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울지마, 톤즈
영화
평점 :
상영종료


1. 마태복음 4장에 예수께서는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로 나가 40일 동안 금식하며 오로지 기도만 하시면서, 하느님이 주신 시험을 통과하려고 하셨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때 마귀가 나타나 광야에서 기도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유혹했지만, 예수님은 그에 넘어가지 않으시고 오로지 하느님에게 바치는 믿음만으로 유혹을 물리치셨다.

 



이 거룩한 복음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사람들이 대개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마귀가 처음부터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주겠다고 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마귀가 예수님에게 기도를 그만두라고 꾈 때 가장 먼저 제시한 것은 빵과 물이었다. 빵과 물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손아귀에 넣게 해주는 금권과는 견줄 수도 없이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하찮게 여기기 쉽고 그 정도야 얼마든지 나누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마귀는 그 하찮은 것을 무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유혹하는 첫 수단으로 삼았다. 예수님은 그 첫 유혹을 물리치신 뒤, 결국 이 세상을 모두 마음대로 가질 수 있는 권력욕까지 뿌리치고 마귀를 물리쳤다.

 



여기에 담긴 뜻은 절대 가볍게 넘길 수 없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보여주는 모습에서 우리는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무려 40일 가까이 단식하면서 육신이 죽음에 이를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그 보잘것없는 빵과 물이 주는 달콤한 유혹에 굴복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그 어느 것도 부족하지 않은 데도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눠서 자기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기는커녕, 하찮은 유혹에 쉽게 굴복해 자기도 망치고 더 나아가 수많은 피해를 끼치는 사례를 우리 주변에서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찮은 유혹에도 그렇게 무참히 짓눌려 버리는데, 하물며 자기가 지니고 있는 욕망을 목마를 때 마시는 시원한 포도주와도 같이 해소해 줄 수 있는 유혹이 다가올 때 인간이 얼마나 나약해지는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와 같이 가장 쉬워 보이는 일이 가장 어렵다는 모순 같은 진리는 인간이 지닌 본성 때문에 성립한다. 항상 나누는 선행을 베풀어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도, 막상 지하철 환승통로에서 적선을 바라는 불쌍한 거지에게 500원짜리 동전 하나 던져주기도 아까워하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500원짜리 동전 하나도 그렇게 아까운데 남들에게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고 할 때 선뜻 나서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지는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하느님이 말씀하신 에덴동산은 말 그대로 유토피아로밖에 남을 수 없는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한다.

 



하지만 ‘울지마 톤즈’에서 주인공인 이태석 신부는 인간도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나 유혹 앞에서 강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수단으로 가려는 결정을 하는 그 순간에, 수단으로 떠나는 길에서, 수단에서 온갖 고초를 겪을 때마다 마귀가 나타나서 온갖 방법으로 유혹을 일삼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굴복하지 않았고, 그 유혹을 뿌리치고 수단 사람들에게 자기를 바치는 순간 그는 예수님이 되었다. 그 광휘를 보면서 눈앞이 아찔해지고, 내 삶이 지닌 어두운 면이 더욱 도드라지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 없다. 우리는 그를 보고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는 이미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 단지 우리 주변에 있는 마귀를 얼마나 잘 물리치는지가 문제일 뿐이다.

 

 

2. 필자가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가진 고민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무엇인지 굳이 생각해 보자면, 과연 어떻게 해야 신이 세상에서 구현하려는 바를 본인이 온전히 실천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대개 그런 고민을 하게 되는 가장 큰 까닭은 보나벤투라가 이야기했듯이, 이 지구에서 신의 형상을 타고난 존재가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신 앞에서 인간은 더없이 보잘것없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간을 보잘것없게 만드는 것은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떨치기 힘든 욕망과 그를 자극하는 유혹이다. 신학자들은 신을 알면 알수록 자기에게 주어진 막중한 사명감과 인간으로서 반드시 지니고 있는 욕망과 유혹 사이에서 더욱 깊게 고뇌하게 된다. 보통 사람들은 대개 그 욕망과 유혹에 저항하면서 신이 추구하는 바를 이해하려고 하지만, 그 일은 절대 쉽지 않다. 단순히 저항하는 일도 그렇게 힘든데, 자기 존재를 버려가면서까지 신이 지닌 의지를 보여주려는 시도는 역사에서 여러 차례 나타나기는 했지만, 그 가운데 누구에게든지 인정받을 수 있는 실천과 희생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만큼 어렵고 힘든 것이기에 그 실천과 희생을 보여준 존재는 칭송받아 마땅한 것이다.

 



얼마 전에 ‘울지마 톤즈’를 봤다. 절대 울지 않기로 유명한 딩카족과 마찬가지로 나도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는 이 영화를 보면서도 약간 과장하자면 눈 한 번 깜빡거리지 않고 끝까지 화면 앞에 버티고 있었다. 심지어 딩카 브라스 밴드가 이태석 신부 사진을 들고 행진할 때 딩카족 사람들마저도 눈물을 흘렸지만, 나는 울지 않았다. 영화를 다 본 뒤 왜 눈물이 나지 않았는가를 생각해 보면, 이태석 신부가 보여준 그 위대한 행보에 완전히 압도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신 앞에서는 너무나도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사실은 교인이 아니더라도 이미 인식하고 있지만, 같은 사람이라도 그 숭고함에 사로잡혀 꼼짝도 할 수 없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영화를 보면서 깨달았다.

 



자기에게 주어진 재능이 하느님이 내려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그리고 자기가 신에게 귀의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신이 지닌 의지를 구현하는 가장 참된 방법을 알고 있었기에, 이태석 신부는 주저하지 않고 남수단에 있는 톤즈 마을로 떠났다. 척박하고 험난한 아프리카 시골 마을에서 그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쳤다. 스스로 원하신 최후의 날이 다가오자 빵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희생을 예고하신 예수님처럼, 이태석 신부도 자기가 지닌 재능으로 얼마든지 인정받고 안락한 삶을 살 수도 있었지만 신에게 자기에게 준 사명감을 믿고 그 믿음만으로 광야에 뛰어들어 에덴동산을 개척했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로 나가 40일 동안 금식하며 오로지 기도만 하시면서, 하느님이 주신 시험을 통과하려고 하셨다. 이 때 마귀가 나타나 광야에서 기도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유혹했지만, 예수님은 그에 넘어가지 않으시고 오로지 하느님에게 바치는 믿음만으로 유혹을 물리치셨다. 이태석 신부에게도 수단으로 가려는 결정을 하는 그 순간에, 수단으로 떠나는 길에서, 수단에서 온갖 고초를 겪을 때마다 마귀가 나타나서 온갖 방법으로 유혹을 일삼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굴복하지 않았고, 그 유혹을 뿌리치고 수단 사람들에게 자기를 바치는 순간 예수님이 되었다. 그 광휘를 보면서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 정도로 나는 철저하게 욕망에 찌든 평범한 인간일 뿐이었단 말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루 밑 아리에티 - The Borrowers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어릴 때 집에서 '세계전래동화전집'을 골방에 틀어박혀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그 책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 가운데 '엄지공주'라는 동화가 있었다. 아이가 없던 여자가 하늘에 빌고 빌어서 엄지손가락만한 여자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다가 어느 날 그 미모에 반한 두꺼비에게 납치되면서 벌어지는 온갖 이야기를 다뤘다. 두꺼비와 결혼하는 것이 상상만 해도 끔찍했던 엄지공주는 간신히 두꺼비집에서 탈출한다. 한동안 자연 속에서 꿀과 이슬을 먹고 살다가 겨울이 오자 꼼짝없이 얼어죽을 위기에 처하는데, 들쥐 아줌마가 쓰러진 엄지공주를 구원해 준다. 그런데 이 들쥐 아줌마도 엄지공주를 구원해 준 대가로 그녀에게 이웃집에 사는 부자(?) 두더지 아저씨와 결혼하라고 한다. 또 결혼이 끔찍해진 엄지공주는 들쥐 아줌마 집에서도 탈출해서 봄꽃이 활짝 핀 꽃밭으로 가는데, 거기에서 나비들과 어울리는 꽃의 요정들을 만난다. 그 요정들의 왕자를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하면서 이야기가 끝난다.
 

이 만화 '마루 밑 아리에티'를 보기 전에 나는 10cm밖에 안 되는 진짜 소녀(小女)가 나온다는 홍보영상을 보면서, 예전에 읽었던 그 동화 '엄지공주'를 잠시 떠올렸다. 하지만 예전에 읽었던 동화 내용을 되새겨 봐도 소인이 나온다는 것 말고는 그 어떤 공통점도 찾을 수 없었다. 싱그러운 자연이 아닌 어두침침하고 지저분한 마루 밑에 사는 소인. 꿀과 이슬을 먹으면서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소인이 아닌, 인간들에게서 꼭 필요한 만큼만 모든 생필품을 빌려서(?) 살아가는 소인. 그녀가 꾸려가는 삶을 그려냄으로써 미야자키 히야오는 사람들에게 도대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인지 궁금해졌다. 미야자키 히야오가 지난 작품 속에서 꾸준히 이야기했던 '공존'이라는 주제가 이 작품 안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것인지도 궁금해졌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공존'이라는 핵심은 이 작품 안에서도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단지 예전 작품들과 견주었을 때 이 작품은 심심하다 싶을 정도로 특별한 내용이 없이 담담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게 처음에는 흠으로 느껴졌을 뿐이다. 정말 영화를 다 본 뒤 든 처음 생각은 그랬다. 영화를 보면서 내가 기대했던 어떤 특별한 이야기나 행복한 결말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소인족이자 주인공인 아리에티는 부모님과 함께 어느 마루 밑에서 사는 14살 소녀인데, 어느 날 그들이 사는 집에 집주인 손자인 12살 인간 소년 쇼우가 요양을 오고, 인간에게 정체를 들킨 아리에티가 결국 부모님과 함께 정든 집을 떠난다는 게 전부다. 놀라울 정도로 돋보이는 친근하고 싱그러운 자연 풍경 묘사, 도시에서는 절대 기대할 수 없는 맑고 고운 자연 소리, 걸리버가 브롭딩넥에 간 것과 같은 상황을 묘사하는 탁월한 시각과 청각 묘사, 그리고 영화 전반에서 등장하는 감미로운 음악이 내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지만, 영화를 본 그 날은 정말 그것 말고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심해진 궁금증만 안고 단칸방으로 돌아왔다.

 

고시원으로 돌아온 뒤에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내가 도대체 무엇을 기대하면서 이 작품을 봤는지 이해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정말 그게 다였는가? 쇼우는 아리에티를 보면서 아름답다고 감탄하고 아리에티도 소년에게 차츰 마음을 열지만, 왜 결국 그 열린 마음에서 싹트는 사랑을 아주 잠시도 나누지 못하고 그렇게 떠나야 했을까? 아리에티가 살고 있는 집에 살았던 인간들은 소인들과 공존하고 싶어서 집까지 만들어 놓고 소인들을 기다리지만, 왜 소인들은 인간들과 결국 어울리지 못하고 떠나야 했을까? 왜 이렇게 허무한 이야기를 90여 분 동안 이어나갔을까?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나는 미야자키 히야오에게는 훌륭한 관객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그는 이 작품에서 항상 소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강조했지, 인간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지 않았다. 거기에 미야자키 히야오가 이야기하는 핵심인 '공존'이 어떤 뜻인지를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는 단서가 숨어 있었다. 나는 철저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 관점에서 작품을 감상하고 이해했던 것이다. 인간이 베푸는 호의를 왜 소인들은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으려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소년에게 마음을 연 아리에티가 아빠와 엄마를 설득해서 인간들을 이해해 보자고 설득해서 결국 다시 엄마가 좋아하는 예전 집으로 돌아오고, 쇼우가 심장병 수술에 성공한 뒤 기뻐하면서 소인들을 인형의 집으로 초대해 함께 살자고 하고, 그 뒤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말(!)을 꿈꿨다.

 

하지만 그야말로 그것은 철저하게 인간 관점일 뿐, 소인들에게는 터무니없는 소리일 뿐이었다. 꼭 필요한 만큼만 훔쳐 쓰는 것이 아니라 빌려 쓸 뿐이며, 인간에게는 절대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 인간에게 들키지 않고 그 작은 세상에서 생명을 유지하면서 인간과 같이 가족을 이루고 행복한 삶을 살면 그만이다. 인간에게 들키지만 않으면 소인들은 얼마든지 자기들만의 보금자리를 꾸미고 살 수 있으며, 인간들은 소인들의 보금자리를 품은 집 안에서 얼마든지 방해받지 않고 안락을 누릴 수 있다. 서로 간섭하지 않으며 특성을 인정하는 것을 넘어 서로를 인지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리에티가 쇼우를 바라보면서 인간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얻었다고 해서, 소인족들이 지키는 철칙을 깰 수는 없었다. 67억이나 되는 인간은 결국 소인 눈에는 가정부 할머니와 같이 자기들을 희귀한 벌레를 잡아서 관상용으로 삼으려는, 곧 자기들 생각밖에 할 줄 모르는 위험한 존재들로밖에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소인들이 누리는 행복을 인정할 줄 모른다. 그렇기에 안 그래도 두꺼비, 바퀴벌레, 생쥐, 까마귀 같은 온갖 자연 속 위험에 시달리면서 힘겹게 살아온 소인족이 사람들마저도 두려워해야 하고 피해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삶을 포기하는 것도 아니다. 왜 쇼우가 아리에티에게 그렇게 무시무시한 말을 했는지는 오랫동안 생각한 뒤에야 알 수 있었다. 쇼우는 심장병 수술에 실패하고 죽을 것이라는 체념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문제가 있는 부모에게서 제대로 된 사랑도 받아보지 못한 불쌍한 소년으로서, 삶에 애착이 그다지 크지 않다. 그런 마당에 아리에티에게 자기 가족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라고는, 자기가 곧 맞닥뜨릴 죽음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리에티는 그동안 자기들은 어떻게든지 열심히 살아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소리친다. 그 말을 들은 쇼우는 큰 깨달음을 얻는다. 자기와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67억 명이나 있다고 한들, 자기가 살아있지 않은 세상은 자기에게 아무런 뜻이 없다. 그와 반대로 비록 종족이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한들, 아리에티 자기가 살아있다면 여전히 이 세상은 살아갈 가치가 있다. 게다가 자기 가족뿐만이 아닌 다른 소인족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세상을 등져야 할 까닭이 전혀 없다. 어떻게든지 살아서 자기가 원하는 행복으로 가득 찬 새로운 세계로 가야 한다. 만약 그런 세계가 없다면 자기가 사는 세계를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그 징표로서 쇼우는 아리에티에게 각설탕을 선물하고, 아리에티는 쇼우에게 자기 머리를 묶는데 쓰는 빨래집게를 선물한다. 예전에 조상님이 만들어 놓은 인형의 집과는 견줄 수 없을 정도로 큰 진정성이 담긴 선물이다. 인간과 소인이 공존할 수 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하지만 더는 쇼우와 함께 있을 수 없게 됐다. 주전자를 타고 강 따라 흘러가 새로운 세계로 떠나야 한다.

 

어느 시인은 가야 할 때를 아는 자가 보여주는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답느냐고 탄성을 내질렀다. 가야 할 때를 아는 자와 마찬가지로 보내야 할 때를 알고 보내주는 사람이 가진 가슴은 얼마나 순결하고 아린가. 기대했던 일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나누지 못하고 간직한 사랑은 더욱 슬프다. 태양 아래에서 꽃에 둘러싸인 채 사랑하는 이와 함께 지내고 싶지만, 서로 행복하려면 보내줄 수밖에 없다면 기꺼이 보내줘야 한다. 추억을 마음 속에 담아두고 각자 자기답게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공존이다. 이 세상에 정말 공존하고 있는 존재가 과연 얼마나 될까. 아리에티와 쇼우 같이 안타까운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안 나던 눈물이 났다. 오래오래 고이 흘렸다.

 

 

 



Arrietty's Song(Theme Song) - Cecile Cobel

 

 

I'm 14 years old, I'm pretty
나는 14 살, 나는 예쁘지

元気な小さな lady
힘이 넘치는 조그마한 숙녀

床下にずっと借り暮らししてたの
마루 아래에서 계속 빌려살기를 했지


時にはHaapy,時にはBlue、
어느 때는 happy, 어느 때는 blue

誰かに合いたい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


風、髪に感じて空を眺めたい
머리카락으로 바람을 느껴서 하늘을 쳐다보았지

あなたに花届けたい
너에게 꽃을 전하고 싶어


向こうは別の世界
건너편은 또 다른 세계

ほら蝶々が舞ってる私を待っている
봐봐, 나비들이 날아다니고 있어, 나를 기다리고 있어


そう、変わることのないわたしの小さい世界
그래, 변할 것 없는 내 조그마한 세계

嫌いじゃないのでもあなたを
싫어하는 것은 아니야, 그래도 그대를

もっともっと知りたくて
좀 더, 좀 더 알고 싶어서


喜びと悲しみはいつも折り混ざってゆく
기쁨과 슬픔은 언제나 서로 섞여서 갈 뿐


風、髪に感じて空を眺めたい
머리카락으로 바람을 느껴서 하늘을 쳐다 보았지

あなたに花届けたい
너에게 꽃을 전하고 싶어


向こうは別の世界
건너편은 또 다른 세계

ほら蝶々が舞ってるあなたを待っている
봐봐, 나비들이 날아다니고 있어, 너를 기다리고 있어


太陽の下で花に囲まれて
태양 아래에서 꽃에 둘러싸인 채

あなたと日々過ごしたい
너와 함께 지내고 싶어

この想いを胸に新しい世界で
이 추억을 마음에 넣어두고 새로운 세계로

私らしく生きる
나답게 살아갈 테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화려한 휴가 - May 18
영화
평점 :
상영종료


2008년 부산대학교 시월제 때 우연히 볼 수 있었던 영화다. 원래는 시월제 기념으로 10월 7일에 열리는 강연회에 영화 '화려한 휴가'와 연속극 '뉴하트'에서 호평을 받은 영화배우 박철민이 온다고 해서 강연을 들으러 간 거였다. 일단 약간 늦게 강연회장인 부산대학교 10.16 기념관 안으로 들어갔더니, 기대했던 박철민 목소리가 들려오기는 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실제로 박철민이 온 게 아니라 영화를 틀어놓은 것이었다.

 

속사포 같은 사투리를 퍼부으면서 주인공 민우(김상경 분)에게 연애 상담을 해 주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일단 웃었다. 동생 진우(이준기 분)와 같은 성당에 다니는 간호사 신애(이요원 분)를 짝사랑하는 민우가 벌이는 촌극을 보면서 또 웃었다. 성당 야유회에서 진우가 민우를 골탕먹이는 장면에서는 폭소가 터졌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분통 터지는 잔인한 장면들, 그 속에서 죽어가며 피를 흘리고 그들을 바라보며 생지옥 속에서 눈물을 흘리는 이들을 바라보면서는 울 수밖에 없었다. 영화를 보기 전부터 과에서 벌어진 대소동 때문에 기분이 울적했는데, 시종일관 계속 되는 너무나도 슬픈 장면 때문에 결국 눈물을 뚝뚝 흘리고 말았다. 한 번 흘린 눈물은 조금만 슬픈 장면이 나오면 무조건 흘러나왔다. 신애(이요원 분)가 을씨년스러운 광주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절박하게 외치는 목소리는 심장을 쥐어짜다 못해 도려내는 듯했다.

 

독재 정권을 타도하고 미제에서 민족을 구원하자고 일어섰던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 학생들 말고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 그저 순박하게 살고 있던 광주 시민들은 공수 부대가 광주 시내를 휩쓸기 시작한 뒤부터 전두환 군사 독재 정권이 일삼는 미친 짓에 희생양이 된 것을 알아차렸다.

 

사실대로 이야기하자면 그들은 자기들이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자기들이 왜 폭도로 매도당하고 있는 지도 몰랐다. 설사 북한에서 내려보낸 특수부대가 개입했다 하더라도, 공수 부대가 그 따위로 광주 시민들을 무지막지하게 폭행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해서는 안 되었다. 테러리스트들이 도사리는 근거지를 소탕한다는 명목 아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한 미군이 전 세계에서 쏟아지는 비난에 시달린 까닭도 아무 죄도 없는 민간인을 작전에 방해가 된다는 까닭으로 마구잡이로 죽인 탓이요, 사담 후세인 또한 욕을 똥 바가지로 얻어먹은 까닭 또한 민간인을 미군에게서 아군을 보호할 방패막이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진정으로 폭도들을 소탕하러 왔다면 선량한 광주 시민들 사이에 숨어 있는 폭도를 찾아내려고 힘써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다. 그 당시 작전을 지휘한 장교들이야 작전 계획에 따랐을 뿐이며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민간인으로 위장해서 공작을 벌이고 있었다고 항의할 수도 있다. 그것은 국민에게 신뢰받고자 하는 국군으로서 할 말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대들면 무조건 두들겨 패고 죽여도 좋다는 식으로 전두환이라는 살인마에게 충성을 다한 주구였을 뿐이다.

 

4.3 사태 때도 공산주의자들을 소탕한다는 명목 아래 양민들을 무작정 잡아 죽이고 민가를 약탈한 군인들이 양민 학살자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때 북한 특수부대를 진압한다는 명목 아래 독재 타도를 외치던 대학생들뿐만 아니라 무고한 시민들까지 사살한 군인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자기들에게 대항했다고 무작정 폭도로 몰아붙이고 다 죽여도 된다고 일갈하는 장군을 보라.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민들을 빨갱이로 몰아 학살한 대가로 어깨에 달은 그 별이 자랑스러운가? 그가 대한민국을 지키는 자랑스러운 군인으로 보이는가?

 

하긴 수구 세력은 항상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게 나라를 지키려면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으며, 그 장군이야말로 그런 고뇌 속에서 꿋꿋하게 임무를 완수한 참군인이라고 했다. 내가 해병대에서 복무하면서 정훈 교육을 귀가 솔 정도로 받으면서도 그 논리를 생각하기만 하면 저절로 코웃음이 나왔다. 참군인 정신이라는 게 대한민국이 처한 일그러진 현실 속에서는 얼마나 비틀어지고 악용되었는지 빤하지만, 정훈 교육 자료에서는 절대로 드러나지 않고 인정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올해 터진 '불온서적 지정' 논란과 '교과서 개정 요구' 논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작 국방부에서 국군을 지휘하고 있는 장군들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어쩔 수 없었다는 소리만 늘어놓으면서, 너무나도 억울해 피를 토하고 절규하는 피해자들과 유족들이 내는 목소리에는 귀를 닫았다. 국군은 지난 과오를 반성하고 새롭게 거듭나고 있다는 정훈 교육 내용은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뒤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하긴 경찰도 새롭게 달라지겠다고 경찰서 입구마다 간판을 붙여 선전하면서 보여주는 꼴이, 이명박 정권 아래에서 시민들을 탄압하는 충실한 주구가 되는 것이었는데, 그보다 더한 보수 세력인 군대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이명박이 그래도 최소한 양심은 남아 있는지 이 영화에서처럼 반정부 시위를 진압하는데 군대를 동원하지는 않아서 천만다행이다. 안 그래도 맨손인 시위대를 해산시켜 체포하려고 물대포를 쏘며 한 걸음 한 걸음 위풍당당하게 전진해 오는 전경들을 보면서도, 저들이 폭력 경찰로서 시위대 앞에서 저렇게 당당해질 수 있는 까닭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면서 한탄했던 터였다.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아무 무기도 들지 않고, 군인들이 실탄을 장전한 M-16 소총을 들고 있다는 것에 비추어 볼 때 화염병과 돌멩이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곤봉을 들고 달려오는 진압 부대에 대항하고자 화염병과 돌멩이를 던진 광주 시민들에게 폭도네 빨갱이네 온갖 오명을 씌우는 이들을 보면서 떠오르는 것이 있다. 국민들이 아무리 촛불 문화제를 지키면서 평화롭게 목소리를 높여도 귀를 닫고 있다가, 도저히 참지 못한 국민들이 거리로 나서자 그들을 일제히 폭력 시위꾼으로 몰아붙이기 시작하며 폭력 비폭력 논란을 조장하고 법치를 천명한 이명박 정권과 수구 언론과 어쩌면 그렇게 닮았을까.

 

공산주의자들이 있었다는 사실, 심지어 있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만으로 꿔다 놓은 보릿자루와 같은 주장을 펼치는 이들이 대한민국에 너무나도 많다. 그 주장이 대한민국에서 권력 위에 올라타면서 궤변은 폭력으로 둔갑했고, 수많은 국민이 그 폭압 아래 희생당했다. 5.18은 그 극악무도한 국가 차원 범죄가 낳은 한 가지 끔찍한 비극일 뿐이다. 그리고 분명히 현재진행형이다. 그 비극을 일으킨 세력은 여전히 대한민국에서 활개를 치고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그들은 자기들에게 대항하는 세력을 좌익 폭도로 매도하며, 그에 놀아나는 이들은 민주주의를 쟁취하려는 움직임에 찬물을 끼얻는다.

 

이 비극이 영화로서 대한민국에서 빛을 보게 한 장본인인 전두환 전 대통령은 여전히 거들먹거리면서 대한민국에 버젓이 살아남아 있다. 그러면서 그를 비난하는 젊은이들에게 자기에게 당해보지 않아서 욕이 나오는 거라는 망언을 내뱉고 있다. 그리고 그런 살인마와 일왕에게 열심히 고개를 숙이며 역겨운 미소를 짓는 이명박이라는 작자가 대통령으로 올라앉아 대한민국을 말아먹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서울교회에서 목사 자리 맡고 있는 이종윤이라는 작자가 5.18 사태에 북한 특수부대가 투입됐다'고 설교 시간에 대놓고 주장했다는 소식을 듣고 치밀어 오른 화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다. 분노를 원동력으로 삼아 쓴 글은 논리가 잘 들어맞지 않는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것이라도 너그러이 넘어가고 싶다. 상식이 통하지 않고 엉망진창인 대한민국 현실을 삐딱하게 바라보면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여기고 싶기 때문이다.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역사를 반성할 줄 모르는 국민들이 낳은 뼈저린 현실은, 엄청난 자충수라는 사실을 증명하며 국민들을 더욱 깊은 수렁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청년인 해야 할 일은 분명히 정해져 있다. 아무리 두렵다고 하더라도 가야 한다. 그러고자 나는 오늘도 보이지 않는 채찍을 든다. 그리고 힘껏 내리친다. 아프다. 하지만 거부할 수는 없다. 다시 5.18 항쟁과 같은 대규모 항쟁이 벌어진다면, 나도 민우처럼 기꺼이 무기를 들 수 있을지 깊은 밤에 잠을 못 이루면서 고민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나콘다 - Anaconda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성경'에 따르면 뱀은 이브를 유혹하여 선악과를 먹게 해서 아담과 이브를 천국에 쫓아냈다. 성경뿐만 아니라 여러 종교 경전에서도 뱀이 신과 사람들에게 저지른 악행에 관한 기록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이 뱀을 대할 때, 심지어 뱀이라는 말만 들었을 때 보여주는 거의 본능에 가까운 거부감과 공포를 종교학자들은 그런 온갖 기록을 근거로 삼아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생물학자들은 사람도 위험을 인지하고 경고하는 생화학 체계를 갖추고 있는 동물이기에, 뱀이 사람들에게 위험하다는 사실이 위험 경보 체계에 쓸모 있는 정보로 저장되었고 그 체계가 저절로 작동하는 것이라고, 철저하게 과학에 근거한 설명을 내놓는다.

 

설명하는 방법은 다르지만, 일단 종교학자들이나 생물학자들이나 뱀이 사람들에게 위험하고 두려운 존재라고 여기는 건 똑같다. 자기보다 훨씬 덩치가 큰 동물도 주저하지 않고 감아서 삼켜버리는 그 무지막지한 식성을 누가 역겹다고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물론 모든 동물은 먹어야 살고 각자 습성과 조건에 알맞게 먹는 방법과 먹이가 각자 다르니, 뱀이 먹이를 먹는 게 역겹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어쩌면 이상한 것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사람들은 뱀을 싫어한다.

 

'권위의 법칙'에 따라 뱀이 클수록 그 거부감과 공포는 더욱 커진다. 작은 뱀이야 그냥 징그럽다고 하고 겁이 별로 없는 사람들은 귀엽게 느끼기까지 하지만, 사람을 꽉 조아서 죽일 수 있을 정도로 큰 뱀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누구든지 그런 큰 뱀을 실제로 보면 너무 놀라서 비명조차 지를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뱀은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도시에서는 전혀 볼 수가 없기에 더욱 그렇다. 전혀 예상하지 않은 상태에서 마주치는 공포는 예상했을 때보다 더욱 강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거대한 뱀은 지금까지 대개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무시무시한 괴물로 온갖 이야기에 등장했다. 동양에서보다는 서양에서 그런 경향이 더 잘 드러난다. 동양에서는 한국 전래동화에 '지성이와 감천이'라는 우리말 유래가 된 이야기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뱀이 사람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이야기를 찾아볼 수가 없다. 동서양 공통으로 나타나는 은밀한 곳에서 살다가 마을로 내려와 사람을 해치고, 처녀를 제물로 바치라고 강요하며 사람들을 괴롭히는 사악한 뱀 이야기만 있을 뿐이다. 기독교 전통이 깊은 서양에서 그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동서양에서 공통으로 신비로운 존재로 여겨지는 용은 뱀과 직접 연관되어 있다. 이 용이 동서양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 알아보면, 뱀을 바라보는 시각을 더욱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다.

 

동양에서는 용이 대개 황제가 가진 권위를 상징하는 성스러운 존재로서 사람들에게서 존경과 숭배를 받고, 색깔도 대개 긍정과 젊음과 희망을 나타내는 청색이다. 용이 되지 못한 뱀을 이무기라고 부르며 용과는 다른 요물로서 확실히 구분하고 있는데, 이는 용에게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존경심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을 해치는 몹쓸 뱀은 흔히 용이 되지 못한 화풀이를 사람들에게 하는 포악한 이무기로 나타난다. 곧 알에서 태어난 평범한 뱀이 수련을 거치면서 천 년을 묵으면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갈 수 있다는 기본 전제가 깔려 있다. 이는 용이 지닌 본성이 포악하지 않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인식은 뱀에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그러나 서양에는 이무기라는 개념이 없다. 용은 알에서 태어날 때부터 용이 지닌 특징을 그대로 띠고 있다. 거친 날개가 있고 날카로운 발톱이 있다. 곧 본성이 포악하여 사람들을 해치는 괴물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악마와 결탁하거나 악마에게 조종당해 사람들을 지옥으로 인도하고자 온갖 술책을 쓰는 사악한 존재로까지 묘사되기도 한다. 아더왕 전설이나 베어울프 전설 따위에서 볼 수 있는 용은 신하들을 잡아먹고 왕에게 저항하는 괴물이다. 이들은 대개 붉은 핏빛이거나 검다. 둘 다 피와 어둠과 부정을 뜻하며 악마를 대표하는 색깔이다. 포악한 용에 맞서 싸우는 용사들이나 마법사 이야기는 현대에까지 전해져 내려와 서양 영화에서 자주 인용되는 단골 주제이다.

 

웃긴 것은 결국 동서양 공통으로 뱀을 본떠 용을 상상해냈으면서도, 서양에서는 이무기라는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용은 용이고 뱀은 뱀이라는 식인데, 뱀은 성경에 나오듯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악한 존재이고 용은 뱀을 본뜬 존재이니 마찬가지로 사악하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영화에도 고스란히 드러나서, 괴물 영화 분야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는 외국 영화에서 뱀은 매우 좋은 주제거리가 되었다. 동정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초점 없는 눈동자로 공포에 떨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며 끝이 갈라진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뱀을 상상해 보자. 뱀은 꼼짝없이 얼어버린 사람을 그윽한 살의가 서린 눈으로 쳐다보더니, 순식간에 사람을 휘감아 뼈와 내장을 부수고 터뜨린 뒤 통째로 삼켜버린다. 서양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야말로 '악의 화신'이라고 할만하다.

 

그런 무시무시한 뱀을 대표하는 것들로 주로 동남아시아에 사는 비단구렁이나 보아, 아프리카와 서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폭넓게 분포하는 코브라, 그리고 중남미 정글에 사는 아나콘다가 있다. 이 영화는 제목 그대로 아나콘다를 주제로 삼았다. 그리고 거대한 아나콘다가 사람들을 습격하여 잡아먹는 무시무시한 장면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사람을 물어 흔들고 휘어 감고 조아서 삼키는 아나콘다는 누가 봐도 기가 질리게 만든다. 특히 아나콘다가 삼킨 사람이 뱃속에서 꽉 끼여 바깥으로 윤곽을 드러내는 장면이나, 새끼들에게 주고자 잡아먹은 사람을 토해내는 장면은 끔찍하기 짝이 없다.

 

시작할 때부터 정글 속에서 조난당한 배에서 절박하게 구조를 요청하는 사람을 아나콘다가 습격하면서 영화가 시작되는데, 교묘하게도 아나콘다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뱀을 수호신으로 섬긴다는 중남미 원시 부족을 찾아 주인공 일행이 아마존 정글로 들어가는데, 돈벌이에 눈이 멀어버린 악당 한 사람을 못 알아보고 배에 태우는 바람에 일이 꼬일 대로 꼬이기 시작한다. 아나콘다가 재규어를 잡아먹으며 앞으로 일어날 끔찍한 참상을 예고하고, 악당이 주인공 일행과 동행하면서 지름길을 안다며 특정한 지점으로 가도록 자꾸만 유인하면서 불길한 예감은 갈수록 커진다.

 

드디어 불길한 예감이 현실이 되어 주인공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이 영화 맨 처음에 나왔던 조난당한 배를 수색하고 돌아가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고, 악당은 아나콘다를 잡아 돈벌이를 하겠다는 속셈을 거침없이 드러내며 주인공 일행을 위협한다. 설상가상으로 거기에 동조하는 사람까지 나오면서 주인공 일행은 울며 겨자 먹기로 아나콘다 사냥에 나선다. 마침내 상상을 뛰어넘는 거대한 아나콘다가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사람들은 원시 부족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라는 걱정은커녕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극심한 공포에 시달리게 된다. 시도 때도 없이 습격해 오는 아나콘다와 돈벌이에 눈이 먼 악당 사이에서 주인공 일행은 더는 나빠질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른다. 이들은 과연 어떻게 위기를 빠져나갈 것인가?

 

영화가 나름대로 괜찮아서 꽤 재미있게 봤는데, 엉뚱하게도 갑자기 그야말로 완벽한 배타성과 흑백논리를 보여주는 개신교도들이 떠올랐다. 임진왜란 때 조선 침략 선봉대를 이끈 고니시 유카나가가 독실한 기독교도였다고 해서 그를 괴롭힌 이순신이 하느님에게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고, 그 죄인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토록 존경하는 까닭을 이해할 수 없다는 정신나간 소리를 거침없이 해대는 이들이다. 내가 알기로 이런 독특한 견해를 지닌 이들이 이 영화를 보고 깨달을 수 있는 점을 담은 글을 쓴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아서 안타깝다. 그 평론을 볼 때 집중도 그다지 하지 않고 대충 봤고 그나마 본 지도 꽤 오래 되어서, 이제는 내가 본 것이 지금 기억하고 있는 그대로인지 아니면 다른 것을 보고 멋대로 상상한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어쨌든 내가 알고 있는 대로 써 보겠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성경에 따르면 뱀은 사람과는 절대 타협할 수 없는 악한 존재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런 악한 존재를 섬기는 원시 신앙을 지닌 이들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반드시 회개해야 하는 이교도들이다. 그들에게 다가가는 이들에게는 반드시 악마가 접근하여 해를 끼친다. 주인공 일행이 중간에 태운 악당이 바로 악마가 보낸 전령이며, 전령에게 이끌린 그들은 아나콘다라는 악마에게 해를 입은 것이다. 악당이 애당초 아나콘다에게 주인공 일행을 끌고 가려고 접근했다는 사실은 그 증거로 인용된다.

 

아나콘다가 악당을 잡아먹어버린 것은, 어차피 악당은 악마가 보낸 전령이므로 그럴 수도 있다고 한다. 전령이 악마에게 먹이가 되는 것은 악마들이 지닌 습성으로 볼 때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나콘다는 처음에는 악당을 잡아먹을 생각이 없었고 악당이 묶어놓은 제물을 그냥 먹으려고 했는데, 그러면 악마라는 정체가 탄로날까봐 그것을 숨기고자 악당을 어쩔 수 없이 잡아먹어버린 것이라는 놀라운 해석을 내놓는다. 어차피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악마, 곧 아나콘다는 악당을 잡아먹은 뒤에도 쉽게 사람들을 잡아먹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개의치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까 예상 밖으로 사람들이 강하게 저항하면서 계획대로 일이 굴러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단정 지어 버린다. 하느님이 보살펴 주셨다는 이야기는 절대 꺼내지 않는다. 이교도를 찾아가는 불순한 무리들을 하느님이 지켜준다는 건 말도 안 되기 때문이다.

 

가장 기가 막힌 것은 선교사들이 그들에게 찾아갔다면 그들은 아나콘다를 만나는 봉변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논리이다. 설사 그들이 아나콘다를 만나 사투를 벌이다 죽는다 하더라도, 그 글을 쓴 이들은 그것을 순교로 여기며 찬양할 것이다. 선교라는 명목으로 온 세상에 피바람을 불러일으킨 제국주의를 생각하면서 나는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그 글에서마저 완벽한 배타성을 드러내고 있다. 자기들이 믿는 신을 믿지 않는 이교도들은 반드시 악마가 찾아와 피해를 입는다는 논리가 배여 있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 그런 해석이 나오기를 의도했든 그러지 않았든, 정말 해석은 하기 나름이라는 사실을 그 글을 되새겨 보면서 확실히 느꼈다. 아마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감독이 자기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아나콘다를 소재로 삼아 이 영화를 만들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감독은 그저 뱀이 보여주는 흉포함과 잔인함을 확실하게 드러내는데 온 신경을 쏟았다고 했으며, 그 말은 의심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나는 앞에서 풀어놓은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영화가 성공한 뒤 만들어진 '아나콘다 2'를 보면서, 나는 '아나콘다'를 보고 감상문을 쓸 때 했던 생각과 같은 범주에서 되새겨 볼거리를 찾을 수 있었다. 분명히 그냥 즐기려고 이 영화를 보다가 어쩌다가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게 됐는지 이 글을 쓰면서도 이해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일단 생각이 났으니 마음대로 부지런히 써야겠다. 내가 이런다고 해서 혹시나 이 글을 읽은 사람들이 괜히 쓸데없는 생각에 빠지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그저 이런 공포 영화에서 느낄 수 있는 재미(?)만 확실하게 챙기면 그만이다. 그리고 쩍 벌어진 무시무시한 뱀 주둥이와 아무 감정 없이 그저 살기만 그윽한 눈동자를 내 눈으로 직접 보는 일은 없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부기맨 - Boogeyma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과학이 크게 발달한 요즘도 귀신 이야기는 사람들 관심에서 벗어날 줄 모른다. 비록 시간이 흐르면서 지구 온난화 때문에 갈수록 심해지는 더위를 몰아내는데 좋은 방법으로 전락해 버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귀신 같은 초자연 존재와 그 때문에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 같은 심리 현상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이들도 분명히 많다. 과학과 심리학을 넘나드는 주제인 초자연 현상과 그 때문에 생기는 공포는 초과학이 나름대로 발달하기는 했어도 여전히 설명하기가 쉽지 않고, 호기심이 넘치는 사람들은 그 모호한 영역을 설명하고자 본능과도 같이 온갖 논리를 고안해 낸다.

 

귀신이라고 하면 유물론자들은 턱도 없는 믿음 때문에 쓸데없이 헛것을 보는 것이라고 코웃음을 치겠지만, 초자연 현상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자료도 지금까지 꽤 많이 모여서 무작정 그렇게 단정 지어 버리기도 힘들다. 논리와 비논리를 넘나드는 모호한 영역에서 논쟁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그 논쟁 속에서 초자연 현상은 생명을 얻는다. 귀신도 그 속에 살아 있다. 논쟁에 목숨을 거는 이들을 비웃듯이 귀신들은 날 보란 듯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괴롭히며 심지어 목숨을 빼앗아가기도 하지만, 때로는 좋은 친구가 되거나 사람들을 돕기도 한다.

 

온갖 귀신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 떠돌아다니지만, 어디에 가든지 끈질기게 명맥을 이어오는 전통(?) 귀신 이야기가 있다. 한국과 일본에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려 얼굴을 가리고 하얀 소복을 입은 처녀귀신이 있고, 중국에 청나라 조정 대신들이 입는 정복(?)을 입고 신선한 피를 찾아다니는 강시가 있고, 홍콩에 기분 나쁘게 깔깔 웃어대며 사람들을 쫓아다니는 홍콩할매귀신이 있다. 그렇다면 서양에는 무엇이 있는가?

 

바로 이 영화에 나오는 부기맨(Boogey Man - Boogie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수도 있는데, Boogie는 흑인을 나타내는 미국 속어이므로 괴물 이름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본다)이 있다. 프레데터처럼 손등에 칼을 찬(프레데터가 쓰는 주력 무기인 리스트 블레이드(Wrist Blade)와 거의 비슷하게 생겼다) 프레디와 항상 날이 피범벅인 큰 도끼를 들고 다니는 제이슨이 '프레디 대 제이슨(Freddy VS Jasson)'이라는 영화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하고 심지어 큰 인기를 끌기까지 했지만, 사실 부기맨 앞에서는 명함도 못 내민다. 매우 유명하고 나름대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드라큘라와 좀비도 부기맨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프레디, 제이슨, 드라큘라, 좀비 따위 모든 괴물들은 실체가 분명하며 따라서 죽일 방법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부기맨은 전혀 정체를 알 수 없다. 15세기에 켈트 족 전설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부기맨은 서양에서 잔약한 살인마나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나갈 때마다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는 했지만, 그 정체는 결코 밝혀지지 않았다.

 

어린 주인공은 아버지가 들려주는 그 정체 모를 괴물 이야기 때문에 극심한 공포에 시달린다. 벽장 속에 아이를 가둔 아버지는 1에서 5까지 세고 아무 일이 없으면 귀신은 없는 거라면서 아이를 달래지만(?), 이미 극도로 공포에 질린 아이에게 그런 말이 제대로 통할 리가 없다. 아버지는 어릴 때 남은 기억은 평생 동안 사람들을 따라다닌다는 상식을 분명히 무시한다. 아이를 학대하는 건지 정말 담력을 키워주려는 건지 어떤 건지도 알 수 없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불을 끄고 잠에 빠지려던 아이는 뭔가 방 안에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그 예감은 아주 서서히 현실이 되어,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커먼 괴물이 아이가 누워있는 침대로 다가온다. 극도로 공포에 사로잡혀 이불을 뒤집어 쓴 아이에게 다가와 이불을 걷어낸 이는 아버지였다. 아이가 방 안에 무언가 있다고 말하자 아버지는 피식 웃으면서 귀신 이야기는 사람들이 꾸며낸 이야기일 뿐이라면서 구석구석을 직접 돌아다니고 헤집는다.

 

마지막으로 옷장에까지 들어갔다가 나와서 어깨를 으쓱하는 아버지. 그 순간 옷장 안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튀어나와 아버지를 옷장 안으로 끌고 들어간다. 너무 놀라서 비명도 지르지 못하는 아이 앞에 아버지가 옷장 안에서 갑자기 튀어나온다. 그러나 상체만 튀어나왔지 하체는 분명히 옷장 안에 있는 괴물에게 잡혀 있다. 천장과 바닥에 쉴 새 없이 내팽개쳐진 아버지는 극도로 심한 고통 때문에 나중에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비명이 멈추는 순간 아버지는 다시 옷장 안으로 끌려들어가 사라진다. 그 뒤 아이는 다시는 아버지를 볼 수 없었다.

 

아이는 그 끔찍한 경험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믿지 않는다. 15년이 지난 뒤 어엿한 직장인이 된 아이는 예쁜 여자 친구까지 두고 근심 걱정이 하나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는 남들이 자기를 믿어주지 않는 현실이 원망스럽기만 하고, 아버지를 잡아간 괴물이 다시 나타날까봐 자기 혼자 두려워한다. 실제로 그가 사는 집에는 찬장과 여닫이문이 하나도 없다. 아버지를 잡아간 괴물이 찬장 안에서나 여닫이문으로 가려진 공간 안에서 불쑥 튀어나올까봐 그런 것이다. 그런 방법이 효과가 있었는지 괴물은 나타나지 않고, 그는 공포에 떨면서도 괴물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겨우 마음을 놓으며 그럭저럭 살았다.

 

그러나 아버지가 사라진 뒤 계속 상태가 좋지 않던 어머니가 더욱 안 좋아졌다는 소식을 삼촌에게서 들은 주인공은, 그토록 가기 싫어하던 옛날 집에 어쩔 수 없이 찾아간다. 그런데 주인공이 옛날 집에 가자마자 그가 걱정하던 대로, 정체를 감추고 있던 괴물이 다시 나타나 주인공과 절친한 이들을 잡아가기 시작한다. 그는 괴물을 막으려면 결국 자기가 나서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버지가 괴물에게 잡혀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상한 여자아이에게서 용기를 얻어 괴물에게 정면으로 맞선다. 마침내 괴물이 정체를 드러내면서 주인공과 사라진 사람들을 둘러싼 온갖 비밀이 하나 둘씩 밝혀지며 이야기는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닫는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군대에서 읽었던 스티븐 킹이 지은 '그것(IT)'을 떠올렸다. 거기에서 '그것'은 거대한 뱀 같은 괴물도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지니고 있기 마련인 어린 시절에 느꼈던 원초 공포를 무엇보다도 뚜렷하게 되살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 극렬한 공포에 사로잡힌 이들은 환상인지 현실인지 물리 현상과 초자연 현상을 구분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가운데 자기가 어릴 때 무서워했던 그것(!) 때문에 죽고 만다. 실체를 알 수 없고 밑도 끝도 없이 모호하기만 하니, 흉포한 공포 속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단말마를 맞이하기 직전에 '악령(Evil Spirit)'도 '괴물(Monster)'도 아닌 '그것(IT)'이라는 글자를 남긴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부기맨도 결국 모호한 그것이 뚜렷하게 정체를 드러낸 것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감독은 부기맨이라는 괴기스러운 초자연 존재가 사람들에게 더욱 큰 공포를 선사할 수 있도록 세심한 부분에까지 나름대로 신경을 많이 썼다. 배경음악에 신경을 많이 쓰지는 않았는지 음악은 그다지 많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 대신 초중반에 느린 사건 진행 속에서 주인공이 부기맨을 느끼는 과정을 분명히 나타내고,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두려워하기 마련인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어두컴컴한 공간을 강조한다. 공간만 강조하면서 부기맨이 무엇인지 절대 정확하게 드러내지 않으면서 사람들만 사라지게 하다가, 주인공이 자기를 괴롭히는 괴물에게 맞서고자 다가가는 그 순간부터 부기맨을 갑자기 전면에 등장시키며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

 

도대체 감독은 이 영화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한 걸까? 그저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원초 공포를 끌어내려고 한 걸까, 아니면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 파헤치려고 한 걸까? 누구도 정확하게 밝혀내지는 못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영역인 무의식 그 속에 자기도 모르게 스며들어 버린 무시무시한 공포를 이끌어내면 부기맨과 같은 괴물이 현실로 나타나는 걸까?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환상일까?

 

감독은 그 모호한 경계를 넘나들며 우리가 모호함에 관하여 품고 있는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을 자꾸만 들쑤신다. 그런 시도는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일단 굳게 닫힌 찬장 안이나 침대 밑 같은 어두컴컴한 공간을 자꾸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덜덜 떨기 시작한 나 같은 사람들에게서는 말이다.

 

전설 속에서나 나오는 괴물이 현실로 나타나는 끔찍한 공포는 그 실체가 밝혀지지 않았기에 더욱 끔찍하다. 과연 주인공은 어떻게 실체를 알 수 없는 그 괴물에게 맞설까? 도저히 눈을 믿을 수 없게 만드는 그런 일을 버젓이 저지르고 다니는 놈에게 말이다. 그는 너무 두려워서 눈을 감은 채로 숫자를 센다. 그리고 골똘히 생각에 빠진다.

 

1, 2, 3, 4, 5. 1에서 5까지 다 셌어. 그런데도 귀신이 나를 끌고 가지 않았어. 그러면 아빠가 말한 대로 이제 아무 일이 없는 거야. 그렇다면 눈을 떠도 될까? 아니야. 나는 아빠 말도 믿을 수가 없어. 5까지 센 뒤에 아무 일이 없다고 해서 눈을 뜨는 바로 그 순간 부기맨은 괴성을 지르며 나를 끌고 가 잡아먹어 버리겠지. 나는 눈을 뜨지 않을 거야. 5를 넘길 거야. 그렇다면 6을 넘긴다면 어떻게 될까? 과연 어디까지 숫자를 세어야 내 앞에 있는 정체 모를 괴물이 사라질까?

 

그는 어느 순간 깨달았다. 숫자를 세는 자체가 아무 뜻이 없다는 사실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