안 지나서 역시나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공부고 뭐고 다 집어치웠다. 개가 시끄럽게 굴어서 짜증이 난 게 아니라, 아까 분명히 본 보살펴 줄 사람을 원하는 그 간절한 눈망울을 도저히 더는 못 본 척 할 수 없었다. 벌떡 일어나 사무실 문을 열었더니 개가 총알 같이 튀어나와 중대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생활반 문을 닫아놨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이 새끼 개새끼 그러면서 한바탕 난리가 났을 것이다.

 

사무실로 개를 데리고 갔다. 현관 근무를 마치고 철수하는 후임에게 창고에서 스티로폼과 모포를 가져오라고 해서 자리를 깔았다. 개를 자리 위에 앉힌 뒤 모포를 덮어주고 나도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보드라운 털을 계속 쓰다듬으며 개를 쳐다봤다. 예상했던 대로 개는 낑낑거리지 않고 얌전히 있었다. 아까도 말했듯이 털이 고르고 윤기가 있는 것을 보니 분명히 누군가 키우다가 버린 개이다. 사람을 경계하지 않고 졸졸 따라다니며, 사람이 없으면 낑낑거리고 쓰다듬어 주는 것을 좋아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그 개를 버린 사람은 누구일까. 그토록 예쁘고 주인에게 충성스럽기만 한 개를 도대체 왜 버린 걸까. 그 주인도 한 때 그 개를 애지중지했을 것이다. 밥 먹이고 집 지어주고 쓰다듬어 주는 것만으로 성에 차지 않으면, 인형놀이 하듯이 옷 해 입히고 장신구 달아주고 각종 화장품까지 발라줬을 것이다. 어딘가 아파서 깽깽거리면 병원 대려가서 주사 놔 주고 약 지어주고 아이 키우는 만큼 지극정성으로 길렀을 것이다. 애견산업 규모가 연간 1조 원이나 된다고 하니 그렇게 극성인 주인이 있을 가능성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다가 키우는데 들어가는 돈이 부담스러워지면 그냥 버린다. 한 때 그토록 아꼈던 엄연한 생명인데도 말이다. 생명이 없는 인형과는 차원이 다른데도, 그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개를 버리는 사람을 보면 정말 너무하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가장 기초인 윤리 가운데 하나인 생명 윤리를 대수롭지 않게 스스로 폐기 처분하는 그들은 과연 올바른 이성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는지 의심스러워진다.

 

문득 미영이 누나가 생각났다. 누나가 동물애호협회(?)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계셔서, 싸이월드 미니홈피도 동물보호, 버린 개 주인 찾아주기 같은 동물 관련 게시물로 가득 차 있다. 그 덕분에 나는 그 홈피에 있는 게시물들을 보며 가슴이 뿌듯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르기 힘들다. 도대체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해도 끼치지 않는 동물, 특히 개들에게 왜 그러는 것일까? 사람을 공격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못 생긴 것도 아니다. 그저 자연 법칙대로 살다 가고, 사람들이 데려다가 기르면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고 즐거움을 주며 때로는 자식보다도 더욱 훌륭한 동반자가 되지 않는가?

 

그렇다고 해서 그놈들이 무조건 훌륭하다는 건 아니다. 보통 개들과 마찬가지로 본능에 충실하고 미련하다. 먹는 것에 집착하다가 뒤룩뒤룩 살이 쪄 퉁퉁 불은 굵은 소시지 양쪽으로 가는 소시지 네 개가 튀어나온 것 같은 우스꽝스러운 형상이 되어버린 트리키 같은 개도 있고, 어미가 된 뒤에도 방정 떤답시고 자기 새끼와 차를 쫓는 경주를 하다가 새끼들에게 왕좌를 빼앗길 위협을 느끼는 조크 같은 개도 있다. 그런가 하면 옥수수가루와 우유만으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끊임없는 노동과 활동으로 다져진 놀라운 건강을 자랑하며 눈 속에서 잠을 자는 피터 트렌홈 씨네 개 팁, 평생 동안 딱 한번 짖은 윌킨 씨네 개 지프, 작가인 수의사 해리엇이 부인 헬렌과 데이트 약속을 잡을 수 있게 도와준 개 댄……이 책 '마음이 따뜻해지는 개 이야기'에 나오는 개들은 바보 같으면서도 훌륭한 그런 개들이다.

 

그런 개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씨 좋은 사람들도 이 책을 읽는 사람들 가슴을 훈훈하게 데운다. 애완견 트리키가 없으면 기절할 것 같은 펌프리 부인, 수술을 시키고 싶지 않을 정도로 퍼시를 사랑하는 화가 파트리지, 오랜 세월 동안 함께한 친구 같은 개 보브가 고통 없이 잠들도록 가슴 아린 고통을 참으며 안락사에 찬성하는 노인, 항상 적자가 나더라도 어떻게든지 버려진 개를 데려다 키우는 루이자 로즈 부장, 빌어먹을 개새끼 욕을 해 가면서도 결국은 수술이 끝난 래브라도 곁을 지키는 트리스탄, 그리고 주인공이자 이 책을 지은 수의사 해리엇……금방이라도 멸망할 것 같은 냉혹하고 잔인한 세상이 그래도 용케 버티며 굴러가는 까닭은, 바로 이런 사람들과 동물들이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기 때문인 것 같다.

 

아무 부담 없고 푸근한 글을 읽다 보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리고 몇 번이고 킬킬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일부러 기교를 부린 흔적이 전혀 없이 겪은 일을 털어놓았을 뿐인데, 그 안에 재치와 재미가 넘친다. 자연 속에서 한평생을 보내면 마음이 탁 트이면서 차원이 높아지는가 보다. 앞으로 글을 써서 먹고 살까 생각도 해 보고 있기는 하지만 이미 인공 도시에 찌든 나에게는 그저 부럽기만 한 능력이다.

 

당직 근무를 교대한 뒤 나는 그 개가 아침까지 중대에 남아있기를 바라면서 생활반으로 들어가 푹 잤다.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사무실에 가 봤더니 그 개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날씨도 추운데 어디에서 어떻게 그 매서운 추위를 견딜까. 낑낑대면서 오들오들 떨 그 개를 생각하니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그 크고 맑은 눈망울을 잊을 수 없었다. 며칠 동안 마음 한 구석에서 괴로워하다가 이 책을 읽으면서 그 개를 다시 떠올렸다. 그리고 괴로움을 희망으로 바꿨다. 옛 주인을 다시 찾거나 새로운 주인을 만나 행복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청춘의 문장들'에 이어서 이 책 '마음이 따뜻해지는 개 이야기' 독후감을 미영이 누나에게서 도움을 받아 쓸 수 있었다. 누나는 그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열심히 사셨을 뿐이지만,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영감을 받았다. 그러니 내가 어찌 누나에게 고마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누나뿐만 아니라 그 날 본 개처럼 아무 사심 없이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자연스럽고 순박한 동물들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아야겠다. 나도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순간마다 최선을 다하면서 산다면, 내가 원하든 그렇지 않든 알아주는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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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카타야마 쿄이치 지음, 안중식 옮김 / 지식여행 / 200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래 전부터 나는 사랑에 모든 것을 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네가 없으면 나는 살 수 없으며 살아있다고 해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든가, 너에게 무엇이든지 해 줄 수 있으며 네가 필요하다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다는 말 따위는, 자기를 지금까지 아껴준 수많은 사람들을 배신하는 몹쓸 짓이며, 특히 사랑 때문에 목숨을 저버리는 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아무리 사랑이 인류를 움직이는 근본인 힘 가운데 한 가지라고 하더라도 그 사랑을 해석하는 방법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고, 사랑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는 논리는 그 해석 방법 가운데 한 가지일 뿐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도 나름대로 연애관을 갖추고 있다. 그 연애관에 따르면 사랑에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걸 필요는 없다.

 

사랑 때문에 아무 것도 못 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자기는 끝없는 욕심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나약한 인물이라고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사랑을 하면서도 이성을 잃어버려서는 안 되며, 이성이 없는 사람은 현실과 극렬하게 대립할 때 비극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수많은 예술 작품들이 그 비극을 그렸으며, 나는 그 현실 같은 비극에 희생당하고 싶지 않았다.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이야기하면서도 막상 사랑에 빠지면 그 어떤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자기 관리 능력이 부실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예상했던 대로 내 모든 것을 쏟아야 할 사랑이 처음으로 찾아왔을 때, 나는 급격하게 허물어졌다. 하루에 도대체 몇 번이나 그녀 생각 때문에 움찔하며 진저리를 쳤는지 기억하기조차 어렵다. 그녀가 한 말 한 마디, 그녀가 보낸 문자 그리고 편지 한 통에 웃고 울었다. 나를 그나마 잘 안다고 할 수 있는 이들은 내가 사랑 때문에 그토록 괴로워하는 것은 처음 봤다면서, 그렇게 괴로워하는 만큼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격려했다. 그 격려가 현실이 될 것이라고 나는 무조건 믿고, 지금까지 읽고 보고 들었던 모든 사랑이야기를 떠올리면서 어떻게 그녀를 완전히 사로잡을 수 있을지 골몰했다.

 

하지만 그렇게 불안한 가운데에서도 나는 내가 해야 할 모든 일을 어떻게든지 해냈다. 가슴이 아파도 약도 먹지 않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일을 처리했고, 몸이 좋지 않아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 공을 찼고 경기에서 이겼다. 그녀를 생각하느라 온몸이 달아올라 뇌가 뜨거워졌는데도 책을 붙들고 어떻게든지 집중하려고 했고, 시험을 쳤더니 학점이 A+가 나왔다. 한 여자에게 너무나도 강하게 사로잡혀 있던 그 순간에 오히려 예전보다도 훨씬 더 많은 일을 해냈다는 건,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일이었다. 

 

그건 자기 제어 능력이 강하다고 평가를 좋게 내릴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결국 내 원칙에 충실해 사랑에 모든 것을 걸지 않았고 그녀는 그런 내 모습에 실망해서 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진실은 앞에서 말한 것과는 분명히 다르지만, 이 책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를 읽은 뒤 이 글을 쓸 때만큼은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결국 그녀에게 남자로 인정받지 못한 비참한 현실에 대한 분노 때문에 여전히 좋은 사이로 남을 수 있는 가능성도 스스로 저버린 어리석음 따위는 무조건 부정하고, 그저 하쿠아키(이하 아키)를 잃은 사쿠타로(이하 사쿠)를 온전히 이해하고 싶었다.

 

 

"지금 중대한 사실을 깨달았어."

 

"이번엔 뭐?"

 

창밖을 보고 있던 그녀는 조금 귀찮다는 듯 돌아보았다.

 

"아키의 생일은 12월 17일이잖아."

 

"사쿠 생일은 12월 24일이고."

 

"그렇다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나서 아키가 없었던 적은, 지금까지 단 일 초도 없었어."

 

"그렇게 되나?"

 

"내가 태어난 이후의 세상은 전부 아키가 있는 세상이었던 거야. 나한테 있어서 아키가 없는 세계는 완전히 미지의 세상이고, 그런 것이 존재할지 어떨지조차 모르겠어."

 

 

정말 그랬다. 아키가 없는 세상은 사쿠에게는 아무 뜻이 없었다. 거친 세상살이 속에서 사랑하는 여자를 자기 뜻과는 상관없이 잃어버려야 했던 할아버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던 사쿠는, 일찌감치 연인을 잃을 운명을 자기도 모르게 물려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어떤 이에게는 환영일 뿐이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투명한 실체인 시간 속에서,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과 작은 배로 떠돌던 그 무섭도록 넓고 깊은 바다에서 사쿠는 아키와 함께 있었다.

 

아키는 사쿠에게 깨진 유리 조각과 같은 섬세한 존재였으며, 눈부실 정도로 희부연 피부는 사쿠를 숨 막히게 했다. 그런 그녀를 떠나보내면서 사쿠는 한동안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공부를 하면서도 무슨 계기만 있으면 그녀가 떠올랐고, 살아야 할 뜻을 잃어버렸다. 의지가 굳건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그건 사랑에 모든 것을 건 사쿠에게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할아버지도 결국 그 사랑을 포기하고 현실에 적응해 살아남았듯이, 사쿠도 새로운 여자를 만났고 공부를 계속해서 대학에 가고 직장을 얻었다. 하지만 아키가 남긴 기억은 절대 잊어버릴 수 없었다. 호주에서 안내원이 아키의 부모님과 사쿠에게 말한 드리밍(Dreaming)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녀를 태운 재를 흩뿌린다고 해서 모든 것이 날아가 버리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렇게 아키는 사쿠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섬세하고 예리한 기억을 남겼다.

 

사쿠에게 앞으로 어떤 사랑이 찾아오든지 아키는 사쿠가 인식하는 세상에서만큼은 영원히 중심에 남아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라는 제목은 바로 그런 뜻이라고 본다. 어차피 사람은 세상을 그대로가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 속에 자리잡은 사랑은 그 누구도 쉽게 바꿀 수 없으며, 인생 전반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사쿠에게 아키가 그런 존재라면 나에게는 누가 그런 존재일까, 아니 누가 그런 존재가 될 것인가.

 

항상 나를 감싸 안는 쓸쓸함은 모순으로 가득한 사회 구조 안에서 민중들이 아무리 일해도 떨어지지 않는 가난만큼이나 지독하다. 그건 내가 공부하고 일하고 먹고 살아야 할 현실을 투영하는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관념이 그려낸 고유한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그 삶은 실패했다고 봐야 하는가? 내가 외친 사랑은 세상 중심에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내가 원했던 사랑은 나를 떠나갔는가? 내 세상에서 사랑이 중심이 되는 그 날은 과연 언제일까? 그 해답을 찾는 데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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