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순이 언니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4년 9월
평점 :
절판


'공지영'이라는 작가 이름은 많이 들어봤다. 그리고 그녀에 관한 이야기도 참 많이 들었다. 연세대 영문학과 나온 엘리트 작가라더라, 나오는 소설마다 대박이 터지는 대단한 작가라더라, 세 번 결혼하고 세 번 이혼해서 성이 모두 다른 아이가 셋이 있다더라……
 

좋든 싫든 그런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것은 그만큼 그녀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으며,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유명한 사람에게 알게 모르게 관심을 지니기 마련이며, 우연히 그 사람에 관해 알아볼 기회가 생기면 자기도 모르게 파고든다. 그러다가 그 사람에게 푹 빠지기도 하고, 자기가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실체에 깜짝 놀라거나 크게 실망하기도 한다.

 

군대에서 공지영이 쓴 소설을 처음 읽었다.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이라는 소설이었는데, '냉정과 열정 사이'처럼 츠지 히토나리라는 일본 작가와 서울과 파리에서 전자우편을 주고 받으며 애틋한 감성으로 완성한 미묘하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라고 했다. 어찌나 애닳는 심정을 그토록 잘 묘사했는지, 읽으면서 그저 탄식만 한 것 같다. 그 날 책을 읽은 뒤에 썼던 짧은 일기를 보면 다음과 같다.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은 나에게 핵폭탄과도 같은 충격을 줬다……

 

 

그 느낌이야 '사랑 후에 오는 것들' 독후감에서 잘 풀어내면 그만이니, 여기에 구구절절 늘어놓을 필요는 전혀 없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그 책대로 '즐거운 나의 집'은 그 책대로, 그리고 이 소설 '봉순이 언니'는 이 책대로 각각 색다른 느낌을 준다. 그 미묘한 색다름을 어쩌면 그렇게 막힘 없이 풀어내는지, 그 마법 같은 솜씨에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하긴 독자들에게 작가는 비밀스러운 능력을 지니고 있는 마법사와도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으니, '마법 같은 솜씨'라는 표현이 더욱 진부해 보인다. 언제 작가들처럼 그럴듯하게 글 한 편이라도 제대로 쓸 수 있을까.

 

아니다. 언제부터 글을 쓰는데 현란한 기교에 이토록 신경을 많이 쓰기 시작했는가. 시현 덕분에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된 비트겐슈타인도 언어가 지닌 불완전성을 극도로 경계한 나머지, 그가 남긴 모든 글에서는 기교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너무나도 간결해서 군더더기 하나 찾아보기 어렵지 않은가. 오로지 내가 생각하는 진리를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데만 힘써온 나로서, 비트겐슈타인에 주목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언어가 지닌 근본 한계를 극복하려고 한 비트겐슈타인을 이해한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러면서도 언어가 지닌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그 불완전성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아니 거짓 없이 자기가 알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기가 지니고 있는 대로 표현해 버리면 작품이 나오는 공지영도 이해할 수 있으니, 이건 도대체 무슨 이중성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이런 때도 그저 세상은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라고 마음 편하게 여기고 넘어가야 할까.

 

사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짱이'라는 아이 자체부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다. 겨우 다섯 살밖에 안 되는게 어쩌다 보니 글을 깨쳐서 '성인 잡지에 나오는 둥그런 붓으로 그린 성애 묘사를 어느 정도 이해할 정도(!)'로 조숙하며, 미자 언니한테 배워서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심지어 남녀가 어떻게 해야 아이를 낳는다고 설명해 주고 '미자 언니가 야릇하게 끌어안자 벌써부터 성 환희에 가까운 알 수 없는 느낌에 젖어드는(!!!!)' 이 괴이한 아이를 도대체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기에 별별 희한한 군상을 다 볼 수 있으며, 그 때문에 작가가 인물을 창조해 내기도 편하니,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시대 배경과 짱이가 처한 환경을 생각했을 때, 마냥 그러려니 하기에는 뭔가 석연찮다. 할아버지가 일제 시대 때 사업을 하셔서 외국에 한 번 나가기도 어렵다는 60년대에 미국에 유학을 갔다 온 뒤 좋은 직장에 취직해 가장으로서 당당한 아버지, 일제 시대 때도 바나나 먹고 자라 방이 두 칸뿐인 집에서 가난이 짜증나 극도로 예민해진 어머니. 그런 부모 밑에서 부족한 걸 모르고 자란 짱이다. 그야말로 온실 속에서 자랐다는 온순한 화초라는 말이다.

 

이런 짱이 옆에는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인 봉순이 언니가 항상 있었다. 짱이에게 언니는 처음으로 만난 세상 그 자체였다. 가난할 때는 주인집 딸에게 얹어맞고, 자기가 주인집 딸이 된 뒤에는 동네 아이들에게 교묘하게 따돌림을 당하고 욕을 먹으면서, 세상이 얼마나 비틀어지고 잔혹한지 깨달으면서 울고 싶을 때는, 언제나 봉순이 언니가 와서 안아주었다. 그러면 그 품 안에서 마음껏 울어도 되었고, 그러다 보면 짱이는 기분이 풀렸다.

 

짱이를 소설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허구 자아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짱이를 현실 속에 살아 있는 아이로 여기고 싶다. 모두 어려운 때 어려움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랐던 아이에게 세상이 얼마나 험악한 곳인지, 그리고 그 속에서 순박하기 짝이 없는 한 여자가 얼마나 철저하게 짓밟히고 망가지는지 직접 보여준 사람이었다. 몇 번이고 배신을 당하고 억울한 누명을 쓰면서 지지리 고생만 하는 언니를 바라보면서, 조금씩 자라나면서 서양식 가정 생활을 강조하는 부모님과 집안 분위기에 조금씩 적응하던 짱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짱이도 결국은 어쩔 수 없는 있는 집 자식이었던 걸까. 그러면서도 모두 헐벗고 굶주리던 시절에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죄책감에 따라 81학번으로서 학생 운동에 뛰어들지만, 결국 그 자체만으로는 자기가 자라온 환경을 극복할 수 없었고, 결국 선배들에게 출신이 들통나 버림 받는 그 한계는 어쩔 수 없는 걸까. 그리고 나서 먼 훗날 봉순이 언니와 같은 인물과 전철에서 마주치지만 짱이는 무시해 버린다. 그것만으로 보면 기억은 빛이 바래고 만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이 소설 전반에는 사회 비판 의식이 강하게 스며들어 있기보다는, 한 때 자기에게 정말 소중한 사람이었던 봉순이 언니에 대한 아련한 기억 그 자체를 복원하려는 의지가 훨씬 더 많이 배어 있다. 그 기억을 더욱 생생하게 되살리고 독자들이 공감하게 하고자 공지영만이 보여줄 수 있는 그런 탁월한 솜씨를 유감 없이 보여주었다. 물론 그런 존재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감동이 덜할 수도 있겠지만, 봉순이 언니 같은 존재가 자기 삶 속에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이 소설이 아주 뜻 깊게 다가올 것이다.

 

놀라운 기억력으로 복원한 60~70년대를 살아간 어느 소녀 이야기. 그 소녀에게 세상 그 자체였던 봉순이 언니. 그 봉순이 언니가 세상 그 자체가 아닌 드넓은 세상 가운데 그저 자기에게 뜻이 있을 뿐인 일부로, 그리고 짱이라는 어린아이가 숙녀로 자라나면서 머릿속을 채운 무수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한 조각 기억만으로 변하기까지.

 

갑자기 나에게도 그런 존재가 있었는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지난 날을 좀 더 명확하게 규정해서 앞날을 좀 더 밝게 하고자, 이 맑은 어느 가을 날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자아 따위는 무시해 버리고, 시간을 거슬러 여행을 떠나볼까. 다시는 돌아가기 싫은 그 끔찍한 시간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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