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카타야마 쿄이치 지음, 안중식 옮김 / 지식여행 / 200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래 전부터 나는 사랑에 모든 것을 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네가 없으면 나는 살 수 없으며 살아있다고 해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든가, 너에게 무엇이든지 해 줄 수 있으며 네가 필요하다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다는 말 따위는, 자기를 지금까지 아껴준 수많은 사람들을 배신하는 몹쓸 짓이며, 특히 사랑 때문에 목숨을 저버리는 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아무리 사랑이 인류를 움직이는 근본인 힘 가운데 한 가지라고 하더라도 그 사랑을 해석하는 방법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고, 사랑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는 논리는 그 해석 방법 가운데 한 가지일 뿐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도 나름대로 연애관을 갖추고 있다. 그 연애관에 따르면 사랑에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걸 필요는 없다.

 

사랑 때문에 아무 것도 못 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자기는 끝없는 욕심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나약한 인물이라고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사랑을 하면서도 이성을 잃어버려서는 안 되며, 이성이 없는 사람은 현실과 극렬하게 대립할 때 비극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수많은 예술 작품들이 그 비극을 그렸으며, 나는 그 현실 같은 비극에 희생당하고 싶지 않았다.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이야기하면서도 막상 사랑에 빠지면 그 어떤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자기 관리 능력이 부실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예상했던 대로 내 모든 것을 쏟아야 할 사랑이 처음으로 찾아왔을 때, 나는 급격하게 허물어졌다. 하루에 도대체 몇 번이나 그녀 생각 때문에 움찔하며 진저리를 쳤는지 기억하기조차 어렵다. 그녀가 한 말 한 마디, 그녀가 보낸 문자 그리고 편지 한 통에 웃고 울었다. 나를 그나마 잘 안다고 할 수 있는 이들은 내가 사랑 때문에 그토록 괴로워하는 것은 처음 봤다면서, 그렇게 괴로워하는 만큼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격려했다. 그 격려가 현실이 될 것이라고 나는 무조건 믿고, 지금까지 읽고 보고 들었던 모든 사랑이야기를 떠올리면서 어떻게 그녀를 완전히 사로잡을 수 있을지 골몰했다.

 

하지만 그렇게 불안한 가운데에서도 나는 내가 해야 할 모든 일을 어떻게든지 해냈다. 가슴이 아파도 약도 먹지 않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일을 처리했고, 몸이 좋지 않아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 공을 찼고 경기에서 이겼다. 그녀를 생각하느라 온몸이 달아올라 뇌가 뜨거워졌는데도 책을 붙들고 어떻게든지 집중하려고 했고, 시험을 쳤더니 학점이 A+가 나왔다. 한 여자에게 너무나도 강하게 사로잡혀 있던 그 순간에 오히려 예전보다도 훨씬 더 많은 일을 해냈다는 건,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일이었다. 

 

그건 자기 제어 능력이 강하다고 평가를 좋게 내릴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결국 내 원칙에 충실해 사랑에 모든 것을 걸지 않았고 그녀는 그런 내 모습에 실망해서 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진실은 앞에서 말한 것과는 분명히 다르지만, 이 책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를 읽은 뒤 이 글을 쓸 때만큼은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결국 그녀에게 남자로 인정받지 못한 비참한 현실에 대한 분노 때문에 여전히 좋은 사이로 남을 수 있는 가능성도 스스로 저버린 어리석음 따위는 무조건 부정하고, 그저 하쿠아키(이하 아키)를 잃은 사쿠타로(이하 사쿠)를 온전히 이해하고 싶었다.

 

 

"지금 중대한 사실을 깨달았어."

 

"이번엔 뭐?"

 

창밖을 보고 있던 그녀는 조금 귀찮다는 듯 돌아보았다.

 

"아키의 생일은 12월 17일이잖아."

 

"사쿠 생일은 12월 24일이고."

 

"그렇다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나서 아키가 없었던 적은, 지금까지 단 일 초도 없었어."

 

"그렇게 되나?"

 

"내가 태어난 이후의 세상은 전부 아키가 있는 세상이었던 거야. 나한테 있어서 아키가 없는 세계는 완전히 미지의 세상이고, 그런 것이 존재할지 어떨지조차 모르겠어."

 

 

정말 그랬다. 아키가 없는 세상은 사쿠에게는 아무 뜻이 없었다. 거친 세상살이 속에서 사랑하는 여자를 자기 뜻과는 상관없이 잃어버려야 했던 할아버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던 사쿠는, 일찌감치 연인을 잃을 운명을 자기도 모르게 물려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어떤 이에게는 환영일 뿐이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투명한 실체인 시간 속에서,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과 작은 배로 떠돌던 그 무섭도록 넓고 깊은 바다에서 사쿠는 아키와 함께 있었다.

 

아키는 사쿠에게 깨진 유리 조각과 같은 섬세한 존재였으며, 눈부실 정도로 희부연 피부는 사쿠를 숨 막히게 했다. 그런 그녀를 떠나보내면서 사쿠는 한동안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공부를 하면서도 무슨 계기만 있으면 그녀가 떠올랐고, 살아야 할 뜻을 잃어버렸다. 의지가 굳건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그건 사랑에 모든 것을 건 사쿠에게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할아버지도 결국 그 사랑을 포기하고 현실에 적응해 살아남았듯이, 사쿠도 새로운 여자를 만났고 공부를 계속해서 대학에 가고 직장을 얻었다. 하지만 아키가 남긴 기억은 절대 잊어버릴 수 없었다. 호주에서 안내원이 아키의 부모님과 사쿠에게 말한 드리밍(Dreaming)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녀를 태운 재를 흩뿌린다고 해서 모든 것이 날아가 버리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렇게 아키는 사쿠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섬세하고 예리한 기억을 남겼다.

 

사쿠에게 앞으로 어떤 사랑이 찾아오든지 아키는 사쿠가 인식하는 세상에서만큼은 영원히 중심에 남아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라는 제목은 바로 그런 뜻이라고 본다. 어차피 사람은 세상을 그대로가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 속에 자리잡은 사랑은 그 누구도 쉽게 바꿀 수 없으며, 인생 전반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사쿠에게 아키가 그런 존재라면 나에게는 누가 그런 존재일까, 아니 누가 그런 존재가 될 것인가.

 

항상 나를 감싸 안는 쓸쓸함은 모순으로 가득한 사회 구조 안에서 민중들이 아무리 일해도 떨어지지 않는 가난만큼이나 지독하다. 그건 내가 공부하고 일하고 먹고 살아야 할 현실을 투영하는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관념이 그려낸 고유한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그 삶은 실패했다고 봐야 하는가? 내가 외친 사랑은 세상 중심에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내가 원했던 사랑은 나를 떠나갔는가? 내 세상에서 사랑이 중심이 되는 그 날은 과연 언제일까? 그 해답을 찾는 데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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