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재구성 - 글로벌 경제위기 제2막의 도래
김광수경제연구소 지음 / 더팩트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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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온 세상에서 못살겠다고 아우성이 터져나오고 있다. 3차 세계 대전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경제위기 안에서 마치 전쟁이 가져다 주는 공포와 불안만큼이나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자고 일어나면 자기가 사놓은 부동산 가치가 올라가 있고, 거리에는 경제 호황을 즐기는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언론에서는 연신 경기가 회복되고 경제성장이 잘 이루어지고 있다는 낙관론만 줄기차게 보도되던 그 시절은 결국 한 여름밤에 꾼 부질없는 꿈과도 같았던 것일까. 좋았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기에 지금과 같은 엄청난 경제위기가 사람들에게는 더욱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 충격은 사람들이 그동안 지니고 있었던 기존 정치권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에 불을 지펴 지금까지 정권을 잡아온 기존 정치세력은 갈아치워야 한다는 인식을 확산시켰고, 그 결과로 각국 정치계에서 기존 정치인들이 선거에서 패배하고 시민들이 정치에 직접 참여하고자 더욱 많이 힘쓰고 있다. 게다가 국제금융위기를 불러일으킨 주범으로 지목된 월가 금융기관들에 미국 국민들이 시위로써 직접 항의하고 그 움직임이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앞으로 자본과 정치가 결탁한 20세기형 민주주의가 드러낸 한계에 정면으로 저항하는 움직임이 갈수록 거세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타나고 있다.

 

물론 전 세계에서 시민들이 직접 문제를 해결하고자 발벗고 나서고 있다는 점은 분명히 환영할 만한 일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들이 정치에 직접 참여하면서 대의 민주주의가 지닌 한계를 극복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사람들이 분노를 폭발시키고 행동에 나서는 동기에서 아직까지는 중요한 것이 빠졌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마이클 센델은 유명한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미국인들이 월가에서 어마어마한 연봉을 챙기고 있는 금융인들에게 분노하는 까닭은, 미국인이 공산주의 사상에 경도되었기 때문은 당연히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99%'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져가는 '1%'이 지닌 '탐욕' 그 자체를 문제로 삼고 있기 때문도 아니라고 지적했다. 만약 탐욕 그 자체를 문제로 삼고 있었다면 이미 '월가를 점령하라'와 같은 시위가 이미 여러 차례 나타나서 많은 사람들에게서 호응을 얻었어야 했는데, 실제로는 지금까지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이클 센델은 미국인들은 '탐욕'보다는 '실패'에 더 강하게 분노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지금뿐만 아니라 오래 전부터 월가에서 그들 표현을 빌리자면 '금융 혁신'을 선도한 이들은 보통 사람들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연봉을 받으며 살았지만, 미국인들은 그들에게 아무런 문제 제기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런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금융업이 발전하면 사회 전체에 더욱 큰 부가 찾아올 것이라는 믿음이 미국 사회 전체에 만연해 있었고, 보통 사람들도 금융 파생상품 발달이 실물 경제에 불러일으킨 거품에 취해 있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로 집을 산 가난한 사람들은 자기들도 집이 생겼다는 '성공' 신화에 젖어 행복했고, 사 놓은 부동산 가격이 치솟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열광하면서 거리에서 소비를 즐겼다. '자산 효과'는 거품에서 비롯된 것인만큼 언젠가는 갚아야 하는 빚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잊고, 경기가 회복되고 생활이 윤택해지는 '성공' 신화에 젖었던 것이다.

 

하지만 신화가 신기루로 판명되는 데는, 다른 말로 하자면 '성공'이 '실패'로 뒤바뀌는 데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한 번 꺼지기 시작한 거품은 사람들이 그동안 누렸던 모든 번영과 부를 순식간에 날려버렸고, 사람들은 그 허탈함과 분노를 이기지 못했고 거리로 나와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뭔가 바뀌어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 말고는 사실 뚜렷한 목표의식이 없어 보인다. 실제로 탐욕스러운 금융자본에 반대한다는 명목으로 시위가 계속 벌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분명한 생각이 담긴 구호가 아닌 그저 분노를 쏟아내는 수준에 그치다 보니까 온갖 단체들이 언론을 타고자 시위대에 합류해 정체성이 모호해지고 있고, 그에 따라 시위대 안에서도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고민하며 회의감에 빠져드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마이클 센델이 지적한 대로라면, 만약 이 위기가 겉으로 보기에 어느 정도 극복되기만 한다면 그들은 이렇게 우왕좌왕하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기 힘들 가능성이 높다. 이번 위기는 절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곧 지금까지 각국 정부에서 재정적자를 무릅쓰고 경기부양을 추진하는 방식으로는 절대 극복할 수 없다. 시장경제 체제 안에서 자연스럽게 거품이 빠지도록 유도하고 그동안 허리띠를 최대한 졸라매서 빚을 갚아나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각국 정부에서는 만약 긴축 재정 정책을 펴서 허리띠를 졸라매면 그만큼 정치 부담이 커지기 때문에, 실제로 지금까지 그랬듯이 어떻게든지 긴축 정책은 자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러면 앞으로 악성 인플레가 만연하면서 사람들은 더욱 살기 힘들어질 것이고, 사람들은 계속 되는 어려움 속에서 분노를 쏟아낼 수밖에 없다.

 

안타깝게도 마이클 센델이 지적한 것은 미국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 같지는 않다. 정도 차이만 있을 뿐 전 세계가 금융 & 부동산 거품에 휩싸여 있었으며, 그 속에서 사람들은 거품이 불러일으키는 성공이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점을 직시하지 못하는 착시 현상에 빠져 있었다. 경제를 공부한다면서 경제 기저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려고 하지 않고, 그저 돈을 벌 수 있는 정보만을 찾아다니는 것이 경제 공부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에 빠져서, 재테크 서적 광풍을 불러일으켰으며 기존 정치권에서 저지르는 온갖 정책 실패에 본의든 그렇지 않든 제대로 책임을 묻지 않았다. 그 결과는 사람들을 참혹할 정도로 조여드는 경제위기로 나타나고 있다.

 

분명히 사람들은 이런 위기를 불러일으킨 권력과 자본을 가진 자들에게 분노하고 있다. 하지만 그 분노가 단순한 분노만으로 끝난다면 항상 지금까지 그랬듯이 역시 어쩔 수 없다는 냉소와 조롱거리만이 될 뿐이다. 사람들이 권력과 자본이 결탁해서 잘못된 정책을 양산한 20세기형 민주주의가 지닌 한계를 극복해야, 21세기 초부터 세계를 대혼란에 빠뜨리고 있는 이번 위기를 극복하고 지금까지 누적된 많은 모순을 해소할 단초를 마련할 수 있다. 그러려면 이번 금융위기가 도대체 왜 발생했는지를 명확하게 인식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 문제를 올바르게 이해해야 한다는 것은 기초 상식이다.

 

이번에 김광수경제연구소에서 새롭게 발간한 '위기의 재구성'이 지금과 같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현실을 명확하게 인식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김광수경제연구소는 이미 국제 금융위기가 터진 2008년이 오기 전부터 경제보고서에서 금융위기 조짐을 계속 경고했는데, 2008년부터 그 경고가 현실이 되면서 탁월한 경제 분석 능력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그 탁월함이 이번에 발간한 '위기의 재구성'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전 세계를 충격과 공포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경제위기 본질은 결국 전 세계에서 넘쳐난 탐욕과 무지 때문이라는 사실을 다양한 사례를 들어서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그 탐욕과 무지가 극도로 활개를 쳤던 곳이 각국 부동산 시장이었으며, 실제로 지금 끊임없이 언론 보도를 타고 있는 유럽재정위기도 결국 유럽 부동산 시장 거품이 꺼지면서 거품을 기반으로 삼은 경제가 근본에서부터 무너지고, 기존 정치권에서 올바른 정책 능력을 함양하지 못해 끊임없는 정책 실패를 일삼았기 때문이라는 점을 유럽 각국 경제를 소개하면서 강조하고 있다. 이 말고도 금융위기가 벌어지는 메커니즘, 유럽재정위기에 불을 지핀 미국발 국제금융위기가 지닌 본질과 같이 세계경제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핵심 지식도 풍성하게 곁들였다.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는 점을 여러 가지 사례를 들어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을 적극으로 추천하면서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점은, 경제 서적을 읽을 때는 제발 그 책에서 돈을 버는데 필요한 정보를 찾기보다 경제 전반 흐름과 그 본질을 이해하는데 훨씬 더 많은 공을 들이라는 것이다. 탐욕에 사로잡혀 돈을 좇으면 그때부터 이성이 흐릿해지기 시작하고 가치 판단에 혼란이 오면서 진실을 바라볼 수 없게 된다. 사실 재테크 열풍이 불 때 사람들은 경제 공부를 한다고 했지만, 실제로 그들은 경제 공부를 한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경제 정보를 좇아다녔을 뿐이다. 그렇기에 스스로 경제 흐름을 읽고 판단하는 능력을 기르지 못했으며, 기존 정치권에서 일삼는 거짓말에도 쉽게 속아넘어가 실패한 경제 정책이 낳은 희생자로 전락한 것이다.

 

2006년에 다음에 개설한 김광수경제연구소포럼도 2008년부터 회원 수가 급증하기 시작했는데, 앞에서 지적했듯이 사람들이 경제 지식을 습득하려고 한다면서 실제로는 포럼이나 공부방에 찾아와서 재테크에 필요한 정보를 달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 김광수경제연구소포럼 공부방은 재테크 상담을 하는 곳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경제와 사회 전반 문제를 분석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곳이라고 설명하면, 실망한 채 돌아간 뒤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 사람들도 지금까지 많이 봤다. 이것이 엄연한 현실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 현실을 바꿔나가고자 지금까지 김광수경제연구소포럼에서는 꾸준히 힘써 왔으며, 이에 공감하고 동참하는 사람들도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정말로 돈을 벌고 싶다면 탐욕에 찌들어 돈 되는 정보만 죽어라 좇아다니는 천민 자본주의에 찌든 작태를 그만두고, 올바른 경제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할 수 있도록 기존 정치권을 압박하거나 아니면 아예 새로운 인물들이 제대로 정치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제대로 된 경제 정책이 집행되어 국가 경제가 탄탄해지면 그만큼 국민들은 윤택한 삶을 누릴 수 있으며, 경제가 어려워도 국민 개개인이 버틸 수 있는 힘이 강해진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재테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만약 앞으로도 탐욕과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무능력한 기존 정치권이 우리 삶을 좌지우지하도록 방치한다면, '위기의 재구성'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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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마, 톤즈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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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태복음 4장에 예수께서는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로 나가 40일 동안 금식하며 오로지 기도만 하시면서, 하느님이 주신 시험을 통과하려고 하셨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때 마귀가 나타나 광야에서 기도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유혹했지만, 예수님은 그에 넘어가지 않으시고 오로지 하느님에게 바치는 믿음만으로 유혹을 물리치셨다.

 



이 거룩한 복음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사람들이 대개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마귀가 처음부터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주겠다고 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마귀가 예수님에게 기도를 그만두라고 꾈 때 가장 먼저 제시한 것은 빵과 물이었다. 빵과 물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손아귀에 넣게 해주는 금권과는 견줄 수도 없이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하찮게 여기기 쉽고 그 정도야 얼마든지 나누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마귀는 그 하찮은 것을 무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유혹하는 첫 수단으로 삼았다. 예수님은 그 첫 유혹을 물리치신 뒤, 결국 이 세상을 모두 마음대로 가질 수 있는 권력욕까지 뿌리치고 마귀를 물리쳤다.

 



여기에 담긴 뜻은 절대 가볍게 넘길 수 없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보여주는 모습에서 우리는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무려 40일 가까이 단식하면서 육신이 죽음에 이를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그 보잘것없는 빵과 물이 주는 달콤한 유혹에 굴복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그 어느 것도 부족하지 않은 데도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눠서 자기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기는커녕, 하찮은 유혹에 쉽게 굴복해 자기도 망치고 더 나아가 수많은 피해를 끼치는 사례를 우리 주변에서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찮은 유혹에도 그렇게 무참히 짓눌려 버리는데, 하물며 자기가 지니고 있는 욕망을 목마를 때 마시는 시원한 포도주와도 같이 해소해 줄 수 있는 유혹이 다가올 때 인간이 얼마나 나약해지는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와 같이 가장 쉬워 보이는 일이 가장 어렵다는 모순 같은 진리는 인간이 지닌 본성 때문에 성립한다. 항상 나누는 선행을 베풀어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도, 막상 지하철 환승통로에서 적선을 바라는 불쌍한 거지에게 500원짜리 동전 하나 던져주기도 아까워하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500원짜리 동전 하나도 그렇게 아까운데 남들에게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고 할 때 선뜻 나서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지는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하느님이 말씀하신 에덴동산은 말 그대로 유토피아로밖에 남을 수 없는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한다.

 



하지만 ‘울지마 톤즈’에서 주인공인 이태석 신부는 인간도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나 유혹 앞에서 강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수단으로 가려는 결정을 하는 그 순간에, 수단으로 떠나는 길에서, 수단에서 온갖 고초를 겪을 때마다 마귀가 나타나서 온갖 방법으로 유혹을 일삼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굴복하지 않았고, 그 유혹을 뿌리치고 수단 사람들에게 자기를 바치는 순간 그는 예수님이 되었다. 그 광휘를 보면서 눈앞이 아찔해지고, 내 삶이 지닌 어두운 면이 더욱 도드라지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 없다. 우리는 그를 보고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는 이미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 단지 우리 주변에 있는 마귀를 얼마나 잘 물리치는지가 문제일 뿐이다.

 

 

2. 필자가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가진 고민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무엇인지 굳이 생각해 보자면, 과연 어떻게 해야 신이 세상에서 구현하려는 바를 본인이 온전히 실천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대개 그런 고민을 하게 되는 가장 큰 까닭은 보나벤투라가 이야기했듯이, 이 지구에서 신의 형상을 타고난 존재가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신 앞에서 인간은 더없이 보잘것없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간을 보잘것없게 만드는 것은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떨치기 힘든 욕망과 그를 자극하는 유혹이다. 신학자들은 신을 알면 알수록 자기에게 주어진 막중한 사명감과 인간으로서 반드시 지니고 있는 욕망과 유혹 사이에서 더욱 깊게 고뇌하게 된다. 보통 사람들은 대개 그 욕망과 유혹에 저항하면서 신이 추구하는 바를 이해하려고 하지만, 그 일은 절대 쉽지 않다. 단순히 저항하는 일도 그렇게 힘든데, 자기 존재를 버려가면서까지 신이 지닌 의지를 보여주려는 시도는 역사에서 여러 차례 나타나기는 했지만, 그 가운데 누구에게든지 인정받을 수 있는 실천과 희생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만큼 어렵고 힘든 것이기에 그 실천과 희생을 보여준 존재는 칭송받아 마땅한 것이다.

 



얼마 전에 ‘울지마 톤즈’를 봤다. 절대 울지 않기로 유명한 딩카족과 마찬가지로 나도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는 이 영화를 보면서도 약간 과장하자면 눈 한 번 깜빡거리지 않고 끝까지 화면 앞에 버티고 있었다. 심지어 딩카 브라스 밴드가 이태석 신부 사진을 들고 행진할 때 딩카족 사람들마저도 눈물을 흘렸지만, 나는 울지 않았다. 영화를 다 본 뒤 왜 눈물이 나지 않았는가를 생각해 보면, 이태석 신부가 보여준 그 위대한 행보에 완전히 압도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신 앞에서는 너무나도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사실은 교인이 아니더라도 이미 인식하고 있지만, 같은 사람이라도 그 숭고함에 사로잡혀 꼼짝도 할 수 없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영화를 보면서 깨달았다.

 



자기에게 주어진 재능이 하느님이 내려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그리고 자기가 신에게 귀의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신이 지닌 의지를 구현하는 가장 참된 방법을 알고 있었기에, 이태석 신부는 주저하지 않고 남수단에 있는 톤즈 마을로 떠났다. 척박하고 험난한 아프리카 시골 마을에서 그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쳤다. 스스로 원하신 최후의 날이 다가오자 빵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희생을 예고하신 예수님처럼, 이태석 신부도 자기가 지닌 재능으로 얼마든지 인정받고 안락한 삶을 살 수도 있었지만 신에게 자기에게 준 사명감을 믿고 그 믿음만으로 광야에 뛰어들어 에덴동산을 개척했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로 나가 40일 동안 금식하며 오로지 기도만 하시면서, 하느님이 주신 시험을 통과하려고 하셨다. 이 때 마귀가 나타나 광야에서 기도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유혹했지만, 예수님은 그에 넘어가지 않으시고 오로지 하느님에게 바치는 믿음만으로 유혹을 물리치셨다. 이태석 신부에게도 수단으로 가려는 결정을 하는 그 순간에, 수단으로 떠나는 길에서, 수단에서 온갖 고초를 겪을 때마다 마귀가 나타나서 온갖 방법으로 유혹을 일삼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굴복하지 않았고, 그 유혹을 뿌리치고 수단 사람들에게 자기를 바치는 순간 예수님이 되었다. 그 광휘를 보면서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 정도로 나는 철저하게 욕망에 찌든 평범한 인간일 뿐이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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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부동산 시장 미래 - 부동산 패러다임 시프트
김광수경제연구소 지음 / 더팩트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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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한동안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부산저축은행 사태가 결국 많은 사람들이 예상했던 대로 온갖 비리가 드러나기는 했지만 주범은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수사가 흐지부지되려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자식들 대학 보내고 시집장가 보내는데 한 푼이라도 더 보태려고 평생 동안 모은 몇 억 원이 모인 예금을 부산저축은행 관계자들과 그들과 연루된 정치인들은 자기 배를 불리고자 함부로 굴려댔다. 사람들은 극도로 분노하면서 관련자를 강력하게 처벌하라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항상 그랬듯이 처벌은 제대로 이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분노를 넘어선 허탈한 냉소만을 뿜어냈고, 정치권은 피눈물을 흘리며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부산저축은행 사태 피해자들을 위로한답시고, 5000만 원이 넘는 피해액도 모두 구제할 수 있게 하는 예금자보호특별법을 제정하겠다고 나섰다.


언제까지 이와 같은 어처구니없는 현상이 우리나라에서 되풀이되어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이런 웃을 수 없는 촌극은 실제로는 시장경제 질서를 유지할 생각은 전혀 없으면서 자기들에게 유리하거나 필요할 때만 시장경제 논리를 들이대는 기득권 집단과, 그들이 강변하는 온갖 논리를 반박하는데 필요한 올바른 지식과 상황 인식 능력을 갖추지 못한 국민들이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수 십 년 동안 대한민국 사회를 지배한 개발연대 패러다임을 주도한 토건 세력은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21세기 지식정보화 사회에 필요한 패러다임 전환과 사회 구조 개편을 철저하게 틀어막았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정치 민주화뿐만 아니라 경제 민주화도 쟁취해 건전한 시장경제를 구현할 필요가 있었던 국민들도 껍데기뿐인 정치 민주화에만 만족했을 뿐만 아니라, 그 너머를 보지 못한 채 탐욕에 눈이 멀어 기득권을 혁파하기는커녕 그에 편승하고자 발버둥 쳤다는 것이다. 그 잘못된 욕망이 가장 첨예하게 얽히고설킨 곳이 바로 대한민국 부동산 시장이다. 그릇된 욕망이 폭주하면서 온 나라가 삭막하고 황량한 공사판으로 돌변했으며, 사람들은 땀 흘려 일해 버는 돈이 지닌 가치를 잊고 ‘재테크’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부동산 한탕주의에 빠져들었고, 한국경제는 헤어날 수 없는 수렁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부동산 시장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정확하게 이해하면, 그 때부터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는 토건 세력과 그를 둘러싼 온갖 추악한 실체가 눈에 보이기 시작하며, 얼핏 보기에는 아무 연관도 없어 보이는 온갖 시사 문제가 퍼즐이 끼워 맞춰지는 것처럼 연결 고리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부산저축은행 사태도 결국 크게 보면 부동산PF 대출 부실이 가장 큰 원인으로서 2007년부터 시작된 수도권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 거품이 꺼지기 시작하면서 이어진 연쇄 작용에 따른 당연한 결과이다. 시장 논리로 볼 때 수요가 감당할 수 있는 가격을 훨씬 더 뛰어넘는 부동산 가격에 낀 거품은 어떻게든지 빠질 수밖에 없으며, 그 거품이 불러일으킨 신기루에 눈이 뒤집혀 부동산 대출을 받아 시세차익을 실현하려고 한 수많은 사람들은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될 수밖에 없다. 그들이 대한민국 부동산 시장이 움직이는 원리를 객관으로 공부하고 이해했다면 그런 비참한 현실을 맞이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부산저축은행 사태를 예로 들자면 국민들은 역시나 썩어빠질 대로 썩어빠진 정치권을 언론이 신나게 자극성 보도를 쏟아내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질타하느라 항상 그랬듯이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도, 정작 부산저축은행 사태가 벌어진 근본 원인인 부동산 문제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는 이상할 정도로 무관심하기 짝이 없다. 이와 같은 모순된 태도는 결국 온 국민들에게 자기도 모르게 깊이 뿌리내린 뒤틀린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언론, 정치, 사법, 기업……그 어떤 이들도 기득권을 놓치지 않고자 ‘재테크’라는 미명으로 포장한 자기 정당화 논리를 철저하게 세뇌시켜 국민들이 진실을 알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언론은 부동산 광고에 목을 매고, 정치인들은 부동산 시장을 쥐락펴락하는 건설업계가 바치는 정치자금에 목을 매고, 그에 질세라 국민들은 세뇌된 논리를 줄기차게 재생산하며 자기실현 예언을 열렬하게 신봉했다.


하지만 21세기 첫 10년 동안 휘몰아쳤던 부동산 광풍이 잦아들고 부동산 거품이 꺼지고 있다. 탐욕에 눈이 먼 모든 사람들은 여전히 부동산 불패신화를 부르짖으며 진실을 외면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시장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도 없다는 진실이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다. 가계 부채 총액이 1000조 원을 넘어서고, 내수 시장은 갈수록 쪼그라들고 있으며, 400만이 넘는 사람들이 ‘하우스 푸어’가 되어 죽지 못해 산다고 한탄하고 있다. 그 10년 동안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외부 입김에서 자유로운 민간 싱크탱크로서 김광수경제연구소는 이미 그와 같은 사태를 예견했고 줄기차게 한국경제를 좀먹고 있는 부동산 거품을 경고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경고를 귀담아듣지 않았고 결국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곳곳에서 파열음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미 김광수경제연구소에서는 대한민국 부동산 시장을 올바르게 바라보는 방법을 알려주고자 2010년 10월에 ‘부동산 시장흐름 읽는 법’이라는 책을 출간한 적이 있다. 이번에 출간된 ‘대한민국 부동산 시장의 미래’라는 책은 그에 이은 두 번째 부동산 전문서적인 셈이다. 그런데 첫 번째 책과 다르게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다. 방법론이야 누구든지 체계를 갖춘 연구 방법과 그를 뒷받침하는 논리와 자료만 가지고 있으면 얼마든지 구축하고 설명할 수 있지만,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사회과학에서 다루는 주제인 사회 현상은 간단하게 풀 수 있는 선형 방정식이 아니며, 그에 따라 미래를 예측하는데 필요한 방정식을 세운다고 하더라도 어떤 해가 도출될 지 알 수 없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김광수경제연구소에서 발간하는 자료에 담겨 있는 뚜렷한 문제의식과 해박한 분석 논리를 그 불확실성과 어려움을 근거로 삼아 혹독하게 비난했다. 부동산 문제는 결코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둥, 연구소에 틀어박혀서 자료나 들여다보는 연구자들은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둥, 심지어 책 팔아먹으려고 부동산 덕분에 유지되고 있는 한국경제 성장세를 깎아내리려는 몹쓸 집단이라는 둥, 별별 해괴한 비난을 뒤집어써야 했지만 김광수경제연구소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경제학자는 경제 현상이 발생하는 시장을 움직이는 기본 원칙에만 충실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정직한 지식은 결국 빛을 보게 된다는 오래 됐지만 많은 사람들이 잊고 있었던 그런 평범한 진리를 남들과 다르게 굳건히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설사 그렇게 빛을 보게 된다고 한들 이미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는 파탄에 이를 지경이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지난 몇 년 동안 김광수경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자료를 읽으면서 느꼈던 점은, 아무리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해도 사태가 정말 나빠지기만 하는데 합리성을 띤 경고가 먹혀들지 않는 현실을 개탄하는 문체나 구성이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더 자주 나타난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부동산 광풍이 멈추지 않는다면 같이 헤어날 수 없는 늪으로 한국경제가 이미 너무나도 깊이 빠져들어 대안이나 해결책 또한 사라지는 지경에 이를 것이라는 예측이 현실이 되지 않기를 김광수경제연구소에서는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미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고 그 양상과 원인이 이 책 ‘대한민국 부동산 시장의 미래’에 명쾌하게 설명되어 있다. 대한민국 부동산 시장 현주소, 총체 부실에 빠진 저축은행, 매매가 하락과 전세가 상승, 전국 주택 시장 동향 분석, 해외 부동산 거품 붕괴 사례……


그렇다고 해서 흔히 사람들이 비난하듯이 절대 현상 설명과 비판만으로 이 책 내용은 끝나지 않는다. 어떻게 행동하라는 대안 지침까지 내려놓지는 않았지만, 일단 지금과 같은 위기 속에서 상황을 냉철하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내용은 모든 사람들에게 유용하다. 아직까지도 부동산으로 떼돈을 벌 생각에 빠진 사람들은 올바른 현실을 파악할 수 있고, 실제로 살 집을 사려는 사람들은 여전히 판치고 있는 해괴한 부동산 구매와 투자 논리에 빠지지 않고, 더 나아가 모든 국민들이 대한민국이 지금 어떤 현실에 처해 있으며 21세기에 한국경제가 활로를 찾으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단초를 얻을 수 있다.


이 책은 김광수경제연구소에서 생산하는 경제 분석 자료인 경제시평에서 부동산 특집으로 근래 한두 달 안에 발간된 자료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 지금까지 김광수경제연구소에서 출판한 경제시평 모음집은 자료가 구독자들에게 제공된 뒤 적어도 반년이 넘어서야 출간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매우 뜻밖이라고 볼 수 있다. 김광수경제연구소를 책장수라고 깎아내리는 사람들이야 돈이 궁하니까 그럴 것이라는 치졸한 비난을 일삼기에만 급급하겠지만, 막상 책을 펼쳐서 김광수 소장이 직접 쓴 ‘펴내는 글’만 읽어보더라도 그런 비난이 얼마나 저급한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대한민국 부동산 시장이 맞이할 미래를 한국경제도 함께 맞닥뜨릴 것이며, 혼란과 격변이 지배하는 미래에서 살아남고 싶다면 반드시 이 책을 읽어봐야 한다. 그리고 예전에 출간한 ‘부동산 시장흐름 읽는 법’과 이 책을 함께 읽으면 내용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더 나아가 이 책 내용이 나오는 경제시평을 구독하면서 한국경제, 더 나아가 세계경제를 이해하는 식견을 함양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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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 밑 아리에티 - The Borrower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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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집에서 '세계전래동화전집'을 골방에 틀어박혀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그 책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 가운데 '엄지공주'라는 동화가 있었다. 아이가 없던 여자가 하늘에 빌고 빌어서 엄지손가락만한 여자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다가 어느 날 그 미모에 반한 두꺼비에게 납치되면서 벌어지는 온갖 이야기를 다뤘다. 두꺼비와 결혼하는 것이 상상만 해도 끔찍했던 엄지공주는 간신히 두꺼비집에서 탈출한다. 한동안 자연 속에서 꿀과 이슬을 먹고 살다가 겨울이 오자 꼼짝없이 얼어죽을 위기에 처하는데, 들쥐 아줌마가 쓰러진 엄지공주를 구원해 준다. 그런데 이 들쥐 아줌마도 엄지공주를 구원해 준 대가로 그녀에게 이웃집에 사는 부자(?) 두더지 아저씨와 결혼하라고 한다. 또 결혼이 끔찍해진 엄지공주는 들쥐 아줌마 집에서도 탈출해서 봄꽃이 활짝 핀 꽃밭으로 가는데, 거기에서 나비들과 어울리는 꽃의 요정들을 만난다. 그 요정들의 왕자를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하면서 이야기가 끝난다.
 

이 만화 '마루 밑 아리에티'를 보기 전에 나는 10cm밖에 안 되는 진짜 소녀(小女)가 나온다는 홍보영상을 보면서, 예전에 읽었던 그 동화 '엄지공주'를 잠시 떠올렸다. 하지만 예전에 읽었던 동화 내용을 되새겨 봐도 소인이 나온다는 것 말고는 그 어떤 공통점도 찾을 수 없었다. 싱그러운 자연이 아닌 어두침침하고 지저분한 마루 밑에 사는 소인. 꿀과 이슬을 먹으면서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소인이 아닌, 인간들에게서 꼭 필요한 만큼만 모든 생필품을 빌려서(?) 살아가는 소인. 그녀가 꾸려가는 삶을 그려냄으로써 미야자키 히야오는 사람들에게 도대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인지 궁금해졌다. 미야자키 히야오가 지난 작품 속에서 꾸준히 이야기했던 '공존'이라는 주제가 이 작품 안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것인지도 궁금해졌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공존'이라는 핵심은 이 작품 안에서도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단지 예전 작품들과 견주었을 때 이 작품은 심심하다 싶을 정도로 특별한 내용이 없이 담담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게 처음에는 흠으로 느껴졌을 뿐이다. 정말 영화를 다 본 뒤 든 처음 생각은 그랬다. 영화를 보면서 내가 기대했던 어떤 특별한 이야기나 행복한 결말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소인족이자 주인공인 아리에티는 부모님과 함께 어느 마루 밑에서 사는 14살 소녀인데, 어느 날 그들이 사는 집에 집주인 손자인 12살 인간 소년 쇼우가 요양을 오고, 인간에게 정체를 들킨 아리에티가 결국 부모님과 함께 정든 집을 떠난다는 게 전부다. 놀라울 정도로 돋보이는 친근하고 싱그러운 자연 풍경 묘사, 도시에서는 절대 기대할 수 없는 맑고 고운 자연 소리, 걸리버가 브롭딩넥에 간 것과 같은 상황을 묘사하는 탁월한 시각과 청각 묘사, 그리고 영화 전반에서 등장하는 감미로운 음악이 내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지만, 영화를 본 그 날은 정말 그것 말고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심해진 궁금증만 안고 단칸방으로 돌아왔다.

 

고시원으로 돌아온 뒤에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내가 도대체 무엇을 기대하면서 이 작품을 봤는지 이해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정말 그게 다였는가? 쇼우는 아리에티를 보면서 아름답다고 감탄하고 아리에티도 소년에게 차츰 마음을 열지만, 왜 결국 그 열린 마음에서 싹트는 사랑을 아주 잠시도 나누지 못하고 그렇게 떠나야 했을까? 아리에티가 살고 있는 집에 살았던 인간들은 소인들과 공존하고 싶어서 집까지 만들어 놓고 소인들을 기다리지만, 왜 소인들은 인간들과 결국 어울리지 못하고 떠나야 했을까? 왜 이렇게 허무한 이야기를 90여 분 동안 이어나갔을까?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나는 미야자키 히야오에게는 훌륭한 관객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그는 이 작품에서 항상 소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강조했지, 인간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지 않았다. 거기에 미야자키 히야오가 이야기하는 핵심인 '공존'이 어떤 뜻인지를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는 단서가 숨어 있었다. 나는 철저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 관점에서 작품을 감상하고 이해했던 것이다. 인간이 베푸는 호의를 왜 소인들은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으려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소년에게 마음을 연 아리에티가 아빠와 엄마를 설득해서 인간들을 이해해 보자고 설득해서 결국 다시 엄마가 좋아하는 예전 집으로 돌아오고, 쇼우가 심장병 수술에 성공한 뒤 기뻐하면서 소인들을 인형의 집으로 초대해 함께 살자고 하고, 그 뒤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말(!)을 꿈꿨다.

 

하지만 그야말로 그것은 철저하게 인간 관점일 뿐, 소인들에게는 터무니없는 소리일 뿐이었다. 꼭 필요한 만큼만 훔쳐 쓰는 것이 아니라 빌려 쓸 뿐이며, 인간에게는 절대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 인간에게 들키지 않고 그 작은 세상에서 생명을 유지하면서 인간과 같이 가족을 이루고 행복한 삶을 살면 그만이다. 인간에게 들키지만 않으면 소인들은 얼마든지 자기들만의 보금자리를 꾸미고 살 수 있으며, 인간들은 소인들의 보금자리를 품은 집 안에서 얼마든지 방해받지 않고 안락을 누릴 수 있다. 서로 간섭하지 않으며 특성을 인정하는 것을 넘어 서로를 인지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리에티가 쇼우를 바라보면서 인간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얻었다고 해서, 소인족들이 지키는 철칙을 깰 수는 없었다. 67억이나 되는 인간은 결국 소인 눈에는 가정부 할머니와 같이 자기들을 희귀한 벌레를 잡아서 관상용으로 삼으려는, 곧 자기들 생각밖에 할 줄 모르는 위험한 존재들로밖에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소인들이 누리는 행복을 인정할 줄 모른다. 그렇기에 안 그래도 두꺼비, 바퀴벌레, 생쥐, 까마귀 같은 온갖 자연 속 위험에 시달리면서 힘겹게 살아온 소인족이 사람들마저도 두려워해야 하고 피해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삶을 포기하는 것도 아니다. 왜 쇼우가 아리에티에게 그렇게 무시무시한 말을 했는지는 오랫동안 생각한 뒤에야 알 수 있었다. 쇼우는 심장병 수술에 실패하고 죽을 것이라는 체념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문제가 있는 부모에게서 제대로 된 사랑도 받아보지 못한 불쌍한 소년으로서, 삶에 애착이 그다지 크지 않다. 그런 마당에 아리에티에게 자기 가족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라고는, 자기가 곧 맞닥뜨릴 죽음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리에티는 그동안 자기들은 어떻게든지 열심히 살아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소리친다. 그 말을 들은 쇼우는 큰 깨달음을 얻는다. 자기와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67억 명이나 있다고 한들, 자기가 살아있지 않은 세상은 자기에게 아무런 뜻이 없다. 그와 반대로 비록 종족이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한들, 아리에티 자기가 살아있다면 여전히 이 세상은 살아갈 가치가 있다. 게다가 자기 가족뿐만이 아닌 다른 소인족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세상을 등져야 할 까닭이 전혀 없다. 어떻게든지 살아서 자기가 원하는 행복으로 가득 찬 새로운 세계로 가야 한다. 만약 그런 세계가 없다면 자기가 사는 세계를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그 징표로서 쇼우는 아리에티에게 각설탕을 선물하고, 아리에티는 쇼우에게 자기 머리를 묶는데 쓰는 빨래집게를 선물한다. 예전에 조상님이 만들어 놓은 인형의 집과는 견줄 수 없을 정도로 큰 진정성이 담긴 선물이다. 인간과 소인이 공존할 수 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하지만 더는 쇼우와 함께 있을 수 없게 됐다. 주전자를 타고 강 따라 흘러가 새로운 세계로 떠나야 한다.

 

어느 시인은 가야 할 때를 아는 자가 보여주는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답느냐고 탄성을 내질렀다. 가야 할 때를 아는 자와 마찬가지로 보내야 할 때를 알고 보내주는 사람이 가진 가슴은 얼마나 순결하고 아린가. 기대했던 일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나누지 못하고 간직한 사랑은 더욱 슬프다. 태양 아래에서 꽃에 둘러싸인 채 사랑하는 이와 함께 지내고 싶지만, 서로 행복하려면 보내줄 수밖에 없다면 기꺼이 보내줘야 한다. 추억을 마음 속에 담아두고 각자 자기답게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공존이다. 이 세상에 정말 공존하고 있는 존재가 과연 얼마나 될까. 아리에티와 쇼우 같이 안타까운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안 나던 눈물이 났다. 오래오래 고이 흘렸다.

 

 

 



Arrietty's Song(Theme Song) - Cecile Cobel

 

 

I'm 14 years old, I'm pretty
나는 14 살, 나는 예쁘지

元気な小さな lady
힘이 넘치는 조그마한 숙녀

床下にずっと借り暮らししてたの
마루 아래에서 계속 빌려살기를 했지


時にはHaapy,時にはBlue、
어느 때는 happy, 어느 때는 blue

誰かに合いたい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


風、髪に感じて空を眺めたい
머리카락으로 바람을 느껴서 하늘을 쳐다보았지

あなたに花届けたい
너에게 꽃을 전하고 싶어


向こうは別の世界
건너편은 또 다른 세계

ほら蝶々が舞ってる私を待っている
봐봐, 나비들이 날아다니고 있어, 나를 기다리고 있어


そう、変わることのないわたしの小さい世界
그래, 변할 것 없는 내 조그마한 세계

嫌いじゃないのでもあなたを
싫어하는 것은 아니야, 그래도 그대를

もっともっと知りたくて
좀 더, 좀 더 알고 싶어서


喜びと悲しみはいつも折り混ざってゆく
기쁨과 슬픔은 언제나 서로 섞여서 갈 뿐


風、髪に感じて空を眺めたい
머리카락으로 바람을 느껴서 하늘을 쳐다 보았지

あなたに花届けたい
너에게 꽃을 전하고 싶어


向こうは別の世界
건너편은 또 다른 세계

ほら蝶々が舞ってるあなたを待っている
봐봐, 나비들이 날아다니고 있어, 너를 기다리고 있어


太陽の下で花に囲まれて
태양 아래에서 꽃에 둘러싸인 채

あなたと日々過ごしたい
너와 함께 지내고 싶어

この想いを胸に新しい世界で
이 추억을 마음에 넣어두고 새로운 세계로

私らしく生きる
나답게 살아갈 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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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휴가 - May 18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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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부산대학교 시월제 때 우연히 볼 수 있었던 영화다. 원래는 시월제 기념으로 10월 7일에 열리는 강연회에 영화 '화려한 휴가'와 연속극 '뉴하트'에서 호평을 받은 영화배우 박철민이 온다고 해서 강연을 들으러 간 거였다. 일단 약간 늦게 강연회장인 부산대학교 10.16 기념관 안으로 들어갔더니, 기대했던 박철민 목소리가 들려오기는 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실제로 박철민이 온 게 아니라 영화를 틀어놓은 것이었다.

 

속사포 같은 사투리를 퍼부으면서 주인공 민우(김상경 분)에게 연애 상담을 해 주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일단 웃었다. 동생 진우(이준기 분)와 같은 성당에 다니는 간호사 신애(이요원 분)를 짝사랑하는 민우가 벌이는 촌극을 보면서 또 웃었다. 성당 야유회에서 진우가 민우를 골탕먹이는 장면에서는 폭소가 터졌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분통 터지는 잔인한 장면들, 그 속에서 죽어가며 피를 흘리고 그들을 바라보며 생지옥 속에서 눈물을 흘리는 이들을 바라보면서는 울 수밖에 없었다. 영화를 보기 전부터 과에서 벌어진 대소동 때문에 기분이 울적했는데, 시종일관 계속 되는 너무나도 슬픈 장면 때문에 결국 눈물을 뚝뚝 흘리고 말았다. 한 번 흘린 눈물은 조금만 슬픈 장면이 나오면 무조건 흘러나왔다. 신애(이요원 분)가 을씨년스러운 광주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절박하게 외치는 목소리는 심장을 쥐어짜다 못해 도려내는 듯했다.

 

독재 정권을 타도하고 미제에서 민족을 구원하자고 일어섰던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 학생들 말고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 그저 순박하게 살고 있던 광주 시민들은 공수 부대가 광주 시내를 휩쓸기 시작한 뒤부터 전두환 군사 독재 정권이 일삼는 미친 짓에 희생양이 된 것을 알아차렸다.

 

사실대로 이야기하자면 그들은 자기들이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자기들이 왜 폭도로 매도당하고 있는 지도 몰랐다. 설사 북한에서 내려보낸 특수부대가 개입했다 하더라도, 공수 부대가 그 따위로 광주 시민들을 무지막지하게 폭행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해서는 안 되었다. 테러리스트들이 도사리는 근거지를 소탕한다는 명목 아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한 미군이 전 세계에서 쏟아지는 비난에 시달린 까닭도 아무 죄도 없는 민간인을 작전에 방해가 된다는 까닭으로 마구잡이로 죽인 탓이요, 사담 후세인 또한 욕을 똥 바가지로 얻어먹은 까닭 또한 민간인을 미군에게서 아군을 보호할 방패막이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진정으로 폭도들을 소탕하러 왔다면 선량한 광주 시민들 사이에 숨어 있는 폭도를 찾아내려고 힘써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다. 그 당시 작전을 지휘한 장교들이야 작전 계획에 따랐을 뿐이며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민간인으로 위장해서 공작을 벌이고 있었다고 항의할 수도 있다. 그것은 국민에게 신뢰받고자 하는 국군으로서 할 말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대들면 무조건 두들겨 패고 죽여도 좋다는 식으로 전두환이라는 살인마에게 충성을 다한 주구였을 뿐이다.

 

4.3 사태 때도 공산주의자들을 소탕한다는 명목 아래 양민들을 무작정 잡아 죽이고 민가를 약탈한 군인들이 양민 학살자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때 북한 특수부대를 진압한다는 명목 아래 독재 타도를 외치던 대학생들뿐만 아니라 무고한 시민들까지 사살한 군인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자기들에게 대항했다고 무작정 폭도로 몰아붙이고 다 죽여도 된다고 일갈하는 장군을 보라.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민들을 빨갱이로 몰아 학살한 대가로 어깨에 달은 그 별이 자랑스러운가? 그가 대한민국을 지키는 자랑스러운 군인으로 보이는가?

 

하긴 수구 세력은 항상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게 나라를 지키려면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으며, 그 장군이야말로 그런 고뇌 속에서 꿋꿋하게 임무를 완수한 참군인이라고 했다. 내가 해병대에서 복무하면서 정훈 교육을 귀가 솔 정도로 받으면서도 그 논리를 생각하기만 하면 저절로 코웃음이 나왔다. 참군인 정신이라는 게 대한민국이 처한 일그러진 현실 속에서는 얼마나 비틀어지고 악용되었는지 빤하지만, 정훈 교육 자료에서는 절대로 드러나지 않고 인정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올해 터진 '불온서적 지정' 논란과 '교과서 개정 요구' 논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작 국방부에서 국군을 지휘하고 있는 장군들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어쩔 수 없었다는 소리만 늘어놓으면서, 너무나도 억울해 피를 토하고 절규하는 피해자들과 유족들이 내는 목소리에는 귀를 닫았다. 국군은 지난 과오를 반성하고 새롭게 거듭나고 있다는 정훈 교육 내용은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뒤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하긴 경찰도 새롭게 달라지겠다고 경찰서 입구마다 간판을 붙여 선전하면서 보여주는 꼴이, 이명박 정권 아래에서 시민들을 탄압하는 충실한 주구가 되는 것이었는데, 그보다 더한 보수 세력인 군대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이명박이 그래도 최소한 양심은 남아 있는지 이 영화에서처럼 반정부 시위를 진압하는데 군대를 동원하지는 않아서 천만다행이다. 안 그래도 맨손인 시위대를 해산시켜 체포하려고 물대포를 쏘며 한 걸음 한 걸음 위풍당당하게 전진해 오는 전경들을 보면서도, 저들이 폭력 경찰로서 시위대 앞에서 저렇게 당당해질 수 있는 까닭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면서 한탄했던 터였다.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아무 무기도 들지 않고, 군인들이 실탄을 장전한 M-16 소총을 들고 있다는 것에 비추어 볼 때 화염병과 돌멩이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곤봉을 들고 달려오는 진압 부대에 대항하고자 화염병과 돌멩이를 던진 광주 시민들에게 폭도네 빨갱이네 온갖 오명을 씌우는 이들을 보면서 떠오르는 것이 있다. 국민들이 아무리 촛불 문화제를 지키면서 평화롭게 목소리를 높여도 귀를 닫고 있다가, 도저히 참지 못한 국민들이 거리로 나서자 그들을 일제히 폭력 시위꾼으로 몰아붙이기 시작하며 폭력 비폭력 논란을 조장하고 법치를 천명한 이명박 정권과 수구 언론과 어쩌면 그렇게 닮았을까.

 

공산주의자들이 있었다는 사실, 심지어 있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만으로 꿔다 놓은 보릿자루와 같은 주장을 펼치는 이들이 대한민국에 너무나도 많다. 그 주장이 대한민국에서 권력 위에 올라타면서 궤변은 폭력으로 둔갑했고, 수많은 국민이 그 폭압 아래 희생당했다. 5.18은 그 극악무도한 국가 차원 범죄가 낳은 한 가지 끔찍한 비극일 뿐이다. 그리고 분명히 현재진행형이다. 그 비극을 일으킨 세력은 여전히 대한민국에서 활개를 치고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그들은 자기들에게 대항하는 세력을 좌익 폭도로 매도하며, 그에 놀아나는 이들은 민주주의를 쟁취하려는 움직임에 찬물을 끼얻는다.

 

이 비극이 영화로서 대한민국에서 빛을 보게 한 장본인인 전두환 전 대통령은 여전히 거들먹거리면서 대한민국에 버젓이 살아남아 있다. 그러면서 그를 비난하는 젊은이들에게 자기에게 당해보지 않아서 욕이 나오는 거라는 망언을 내뱉고 있다. 그리고 그런 살인마와 일왕에게 열심히 고개를 숙이며 역겨운 미소를 짓는 이명박이라는 작자가 대통령으로 올라앉아 대한민국을 말아먹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서울교회에서 목사 자리 맡고 있는 이종윤이라는 작자가 5.18 사태에 북한 특수부대가 투입됐다'고 설교 시간에 대놓고 주장했다는 소식을 듣고 치밀어 오른 화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다. 분노를 원동력으로 삼아 쓴 글은 논리가 잘 들어맞지 않는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것이라도 너그러이 넘어가고 싶다. 상식이 통하지 않고 엉망진창인 대한민국 현실을 삐딱하게 바라보면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여기고 싶기 때문이다.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역사를 반성할 줄 모르는 국민들이 낳은 뼈저린 현실은, 엄청난 자충수라는 사실을 증명하며 국민들을 더욱 깊은 수렁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청년인 해야 할 일은 분명히 정해져 있다. 아무리 두렵다고 하더라도 가야 한다. 그러고자 나는 오늘도 보이지 않는 채찍을 든다. 그리고 힘껏 내리친다. 아프다. 하지만 거부할 수는 없다. 다시 5.18 항쟁과 같은 대규모 항쟁이 벌어진다면, 나도 민우처럼 기꺼이 무기를 들 수 있을지 깊은 밤에 잠을 못 이루면서 고민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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