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모르는 내 성격 - 성격장애, 어떻게 함께 지내고, 어떻게 극복하나
오카다 타카시 지음, 유인경 옮김 / 모멘토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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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공지영이 2008년 중순에 이화여대에서 했던 강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람이 지닌 성격이라는 건 절대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는 그런 모호한 것이다. 한 사람 안에 히틀러와 부처, 그리고 그 사이에 어중간한 무수한 인물들이 동시에 잠재되어 있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단지 그 가운데 어떤 것이 드러나느냐가 그 사람 성격이 어떻다고 다른 사람들이 판단하는데 필요한 증거가 될 뿐이다.

 

대개 어떤 특정한 성향이 너무 지나치게 드러나거나 여러 가지가 섞여서 흔히 사회에서 정상이라고 인정하는 그런 기준을 교묘하게 또는 무작정 벗어나 버리면, 그 사람에게는 '비정상'이라는 딱지가 붙는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정말로 성격에 문제가 있어서 사회에 큰 해악을 끼치는 사람들이 자기 성격에 관해 제대로 모른다는데 문제가 있다.

 

아마 그 점을 강조하려고 이 책을 출판한 '모멘토'에서는 표지에 황우석, 유영철 같은 한 때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인물들을 올린 것 같다. 논문 조작 사건으로 국제 과학계에서 대한민국을 망신살이 쌍무지개로 뻗게 만든 황우석이나, 사람인지 짐승인지 의심스럽게 하는 잔혹한 엽기 살인 행각으로 대한민국을 연쇄 살인마 공포로 몰아넣은 유영철이나, 이 책 '나만 모르는 내 성격'에 따르면 성격 장애가 있었다. 황우석에게는 '히스테리성 성격장애',  유영철에게는 '반사회적 성격장애'가 있었다.

 

그 말고도 살바도르 달리, 키에르케고르, 카미유 클로델 같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여러 인물들이 지니고 있던 색다른(?) 정신 측면을 논리정연하게 보여준다. 시종일관 차분한 문체로 열 가지 성격장애 유형을 제시하고 그 대처 방안까지 친절하게 제시한다. 2부에서는 성격장애가 무엇이며 왜 생기는지에 관한 근본 물음까지 집요하게 파고들어, 여러모로 생각하며 파고들 거리를 제공한다.

 

서양에서는 어려운 일을 겪어 정신이 힘들 때 정신과 의사나 심리 상담사에게 가서 정신과 치료를 받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고, 사회에서도 그 분야를 장려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정신병원 다닌다고 하면 아직도 무조건 미친 놈처럼 여기는 경향이 강한데, 그게 큰 문제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에 유난히 관심이 쏠린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스스로 문제점을 깨닫고 해결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혼자 이 책을 읽고 자기에게 무슨 문제가 있다고 그대로 실천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누가 이 책을 읽고 자기도 정신병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한탄하고 싶겠는가. 아무리 현대인들 대부분이 정신병을 앓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더라도, 사람들은 정상으로 인정받고 싶어하기 마련이다. '정신병'이라는 단어 자체가 띠는 이미지가 너무 안 좋은 대한민국에서 그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도 한 번쯤 이런 책을 읽고 스스로 자가 진단을 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주저하지 않고 했다. 음습한 곳에서 호시탐탐 내 자아를 노리고 있는 데이바 같은 존재가 온갖 장소에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분명히 정상이 아닌 내가 지니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내지 못한다면, 지금까지 반복되었던 그런 한심한 행태를 그만두지 못할 것이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정상은 아니라는 소리를 꽤 많이 들었다. 그것을 언제부터 인정하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긴 시기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그 사실을 막연하게나마 인지했다는 그 자체가 중요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했던 모든 일을 생각해 볼 때, 모든 사람들이 숨기고 있을 뿐 대부분 그렇게 산다고 볼 수 없을 만큼 나에게는 분명히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매우 진지하게 읽었다.

 

내가 속하는 성격 장애는 이 책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1. 경계형 성격장애(Borderline Personality Disorder) -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들

 

1-1. 함께 지내는 요령 - 일관성이 가장 중요하다. 한계를 분명히 정하라. 동정은 절대 금물이다. 자살을 기도할 경우 엄격히 행동을 제한하라.

 

1-2. 극복 요령 - 현실을 흑백만으로 규정할 수 없다. 멋진 관계보다 더 오래갈 수 있는 관계를 맺어라. 스스로를 지켜라.

 

 

2. 강박성 성격 장애(Obsessive Personality Disorder) - 지나치게 의무감이 강한 사람들

 

2-1. 함께 지내는 요령 - 고집을 존중해 주고 한계 설정을 해 준다. 좋은 점이 있으면 나쁜 점도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어라.

 

2-2. 극복 요령 - 힘을 8할 정도만 써라. 혼자서 책임지지 않는다. 남이 자기와 같기를 바라지 마라.

 

 

내가 눈여겨봐야 할 성격 장애는 다음과 같다.

 

 

1. 분열형 성격장애(Schizotypal Personality Disorder) - 머리로 살아가는 사람들

 

1-1. 함께 지내는 요령 - 압박보다는 전향하는 평가가 더 좋은 결과를 낳는다, 사회로 이끄는 도우미가 중요하다.

 

1-2. 극복 요령 -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을 두어라. 남 기분도 살펴라. 깜깜한 동굴 속에 갇혀 있는 듯한 위기 상태를 극복하라.

 

 

2. 분열성 성격장애(Schizoid Personality Disorder) - 친밀한 관계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

 

2-1. 함께 지내는 요령 - 자기 세계가 침해당하는 것을 두려워하니 조금씩 접근하라. 친밀해지려고 하면 실망한다.

 

2-2. 극복 요령 - 동호인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이 결과에 따른 내 사생활을 여기에서 구구절절 풀어놓을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저 지금까지 마음먹었던 것을 다시 되새기는 그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떻게든지 이 빌어먹을 성격장애를 극복할 것이다. 지난 추잡한 과거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면 그 모든 과거에 어떻게든지 생명을 집어넣어서 나에게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 것이다. 그 모든 힘이 내 안에 분명히 숨어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성격이 너무나도 착하고 정이 많아서(물론 그건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내리는 평가이기는 하지만) 그런 정에 이끌려 자기마저 잃어버릴 확률이 너무나도 크다면, 이제는 일부러라도 사악해질 수는 없으니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분열형 성격장애자와 같은 차갑고 냉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쓸데없는 희망은 나를 괴롭게 만들 뿐이다.

 

피도 눈물도 없어도 좋다. 지금 물론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눈물이 치밀어 오르기는 하지만, 이건 어차피 평생 동안 겪어야 할 고통에 견주었을 때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고 비틀어진 자아 때문에 눈물이 쉽게 나오지도 않는다. 미친 듯이 아픈 고통을 겪든가 아니면 프레첼처럼 꼬인 통로를 모두 거쳐서 나올 만큼 감정이 강하게 폭발하든가 둘 가운데 하나인데,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지금 나는 내가 지금까지 경험한, 곧 보고 읽고 듣고 느낀 모든 것을 반성하는 데서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어떤 기대도 하지 말고 온전히 객관으로 평가할 수 있는 시간 통계에만 매달려야 한다. 절제하지 않고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했기에,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에게 못난 모습을 보여주면서 피해를 입히고 그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 것이다. 나는 류비셰프와 같은 고고한 화신이 실제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이 세상에 태어났다. 이 정도 시련으로 무너져 버린다면, 앞으로 계속 걸어야 할 황야에서는 절대 온전히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만든 가장 분명한 구호는 다음과 같다.

 

 

Dynamic Intelligence, UItimate Passion, Thorough Planning, Incredible Self-control - I have a duty. I must do my duty.

 

Aleksandr Aleksandrovich Lyubishev

 

(역동하는 지성, 극한 열정, 철저한 계획,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자아 통제 - 나에게는 의무가 있다. 나는 그 의무대로 해내야 한다)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류비셰프)

 

 

이제 새로운 구호를 하나 덧붙인다.

 

 

Construct merciless loneness. Destruct worthless loneliness.

 

(잔혹한 고독을 만들어라. 쓸모 없는 외로움을 파괴하라)

 

 

2008년 9월 어느 날. 온몸에 바늘이 꽂힌 듯한 이상한 아픔이 온몸을 괴롭혀 책상 앞에 힘 없이 앉아 있다. 그러면서 내 옆에 있는 책이 꽉 찬 두 책꽂이를 멍하니 바라본다. 그런데 갑자기 정말 글을 쓰고 싶다는 욕구가 생긴다. 단숨에 글 한 편을 써내면서 새롭게 시작한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나는 스스로 문제가 있다고 인정하고, 어떻게든지 이 빌어먹을 성격장애를 극복할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나에게 앞날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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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나 나는 꿈꾸는 청년이고 싶다
류태영 지음 / 국민일보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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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2008년 2월 21일. 전역한 뒤 새롭게 시작하고자 부산에 내려올 때 내 마음은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했다. 2003년 11월에 처음으로 아버지와 함께 전철에서 내려 부산대학교 앞을 걸어 올라가며 내가 느꼈던 그 복잡한 감정, 해방감과 희망과 두려움이 범벅이 된 묘한 감정과 거의 같은 것이었다.
 

그로 미루어 판단할 때 나는 태어난 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그 19년이나, 군 복무 기간인 2년이나 너무나도 암울하기는 마찬가지였다고 여기고 있다. 분명히 떠오르는 아침 태양을 바라보면서도 빛이 보이지 않는 그 참을 수 없는 역설. 내 눈 앞에서 더는 그 때와 같은 풍경을 보지 않아도 되기에, 끝도 없이 어두운 심연을 품은 자아 속에 갇혀 있는 확고하게 규정하기 어려운 기억. 그 역설과 기억을 떨쳐버리고자 나는 빛으로 가득 한 새로운 삶을 꿈꿨다. 무엇이든지 내 의지와 열정에 따라 이루고 한 치 오차도 없는 삶을 꾸려 나가는 그 찬란한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내 자취방은 부산대학교 앞 번화가 바로 옆에 있다. 자취방이야말로 내가 지금까지 그토록 원하는 공간이었다. 개인 생활이 보장되지 않는 대학 기숙사와 내무반에서 4년을 보내면서, 나 혼자 은거할 수 있는 공간에 대한 욕구는 더욱 커졌다. 그 욕구를 드디어 충족시켰던 만큼, 나는 아주 큰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바로 옆에 있는 번화가 따위는 내가 계획했던 대로라면 아예 내 관심에서 영영 사라져야 했다. 오로지 '정진'이라는 두 글자만을 외치며, 류비셰프와 다치바나 다카시와 피에르 뒤페에 열광하던 내 모습과 모순되지 않는 자아를 만들어 나가야 했다.

 

하지만 전역한 뒤 지금까지 내가 보낸 시간을 돌이켜 볼 때, 그런 거창한 계획 따위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도대체 언제부터 그런 휘황찬란한 거리를 바라보면서 그 모든 것을 즐기겠다던 비틀어진 열망에 사로잡힌 채 거리를 누볐는가? 내가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헛된 발걸음을 떼어놓는 사이에 내가 본받아야 할 이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자아 실현이라는 막연하지만 분명한 길을 걷다 못해 달리고 있지 않은가? 그것도 방황 따위는 아예 무엇인지조차 모른다는 듯이 잠시도 쉬지 않고 말이다.

 

그러는 사이 나는 술을 마시고 방황하며 비틀거리고 낄낄댔으며, 방에 오면 내 바로 옆에 가득 찬 책꽂이 그 자체에만 헛된 만족을 느끼면서 풀썩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런 나를 아침에 뜨는 햇빛이 미친 듯이 찔러댔지만, 나는 아픔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 정도로 나는 방탕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느 글을 전역하고 난 뒤 거의 써 본 적이 없다. 부족한 점이 많았다던 대학교 1~2학년 때도 지금보다는 훨씬 더 많이 읽고 썼다. 그리고 그토록 힘들고 괴로웠던 시기에 어떻게든지 책을 읽고 글을 써야겠다는 헛헛함이 있었다. 잠이 부족했을지언정 한 자라도 더 읽고 쓰겠다는 의지가 있었기에 무거운 눈꺼풀을 치켜올리면서 책을 읽었다. 읽을 수 없다면 무엇이라도 종이에 끼적거리면서 한 두 조각이라도 소중하게 모아서 보관했다. 그 때 읽고 보고 적은 모든 것을 정련해서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그 날만 나는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

 

그런데 막상 그 시기를 맞이한 나는 지금 철저하게 무너져서 그 어떤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배가 불러서 이 따위 고민에 빠져 폐인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무엇이든지 열심히 하려고 했다. 한 치 오차도 없이 움직이면서 완제품을 만들어 내는 완벽한 동작 원리를 갖춘 기계처럼 살고 싶었다. 해병대에서 그토록 극심하게 고민하면서 그 모든 것을 현실로 만들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리고 이 책 '언제까지나 나는 꿈꾸는 청년이고 싶다'와 같은 책을 읽으면서 제목 그대로 언제까지나 한 결 같은 의지와 열정을 지닌 청년과도 같은 삶을 유지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류비셰프? 다치바나 다카시? 피에르 뒤페? 지금 내 모습 어디에서 이 세 사람과 티끌만큼이라도 비슷한 점을 찾아볼 수 있단 말인가? 시간 통계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이 단순히 시간을 잡아먹는 습관일 뿐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지만, 그저 그 점을 인정하기 싫어서 버티고 있을 뿐이다. 책만 잔뜩 사면서 한 달에 책을 겨우 두 어 권밖에 읽지 않는다. 철저하게 욕구를 관리하면서 해야 할 일을 꼬박꼬박 하지도 않는다. 이렇게 살려고 내가 그토록 힘들었던 지난 시간을 어떻게든지 견뎠단 말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이 책에 나오는 류태영 박사처럼, 도서관 창 밖으로 보이는 나무에 꽃망울이 터질 듯이 부풀어오르는 것을 보며 공부했는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꽃망울은 온데간데없고 낙엽이 보였다는 일화를 남길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는가? 읽는 것만으로도 배가 고프고 잠이 와서 견디기 힘들 정도로 가난한 시절을 여과 없이 담은 문장을 읽으면서도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단 말인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영상 가운데 목표로 전진하던 그 보람찬 순간이 과연 얼마나 되었는가? 남들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그 모든 것이 실제로는 얼마나 덧없던 것이었는지 그토록 절실하게 깨닫지 않았는가? 그 깨달음에 따라 움직이지 못하고 있의 지금처럼 수 조 갈래로 나뉜 이 지긋지긋한 신경에서 생겨나는 전개념을 불안한 언어로조차도 마음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까지 때로는 피눈물을 흘려가면서까지 썼던 모든 글을 쓰레기로 만들어 버릴 것이나? 언행일치를 넘어서는 언문행일치를 이루는 진정한 자아실현이라는 그 꿈을 이렇게 어이없이 포기하고 말 것인가?

 

절대 그럴 수 없다! 나는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든지 벗어나야 한다. 누구보다도 더 치열하게 내 삶이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고민해야 하며, 그 고민이 행동을 제약해서도 안 된다. 지금 대학에 다니고 있는 학생들 자체가 대한민국 사회에서 이미 기득권 세력에 포함되어 있다는 그 비판을 극복해야 한다. 시간이 너무나도 부족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 부족한 시간이나마 어떻게든지 잘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 놓은 것도 아니니, 더욱 서둘러야 한다.

 

내 나이 어느덧 20대 중반으로 흘러가고 있다. 하지만 지금 내 모습을 냉정하게 바라보면 20대 중반까지 내 앞에 펼쳐져 있던 무수한 가능성을 헛되게 날려버린 실패자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에서 무너질 수는 없다. 나는 이 책 제목대로 언제까지나 꿈꾸는 청년이고 싶고, 그런 청년답게 내 삶을 정말 알차게 꾸려가고 싶다. 베르나드스키가 진리를 탐구하면서 죽어도 좋다는 비장한 결언을 남겼듯이 나도 그러고 싶다.

 

지금까지 온갖 고민을 해 봤지만, 결국 지금 이렇게 추한 내 모습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터득한 것들을 바탕으로 세운 원칙을 지키지 않은 결과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제는 더욱 철저하게 외부 환경과 나를 차단하고 예전에는 다 낡아빠져서 그저 나를 옭아매기만 하는 그런 쓸데없는 틀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더욱 강하게 해서 그 어떤 것과도 타협하지 않겠다. 시간과 공을 들여 쓴 글이 쓰레기가 되어 버리는 일을 한 두 번 겪은 것이 아니지만, 존재 자체가 쓰레기가 되어버리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나을 것이다.

 

다시 글을 쓰자. 역겨운 가래가 끓어오른다면, 거침없이 뱉어버리자. 그리고 청년답게 뜨거우면서도 차갑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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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순이 언니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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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이라는 작가 이름은 많이 들어봤다. 그리고 그녀에 관한 이야기도 참 많이 들었다. 연세대 영문학과 나온 엘리트 작가라더라, 나오는 소설마다 대박이 터지는 대단한 작가라더라, 세 번 결혼하고 세 번 이혼해서 성이 모두 다른 아이가 셋이 있다더라……
 

좋든 싫든 그런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것은 그만큼 그녀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으며,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유명한 사람에게 알게 모르게 관심을 지니기 마련이며, 우연히 그 사람에 관해 알아볼 기회가 생기면 자기도 모르게 파고든다. 그러다가 그 사람에게 푹 빠지기도 하고, 자기가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실체에 깜짝 놀라거나 크게 실망하기도 한다.

 

군대에서 공지영이 쓴 소설을 처음 읽었다.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이라는 소설이었는데, '냉정과 열정 사이'처럼 츠지 히토나리라는 일본 작가와 서울과 파리에서 전자우편을 주고 받으며 애틋한 감성으로 완성한 미묘하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라고 했다. 어찌나 애닳는 심정을 그토록 잘 묘사했는지, 읽으면서 그저 탄식만 한 것 같다. 그 날 책을 읽은 뒤에 썼던 짧은 일기를 보면 다음과 같다.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은 나에게 핵폭탄과도 같은 충격을 줬다……

 

 

그 느낌이야 '사랑 후에 오는 것들' 독후감에서 잘 풀어내면 그만이니, 여기에 구구절절 늘어놓을 필요는 전혀 없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그 책대로 '즐거운 나의 집'은 그 책대로, 그리고 이 소설 '봉순이 언니'는 이 책대로 각각 색다른 느낌을 준다. 그 미묘한 색다름을 어쩌면 그렇게 막힘 없이 풀어내는지, 그 마법 같은 솜씨에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하긴 독자들에게 작가는 비밀스러운 능력을 지니고 있는 마법사와도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으니, '마법 같은 솜씨'라는 표현이 더욱 진부해 보인다. 언제 작가들처럼 그럴듯하게 글 한 편이라도 제대로 쓸 수 있을까.

 

아니다. 언제부터 글을 쓰는데 현란한 기교에 이토록 신경을 많이 쓰기 시작했는가. 시현 덕분에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된 비트겐슈타인도 언어가 지닌 불완전성을 극도로 경계한 나머지, 그가 남긴 모든 글에서는 기교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너무나도 간결해서 군더더기 하나 찾아보기 어렵지 않은가. 오로지 내가 생각하는 진리를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데만 힘써온 나로서, 비트겐슈타인에 주목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언어가 지닌 근본 한계를 극복하려고 한 비트겐슈타인을 이해한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러면서도 언어가 지닌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그 불완전성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아니 거짓 없이 자기가 알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기가 지니고 있는 대로 표현해 버리면 작품이 나오는 공지영도 이해할 수 있으니, 이건 도대체 무슨 이중성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이런 때도 그저 세상은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라고 마음 편하게 여기고 넘어가야 할까.

 

사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짱이'라는 아이 자체부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다. 겨우 다섯 살밖에 안 되는게 어쩌다 보니 글을 깨쳐서 '성인 잡지에 나오는 둥그런 붓으로 그린 성애 묘사를 어느 정도 이해할 정도(!)'로 조숙하며, 미자 언니한테 배워서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심지어 남녀가 어떻게 해야 아이를 낳는다고 설명해 주고 '미자 언니가 야릇하게 끌어안자 벌써부터 성 환희에 가까운 알 수 없는 느낌에 젖어드는(!!!!)' 이 괴이한 아이를 도대체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기에 별별 희한한 군상을 다 볼 수 있으며, 그 때문에 작가가 인물을 창조해 내기도 편하니,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시대 배경과 짱이가 처한 환경을 생각했을 때, 마냥 그러려니 하기에는 뭔가 석연찮다. 할아버지가 일제 시대 때 사업을 하셔서 외국에 한 번 나가기도 어렵다는 60년대에 미국에 유학을 갔다 온 뒤 좋은 직장에 취직해 가장으로서 당당한 아버지, 일제 시대 때도 바나나 먹고 자라 방이 두 칸뿐인 집에서 가난이 짜증나 극도로 예민해진 어머니. 그런 부모 밑에서 부족한 걸 모르고 자란 짱이다. 그야말로 온실 속에서 자랐다는 온순한 화초라는 말이다.

 

이런 짱이 옆에는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인 봉순이 언니가 항상 있었다. 짱이에게 언니는 처음으로 만난 세상 그 자체였다. 가난할 때는 주인집 딸에게 얹어맞고, 자기가 주인집 딸이 된 뒤에는 동네 아이들에게 교묘하게 따돌림을 당하고 욕을 먹으면서, 세상이 얼마나 비틀어지고 잔혹한지 깨달으면서 울고 싶을 때는, 언제나 봉순이 언니가 와서 안아주었다. 그러면 그 품 안에서 마음껏 울어도 되었고, 그러다 보면 짱이는 기분이 풀렸다.

 

짱이를 소설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허구 자아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짱이를 현실 속에 살아 있는 아이로 여기고 싶다. 모두 어려운 때 어려움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랐던 아이에게 세상이 얼마나 험악한 곳인지, 그리고 그 속에서 순박하기 짝이 없는 한 여자가 얼마나 철저하게 짓밟히고 망가지는지 직접 보여준 사람이었다. 몇 번이고 배신을 당하고 억울한 누명을 쓰면서 지지리 고생만 하는 언니를 바라보면서, 조금씩 자라나면서 서양식 가정 생활을 강조하는 부모님과 집안 분위기에 조금씩 적응하던 짱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짱이도 결국은 어쩔 수 없는 있는 집 자식이었던 걸까. 그러면서도 모두 헐벗고 굶주리던 시절에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죄책감에 따라 81학번으로서 학생 운동에 뛰어들지만, 결국 그 자체만으로는 자기가 자라온 환경을 극복할 수 없었고, 결국 선배들에게 출신이 들통나 버림 받는 그 한계는 어쩔 수 없는 걸까. 그리고 나서 먼 훗날 봉순이 언니와 같은 인물과 전철에서 마주치지만 짱이는 무시해 버린다. 그것만으로 보면 기억은 빛이 바래고 만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이 소설 전반에는 사회 비판 의식이 강하게 스며들어 있기보다는, 한 때 자기에게 정말 소중한 사람이었던 봉순이 언니에 대한 아련한 기억 그 자체를 복원하려는 의지가 훨씬 더 많이 배어 있다. 그 기억을 더욱 생생하게 되살리고 독자들이 공감하게 하고자 공지영만이 보여줄 수 있는 그런 탁월한 솜씨를 유감 없이 보여주었다. 물론 그런 존재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감동이 덜할 수도 있겠지만, 봉순이 언니 같은 존재가 자기 삶 속에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이 소설이 아주 뜻 깊게 다가올 것이다.

 

놀라운 기억력으로 복원한 60~70년대를 살아간 어느 소녀 이야기. 그 소녀에게 세상 그 자체였던 봉순이 언니. 그 봉순이 언니가 세상 그 자체가 아닌 드넓은 세상 가운데 그저 자기에게 뜻이 있을 뿐인 일부로, 그리고 짱이라는 어린아이가 숙녀로 자라나면서 머릿속을 채운 무수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한 조각 기억만으로 변하기까지.

 

갑자기 나에게도 그런 존재가 있었는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지난 날을 좀 더 명확하게 규정해서 앞날을 좀 더 밝게 하고자, 이 맑은 어느 가을 날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자아 따위는 무시해 버리고, 시간을 거슬러 여행을 떠나볼까. 다시는 돌아가기 싫은 그 끔찍한 시간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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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 1 - 아동교육 심리학의 영원한 고전 한 아이 1
토리 헤이든 지음, 이희재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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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이야기했듯이, 나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기 넉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사범대에 갈 생각이 벼룩 털끝만큼도 없었다. 나에게는 오로지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지덕체를 모두 갖춘 지존혁명전사가 되겠다는 꿈뿐이었으며, 그 흔들리지 않는 꿈은 그 어떤 것도 내 마음 속을 비집고 들어오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동안 고등학교 교사이셨던 아버지뿐만 아니라 내 눈에 곱지 않게 보였던 모든 선생님들에게 품었던 반감도 사범대에 관한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하는데 한 몫 단단히 했다.

 

그러다가 내가 계획한 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서 우연찮게 사범대에 들어온 뒤, 대학교에 다니면서 방황을 너무나도 많이 했던 것 같다. 장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여전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이 길이 과연 나에게 맞는 길인지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온갖 다양한 일과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커다란 실타래에 얻어맞아 정신을 잃었는데 눈을 떠 보니 실타래 안에 갇힌 내 모습을 발견한 것 같았다. 풀어도 풀어도 헝클어지기만 할 뿐 절대 풀리지 않는 그런 실타래 안에서 나는 너무 지쳤다.

 

하지만 그 실타래를 조금씩 풀면서 얻는 것 또한 분명히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건 단순히 지식만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사범대에 다니기 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인데, 아이들을 맡아 영어를 가르치면서 조금씩 알게 되었다. 내가 과외 수업을 해 주는 학생이든 봉사 활동하러 온 나에게 영어를 배우는 아이들이든 그런 깨달음을 주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특히 아이들이 나에게 마음을 여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했다. 극도로 예민하고 온갖 다양한 성격을 지닌 아이들을 파악하는 데는 정말 많은 공을 들여야 했다. 일단 어느 정도 아이들을 파악한 뒤 이야기를 해 봐도, 아이들은 절대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 정도로 모범을 보여주고 먼저 다가가서 자기를 활짝 열어서 보여줘야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러지 못했던 것 같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아이들과 소통하려고 해도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고 주저하는 아이들도 많았다. 그렇다고 해서 금세 지치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교육에 관해서는 거의 아무 생각도 없던 나에게 어느 순간부터 안타까움에서 우러나오는 사명감이 생긴 것이다.

 

'한 아이'를 읽으면서 그 사명감을 누구보다도 강하게 불태웠던 어느 한 선생님을 만났다. '반사회적 인격장애자'라고 봐도 충분할 정도로 엽기 행각을 일삼는 쉴라라는 아이에게 토리 선생이 보여준 친절과 배려와 이해심은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나는 과연 쉴라 같은 아이가 마음을 열 수 있을 정도로 아이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고 모범이 될 수 있을까? 항상 특수교육과 학우들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생각이 생각 그 자체로만 끝나는 판에, 보통 아이들이 아닌 그런 특수한 아이들을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정말 자신이 없다. 그래도 나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을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 그게 지금 나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아무리 예전에 그런 생각이 없었든 어쨌든 간에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대학교에 들어온 뒤 지금까지 한 방종과 자만은 그런 사명을 잊어버린 책임감 없는 추한 행동이었다. 이제 이 책을 읽고 이 글을 썼으니 나는 이 글에 책임을 져야 한다. 쓸데없는 생각은 버리고 나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지 생각하자. 그리고 쉴라를 변하게 한 토리 선생이 보여준 미덕을 절대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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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짓 존스의 일기 브리짓 존스 시리즈
헬렌 필딩 지음, 임지현 옮김 / 문학사상사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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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 Inside에 자주 방문하는 사람이든 아니든, 솔로 부대와 커플 부대를 각각 선전하는 홍보물을 인터넷에서 한 번쯤은 봤을 것이다. 그게 DC 밀갤(밀리터리 갤러리(Military Gallery)를 줄인 말인데 혹은 내무반이라고도 한다)에 처음으로 나왔는데, 누구든지 보면서 낄낄대며 웃거나 탄식하면서 깊이 공감할 수박에 없었을 것이라고 봤을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연인이 있든가 없든가 둘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커플들이 즐길 때 우리는 미래에 투자한다."

 

"일 안하고 놀면 나라 경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솔로 부대에서 이렇게 공격하면 커플 부대에서는 이렇게 반격한다.

 

"솔로 부대는 물에 빠졌을 때 잡아줄 사람이 없다."

 

"솔로 부대는 겨울이 두렵지만 우리는 전혀 두렵지 않다."

 

묵시록급 핵폭탄과도 같은 이 공격에 솔로 부대는 흔히 방어선과 진영이 흐트러지기 마련이다. 자기 앞날 생각도 좋고 나라 경제 걱정도 좋지만, 결국 다 자기 좋자고 하는 일이며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본능에 따라 짝을 찾는 게 가장 자연스럽고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솔로 부대에서 커플 부대로 넘어가고자 솔로 부대원들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움직이지만, 커플 부대에서 솔로 부대로 넘어가려고 발버둥치는 커플 부대원은 없다.

 

이 책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 나오는 브리짓 존스라는 여자는 안타깝게도 솔로 부대원이며 나이도 30대에 접어들었다. 독신이기는 하지만 완벽한 여권신장주의자이며 독신주의자인 친구 샤론이나 주드나, 동성애자로서 브리짓 존스를 깊이 이해하는 남자친구(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남자친구가 아니라 말 그대로 남자친구일 뿐이다!)인 톰을 벗 삼아 그렇게 외롭지는 않다. 매일 체중을 관리하면서 술과 담배를 멀리하고자 세심하게 신경을 쓰고, 친구들과 술 한 잔 걸치면서 재미있게 놀고 복권도 사면서 나름대로 바쁘게 그런대로 삶을 즐기면서 산다.

 

 

……한때 상품 중개인이었던 마그다는 해리의 나이를 실제보다 어리게 속여서 마치 발육이 좋은 것처럼 꾸미고 있다. 임신했을 때도 마그다는 엽산과 철분을 다른 사람보다 여덟 배나 더 섭취하려고 했으니 정말 무지막지한 엄마가 아닐 수 없었다. 출산도 굉장했다. 열 달 동안 누구에게나 자연 분만을 하겠다고 말해 오던 그녀는, 막상 진통이 시작되자 십 분 만에 자제력을 잃고는 "마취를 해 달란 말이야. 이 뚱뚱한 암소야!" 하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다과회는 악몽의 시나리오였다. 등장인물은 방을 꽉 채우다시피 모여든 슈퍼 어머니 군단. 그 중에는 생후 사 주일된 아기의 엄마도 끼어 있었다.

 

사라 드 릴은 "아기가 정말 귀엽네"하고 아양을 떨면서, "이 애는 AGPAR 결과가 어떻게 나왔어?"라고 물었다.

 

두 살짜리 아기를 상대로 치르는 시험도 뭐가 그리 대단한 것인지 알 수 없었는데, 이 AGPAR인지 뭔지는 생후 이 분 만에 실시되는 테스트란다. 이 년 전 마그다는 어느 저녁 모임에서 해리가 AGPAR 테스트에서 10점 만점을 받았다고 자랑을 늘어놓다가 손님 중 직업이 간호사인 사람이 AGPAR 테스트는 만점이 9점이라고 지적하는 바람에 망신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런 일을 겪었으면서도 마그다는 아기 엄마들이 만나는 자리에서 또다시 자기 아들이 똥오줌 가리기의 천재라며 추켜세우는 바람에, 그 자리는 서로 애들을 자랑하거나 깔아뭉개는 일종의 콘테스트장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오줌이 새지 않도록 방수 기저귀로 둘둘 말아 눕혀 두어야 하는 갓난아이들은 저마다 기저귀도 안 차고 뒤뚱뒤뚱 걸음마를 떼고 있었다.

 

내가 도착한 지 십 분도 채 안 되어서 카펫에는 세 무더기의 똥덩어리가 퍼질러지게 되었다. 누가 똥을 쌌는가를 놓고 이들은 겉으로는 미소를 지으면서도 악의에 찬 설전을 벌였다. 곧이어 사태는 긴장이 감도는 아기 팬티 벗기기로 이어졌고, 다시 아기들의 성기 크기 경쟁으로, 그리고 급기야는 그에 준하는 남편들 물건에 대한 논쟁으로까지 이어져갔다.

 

"유전의 문제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 설마 코즈모가 이 점에서 뭔가 문제를 안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 소동으로 나는 머리가 빠개지는 것만 같았다. 간신히 핑계를 대고 그 장소에서 빠져나와, 나는 내가 아직 독신이라는 사실이 한없이 고마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언제부터인지 직장 상사 이상이 되어버린 다니엘과 이상하게도 조금씩 끌리는 다아시(제인 오스틴이 쓴 '오만과 편견'에 나오는 그 마크 다아시와 이름이 똑같다! 그렇다면 브리짓 존스가 엘리자베스 베넷이라는 말인가!)라는 두 남자를 생각하다 보면, 옆구리가 더욱 허전해지고 본능은 그 빈자리를 채우라고 자꾸만 속삭인다. 동창 마그다가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알고 그 자식이 바람을 피운다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을 보며 그 본능을 귀싸대기를 올려붙이듯이 날려버리다가도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소용없다. '새해 아침의 짜릿한 결심 리스트'에서도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 13번째에서 남자친구가 없다고 의기소침해하지 말고 당당해지자는 것도 그 자체가 좋은 것이 아니라 결국 그래야 남자친구가 생길 것이라는 기대 때문 아닌가. 게다가 반드시 해야 할 일 19번은 책임감 있는 남자와 진지한 관계를 맺는 일이다.

 

하지만 하는 일마다 실수투성이이며 임신 판별 시약도 제대로 쓸 줄 모르는(으악! 으악! 다니엘이 나 임신시켰어! 섹스가 가장 좋은 운동이라고 해서 다니엘과 그렇게 난리를 쳤더니! 으악!) 수더분한 30대 얼뜨기 아가씨(30대에게 아가씨라는 표현이 적절한지 심각하게 고민했다)를 누가 좋아해 주겠느뇨? 그야말로 모순과 실수투성이이며 엉망진창이다. 알코올은 사탄이 눈 오줌이며 담배는 사탄이 기르는 풀이라고 해 놓고 둘 다 꾸준히 들이키고 피운다. 요리도 서툴고 사교도 서툴지만 친구들과 멋진 생일잔치를 열고 싶어서 이것저것 요리를 하지만, 이런저런 일 때문에 허둥지둥 거리다가 거의 다 엉망으로 말아먹는다. 그런데 얄궃게도 친구들이 음식점을 예약해 놓고 거꾸로 브리짓을 초대한다. 생일을 맞이한 사람이 브리짓이기는 하니 친구들이 초대하는 게 사실 이상하지는 않지만, 애초 계획과는 전혀 다르니 그게 문제다.

 

브리짓과 다아시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만 해도 그렇다. 다니엘이 충직한 남자친구로서는 좋지 않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을 무렵, 그만큼 다아시가 지닌 매력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한 브리짓은 그를 만나겠다고 약속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다아시가 집에 도착해 초인종을 누르는데, 브리짓은 머리를 말리다가 기계 소리 때문에 종소리를 듣지 못한다. 방송사에 들어간 뒤 취재 경쟁이 붙었을 때 브리짓은 담배 심부름을 하다가 취재 기회를 놓치는데, 엉뚱하게도 그 피의자를 맡고 있던 사람이 바로 다아시였다. 생각하지도 못한 도움을 받은 브리짓은 회사에서 순식간에 영웅이 된다.

 

원서를 읽어보지 않아서 원작이 지니고 있는 매력인지 아니면 옮긴이가 만들어낸 효과인지는 판단할 수 없다. 어쨌든 요란하기 짝이 없으면서 발랄하고 재미있는 이야기에 누구든지 빠져들 수밖에 없어 보인다. 살만 루시디라는 사람은 남자들도 폭소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단평을 썼는데, 그 말에 나는 절대 공감한다. 특히 직장은 있지만 남자친구가 없고 나이는 나이대로 먹어 주위 사람들이 시집가라고 말하면 스트레스를 받고 고민에 빠져드는 20대 후반과 30대 초반 독신 여성들은 그야말로 눈물을 질금질금 흘리면서 웃고 울며 감동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책에 나오는 브리짓 존스는 딱 그런 여자이니까. 그런 브리짓 존스도 결국 마크 다아시와 잘 되니까. 이 책을 읽고 여자들이 어찌 자기도 브리짓 존스처럼 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지 않을 수 있을까?

 

제인 오스틴이 쓴 '오만과 편견'을 읽었고 그에 관한 평론도 몇 편 읽어봤지만, 이 책을 그와 연관 지어 생각한 내용을 쓰기는 싫다. 나도 이 글은 발랄하고 재미있게 쓰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글보다는 책이 훨씬 더 재미있을 테니, 그 재미를 느껴보고 싶은 사람은 주저하지 않고 책을 읽기 바란다. 그리고 이 책을 매우 맛깔스럽게 우리말로 잘 옮겨 나에게 이런 즐거움을 준 임지현 씨도 안타깝게도 30대 독신이라고 하는데, 브리짓 존스처럼 마크 다아시 같은 멋진 남자를 만나서 행복해지시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 책을 이토록 재미있게 우리말로 옮길 수 있었던 까닭이 다 있었던 셈이다. 적절한(?) 시기에 큰 일을 해냈으니 이제는 그 적절한 시기에서 벗어나셔야 하지 않겠는가?

 

그건 그렇고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브리짓 존스가 세운 한 해 계획과 한 해 결산을 다시 읽어보다가, 또 꺽꺽대며 웃고 말았다. 새해 첫 날에 세운 근사한 남자 친구 1명, 지켜진 새해 결심 1개, 그런데 매우 양호하단다. 그리고 그 정도면 대단히 발전한 한 해였단다. 뭐 그 정도야 그냥 피식 웃으면서 애교라고 치고 넘어가 줄 수도 있다.

 

내가 그렇게 웃을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무엇인가? 한 해 결산에 따르면 브리짓 존스는 한 해 똥안 11090265cal. 곧 약 11090kcal를 내는 만큼 음식을 먹었다고 한다. 하루 평균을 내 보면 30~40cal 정도다. 내가 알기로는 성인 여자가 무리 없이 하루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 열량이 1400~1500kcal 정도인데, 브리짓 존스는 도대체 어떻게 된 사람이기에 최소 열량 약 1/40000밖에 안 되는 열량으로 하루를 버틴단 말인가? 누가 실수해서 k를 빠뜨렸다고 볼 수밖에 없는데, 누가 실수한 건가? 작가? 옮긴이? 편집자?

 

며칠 전에 영국 프리미어 리그 첼시 소속 선수인 드록바(Drogba)를 어떻게 부르냐는 문제를 놓고 쓸데없이 논쟁이 벌어졌는데, 온갖 꼬리와 답글 가운데 대박을 터뜨린 글이 하나 있었다.

 

"드로그바가 아니라 드록바다. 드록바가 드로그바면 수박바는 수바그바냐?"

 

이거 본 뒤 며칠 만에 또 대박이 터졌다. 말년에 지겹고 살 맛 안 나서 죽겠는데, 이런 재미있는 것들 덕분에 내가 안 죽고 산다. 이렇게 재미있는 것들이 세상에 넘쳐나는데 죽기는 왜 죽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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