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의사 헤리엇의 마음이 따뜻해지는 개 이야기
제임스 헤리엇 지음, 김석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3년 6월
평점 :
품절


2007년 12월 7일에 있었던 일이다. 당직분대장과 근무를 교대한 뒤 당직병 근무를 서면서 무엇을 할 지 업무 목록에서 고르고 있었다. 그런데 내 왼쪽 옆으로 갑자기 시커먼 뭔가가 빠르게 휙 지나갔다. 요즘 'Supernatural'에 푹 빠져 있던 터라 나는 'Supernatural - Season 1'에 나오는 윈딩고인줄 알고 기절초풍했다. 하마터면 으악 소리를 지를 뻔 했지만, 목구멍까지 밀려나온 비명을 꾹 눌러 참았다. "으악"이 뱃속으로 다 내려가자마자 임길순 해병이 나타났다. 녀석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나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아. 뭘 그렇게 놀라십니까. 전태욱 해병님. 갭니다. 개."

 

"갑자기 웬 개? 어디에서 데려왔어?"

 

"저희도 모릅니다. 순검 청소하기 전에 갑자기 들어오더니, 도무지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아서 그냥 데리고 있었습니다."

 

"당직사령이 뭐라 안 그랬나?"

 

"별 말 안 했습니다. 개 저기 있군요."

 

 

나는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임길순 해병이 가리키는 곳에 갈색 털을 가진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개 한 마리가 있었다. 어디에서 많이 봤다 했더니 사단 본부 쪽에서 본 그 개였다. 온 사단을 굴러다니는 놈이 어쩌다가 여기로 굴러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괜히 놀랐다는 생각에 한숨을 쉬었다.

 

마음을 가라앉힌 뒤 개를 자세히 관찰했다. 혓바닥을 내밀고 발을 쳐들고 헥헥 가쁜 숨을 몰아쉬는 보통 똥개는 분명히 아니었다. 털이 고르고 윤기가 흘렀으며, 몸집도 아담하고 얼굴도 잘 생긴 것이 귀여움을 한 몸에 받게 생겼다. 함부로 왈왈 짖지도 않고 얌전했다. 레이다 기지에서 키우는 덩치만 무지막지하게 크고 귀여운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으며 낯선 사람을 보기만 하면 으르렁거리고 왕왕 짖어대는 정나미 떨어지는 군견과는 과장해서 말하자면 차원이 달랐다.

 

무엇보다도 내 마음을 크게 흔든 건 아무 티 없이 맑은 눈망울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 초롱초롱한 눈에는 아무런 적개심도 탐욕도 없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때만큼은 개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심전심'으로 알 수 있었다. 개는 자기를 보살펴줄 따뜻한 손길을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양현 해병이 사단 전산실에서 근무를 마치고 돌아올 때 잠깐 관심을 보였더니, 계속 쫓아내는 데도 몇 번이고 뒤쫓아온 것이다.

 

그 눈망울을 보고 개 옆에 계속 있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런데 임길순 해병이 사무실에서 개를 계속 돌보겠다고 해서, 일단 다시 업무 목록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뒤 임길순 해병이 자겠다고 사무실에서 나와 생활반으로 들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개가 낑낑거리기 시작했다. 자꾸 신경이 쓰여서 사무실에 가서 문을 열었더니 몸을 웅크리고 낑낑거리던 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벌떡 일어나 나를 바라봤다. 혹시라도 배가 고픈 게 아닐까 해서 라면과 빵, 심지어 우리가 식당에서 몰래 퍼 와 먹다 남은 밥까지 가져다 줬지만 먹지 않았다.

 

문을 닫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자리에 앉은 뒤 몇 초도 안 지나서 또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사무실로 가서 문을 열었더니 나를 보고 벌떡 일어났다. 목이 마른 게 아닐까 해서 물을 퍼 주었지만 마시지 않았다. 문을 닫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자리에 앉은 뒤 몇 초도 안 지나서 역시나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공부고 뭐고 다 집어치웠다. 개가 시끄럽게 굴어서 짜증이 난 게 아니라, 아까 분명히 본 보살펴 줄 사람을 원하는 그 간절한 눈망울을 도저히 더는 못 본 척 할 수 없었다. 벌떡 일어나 사무실 문을 열었더니 개가 총알 같이 튀어나와 중대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생활반 문을 닫아놨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이 새끼 개새끼 그러면서 한바탕 난리가 났을 것이다.

 

사무실로 개를 데리고 갔다. 현관 근무를 마치고 철수하는 후임에게 창고에서 스티로폼과 모포를 가져오라고 해서 자리를 깔았다. 개를 자리 위에 앉힌 뒤 모포를 덮어주고 나도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보드라운 털을 계속 쓰다듬으며 개를 쳐다봤다. 예상했던 대로 개는 낑낑거리지 않고 얌전히 있었다. 아까도 말했듯이 털이 고르고 윤기가 있는 것을 보니 분명히 누군가 키우다가 버린 개이다. 사람을 경계하지 않고 졸졸 따라다니며, 사람이 없으면 낑낑거리고 쓰다듬어 주는 것을 좋아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그 개를 버린 사람은 누구일까. 그토록 예쁘고 주인에게 충성스럽기만 한 개를 도대체 왜 버린 걸까. 그 주인도 한 때 그 개를 애지중지했을 것이다. 밥 먹이고 집 지어주고 쓰다듬어 주는 것만으로 성에 차지 않으면, 인형놀이 하듯이 옷 해 입히고 장신구 달아주고 각종 화장품까지 발라줬을 것이다. 어딘가 아파서 깽깽거리면 병원 대려가서 주사 놔 주고 약 지어주고 아이 키우는 만큼 지극정성으로 길렀을 것이다. 애견산업 규모가 연간 1조 원이나 된다고 하니 그렇게 극성인 주인이 있을 가능성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다가 키우는데 들어가는 돈이 부담스러워지면 그냥 버린다. 한 때 그토록 아꼈던 엄연한 생명인데도 말이다. 생명이 없는 인형과는 차원이 다른데도, 그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개를 버리는 사람을 보면 정말 너무하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가장 기초인 윤리 가운데 하나인 생명 윤리를 대수롭지 않게 스스로 폐기 처분하는 그들은 과연 올바른 이성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는지 의심스러워진다.

 

문득 미영이 누나가 생각났다. 누나가 동물애호협회(?)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계셔서, 싸이월드 미니홈피도 동물보호, 버린 개 주인 찾아주기 같은 동물 관련 게시물로 가득 차 있다. 그 덕분에 나는 그 홈피에 있는 게시물들을 보며 가슴이 뿌듯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르기 힘들다. 도대체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해도 끼치지 않는 동물, 특히 개들에게 왜 그러는 것일까? 사람을 공격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못 생긴 것도 아니다. 그저 자연 법칙대로 살다 가고, 사람들이 데려다가 기르면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고 즐거움을 주며 때로는 자식보다도 더욱 훌륭한 동반자가 되지 않는가?

 

그렇다고 해서 그놈들이 무조건 훌륭하다는 건 아니다. 보통 개들과 마찬가지로 본능에 충실하고 미련하다. 먹는 것에 집착하다가 뒤룩뒤룩 살이 쪄 퉁퉁 불은 굵은 소시지 양쪽으로 가는 소시지 네 개가 튀어나온 것 같은 우스꽝스러운 형상이 되어버린 트리키 같은 개도 있고, 어미가 된 뒤에도 방정 떤답시고 자기 새끼와 차를 쫓는 경주를 하다가 새끼들에게 왕좌를 빼앗길 위협을 느끼는 조크 같은 개도 있다. 그런가 하면 옥수수가루와 우유만으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끊임없는 노동과 활동으로 다져진 놀라운 건강을 자랑하며 눈 속에서 잠을 자는 피터 트렌홈 씨네 개 팁, 평생 동안 딱 한번 짖은 윌킨 씨네 개 지프, 작가인 수의사 해리엇이 부인 헬렌과 데이트 약속을 잡을 수 있게 도와준 개 댄……이 책 '마음이 따뜻해지는 개 이야기'에 나오는 개들은 바보 같으면서도 훌륭한 그런 개들이다.

 

그런 개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씨 좋은 사람들도 이 책을 읽는 사람들 가슴을 훈훈하게 데운다. 애완견 트리키가 없으면 기절할 것 같은 펌프리 부인, 수술을 시키고 싶지 않을 정도로 퍼시를 사랑하는 화가 파트리지, 오랜 세월 동안 함께한 친구 같은 개 보브가 고통 없이 잠들도록 가슴 아린 고통을 참으며 안락사에 찬성하는 노인, 항상 적자가 나더라도 어떻게든지 버려진 개를 데려다 키우는 루이자 로즈 부장, 빌어먹을 개새끼 욕을 해 가면서도 결국은 수술이 끝난 래브라도 곁을 지키는 트리스탄, 그리고 주인공이자 이 책을 지은 수의사 해리엇……금방이라도 멸망할 것 같은 냉혹하고 잔인한 세상이 그래도 용케 버티며 굴러가는 까닭은, 바로 이런 사람들과 동물들이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기 때문인 것 같다.

 

아무 부담 없고 푸근한 글을 읽다 보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리고 몇 번이고 킬킬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일부러 기교를 부린 흔적이 전혀 없이 겪은 일을 털어놓았을 뿐인데, 그 안에 재치와 재미가 넘친다. 자연 속에서 한평생을 보내면 마음이 탁 트이면서 차원이 높아지는가 보다. 앞으로 글을 써서 먹고 살까 생각도 해 보고 있기는 하지만 이미 인공 도시에 찌든 나에게는 그저 부럽기만 한 능력이다.

 

당직 근무를 교대한 뒤 나는 그 개가 아침까지 중대에 남아있기를 바라면서 생활반으로 들어가 푹 잤다.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사무실에 가 봤더니 그 개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날씨도 추운데 어디에서 어떻게 그 매서운 추위를 견딜까. 낑낑대면서 오들오들 떨 그 개를 생각하니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그 크고 맑은 눈망울을 잊을 수 없었다. 며칠 동안 마음 한 구석에서 괴로워하다가 이 책을 읽으면서 그 개를 다시 떠올렸다. 그리고 괴로움을 희망으로 바꿨다. 옛 주인을 다시 찾거나 새로운 주인을 만나 행복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청춘의 문장들'에 이어서 이 책 '마음이 따뜻해지는 개 이야기' 독후감을 미영이 누나에게서 도움을 받아 쓸 수 있었다. 누나는 그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열심히 사셨을 뿐이지만,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영감을 받았다. 그러니 내가 어찌 누나에게 고마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누나뿐만 아니라 그 날 본 개처럼 아무 사심 없이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자연스럽고 순박한 동물들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아야겠다. 나도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순간마다 최선을 다하면서 산다면, 내가 원하든 그렇지 않든 알아주는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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