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짓 존스의 일기 브리짓 존스 시리즈
헬렌 필딩 지음, 임지현 옮김 / 문학사상사 / 199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DC Inside에 자주 방문하는 사람이든 아니든, 솔로 부대와 커플 부대를 각각 선전하는 홍보물을 인터넷에서 한 번쯤은 봤을 것이다. 그게 DC 밀갤(밀리터리 갤러리(Military Gallery)를 줄인 말인데 혹은 내무반이라고도 한다)에 처음으로 나왔는데, 누구든지 보면서 낄낄대며 웃거나 탄식하면서 깊이 공감할 수박에 없었을 것이라고 봤을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연인이 있든가 없든가 둘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커플들이 즐길 때 우리는 미래에 투자한다."

 

"일 안하고 놀면 나라 경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솔로 부대에서 이렇게 공격하면 커플 부대에서는 이렇게 반격한다.

 

"솔로 부대는 물에 빠졌을 때 잡아줄 사람이 없다."

 

"솔로 부대는 겨울이 두렵지만 우리는 전혀 두렵지 않다."

 

묵시록급 핵폭탄과도 같은 이 공격에 솔로 부대는 흔히 방어선과 진영이 흐트러지기 마련이다. 자기 앞날 생각도 좋고 나라 경제 걱정도 좋지만, 결국 다 자기 좋자고 하는 일이며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본능에 따라 짝을 찾는 게 가장 자연스럽고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솔로 부대에서 커플 부대로 넘어가고자 솔로 부대원들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움직이지만, 커플 부대에서 솔로 부대로 넘어가려고 발버둥치는 커플 부대원은 없다.

 

이 책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 나오는 브리짓 존스라는 여자는 안타깝게도 솔로 부대원이며 나이도 30대에 접어들었다. 독신이기는 하지만 완벽한 여권신장주의자이며 독신주의자인 친구 샤론이나 주드나, 동성애자로서 브리짓 존스를 깊이 이해하는 남자친구(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남자친구가 아니라 말 그대로 남자친구일 뿐이다!)인 톰을 벗 삼아 그렇게 외롭지는 않다. 매일 체중을 관리하면서 술과 담배를 멀리하고자 세심하게 신경을 쓰고, 친구들과 술 한 잔 걸치면서 재미있게 놀고 복권도 사면서 나름대로 바쁘게 그런대로 삶을 즐기면서 산다.

 

 

……한때 상품 중개인이었던 마그다는 해리의 나이를 실제보다 어리게 속여서 마치 발육이 좋은 것처럼 꾸미고 있다. 임신했을 때도 마그다는 엽산과 철분을 다른 사람보다 여덟 배나 더 섭취하려고 했으니 정말 무지막지한 엄마가 아닐 수 없었다. 출산도 굉장했다. 열 달 동안 누구에게나 자연 분만을 하겠다고 말해 오던 그녀는, 막상 진통이 시작되자 십 분 만에 자제력을 잃고는 "마취를 해 달란 말이야. 이 뚱뚱한 암소야!" 하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다과회는 악몽의 시나리오였다. 등장인물은 방을 꽉 채우다시피 모여든 슈퍼 어머니 군단. 그 중에는 생후 사 주일된 아기의 엄마도 끼어 있었다.

 

사라 드 릴은 "아기가 정말 귀엽네"하고 아양을 떨면서, "이 애는 AGPAR 결과가 어떻게 나왔어?"라고 물었다.

 

두 살짜리 아기를 상대로 치르는 시험도 뭐가 그리 대단한 것인지 알 수 없었는데, 이 AGPAR인지 뭔지는 생후 이 분 만에 실시되는 테스트란다. 이 년 전 마그다는 어느 저녁 모임에서 해리가 AGPAR 테스트에서 10점 만점을 받았다고 자랑을 늘어놓다가 손님 중 직업이 간호사인 사람이 AGPAR 테스트는 만점이 9점이라고 지적하는 바람에 망신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런 일을 겪었으면서도 마그다는 아기 엄마들이 만나는 자리에서 또다시 자기 아들이 똥오줌 가리기의 천재라며 추켜세우는 바람에, 그 자리는 서로 애들을 자랑하거나 깔아뭉개는 일종의 콘테스트장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오줌이 새지 않도록 방수 기저귀로 둘둘 말아 눕혀 두어야 하는 갓난아이들은 저마다 기저귀도 안 차고 뒤뚱뒤뚱 걸음마를 떼고 있었다.

 

내가 도착한 지 십 분도 채 안 되어서 카펫에는 세 무더기의 똥덩어리가 퍼질러지게 되었다. 누가 똥을 쌌는가를 놓고 이들은 겉으로는 미소를 지으면서도 악의에 찬 설전을 벌였다. 곧이어 사태는 긴장이 감도는 아기 팬티 벗기기로 이어졌고, 다시 아기들의 성기 크기 경쟁으로, 그리고 급기야는 그에 준하는 남편들 물건에 대한 논쟁으로까지 이어져갔다.

 

"유전의 문제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 설마 코즈모가 이 점에서 뭔가 문제를 안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 소동으로 나는 머리가 빠개지는 것만 같았다. 간신히 핑계를 대고 그 장소에서 빠져나와, 나는 내가 아직 독신이라는 사실이 한없이 고마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언제부터인지 직장 상사 이상이 되어버린 다니엘과 이상하게도 조금씩 끌리는 다아시(제인 오스틴이 쓴 '오만과 편견'에 나오는 그 마크 다아시와 이름이 똑같다! 그렇다면 브리짓 존스가 엘리자베스 베넷이라는 말인가!)라는 두 남자를 생각하다 보면, 옆구리가 더욱 허전해지고 본능은 그 빈자리를 채우라고 자꾸만 속삭인다. 동창 마그다가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알고 그 자식이 바람을 피운다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을 보며 그 본능을 귀싸대기를 올려붙이듯이 날려버리다가도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소용없다. '새해 아침의 짜릿한 결심 리스트'에서도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 13번째에서 남자친구가 없다고 의기소침해하지 말고 당당해지자는 것도 그 자체가 좋은 것이 아니라 결국 그래야 남자친구가 생길 것이라는 기대 때문 아닌가. 게다가 반드시 해야 할 일 19번은 책임감 있는 남자와 진지한 관계를 맺는 일이다.

 

하지만 하는 일마다 실수투성이이며 임신 판별 시약도 제대로 쓸 줄 모르는(으악! 으악! 다니엘이 나 임신시켰어! 섹스가 가장 좋은 운동이라고 해서 다니엘과 그렇게 난리를 쳤더니! 으악!) 수더분한 30대 얼뜨기 아가씨(30대에게 아가씨라는 표현이 적절한지 심각하게 고민했다)를 누가 좋아해 주겠느뇨? 그야말로 모순과 실수투성이이며 엉망진창이다. 알코올은 사탄이 눈 오줌이며 담배는 사탄이 기르는 풀이라고 해 놓고 둘 다 꾸준히 들이키고 피운다. 요리도 서툴고 사교도 서툴지만 친구들과 멋진 생일잔치를 열고 싶어서 이것저것 요리를 하지만, 이런저런 일 때문에 허둥지둥 거리다가 거의 다 엉망으로 말아먹는다. 그런데 얄궃게도 친구들이 음식점을 예약해 놓고 거꾸로 브리짓을 초대한다. 생일을 맞이한 사람이 브리짓이기는 하니 친구들이 초대하는 게 사실 이상하지는 않지만, 애초 계획과는 전혀 다르니 그게 문제다.

 

브리짓과 다아시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만 해도 그렇다. 다니엘이 충직한 남자친구로서는 좋지 않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을 무렵, 그만큼 다아시가 지닌 매력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한 브리짓은 그를 만나겠다고 약속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다아시가 집에 도착해 초인종을 누르는데, 브리짓은 머리를 말리다가 기계 소리 때문에 종소리를 듣지 못한다. 방송사에 들어간 뒤 취재 경쟁이 붙었을 때 브리짓은 담배 심부름을 하다가 취재 기회를 놓치는데, 엉뚱하게도 그 피의자를 맡고 있던 사람이 바로 다아시였다. 생각하지도 못한 도움을 받은 브리짓은 회사에서 순식간에 영웅이 된다.

 

원서를 읽어보지 않아서 원작이 지니고 있는 매력인지 아니면 옮긴이가 만들어낸 효과인지는 판단할 수 없다. 어쨌든 요란하기 짝이 없으면서 발랄하고 재미있는 이야기에 누구든지 빠져들 수밖에 없어 보인다. 살만 루시디라는 사람은 남자들도 폭소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단평을 썼는데, 그 말에 나는 절대 공감한다. 특히 직장은 있지만 남자친구가 없고 나이는 나이대로 먹어 주위 사람들이 시집가라고 말하면 스트레스를 받고 고민에 빠져드는 20대 후반과 30대 초반 독신 여성들은 그야말로 눈물을 질금질금 흘리면서 웃고 울며 감동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책에 나오는 브리짓 존스는 딱 그런 여자이니까. 그런 브리짓 존스도 결국 마크 다아시와 잘 되니까. 이 책을 읽고 여자들이 어찌 자기도 브리짓 존스처럼 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지 않을 수 있을까?

 

제인 오스틴이 쓴 '오만과 편견'을 읽었고 그에 관한 평론도 몇 편 읽어봤지만, 이 책을 그와 연관 지어 생각한 내용을 쓰기는 싫다. 나도 이 글은 발랄하고 재미있게 쓰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글보다는 책이 훨씬 더 재미있을 테니, 그 재미를 느껴보고 싶은 사람은 주저하지 않고 책을 읽기 바란다. 그리고 이 책을 매우 맛깔스럽게 우리말로 잘 옮겨 나에게 이런 즐거움을 준 임지현 씨도 안타깝게도 30대 독신이라고 하는데, 브리짓 존스처럼 마크 다아시 같은 멋진 남자를 만나서 행복해지시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 책을 이토록 재미있게 우리말로 옮길 수 있었던 까닭이 다 있었던 셈이다. 적절한(?) 시기에 큰 일을 해냈으니 이제는 그 적절한 시기에서 벗어나셔야 하지 않겠는가?

 

그건 그렇고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브리짓 존스가 세운 한 해 계획과 한 해 결산을 다시 읽어보다가, 또 꺽꺽대며 웃고 말았다. 새해 첫 날에 세운 근사한 남자 친구 1명, 지켜진 새해 결심 1개, 그런데 매우 양호하단다. 그리고 그 정도면 대단히 발전한 한 해였단다. 뭐 그 정도야 그냥 피식 웃으면서 애교라고 치고 넘어가 줄 수도 있다.

 

내가 그렇게 웃을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무엇인가? 한 해 결산에 따르면 브리짓 존스는 한 해 똥안 11090265cal. 곧 약 11090kcal를 내는 만큼 음식을 먹었다고 한다. 하루 평균을 내 보면 30~40cal 정도다. 내가 알기로는 성인 여자가 무리 없이 하루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 열량이 1400~1500kcal 정도인데, 브리짓 존스는 도대체 어떻게 된 사람이기에 최소 열량 약 1/40000밖에 안 되는 열량으로 하루를 버틴단 말인가? 누가 실수해서 k를 빠뜨렸다고 볼 수밖에 없는데, 누가 실수한 건가? 작가? 옮긴이? 편집자?

 

며칠 전에 영국 프리미어 리그 첼시 소속 선수인 드록바(Drogba)를 어떻게 부르냐는 문제를 놓고 쓸데없이 논쟁이 벌어졌는데, 온갖 꼬리와 답글 가운데 대박을 터뜨린 글이 하나 있었다.

 

"드로그바가 아니라 드록바다. 드록바가 드로그바면 수박바는 수바그바냐?"

 

이거 본 뒤 며칠 만에 또 대박이 터졌다. 말년에 지겹고 살 맛 안 나서 죽겠는데, 이런 재미있는 것들 덕분에 내가 안 죽고 산다. 이렇게 재미있는 것들이 세상에 넘쳐나는데 죽기는 왜 죽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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